따뜻하게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책을 뒤적거리기에 좋은 계절.

춥지만, 적어도 책만은 가까이 하기에 좋은 계절이 아닐까 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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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몇년만에 신간평가단 신청하고 에세이 분야에 선정되었다.

성실하게, 즐겁게 읽어봐야지 다짐하면서, 첫번째 책을 골라본다.

 

1월에 읽고 싶은 에세이

 

<오 마이 독 오 마이 갓>

아, 정말 특이하다.

나는 동물은 안 좋아한다. 싫어하는 쪽에 가깝다. 귀엽다고 쓰다듬는 손길도 망설일 정도로 동물이 별로다. 흔하게 보이고 키우는 개에게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 책 소개글 보다가 궁금해졌다.

개에 관한 많은 이야기와 감정을 느낄 수 있을 듯하다.

인간의 오랜 지기처럼 익숙한 동물이기도 하고, 인간의 모습을 개에 비유하기도 하는 것을 보면 분명 가까운 존재일 텐데... 내가 너무 모르고 살아왔던 것 같아서 듣고 싶다.

개와 함께 한 인간사, 일러스트와 시로 이루어진 형식이 보여주려 하는 것은 무엇인지...

숨겨진 행간의, 여백의 맛을 직접 내야할 듯하여, 펼쳐보고 싶다.

 

 

 

 

<어이없게도 국수>

제목에서 풍기는 호기심에 상세페이지를 열었다.

저자는 가업을 이어받은 부친 덕분에 '혈관 속에 냉면 육수가 흐르는' 뼛속까지 진정한 면식수행자란다. ^^

라면을 제외한 면 종류를 좋아한다. 몸에 안 좋다고 하는데 끊을 수가 없어서 어느 정도 포기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면으로 이어진 인간사, 정말 궁금하다. 저자가 어떻게 풀어냈을지... 국수가 곧 삶이라고 말하는 순간들을 같이 경험하고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

국수에 대한 오마주~

기대된다.

 

 

 

 

<그것도 괜찮겠네>

아사카 코다로의 산문집이다.

소설가가 말하는 일상이 새로울 게 없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내가 읽은 그의 작품들이 좀 강했던 기억으로 떠오르는 걸 보면, 다정다감하다는 이 산문집의 표현은 궁금해진다.

일러스트와 함께 한, 조금은 특이하고 엉뚱해 보이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그가 말하는 일상, 인간, 세상에 관한 지극히 사적인 생각을 펼쳐들고 싶어서 골라본 책.

 

 

 

 

 

 

 

<나는, 당신에게만 열리는 책>

<우리가 사랑한 소설들>과 함께 펼쳐보면 좋겠다.

사실 나는 이동진과 김중혁이 함께 한 팟캐스트를 자주 듣지는 않는다.

하지만 가끔 들을 때마다 이동진의 오프닝 분위기는 좋다.

<우리가 사랑한 소설들>을 만날 때 두 남자의 수다스러움이 떠오른다면

이 책은 두 남자의 수다를 듣기 전의 고요함, 준비, 잠깐의 사색 같은 느낌을 줄 것 같다.

사실, 라디오 작가가 적은 글이어서 더 끌렸는지도 모른다. ^^

나, 이런 분위기 좋아해...

 

 

 

 

 

 

신간평가단의 첫번째 책, 어떤 책을 만날지 몹시 기대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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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크리스마스 아침에 엄마가 교회에 가기 전, 조카(엄마의 손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직 잠에서 덜 깬 조카에게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선물을 주고 가셨냐고 물었다.

8세 조카 하는 말이,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안 왔어요. ㅠㅠ"

형아 옆에 있던 6세 조카는 갑자기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유치원에서 배웠다던 노래를 불렀단다.

"루돌프 사슴 코는~~~~~~~ "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그 말을 듣고 깔깔거렸다.

산타클로스가 안 와서 서운했구나, 그래도 아직은 믿는구나 싶었다.

 

근데 뭐, 산타클로스는 안 왔어도 택배 아저씨는 다녀갔을 터이니...

그게 그거 아닌가?

아니다. 비밀스러운 낭만이 없어져서 슬픈 건가?

 

 

정확하게 기억에 없다.

나는 언제까지 산타클로스를 믿었는지...

 

분명 어렸을 적에 양말을 만들기도 했다.

크리스마스에 눈을 뜨면 양말 속에 과자며 기타 등등 뭔가가 들어있기도 했다.

거기까진 기억난다.

언젠가부터 크리스마스는 그냥 빨간 글씨, 휴일, 뭘할까 고민하는 날, 이런 저런 일들에 돈이 좀 들겠구나, 같은...

그냥, 어른의 365일 중 하루가 되어버렸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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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연변이 2014-12-28 0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 숙모는 아들이 셋인데요.
첫째와 둘째는 이미 초등학생이고 산타의 존재가 아빠라는 걸 알고있습니다
그런데 셋째한테 그걸 안말하고 환상을 지켜주는 모습이 예쁘더군요 ㅋㅋㅋ

구단씨 2014-12-30 15:01   좋아요 0 | URL
아이들 마음이 참 예쁘네요. ^^
스스로 알게 될 때까지는 저도 말 안해주고 싶어요.

Breeze 2014-12-30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 애들은 초등학교 저학년까지 산타클로스가 있다고 믿었던것 같아요.
언젠가, 크리스마스 선물을 못받았다는 친구의 말에 `베개 밑에랑 잘 찾아봐`라고 말하는 아들녀석이 아직도 생각나요. ㅋㅋ

구단씨 2014-12-30 15:00   좋아요 0 | URL
녀석들, 참나... ㅎㅎ
요즘 아이들이 산타의 존재를 믿을까 싶었거든요.
선물도 콕 찍어서 주니까 뭐... ^^
 
니 부모 얼굴이 보고싶다 무대 위의 문학 1
하타사와 세이고.구도 치나쓰 지음, 추지나 옮김 / 다른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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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이 끝나고 난 후... 『니 부모 얼굴이 보고싶다』

 

 

직접 경험해보지는 않았지만, TV나 책을 통해서 봤던 심리치료 과정에서, 서로의 처지를 바꿔놓고 같은 상황을 경험하게 하는 장면이 있다. 상처받은 사람은 그 정신적인 고통을 전문가와의 상담으로라도 덜어내야만 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상황극, 역할극 같은 것처럼 보인다. 아주 작은 무대(무대라고 할 것도 없는 어떤 장소) 위, 어떤 상황이 펼쳐진다. 언제 어느 때, 이런 일이 있었고, 나는 그 일로 이런 고통을 받았지. 대충 이런 내용의 연극이 펼쳐진다. 고통 받았다고 여긴 사람은 그 반대의 관점을 연기한다. 실컷 흥분하며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과격해지기도 한다. 그 맞은편의 누군가는 침묵하거나 듣기만 하거나, 고개를 숙이고 있다. 연극이 끝나고 나면 서로에게 한발 더 다가서는 분위기를 느낄 수도 있다. 보는 사람이 느끼는 그 감정이 진실일지 아니면 그 순간의 가면일지는 모르겠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살아가는 동안에 바뀐 그 입장에서 상대를 봐야 할 때가 생각보다 많을 수도 있다는 거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연극이 많이 생각났다. 연극으로 먼저 오르고 난 후 소설이 된 이야기다. 우리나라에서 낭독회로 진행되었을 때도 상당히 주목받았다고 한다. 비단 일본에서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증거다. 새삼 얘기하는 게 불필요한 일처럼 느껴질 정도로 익숙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너무 흔한 일상처럼 되어버렸다는 게 아픈 이야기라는 것. 이런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오고 있는, 계속되어야만 하는 이유도 같을 것이다. 이 책이 조금은 다르게 다가오는 이유는 단순히 왕따 문제나 청소년의 자살 문제를 그리고 있다는 것을 넘어서서, 그 아이들의 든든한 배경이 되는 부모의 진짜 얼굴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중학교 교실의 이른 아침. 한 여학생이 자기 반 교실에서 자살했다. 그리고 유서로 보이는 편지가 담임선생님에게 도착한다. 편지의 맨 끝에는 같은 반의 아이 다섯 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학교에서는 이 다섯 명을 따로 대기시켜 놓고 아이들의 부모를 호출한다. 학교에 도착한 다섯 명의 학부모들은 저마다 자신의 아이가 그럴 리가 없다, 착한 아이들이다, 내 아이를 격리해 놓지 마라, 죽은 아이가 행실이 올바르지 못했다, 편지가 조작된 것이다, 등등. 자신의 자녀가 죽은 아이의 가해자라는 것을 처음부터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겠지. 부모에게는 자식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 있을 것이다. 자신의 아이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착각인 줄도 모르고,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외침만 반복한다. 그런데 죽은 아이는 담임선생님, 그룹에서 외면당한 자신과 같이 밥을 먹어준 친구, 아르바이트하던 신문보급소의 소장에게 각각 편지를 보냈다. 감사의 말과 함께 편지의 끝에는 똑같이 다섯 명의 이름을 적어서...

 

가해자의 학부모가 모이기 시작한 그 순간, 즉 이 연극의 처음 부분부터 나는 숨이 턱턱 막혀왔다. 한 생명이 스스로 선택한 죽음이었다. 중학교 2학년, 소소한 수다에도 까르르 웃음이 날 것만 같은 가벼움마저 사랑스러운 나이, 인생의 큰 그림보다 당장 바로 앞의 유치한 우정이 소중하다고 여길 수 있는, 정말 순수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게는 그 시간을 미처 다 반짝이지도 못하고 버린 것에 대해 아파해도 모자랄 고통일 텐데... 불태우고 찢어버린 편지를 앞에 두고 '이제는 없는 일이다.'라는 간단명료한 마침표로 만들어버리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 무서웠다. 같이 그룹을 만들어야만 유지되는 게 중학교 생활이라니 인정하고 싶지도, 믿고 싶지도 않지만 요즘 아이들의 학교생활이 그런 모양이라니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그 무리의 형성이나 유지되는 근거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를 동반한다. 그냥 미워, 그냥 싫어. 약해 보이니까, 만만하니까, 한번 찔러보니 말을 잘 들으니까. 또 어떤 이유가 더 있으려나... 사실 특별한 이유가 없어 보였다. 그룹 안에서 한 아이를 밀어내고, 왕따를 시키고, 횡포와 폭력, 협박을 일삼는 이유가 그저 무리와 한 개인이라는 차이 말고는 없던 것이다. 협박에 못 이겨 아르바이트해서 상납을 하고, 그것마저 채우지 못하니 가해자들이 나서서 원조교제를 시키는 것도 너무 당연한 것처럼 이루어진다.

 

그룹에 들지 못하면 외톨이가 되고, 아주 교묘한 따돌림으로 들키지도 않게 하는 고단수의 행동을 하는 아이들이 중학생이라니... 그 나이의 아이들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이야기를 볼 때마다 나는 그 아이들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상태로 되돌아가고는 한다. 현직 교사가 직접 쓴 이야기는, 그가 직접 경험한 내용이 아니지만 간접 경험으로 보고 듣고 상담한 많은 내용을 근거로 써졌기에 상당히 사실적이다. 그런 부분에서 결코 지나칠 수 없는 시선이 바로 부모의 입장에서 취해야 할 자세다. 그것도 가해자의 부모 처지에 놓였을 때 어떤 시선과 생각으로 행동하고 말해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 책에서 보이는 가해자의 부모들은 한결같았다. 계속 드러나는 아이들의 이름 앞에서도 부정했고, 설사 그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오점만 찾아내려 했다. 피해자가 했던 그 불법적인 행동(중학생 신분으로 아르바이트한다거나, 원조교제를 하는 것 같은)만 들춘다. 그러한 행동이 이루어져야 했던 배경에 자신의 아이, 가해자가 있었음을 처음부터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더군다나 자신들이 저지른 일에 대해 전혀 반성하지 않는, 매일같이 얼굴 보고 지냈던 사람이 사라졌다는 것에 아무런 감각도 없는 아이들. 겨우 십 년 조금 넘게 살아온 시간 동안 그 아이들에게 그런 인성이 갖추어진 것은 무슨 이유일까.

 

단숨에 속내를 끄집어낸 엔도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부모들을 휙 둘러보더니 조용히 곱씹듯이 말했다.

"오늘은 운이 좋았네요. 소원을 이뤘습니다. 줄곧 궁금했거든요. 걔들 부모들은 어떻게 생겨 먹었을까."

엔도는 다시 한 번 부모들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휴대전화 화면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어서 사과해. 미치코한테 사과해! 어서!" (103페이지)

 

밖에서 행동할 때 자주 나오는 말이면서, 그 말 때문에 행동거지를 조심해야 하는 이유가 되는 것에 부모가 있다. 아이가 밖에서 잘못된 행동을 할 경우 대부분의 사람은 '집에서 부모가 그렇게 가르쳤나?' 하는 생각을 먼저 할 것이다. 결혼한 여자의 입장에서 시댁에서 가장 듣기 싫은 말은 '너희 친정에서는 그렇게 가르치더냐, 하는 말이라고 했다. 그만큼 한 사람의 성장이나 인성에 있어서,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가장 먼저 관계를 형성하는 부모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중요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잘못된 것을 지적하면서 굳이 그 배경에 부모를 대입해 판단하는 게 익숙해서일 수도 있지만, 그만큼 부모의 가르침이나 부모의 태도가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을 드러내는 부분일 수도 있다. 이 이야기가 처음 상연되었던 연극에서 멈추는 게 아니라 굳이 소설로 다시 써져야만 했던 이유가 이렇게 설명된다.

 

이야기의 중반을 넘어서면서 그 진실이 하나씩 드러난다. 누구나 그 진실을 알고 있다고 해서 다 꺼낼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만 같다. 미치코의 진실을 알고 있던 신문보급소의 소장은 하루 늦은 자신의 행동에 울분할 수밖에 없었고, 아이들의 진실을 알고 있던 부모는 그 진실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처리하는 방법을 먼저 가르쳤다. 나의 예상은 여기서 빗나갔다. 연극의 막이 내려지기 전에 많은 것들이 제 자리를 찾아갈 기회가 만들어지는 것으로 마무리되지 않을까 했었는데... 긍정적인 다음 장면도, 가해자 부모의 태도가 달라질 거란 희망도, 가해자인 아이들의 인성에 대해서도, 온전하게 기대할 수가 없었다. 마지막 장 누군가의 말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으니 다음 행보를 가르쳤던 것일까.

 

연극이 끝나고, 단 하나의 조명만이 무대 위를 비추고 있는 듯하다. 시신이 되어 누워있는, 피해자인 미치코의 표정을. 마치, 이제야 좀 편하다는 얼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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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늦은 시간에 걸려오는 전화나 문자가 무서운 적이 많았다. 지금도 그런 무서움이 아주 사라진 건 아니지만 익숙해져서 그런지 아니면 조금 무뎌진 건지, 예전보다는 덜 하다. 뭐 별것도 아닌 걸로 그러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좋은 경험이 아니었기에 그 기억이 더 오래가는 듯하다. 위험한 말이 오고 가서가 아니고, 안 좋은 소식이나 듣고 싶지 않은 소식이 많아서였다. 절대 유쾌하지 않을 일들.

 

그런데 언젠가부터 한밤중에 도착하는 소식 중에는 외로움, 혹은 쓸쓸함이 담겨 있는 것도 많았다. 자정을 전후로 들어오는 문자가 특히 그랬다. 밤이라는 시간 때문일 수도 있고, 그 외로움을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어서였을 수도 있다. 그렇게 문자를 보내는 이는 내가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었고, 대개 가까운 사이였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라는 말을 웃음과 같이 건넬 수 있는 사람들이어서 다행인... 때로 바쁜 시간이 지난 후 찾아온 여유에 안부를 물을 수 있는 시간이거나, ‘그냥’이라는 이유로 스스럼없이 말문을 열 수도 있는 시간. 그래서 한밤중의 문자가 안 좋은 소식들로 불안한 것보다 괜히 마음이 허해지는 순간으로 변해가곤 했었다.

 

 

외로운 밤이 있다.

'아니 이건 그리움이야, 아니 이건 고독이지, 고독은 나의 친구인걸' 하고

아닌 체해보아야 어쩔 수 없이 사무치는 건, 외로움이다.

외로움에는 눈물이 없다.

메마른 가슴이 괴롭게 사람을 들쑤시는 밤.

(쓸쓸해서 비슷한 사람 194페이지)

 

 

 

이상한 밤이었다.

요즘, 이상하게 잘못 걸린 전화가 자주 온다. 일주일에 두세 번쯤, 그것도 밤에 주로. 지금 번호를 사용한지 1년쯤 됐는데, 그동안 잘못 걸린 전화 어쩌다 한번 받기는 했어도 요즘처럼 자주 오지는 않았다.

 

 

 

언젠가 이런 문장을 읽은 적이 있어.

‘자신을 완벽하게 고백하는 것은 어느 누구라도 불가능하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을 고백하지 않고서는 어떤 표현도 불가능하다.’

비루한 고백을 들어줘서 고마워. 오랫동안 옆에 있어줘서 정말 고마워.

마지막으로 어떤 주저도 없이 말할게.

행복해라, 꼭. (말하자면 좋은 사람 198페이지)

 

 

 

며칠 전 금요일 밤, 자정이 거의 다 되어 가는데 문자 한 통이 들어온다.

 

“00아, 잘 지내니?”

모르는 이름이기에 잘못 온 문자려니 싶어 무시했다.

몇 분쯤 지나자 다시 또 문자가 들어온다.

“00아, 나야. 보고 싶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상대방에게 문자를 전송했다.

“문자 잘못 보내셨습니다.”

상대가 잘 알아들었겠거니 했다. 잘못 수신된 문자라고 친절하게 알려주기까지 했으니, 알아듣고 이젠 문자를 안 보내겠구나 했다. 그런데 이 사람 이젠 문자가 아니라 전화를 걸어온다. 순간, ‘이걸 받어, 말어?’ 몇 초의 고민을 했더랬다. 굳이 잘못 보냈다는 문자에 왜 전화를 걸어올까 궁금하기도 했지만, 내 알바 아니라는 마음이 커서, 귀찮아서였다. 그래도 한 번 더 친절해도 될 것 같아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정말 00 휴대폰이 아닌가요?”

“모르는 분입니다. 전화 잘못 거셨어요. 제가 이 번호를 1년 전부터 사용하고 있습니다.”

“정말인가요?”

“네.”

바로 전화를 끊을 줄 알았다. 전화를 잘못 걸었다는데, 상대방은 자기가 찾는 사람이 아니니 당연히 끊어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 남자, 전화를 끊지 않는다. 할 수 없이 내가 먼저 전화를 끊겠다고 말하고 종료 버튼을 누르려고 했다. 말을 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이 남자가 먼저 말문을 연다.

 

“죄송합니다. 00은 헤어진 여자 친구인데요.”

그래서?

“참고 참다가 1년이 넘어서야 전화를 했어요. 보고 싶어서요.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요.”

그런데?

“그 사이 전화번호가 바뀐 걸 몰랐어요. 너무 당연하고 익숙한 번호라 계속 사용하고 있을 줄 알았어요. 그래서 문자 잘못 보냈다는 말이 거짓말인 줄 알고 전화까지 하게 되었네요... 죄송합니다.”

“네.”

“......”

“저기요?”

“네.”

더 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어서 평소 하던 대로 했다. 나와 상관없는 이 얘기를 더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찾는 분의 전화번호가 바뀐 걸 알았으니, 이제 이 전화를 끊어야하지 않겠어요?”

“아, 예. 그렇죠. 그래야죠...”

근데 왜 끊겠다는 말이 없어?

내가 먼저 끊어야겠다고 다시 말하려고 하는 순간, 상대가 다시 말문을 연다.

“정말 거짓말인줄 알았어요. 그런데 00과 목소리까지 비슷하네요. 처음엔 본인인데 아닌 척하는 줄 알았어요. 근데 말의 억양이 달라서 아닌 걸 알았어요. 그쪽은 목소리가 좀 더 낮네요.”

“저에게 더 하실 말씀 있으세요? 저는 그쪽과 계속 통화할 이유가 없는데요.”

냉정하게 들릴 정도로 딱 잘라 말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의미 없는 대화를 계속할 이유도 없었다. 상대를 배려하고 싶어도, 내가 해결해줄 수 있는 게 없으니 시간낭비라고 생각했다. 모르는 사람을 찾아 데려다 줄 수도 없잖아...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사람 말투가 정말 스팸전화 끊듯이 ‘뚝’ 끊어버릴 수 없게 했다. 그렇게 나 혼자 고민하고 있는데 다시 이어져오는 말.

“보고 싶은 거 그동안 잘 참았는데, 오늘은 정말 못 참겠어서요. 한마디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안하던 짓을 했어요. 죄송했습니다. 제가 먼저 끊겠습니다...”

뚜. 뚜. 뚜...

 

그렇게 전화가 끊겼다. 귀신에 홀린 듯했다. 오 분에 가까운 시간동안 뭐가 지나갔나? 뭐지, 이건? 아, 진짜...

 

 

 

그게 뭐 어때서, 라고 생각하는 순간 증기처럼 아득한 두려움이 나를 덮친다.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잊음으로써 얼마나 많은 시간 토막들을 잃어버리고 살아왔을까.

진짜는 죄다 도둑맞고,

내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자아의 금고 속에는 엉뚱한 모조품만 잔뜩 쟁여져 있는 느낌이다.

스물두 살의 첫새벽처럼 나는 텅 빈 주방 앞에서 나지막이 읊조린다.

누가 너를 내게 보내주었지? (비자나무 숲 262페이지)

 

 

 

 

멀쩡한 기분이었다. 두통이 좀 심했던 거 말고 특별히 더 나쁠 게 없었다. 피곤해서 일찍 자려고 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게 뭐야? 잠들려고 했던 기운을 다 깨워놓고 이상하게 멜랑콜리한 기분까지 남겨놓다니. 그 사람은 그렇게 전화를 끊고 괜찮아졌는지 어땠는지 몰라도, 그녀의 전화번호가 바뀐 것을 알고 이제 삭제하고 개운해졌는지 몰라도, 이젠 정말 그 미련을 버렸는지 몰라도... 나는 괜히 우울해졌다. 전혀 모르는 남인, 누군가의 외로움이 쓸데없이 전염된 듯했다. 수화기 너머 누군가의 쓸쓸함이 그대로 건너온 듯했다. 뭐가 이래. 아, 이런 거 정말 별론데.

 

 

잠이 다 깼다. 이대로 잠들기는 어려울 듯하여 양양의 책 제목이 생각나서 들춰보다가 문득, 내 전화번호 전 주인이 궁금해졌다. 나에게 온 잘못 걸린 전화는 남자를 찾는 전화도 있었지만 대부분 여자를 찾는 전화였다. 같은 이름의 여자를 찾고 있었다. 전화번호를 바꾸면서 번호연결 서비스를 사용하지 않은 듯했다. 그 말은, 굳이 바뀐 전화번호를 전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지 않다는 의미 아닌가. 본인이 먼저 전화번호를 알려주지 않는 이상 타인이 그 번호를 알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갑자기 나에게 잘못 걸려온 전화를 생각해보니, 1년 동안 이 사람들은 내 전화번호 전 사용자와 연락이 없었다는 건가? 왜,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1년이란 시간이 지난 후에 그 사람을 찾는 거지? 전화한 그 남자는 1년 동안 어떤 시간을 보냈을까. 혹시, 좁은 편도 1차선 같은 길을 가고 있었을까. 같은 마음으로 같은 방향으로 갈 수 없는 길, 상한 마음에 '나 없이 잘 지내지 말라'고 소심한 복수라도 했던 걸까. 그래도 결국 쓸쓸해진 마음을 어쩔 수 없어 그녀를 찾았던 걸까.

 

 

한 사람을 떠올렸다. 늦은 밤 전화해서 내려앉은 목소리를 들려주던, 늦은 퇴근길에 걸음은 무겁고, 불 꺼진 집에 들어와 시어진 김치에 물을 만 밥으로 허기를 달랬다던, 외롭다고 푸념을 늘어놓던 목소리. 누구나 사는 게 비슷하다고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는데 이제 와 생각해보니 외롭다고 말하던 사람의 가슴은 쓸쓸했겠구나, 싶다. 이런 거였구나. 양양이 평범하다면 평범한 일상을 두고 말하면서 이런 제목을 붙인 이유를, 어쩌면 알 것도 같다.

 

늦은 밤 불쑥 이 책을 펼쳐 들었던 건, 제목에서 흐르는 그 쓸쓸함 때문이다. 아닌 체하려고 해도 안 되는, 말로 다 하지 못한 침묵이 기어코 또 다른 말이 되어 뛰쳐나오고야 마는 것. 함박눈이 펑펑 내리며 추위가 더 짙어지고, 양양의 노랫말이 되어버린 그녀의 끼적임은 그래서 '비슷한 사람'이란 이유로 우리를 붙든다. 닮아있음을 부정하지 말라고, 닫힌 창문 열고 손 뻗으면 바로 닿는 사람들이라고... 살아가는데 때로 말이 없어도 되고 표정이 없어도 되고 혼자여도 되지만, 가끔은 딱 한 마디가 필요한 때가 있다. 더도 말도 덜도 말고 딱 한 마디만. '어쩌면 우린, 비슷하구나.' 느낄 수 있는 찰나의 순간이 필요할 때. 이 책에서 그녀가 뿜어대는 사소하고 하찮은 일상 같은 시간 앞에 괜히 민망해진다. '너도 그렇잖아' 건네는 한 마디에 모든 감정을 읽힌 듯 얼굴이 붉어진다. 나도 모르는, 혹은 모른 척하고 싶었던 감정을 타인이 살피고 말해주는 것만 같아서다. 전화를 잘 못 걸었던 그 남자에게 괜찮아질 거라는, 진심어린 한 마디라도 해줄 걸 그랬나 싶은 마음에 뒤늦은 후회를 한다.

 

 

 

 

외롭게 혼자 맞이하는 쓸쓸한 죽음도 있고

사랑하는 이들에게 둘러싸여 떠나는 행복한 죽음도 있겠지.

하지만 어차피 떠날 때는 우리 모두 혼자다.

(기억해줘 184페이지)

 

 

 

 

나답지 않게, 전혀 상관없는 남의 일에 신경이 쓰여 생각의 오지랖을 넓혔다.

이상하게, 괜히 쓸쓸해지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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