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모든 시간의 역사 - 시곗바늘 위를 걷는 유쾌한 지적 탐험
사이먼 가필드 지음, 남기철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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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시간이라는 것은 뭘까. 우리의 하루를 표현하는 단위이자 우리가 느끼는 모든 삶을 채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 시간을 보고, 정해진 약속이나 일 처리 같은 것도 시간에 따라 움직이고. ‘빨리빨리’를 외치며 뛰고 움직이는 시간이 우리 삶 전체에 깔렸음에도, 시간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단 한 번도 궁금한 적이 없었다. 시간과 돈의 관계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묻기도 하는 일에 저자의 여행 같은 설명이 답을 내놓는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서 가장 뜻이 많은 단어라는 ‘시간’은 다양한 방면에서 그 의미가 있다. 저자가 풀어내는 이야기를 들으면, 저절로 ‘그렇구나!’ 하는 공감의 끄덕임이 나온다. 역사나 철학에서부터 계속 발전해오는 산업까지, 시간이 개입하지 않은 곳은 없다. 모두 15장으로 나누어 설명한 시간의 모든 것이 이 책에 담겨 있다. 처음 태양의 시간에 맞추어 살아가던 우리가 어떻게 표준시간제를 채택하여 살고 있는지, 산업혁명 후 빠르게 진행된 시간혁명을 이야기한다. 점점 더 정확하게 시간을 알 수 있게 되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시간을 언급한다. 우리가 항상 인지하지 않았어도 우리 삶 깊숙하게 자리한 것이다. 

 

특이하게도, 시간은 인간에게만 존재한다고 한다. 생각해보니 인간 이외의 존재가 어떻게 시간을 파악하는지도 궁금했던 적이 없었다. 그저 인간보다 덜 진화하거나 다른 동물들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방법이 있겠거니 생각했다. 그들의 삶의 방식을 ‘시간’을 주제로 생각하지 않았던 거다. 동물은 시간 개념보다는 본능으로 움직이는 면이 강하다고 한다. 오로지 자기의 감각에 의지해 우리가 아는 시간 개념을 활용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시간은 인간에게 주어진 무기 같은 느낌이 강하다. 인간에게만 적용하는 하루의 계산법 같고, 시간의 활용에 따라 부와 권력의 차이가 생기도 하는 현대의 비즈니스에서도 중요한 존재니까 말이다.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시간의 길고 짧은 감각마저 다르게 다가오는 걸 보면, 무기임을 넘어서서 겁이 나는 존재로 다가오기도 한다. 바쁠수록 더 빠르다고 생각하는 시간을 사는 현대의 우리에게 시간은 어떻게 존재하는지 물음에 물음을 더하는 저자의 설명들이 더 가깝게 와 닿는 이유다.

 

우리는 시간이 멈출 수 있다는 생각이 재미있는 상상이라고 여기거나 영화의 단골 소재임을 알고 있다. 혁명기 프랑스에서 시간이 멈추는 일이 그럴듯하게 보였다면 그것은 각관주의와 열정을 위해, 그리고 다른 혁명, 즉 운송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위해 우리가 만들어야만 하는 욕망일 것이다. 기차 한 대가 선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 단단하게 만든 믿음이 가는 물건이었다. 시간의 관점에서, 기차는 모든 것을 바꿀 것이다. (55페이지)

 

처음부터 시간이 정확하다는 개념은 없었을 것이다. 오차범위도 넓었을 테고, 어디서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시간의 의미를 제대로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철도의 발전으로 더욱 정확한 시간의 개념이 생겼다. 철도는 발전하면서 문명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마차가 다하지 못한 시간 절약과 대량 운송으로 점점 교통 기능으로의 자리가 커졌다. 그러다가 보니 더욱 정확한 시간 조정표가 필요했고, 표준시가 만들어졌다. ‘정확하게’라는 말이 무엇인지 더 깊게 자리 잡은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여러 개의 노선을 연결하는 최초의 일반 승객용 철도 시간표는 1839년에 만들었다. 그런데 시간표에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중략) 옥스퍼드 지역의 시간이 런던의 시간보다 5분 2초 늦고 브리스톨 지역의 시간이 런던보다 10분, 엑서터 지역의 시간은 14분 늦었다면 열차 승객들은 도착지에서 시곗바늘을 조정해야 하는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중략) 시간 조정표를 제공하는 마차회사도 간혹 있었지만 대개 신뢰성이 떨어지는 회중시계나 휴대용 시계를 보고 시간차를 대강 짐작했었다. 그러다가 철도가 도입되면서 여행자들의 시간 개념에 일대 변화가 일어났다. ‘정확성’이라는 개념이 생긴 것이다. (69~70페이지)

 

사상 최초로 영국 전역에 표준시가 도입되어 철도 회사들은 이를 바탕으로 기차 시간표를 만들었다. (71페이지)

 

정확한 시간의 개념과 확인이 필요하면서도, 시간은 추상적인 존재라는 건 변함없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가 말하는 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체험하는 시간의 모습과 의미를 그렸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저자가 독자에게 전달하려는 바도 이런 게 아닐까 생각한다. 여유를 바라지만 현실 속 우리는 바쁘게 살아가고, 또 바쁘게 살아가면서 얻어야 할 삶의 필요한 것들을 놓칠 수도 없는 일. 시간에 집착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시간에서 멀어질 수도 없는 일상을 살면서 우리가 좀 더 애쓰면서 봐야 할 것이 무엇인지 말하려는 것이다. 

 

신경과학자들에 따르면 인간의 의식은 실시간보다 약 0.5초 늦다고 한다. 외부의 신호를 받아들이고 그 신호를 뇌로 보내어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메시지를 뇌가 수용하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인간의 뇌는 그 시간차를 교정하고 유동적인 이야기를 구성하기 때문에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내겠다고 생각한 후 결심을 하고 그 행동을 실행하여 눈으로 보거나 듣기까지는 항상 생각보다 늦다. 따라서 인간은 늘 지금(now)보다 뒤에 있으며 절대 지금을 따라잡지 못한다. (429페이지)

 

시간에 물리적인 의미를 두지 않고, 시간에 속박되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결국 우리는 시간에 맞춰 달리고 움직이는 삶을 이어왔다. 저자는 지금껏 그렇게 살아온 시간을 이제는 조금 늦추어도 좋지 않겠느냐고 물으며, 이제는 그 시간이라는 공을 우리에게 던졌다. 분침 없는 시계의 아이디어를 언급하면서, 일상의 속도를 늦추는 일을 넌지시 추천하는 것만 같다. 지금처럼 경쟁에 둘러싸여 시간을 걷는 게 아니라 뛰는 것처럼 살아온 사람에게 느긋한 쟁기질은 무서운 일일지도 모른다. 삶을 놓아버리는 선택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금만 내려놓고 우리 자신과 주변을 둘러보면 저자가 말하는 ‘도시를 떠나 밭에서 쟁기질하는’ 방식으로 시간을 걷는 일을 떠올릴 수 있다. 문명이 우리에게 주는 온갖 방식의 편리함과 발전된 세상은 분명 좋은 일이지만, 그 이면의 단점들이 우리 삶을 어떻게 만들어왔는지도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시간의 역사’가 아닌 ‘시간의 관계와 감각’에 대해 말하는 책이다. 무거울 것 같은 주제를 흥미롭게 이끌면서 시간에 대한 편견을 사그라지게 한다. 솔직히 처음에는 저자가 들려주는 시간에 관한 이야기가 익숙하지 않았다. 오히려 누군가의 일화를 들려주면서 계속되는 시간에 관한 이야기는 역사 속 사건들이 아닌 인간의 삶에 초점이 맞춰있다. 인간 생활과 밀접하게 연결된 시간의 영향이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흐르던 시간과 다르게 흐르는 시간을 맞이할 수 있을지 묻는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겠지만, 분침 없는 시계의 아이디어가 언급되었던 그 순간 이미 우리는 답을 갖고 있지 않을까 싶다. 직진으로 달리던 삶 옆에 다른 시간의 삶도 있음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조심스레 말하는 책이다. 과거로 가려고 애쓰는 시간의 감각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인간의 모습 속에서 저자의 권유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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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8-03-14 0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이 인간만(?)이 하는 추상적 개념이기도 하지만 시공간이 같이 출현했고 같이 움직인다는 생각은 사람들이 그리 많이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아 그것도 좀 신기해요. 이 책 궁금했는데 시간 다루는 다른 책들과 큰 변별점은 안 느껴지는군요. 전개 내용보면 <소소한 일상의 대단한 역사>랑도 좀 겹치는 듯도 보이고.
시간(관리까지)을 중요하게 생각하다 보니 이런 대중서가 꾸준히 나오는가 싶습니다.

구단씨 2018-03-15 13:02   좋아요 0 | URL
시간의 개념을 인간이 느끼는 감정에서 보는 듯했어요.
제가 읽기에는 뭔가 에세이 분위기가 강하더라고요. ^^
 
한정희와 나 - 2017 제17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이기호 외 지음 / 다산책방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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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작이어서가 아니라, 수록된 작품 중에 가장 먼저 읽어서가 아니라, 이기호여서가 아니라... 수록된 다른 작품들도 비슷한 호감으로 남아있지만, 이기호의 소설 「한정희와 나」는 굉장히 잘 읽히면서도 결말 부분에 다다르면 희미하게 남아있던 불꽃이 스르르 꺼지는 기분이 들어서 기억에서 쉽게 잊히지 못할 것 같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화자인 '나'의 집에 같이 살게 된 초등학교 6학년 한정희를 바라보면서, 이 소설을 읽고 있는 나는 타인을 얼마나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는지 계속 묻게 된다.

 

그저 입 하나 보탠, 그것도 겨우(?) 초등학교 6학년 여자아이인데 뭐가 어려울까 싶었던 화자의 안일함은, 그가 몰랐던 정희의 일상이 드러나면서 심경이 복잡해진다. 화자를 고모부라고 부를 정도로 잘 지냈던 사이였는데, 결국에는 정희가 '학폭위'에 회부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사태에 이른다. 화자의 감정도 요동친다. 이해는 불이해로 변하고, 안 해도 될 말까지 꺼낸다. 그 정도 악화한 감정에 혼란스러운 건 화자 혼자였나 보다. 정희는 그 사건 이후로도 변하지 않는다. 화자는 더는 정희에게 연민의 감정마저 보낼 수 없음을 안다. 그 기록을 소설로 담아보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어려웠다. 화자는 자칭 실패한 소설가라고 말한다.

 

그는 왜 실패한 소설가로 남았을까? 막상 소설을 읽으면서는 잘 보이지 않던 게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니 조금씩 보인다. 소설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는 거였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작가에게 현실의 실제는 소설의 바탕이 되기도 한다. 정희와의 시간이 그가 쓰려는 소설의 바탕이 되지 않더라도 분명하게 찾아보고 싶은 게 있을 터였다. 소설에 녹아들 수 있는 인간의 한 감정과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것들. 그는 끝내 정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정희를 보듬고 있던 연민마저 사라진 게 화자가 기억하는 정희의 마지막이다. 한 사람에 대한 이해를 끌어내지 못한 것은 그가 쓰려는 소설의 완성을 이루지 못함을 동시에 말한다. 그까짓 한 사람의 이해쯤이야 못해도 그만, 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 역시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내가 세상의 모든 사람을 이해할 수도 없고, 나와 관계한 모든 이들의 감정을 다 보듬을 수도 없다. 다만, 이해 언저리에 다가가려고 노력하는 것을 멈추지 못할 뿐이다. 그게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관계를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 아닐까 생각한다. 소설가는 여기서 한 가지 더 나아가려고 애쓰다가 실패한 것이다. 그가 글로 풀어낼 이야기는, 내가 이해 못하고 포기한 지점에서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조금 더 이해하고, 조금 더 깊게 보면서, 내가 알 수 없는 타인의 마음 한 가닥을 더 봐야만 쓸 수 있는 게 소설이 아니었을까? 화자가 실패한 소설가라고 말했을 때 그 역시 나와 똑같은 시선을 가진 인간이구나 싶으면서도, 그가 써야만 했던 소설의 완성(어쩌면 시작 자체를 못 했을지도 모르지만)을 이뤄내지 못함을 안타까워해야 했다. 그동안 만난 이기호의 소설이 웃음이 절로 나는 유쾌함이었다면, 「한정희와 나」는 웃음기를 뺀 현실 속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담은 소설이었다. 우리가 타인에게 가려고 아무리 애써도 완벽하지 못하다는 것, 우리가 타인에게 갖는 많은 감정의 한계를 이렇게 드러낸다. 어쩔 수 없다. 인간이므로, 우리 사는 세상 흘러가는 게 그러하므로.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다.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노력하면서, 타인에 대한 감정이 미완으로 끝나는 것을 멈추지 않고 반복하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므로.

 

수상작 외의 작품들 역시 하나같이 매력적이다. 오늘을 살면서 보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문제들에 답하려고 애쓰는 작품들이다.

구병모의 「한 아이에게 온 마을이」는 만삭의 몸으로 시골로 이사한 정주의 시선을 보여준다. 내가 가장 힘들어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착각들을 그대로 확인한 기분이다. 간섭과 관심의 구분을 짓지 못하고 당신들의 오지랖을 관심이라 착각하는 사람들, 외부인의 편견으로 자기들만의 세상을 구축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지금 한국 사회의 시선을 확인한다. 최은영의 「601, 602」 역시 폭력의 침묵에 방관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담았다. 옆집 친구 효진과 그의 가족의 행태를 보면서 화자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의 세상을 배운다. 하지만 그게 옆집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 집에서도 벌어지는 고요한 폭력이라는 것을 알고 난 후 침묵의 의미를 읽는다.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드러내서는 안 될 문 안의 일이라는 것을 배우는 것처럼 말이다.

 

그 외에도 편혜영의 「개의 밤」, 기준영의 「마켓」, 김애란의 「가리는 손」, 박민정의 「바비의 분위기」, 김경욱의 「고양이를 위한 만찬」 같은 작품들도 하나같이 상처와 아픔, 실패의 이야기들이다. 다문화 가정의 편견이나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거나 위로를 건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책임에서 벗어날 방법만 기를 쓰고 찾아다니는 가해자의 잔인함, 이민자 삶의 힘겨움 같은 일들. 그중에서도 특히 권여선의 「손톱」은 시차를 두고 사라진 가족 대신에 빚을 갚아가면서 사는 20대 초반의 여자가 등장하는데, 상처가 깊은 손톱을 제대로 치료하지도 못하고 상처를 키워가면서 하루를 버틴다. 돈 얼마 더 받는다고 옮긴 직장에서의 장점은 찾지 못하고, 일주일에 한 번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만찬으로 즐기는 인생에 낫지 않는 손톱의 상처는 더 깊어지기만 한다.

 

진통제 기운이 떨어졌는지 손톱이 쿡쿡 쑤신다. 약을 먹고 장을 보고 집에 돌아가 밥도 짓고 국도 끓여야 하는데 소희는 가만히 앉아 있다. 어디서 내릴지 어느 역에서 헤어질지 소희는 알지 못한다. 슬프면서 좋은 거, 그런 게 왜 있는지 소희는 모른다. 밖은 어두워지고 휴일이 지나가는데 소희는 조금만, 조금만, 하며 앉아 있다. (145페이지, 손톱)

 

너무나 고단한 삶을 감당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느 순간 폭발지점을 만나게 된다. 「손톱」의 주인공이 마지막에 외치던 목소리는 아마도 그 폭발지점이 아니었나 싶다. 그런데 또 그런 터트림은 오래 유지되지 못한다. 눈앞의 주어진 삶을 꾸역꾸역 살아가야만 하는 일이 놓여있기 때문이다. 아이가 저지른 일을 차마 말하지 못한 엄마도, 이혼을 준비하는 여자의 현실도, 짖지 않는 개처럼 침묵해야만 하는 가해자의 대리인도, 글을 쓰지 못하는 소설가도... 지금의 실패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도 계속 안고 있을 수는 없다. 지금까지와 같은 방식의 삶이 실패였다면, 그 실패를 벗어날 다른 방법으로 시선을 돌려야만 하니까. 이 무력감이 되돌려줄 '더 나음'을 기다리며 사는 게 우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 기다림이 아니라면 우리는 지금 여기 없을지도 모른다는 섬뜩함에, 더 심한 상처에, 더 깊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거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을 테니.

 

이들의 이야기에, 격한 현실의 공감과 실패의 두려움과 상처의 고통을 동시에 느낀다. 뭔가 이해받는 느낌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나와 네가 같이 겪는 세상이라고 생각하니 조금 위로가 된다고 해도 될까. 그렇다고 타인의 고통에 나를 위로하려는 건 아니다. 이 순간을 사는 우리가 겪는 너무 닮은 일들에 누군가의 서툰 위로가 끼어들 틈이 없다는 거다. 아마도 현실을 사는 모습이 전하는 무언의 이해가 우리 사이를 더 가깝게 했는지도... 솔직한 뭔가가 그곳(소설 속)에서 이곳(현실)으로 넘어온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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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모르는 나의 하루하루가 점점 많아진다
김소은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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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에 결혼이 있을까 생각하면 언제나 부정의 답이 앞서곤 했다. 좀 더 어릴 때 진지하게 결혼을 생각해 볼 것을, 하는 후회. 아니면 지금이라도 아무나 붙잡고 결혼을 해야 하나, 싶은 모험. 이도 저도 아닌 생각들 속에서도 이상형을 묻는 말에는 늘 답이 정해져 있었다. 나와 성격이 잘 맞았으면 좋겠고, 우리 엄마한테 잘했으면 좋겠다는, 누가 일부러 시키지 않아도 오며 가며 우리 엄마가 어떻게 지내는지 살펴봐 주는 사람이면 좋겠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바람들. 나는 마마걸이면서 마마보이는 싫다는 이야기를 꺼냈더니 누군가는 한참을 웃더라. 그렇게 이기적인 생각을 이상형으로 정해놓으니 당연히 누굴 만나고 맞춰가는 건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그런데도 그 바람 속에서 ‘엄마’라는 존재의 묶음은 떼어놓고 생각할 수가 없다. 식구들 모두 각자의 생활에 충실하며 사는 지금, 엄마와 나, 단둘이 서로에게 가진 존재감은 남들보다 조금 다를 것 같아서다. 그런 생각으로 사는 지금, 이 책의 제목에서 풍기는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아서 쓸쓸했다.

 

행복하고 소중한 시간도 결국 흘러가버린다. (316페이지)

 

누구나, 안다. 자식이 커가면서 부모가 모르는 시간은 점점 많아지고, 서로 다른 시간을 사는 준비를 해야만 한다는 것을. 여전히 같은 시간을 함께 살아가고 있지만, 결국 이별은 찾아온다. 먼저 가는 사람, 남은 시간을 사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안다. 알면서도 받아들이기 힘든 시간을 또 겪어야 한다. 저자가 엄마와의 헤어짐을 기록하고, 누구의 딸에서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로 살아가면서 느끼는 시간 속에 저자의 엄마가 있다. 삶의 모든 순간에 엄마가 있었다. 그런 엄마의 모든 것을 엄마가 떠난 뒤에야 알게 된다는 게 아이러니다.

 

아이를 낳고 나서 나는 엄마의 사랑과 희생을 온 마음으로 느끼게 되었고, 엄마는 당신과 같은 과정을 겪게 될 딸에게 더 많은 것을 주고 싶어 했다. 우리는 더욱 많은 것을 공감하게 되었으며 이런 공감대는 약간의 거리가 있었던 우리 사이를 한 걸음씩 좁혀주었다. (153페이지)

 

저자가 웹툰으로 올리던 일상이 책으로 나왔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려진 그 일상을 한편씩 듣다 보면 어느 순간 울컥해지곤 한다. 누구나 그러할 것 같다. 오래전 일기장을 꺼내놓고 읽으면서 지나간 시절을 기억하고, 어떤 마음으로 그 시간을 건너왔는지 이제야 다시 보는 느낌은 어떤 건지, 그런 시간을 만들어준 엄마는 또 왜 이렇게 일찍 가셔야만 하는 건지... 결혼을 생각한 적 없던 사람이 결혼하고, 덜컥 아이의 엄마가 되기까지의 그 짧은 시간에 언제나 엄마가 있었다. 엄마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를 순간들에 늘 기적처럼 엄마가 가능하게 했다. 그런 엄마에게 닥친 암 발병은 서로에게 어떤 존재인지 다시 말하는 순간이 되었고, 함께 있어서 행복하고 감사하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엄마와 저자의 아이가 함께하는 모습을 볼 때 기쁨이 충만해지는 것을 느끼고, 저절로 포근해진다.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은 순간들이다.

 

신기하게도 임신했을 때는 임산부만 보이고 솔이가 아기일 때는 아기들만 보이더니 이제는 길거리에서 엄마와 함께 걷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만 눈에 들어온다.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고등학생 딸과 엄마, 카페에서 손주를 안고 있는 엄마를 찍어주는 딸, 쇼핑몰에서 엄마와 팔짱 끼고 걸어가며 도란도란 이야기하기 바쁜 딸……. 부러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자꾸 시선이 간다. (269페이지)

 

‘엄마가 되어보니 엄마를 이해하게 된다’는 정석 같은 말을 거듭 증명하는 셈이 됐다. 너무 잘 아는데 막상 닥치지 않으면 그 이해의 언저리에 닿지도 못하는 감정이다. 그럴 것이다, 라는 추측으로만 아는 감정. 그걸 직접 겪은 사람의 이야기라 그런지 더 크게 다가오는 듯하다. 막연하게 생각하면서 준비하던 것과 다르게 경험한 사람의 슬픔이 그대로 묻어나는 것만 같아서, 언젠가 내가 겪어야 할 순간을 다시 한번 준비하는 느낌이 가득했다. 저자 스스로 성장하는 시간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은데, 그 안에 언제나 엄마가 있더라. 특별하지 않은 인생처럼 보이는 우리의 보편적인 삶의 모습이었다.

 

엄마에 대해 마음껏 얘기하는 시간. 저자에게 이 웹툰을 그리는 일과 기록하는 일은 그런 의미였을 것이다. 지나고 나서 후회되는 순간도 많겠지만, 엄마를 기억하고 엄마에 관한 이야기를 한껏 쏟아낸 순간에 찾아올 행복도 맛보았을 거라고. 지금 거기서 엄마도 듣고 있겠지, 웃으면서 이 모습을 바라보고 있겠지, 라고 위안으로 삼으며 저자의 기록에 공감으로 동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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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가 이별의 날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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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가고 있다. 지금 우리가 보내는 시간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하나하나, 조금씩 점점 더 많이... 그렇게 우리는 시간을 잃어가며 사는 중이다. 기억이란 것도 그렇게 잃어가는 것 중에 하나일 테지. 깜빡깜빡 자꾸만 뭘 놓치면서 잊어가고, 내 기억이 온전한 건지 확신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길에 다다르며 불안해하는 길을 걷고 있다. 그 불확실한 기억에 대해 점점 불안은 커지고, 나를 아끼는 주변 사람들을 몰라보기도 하는 일도 서슴없이 다가온다. 어쩌면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시간은, 그렇게 많은 것을 잊어가는 순간을 맞이하러 가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여기 이 노인의 시간도 그러하다.

 

“머리가 빛을 잃어가더라도 몸은 한참 뒤에서야 알아차리지." (68페이지)

 

“그냥 조심하면 된다고 설명하면 이해가 될까? 할아버지 말이다. 할아버지의 머리가…… 가끔 우리가 알던 속도보다 느리게 돌아갈 거야. 할아버지가 알던 속도보다 느리게 돌아갈 거야.” (149~150페이지)

 

기억을 잃어가는 노인이 어떻게 세상과 작별하는지 보여주는 이 짧은 소설의 울림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컸다. '잃는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그대로 체험하게 하는 듯했다. 좋아하는 것들, 사랑하는 사람들을 점점 잃어간다. 동시에 그가 살아온 모든 시간과도 헤어지는 중이다. 기쁘고 슬펐던 모든 일상을 그렇게 떠나보내는 과정을 산다. 먼저 떠난 아내를 그리워하는 마음, 평생 가깝게 지내지 못했던 아들과의 서먹함을 안타까워하는, 지나고 보니 온통 서운하고 아쉬운 것들뿐이어서 더 아픈 시간을 겪는 중인지도 모른다.

 

아쉬움이 가득한 지나간 시간을 돌이킬 방법은 없다. 기억을 잃어가며 지난 시간 속을 여행하는 노인의 머릿속을 정돈해줄 방법도 없다. 다만,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이 상황을 겪어갈 뿐이다. 어떻게 건너가야 덜 아쉬울 수 있는지 찾아보라는 숙제를 받은 듯하다. 노인이 중심이 되어 흘러간 가족 삼대의 이야기에 아름답고 아쉽고 뭉클한 순간들을 같이 경험한다. 이제 남은 것은, 남은 사람이 같이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않는 게 아닐까 싶다. 마지막에 놓아야 할 순간이 오기 전까지, 마음을 다해 보듬듯이 대해야 하는 것. 그렇게 해야만 나중에 이 순간을 떠올릴 때 아쉽거나 슬프지 않을 것만 같아서 말이다.

 

“여보, 기억들이 나에게서 점점 멀어져가고 있어. 물과 기름을 분리하려고 할 때처럼 말이야. 나는 계속 한 페이지가 없어진 책을 읽고 있는데 그게 항상 제일 중요한 부분이야.” (83페이지)

 

누군가와 헤어진다는 것, 그렇게 헤어지는 게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슬픈 일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아서 더 아픈 일이다. 아무리 연습을 한다고 해서, 몇 번의 이별을 경험한다고 해서 익숙해질 감정은 아니다. 어린 소년이 할아버지에게 이별을 묻는 그 순간에도 우리는 안다. 작별하는 법을 배운다는 게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다만, 우리는 덜 아프게 작별하는 법을 보려고 애쓰며, 기억을 잃어가는 할아버지와 아직 어른 소년이 이별을 배우며 조금 성장하는 시간을 동시에 만드는 것을 지켜볼 뿐이다. 그렇게 천천히, 담담하게 작별 인사를 하는 이들을 보면서 우리도 조금씩 배우고 싶어진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이별을, 잘 이별하는 방법을 볼 수 있기를...

 

놓기 싫어서 그 순간이 천천히 흘렀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이 뭔지 모르지 않는다. 아직 그 순간을 죽음으로 경험하지는 못했기에 다 안다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헤어지는 모든 순간의 아쉬움을 알기에 감히 그 간절함을 공감한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벤치에 앉아 어딘가를 바라보며 옆에 앉은 이의 잡은 손을 놓고 싶지 않은 마음 그대로 전달하는 노인의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을 서늘하게 만든다. 이별은 이렇게 춥고 아픈 일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전한다. 거기에, 누구나 겪을 그 순간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시간을 만든다. 내가 노인의 자리에, 서먹서먹한 아들의 자리에, 아직은 뭘 모르지만 그래도 알 것만 같은 소년의 자리에 앉아 있다고 생각하니 많은 생각이 머릿속에 꽉 찬다. 각각의 자리에서 볼 장면과 생각을 시뮬레이션하게 된다. 그때마다 매번 같은 감정이 똑같이 찾아온다. 슬프고, 아프고, 아름답고, 기쁜, 상대와 함께했던 많은 순간이 채워진 서로의 시간을 꺼내면서 반복 재생한다. 한 가지 감정만 내놓을 수 없어서 말이다.

 

어김없이, 한 번쯤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글이다. 작가의 전작들도 이 작품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지만, 이 책은 짧은 분량에 비하면 오히려 뭉클함을 커진 느낌이다. 점점 몸의 이곳저곳이 고장 나면서 병원에 갈 일이 많아지고, 주변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죽음 소식이 많아지기도 하는 순간들을 겪다보니, 이 소설 같은 상황에 부딪히기도 하는 일이 낯설지 않다. 제목 그대로, 우리는 ‘하루하루가 이별의 날’인 오늘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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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단씨 2018-03-01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
 
동생이 생긴 너에게 - 2019 아침독서신문 선정, 2018 서울시교육청도서관 여름방학권장도서 추천, 동원책꾸러기 선정 바람그림책 65
카사이 신페이 지음, 이세 히데코 그림, 황진희 옮김 / 천개의바람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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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 남매로 자라면서 가장 큰 바람은, 외동으로 살면서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이었다. 물론 어릴 때 얘기다. 쓸데없는 바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외동인 친구들이 가지는 오롯이 자기만의 그것들이 부러웠나 보다. 물려 입는 게 아니라 무조건 새것으로 사서 입고, 형제자매와 나누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자기만의 그것으로 가지는 것들의 많은 양을 부러워했던 거다. 나 혼자만 있다면 나누는 게 아니라 형제자매들에게 가야 할 것들까지 내 몫으로 올 수 있다는 계산이었던 것. 말하면서 보니 우습기만 하다. 그냥 나에게는 처음부터 내 몫의 적당량이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

 

나의 조카들을 볼 때도 그렇고 친구의 아이들을 볼 때도 그렇더라. 둘째 아이가 태어났을 때 첫째 아이가 겪는 은근한 외로움, 질투, 시기 같은 감정이 있더라는 것. 막연하게 둘째를 질투할 것이라는 추측이 아니라 눈앞에서 첫째 아이의 투정이나 행동을 보고 나니 더 분명한 현상이었다. 아이 육아에 있어서 둘째 아이의 태어남으로 첫째 아이가 겪는 감정의 변화를 유심히 봐야 할 필요가 있는 듯하다. 어른의 눈으로 보이는 아이의 단순한 행동이 아니라, 아이의 그 마음을 읽고 확인하면서 나누어야 하는 일이었던 거다. 이 그림책에서 보이는 준이의 모습도 그러하다. 준이의 겉모습이 아니라, 준이가 동생과 가족들을 바라보는 마음을 읽는 일이 먼저였다.

 

 

 

있잖아, 나 형아가 됐어.

그런데 참 이상해.

다들 자고, 안기기만 하는 동생이 예쁘대.

엄마를 차지하고 내 인형까지 넘보는데

나보고만 양보하래.

이제 모두 나보다 동생이 소중한 걸까?

 

준이에게 동생이 생겼다. 조그맣고, 아직 말도 못 하고, 혼자 움직이지도 못하고, 분유를 먹여줘야만 하는 아이. 혼자 할 줄 아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어른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게 아이러니다. 원래 어른들이 예뻐하고 사랑하는 건 준이였는데, 준이에게 동생이 생긴다는 예고와 동시에 준이는 더는 아이가 아닌 게 되어버린 것 같다. 동생을 뱃속에 품고 있는 엄마가 힘들까 봐 엄마의 일을 도와주고, 무거운 것도 들어주는 준이였는데, 동생이 태어나면서 뭔가 조금 바뀐 것만 같다. 동생이 생겨서 기쁘고, 어른들이 더 많이 웃고 행복해하는 게 좋은데, 뭔가 조금 서운한 이 마음은 뭘까?

 

형제가 생긴다는 일의 시작을 알리는 듯한 이야기다. ^^ 우리 모두 이런 시작과 과정을 거쳐 또 다른 가족을 만나고 형제애를 배운다. 함께여서 더 든든하고 고마운 일들을 겪어갈 테지만, 아직 그 과정을 거치지 못한 준이에게 동생의 등장은 낯설고 소외감 느끼게 하는 경우가 많다. 이건 동화 속의 이야기여서가 아니라, 현실 속 우리가 겪는 이야기이기에 더 가까이 다가가서 보게 한다. 아이에게는 동생을 바라보는 시선과 조금씩 배우며 성장하는 시간을 갖게 하고, 부모와 다른 어른들에게는 둘째가 생긴 첫째에게 어떤 마음으로 다가가야 하는지 보게 한다. 무조건 ‘너는 형아니까 양보하고 배려하고 참는’ 게 아니라, 같은 시간을 겪으면서 보게 되는 가족의 일부분임을 받아들이게 하는 일. 말로 하니까 쉬운 것 같지만 감정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부분까지 이해하려면 좀 난해하고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직접 겪고 보면 더 애틋해지고 아껴주는 마음이 피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준이에게는 하늘이라는 코끼리 인형이 있다. 어른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고 생각하는 준이에게 하늘이는 준이의 마음을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상대가 된다. 원래도 아끼던 인형이었지만, 동생이 태어나면서 준이는 하늘이와 보내는 시간이 많아진다. 준이가 느끼는 불안하고 서운하고 속상한 마음을 하늘이에게 털어놓는다. 동병상련? 이심전심? 후후~ 준이는 오래된 사진첩에서 하늘이의 역사를 알게 된다. 하늘이는 엄마의 인형이었고, 엄마가 어른이 되고 준이가 태어나면서 준이의 인형이 된 거였다. 준이에게는 새로운 친구가 생긴 일이지만, 엄마에게는 소중한 친구를 잃은 거나 마찬가지. 하지만 하늘이가 준이의 단짝이 되었다고 해서 엄마가 서운하고 속상했을까? 아니다.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인형이 준이에게도 똑같이 소중한 존재가 되어가는 것을 보고 행복하지 않았을까?

 

동생이 생긴 아이의 마음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동생이 생긴 아이에게 동생의 존재를 어떻게 이해시켜야 하는지 고민이 되는 부모님에게 안성맞춤인 그림책이다. 뭔가를 알려주고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요하는 가르침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이해하게 되는 순간을 보면서 부모와 아이가 동반 성장하는 느낌이다. 부모에게는 동생이 생긴 아이의 마음을 아는 일, 아이에게는 동생이 생긴다는 게 가족 모두에게 어떤 마음인지 아는 일을 동시에 이뤄낸다. 엄마에게 소중한 인형 하늘이가 준이에게 오고, 준이가 모든 마음을 나누었던 친구 하늘이가 동생에게 건네지면서 끊어지지 않는 다리 하나가 계속 연결되어있는 듯하다. 엄마와의 시간이 줄어들었다는 게 사랑과 관심의 단절은 아니라는 것, 소중함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그대로 보여준다.

 

 

 

읽다 보니, 괜히 예전 생각이 나서, 나도 모르게 순간 어린 마음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왜 이렇게 형제가 많은 거냐고, 투덜투덜, 나도 외동딸이었으면 좋겠다고, 투덜투덜, 부모님의 관심과 사랑을 독점하고 싶다고, 투덜투덜... 외동이 아니어서 싫다는 이유를 끊임없이 나열하며 불평불만을 쏟아내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아마도 준이가 동생의 등장으로 처음 느꼈을 감정들을 나는 많은 형제로 오랜 시간 반복해서 겪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지만, 그것도 시간이 흐르니까 둔해지고 다르게 다가오긴 하더라. 가끔은 그 형제들 때문에 힘든 일도 생기지만, 형제들 때문에 안심하고 든든해지는 일들이 더 많아지는 걸 보면, 외동이 아니어서 생기는 불만스러움은 어린 시절 한때의 투정으로 멈춰있기 마련인가 보다 ^^

 

예쁜 그림과 아름다운 마음이 그대로 묻어나는 책이다. 아이가 부모의 마음을 배우고 부모가 아이의 마음 다치지 않게 가르치는 일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거기에, 단순히 가르치고 배우는 행위가 아니라 마음이 오가는 감정의 문제까지 아우르기에 충분한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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