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비로드 폴앤니나 소설 시리즈 2
최예지 지음, 살구 그림 / 폴앤니나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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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할 수 없는 세상에서 이해하고 싶은 일들이 있다. ‘왜?’라는 질문에 해답을 찾고 싶을 때마다 우리는 투쟁의 길을 걷기도 한다. 하지만 투쟁이든 아니든, 답을 찾든 못 찾든, 그 시간은 흐르기 마련이다. 곧 다시 답을 찾으러 떠날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그 순간의 답에 만족하면서 또 오늘을 사는 존재이기도 하니까. 저자가 써 내려간 이야기들에서, 또 한 번 그 세상 속 우리의 모습을 본다. ‘왜?’라고 묻고 싶은 순간에서 파생한 또 다른 감정을 만난다. 때로는 답을 찾는 것보다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바라는 순간을 만나기도 하니까 말이다.

 

너는 이게 재밌니, 언젠가 영이 물었다. 모르는 사람들이 내키는 대로 죽죽 그어놓은 길 위를 너는 그냥 달리기만 할 뿐인데, 했다. 영에게 되묻고 싶었다. 너는 그게 재밌니, 이탈하는 게, 이탈을 감수하는 게, 포장도 안 된 허공 위를 덜컹거리며 쏘다닐 뿐인 네 인생이. 나는 중심으로, 중심으로 가고 너는 자꾸 바깥으로, 바깥으로 가겠지.

갑자기 영이 내게 말을 건다.

정말로 갈 수 있을 것 같니?

안쪽으로? (70~71페이지)

 

아버지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는데, 결국 물었지만 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애비로드」의 화자는 미혼부인 아버지에게 듣고 싶었다. 미혼부와 사생아 사이에서 채워질 엄마의 존재를 찾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도 확실히 모른다는 엄마를 어디서 찾아야 할까. 엄마가 누구인지 묻는 딸에게 아버지는 말한다. 엄마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니가 내 씨인 건 확실하다고. 엉뚱한 그 대답에 웃음이 났는데, 생각해보니 아버지 말이 틀린 것도 아니더라. 정확히 알 수 없는 엄마의 존재를 애써 확인하려는 것보다, 확실한 것만 받아들여도 괜찮지 않을까? 하나라도 옆에 있는 존재를 더 아끼고 사랑하면, 그게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 될 수 있다는 기대감은 나쁘지 않으니까. 다 알지 못했던 아버지에 관해 알아가는 미세한 감정들을 불러일으키는 단편이었다. 세상의 많은 미혼모 사이에 있을 미혼부의 존재를 인정해야 하는 건 아닐까. 세상은 완벽하지 못한 존재들이 더 많은 곳이니까.

 

세상의 불합리에 목소리를 내고 싶지만, 그 소리는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안으로 숨어드는 경우가 많았다. 「공과 영의 생존법」의 공은 영의 사망 소식에 둘 사이의 일을 기억해낸다. 근무지에서 성희롱을 일삼는 대상을 함부로 신고하지도 공을 대신해서 같은 곳에서 근무하던 영이 대신 나선다. 하지만 그 일을 공은 영이 죽은 후에 알게 된다. 저마다 살아가는 방식이 다를 뿐이라고 생각하기엔 묘한 기류가 흐른다. 목소리를 내는 이들이 겪어야 할 또 다른 피해가 그 목소리의 힘을 뺀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건 아마도」의 두 존재 역시 비슷한 구도였다. 한 사람은 대학가에서 다단계로 화장품을 팔려고 하고, 한 사람은 꾸미고 가꿔야만 하는 여성의 역할을 버려야 한다고 투쟁한다. 대립하듯 역할이 다른 두 사람은 고등학교 동창이었고, 그때도 지금도 두 사람은 다른 성향의 태도로 살아간다. 어쩔 수 없다고 여기며 숨죽인 채로 세상에 스며들거나 여전히 불합리를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내거나.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다고 틀린 인생은 아닐 테다. 하지만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더는 그 불합리한 세상에 스며들지 않기 위해 목소리를 내는 일은 계속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 번에 바뀔 일은 아니겠지만, 우리는 또 언젠가 그 변화를 바라면서 투쟁하고 목소리를 낸다.

 

묘하고 애매한 사이에서 분명한 관계의 이름을 찾지 못한 「넌 항상 바깥에 있고」에서는 그 관계를 정의하지 못한 여운에 뭔가 더 이야기를 듣고 싶어진다. 「드라이브, 드라이브」는 정리의 의미를 다시 떠올리게 된다. 헤어졌지만 제대로 헤어지지 못하고, 결국은 그 흔적을 하나 끌어와서 미련을 끊어내야 하는 건 아닐까 기대한다. 동생의 ‘같은 자전거가 아니’라는 말은, 새것으로 예전 것의 자리를 채울 수 없다는 것이기도 하고, 누군가의 손때 묻은 것으로 채우고 싶다는 바람이기도 하다. 새것과 친해지고 적응해가는 과정이 필요한 게 인간의 관계와도 비슷하다. 누구든 무엇이든, 관계를 맺고 적응해가는 게 순리 같다. 「딸과 여신과 아이돌의 역사」와 「당신을 위한 스물한 번」은 묘하게 대조적이다. 가까이하려고 했더니 너무 가까워진 선에 부담과 짜증이 일어나기도 하고, 가까이 있을 때는 경쟁하느라 느끼지 못했던 편안함을 거리가 생기니 발견하기도 한다.

 

어느 것 하나 확실하다고 단정할 수 없는 세상이다. 이렇게 하면 될 것 같은데 안 되기도 한다. 저렇게 하면 안 될 것 같은데 의외로 문제 해결의 길을 열어주기도 한다. 어떤 식으로든 우리에게 주어진 몫을 감당하는 수밖에 없다는 절망스러운 기분이 들기도 하고, 이렇게라도 나아갈 수 있음에 긍정의 힘을 얻기도 한다. 어쩌면 그것이 행복일지도, 그렇게 살아가는 게 즐거울지도 모른다. 어떻게 해서든 나아가고 있다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방식이니까. 그러면서도 조금씩 옆을, 뒤를 보면서 세상을 바꾸려고 애쓴다. 해설에서 문학평론가 박혜진이 말한 것처럼, 내가 바뀌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세상이 이상하게 변해가는 속도를 늦추기도 한다. 누군가 외치고 투쟁하면서 노력하는 삶은 그런 것일 테다. 불확실한 세상에서 자기만의 태도로 살아가면서, 소박하게 변화를 이루어가는 사람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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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롬비아 산타 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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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오피아 구지 모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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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 아저씨 개조계획
가키야 미우 지음, 이연재 옮김 / ㈜소미미디어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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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학교에서. 출퇴근하며 돈을 벌기도 하고, 집안의 살림과 육아를 담당하기도 하고, 성장하는 나이에서 당연하게 학교 공부에 열중하기도 하고. 더 다양한 자신의 위치에서 묵묵히 움직이고 있다. 누가 더 잘하고 누가 더 못하고 그런 걸 계산하기 전에, 그저 지금 자기 앞에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 성장하던 시기에는 남자와 여자, 아버지와 어머니의 역할이 규정처럼 정해진 경우가 많았다. 아버지가 직장에 다니면서 가정의 소득을 책임지고, 어머니는 집안 살림과 아이들을 돌봤다. 혹시 일을 하던 여성이었다고 하더라도, 막상 임신을 하고 나면 출산 후에는 전업주부로 살아가기 일쑤였다. 직장에서는 복직의 기회를 주지 않았으며, 일할 기회가 생겼다고 하더라도 육아 문제를 해결해야 했을 텐데. 누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와주지 않는다면, 육아는 여성이 직장에 돌아가지 못할 큰 이유가 된다. 지금보다 더 예전에는, 여성은 결혼과 동시에 전업주부의 삶이 보편적이었던 때다. 지금 우리 어머니들 세대에 일하는 여성을 보는 건 어려웠다. 이 소설 속의 도시코 역시 그런 삶이었다. 남편과 같은 직장에서 일했지만, 결혼과 동시에 퇴사했다. 아이 둘을 키우면서 살림과 육아의 시간이 계속되었고, 이제는 정년퇴직한 남편 쇼지까지 집에 있다.

 

쇼지의 생각도 틀리지 않았다. 가족을 위해 젊은 시절부터 일해 왔고, 이제는 나이가 들어 정년퇴직한 자신이 가족들에게 존중받는 게 틀리지 않았다. 아이는 집에서 엄마가 키워야 한다는 사상(?)으로 성장했던 사람이다. 이제는 아이들도 다 성장했고 자기도 일을 마치고 퇴직했으니 시간도 생겼고, 아내와 둘이서 여행도 다녀야겠다고 계획하고 있다. 그런데 아내는 자기와 가까이 지내지 않는다. 딸 유리에 말로는, 엄마는 '후겐병'에 걸렸다고 했다. 후겐병이란, '남편이 원인이 되어 생기는 병'이라는 신조어란다. 하하하. 우리말로 하면 '남편 때문에 생기는 화병' 정도 되려나? 서로 같이 하나의 가정을 잘 꾸려가고자 만난 인연일 텐데, 배우자 때문에 마음의 병이 생기는 건 무슨 경우인가.

 

아니, 별거 아니다. 여기에 와서 도시코가 한 일이라고 해봤자 렌에게 기저귀를 채우고, 밥을 먹이고, 입가를 닦아 주고…… 그 정도야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게다가 이미 점심 식사는 끝났다. 저녁밥은 마이가 돌아와서 먹일 테니까 딱히 할 일은 없다. (140~141페이지)

 

문제는, 상대방의 진심을 읽지 못한 데서 시작한다. 쇼지는 아내 도시코의 그동안 삶이 편했을 거로 여겼다. 일도 안 하는 전업주부가 뭐가 지친다고, 종일 집에서 애들과 노는 인생 부러울 뿐이라고 말한다. 처음 쇼지의 생각과 말에 설명하고 반박하던 도시코도 어느 순간 말문을 닫아버렸다. 아마 처음에는 쇼지도 자기 말이 맞으니까 아내가 할 말이 없어서 그런 거라고 여겼겠지. 하지만 뒤늦게야 알게 된다. 아내가 자기와 말을 하지 않았던 건, 자기가 옳아서가 아니라 자기를 포기해서 그랬다는 것을. 더는 설명도 이해를 구하는 일도 필요 없는 상대라는 것을. 딸마저 자기를 '당신'이라고 부르며 상대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전업주부의 삶을 우습게 여긴다. 그런 쇼지에게 중대한 임무가 주어졌다. 아들 가즈히로 부부가 맞벌이하게 되어서 손주들을 돌봐주어야 했다. 거절하고 아내에게 떠넘기려고 했으나, 아내도 거절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아이를 돌보는 게 뭐 어렵냐고 무시했던 그가 손주들을 어떻게 돌볼지 기대가 커진다.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가? 아내와 여자들이 팔자 편하게 아이들과 집에서 뒹굴 거리는 인생이라고 여겼던 그가 겪을 일이 눈에 선하다. 육아와 가사가 여자만의 일이라고, 아이는 엄마가 돌보는 게 맞는다고 여긴 그가 여자의 그 일을 하고 있다. 얼마나 편할까. 손주들과 뒹굴뒹굴하면서 며느리가 올 때까지 한 시간만 있으면 되는데, 이보다 편하고 즐거운 일이 또 있을까.

 

평생을 회사에서 일하고 퇴직한 남자의 모습은, 비단 이 소설 속에서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익숙한 모습이다.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한다고, 여자가 벌면 얼마나 버느냐고, 집에 들어왔을 때 누군가 있어야 한다고, 식사를 차려주고 집안의 모든 일을 하는 게 여자의 역할이라고 말하는 일들. 낯설지 않다. 그 방식이 아주 틀렸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가정 경제를 책임지고 아이를 돌보는 게 부부이자 부모의 역할이다. 다만 그 책임을 다하는 게 각자가 원하는 방식이어야 한다는 거다. 전업주부를 원하는 이는 그렇게 하면 되고, 출산 후 업무로 복귀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면 된다. 다만 그 복직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게 문제다. 그래서 본인이 원하지 않아도 전업주부로 살아가는 강요된 선택을 하곤 했다는 게 많은 여성이 하는 말 중의 하나일 것이다. 쇼지가 생각하는, 여성은 가정에서 가족들을 돌보고 살림을 도맡아야 한다는 게 어떤 일상이라고 어떤 삶인지 그는 아마 몰랐을 것이다. 당연하게 보고 자란 삶의 방식을 자기 세대에서도 똑같이 적용하면 살아왔으니, 반세기를 건너온 현재의 세상을 그가 받아들이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두 명의 손주와 고군분투하는 쇼지를 보면 고소하다. 그래, 당신 한번 겪어보시지. 애들과 노는 일상이 얼마나 편한 거냐고 말하던 당신, 그대로 한번 편하다는 걸 느껴보란 말이다. 막상 아내의 도움 없이 손주들을 돌보고, 며느리의 눈치를 보고, 친구의 푸념을 듣던 쇼지는 어느 순간 깨닫는다. 자기와 똑같은 사고방식에 휘둘리는 아들을 개조하지 않으면, 노년에는 자기와 같은 인생을 맞이할 거라고 걱정하면서 말이다. 자기 옆에만 오면 아내가 호흡곤란을 일으키고, 집안에 같이 있으면서도 각방을 쓰고 식사도 같이 안 하는, 집에 있는 남편을 피해 다른 곳으로 나가버리는 아내가, 아버지의 모습에 혀를 끌끌 차며 무시하는 딸의 말들이 얼마나 큰 충격을 주는지 알아버렸으니까. 구시대적 가부장제를 온몸에 장착하고 살아온 그가 지금 세상에 얼마나 적응하면서 살아가야 하는지 제대로 깨달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설거지를 해도 밥을 먹고 나면 또다시 설거지거리가 나온다.

청소를 해도 다음 날이 되면 희미하게 먼지가 쌓인다.

빨래를 해도 다음 날에는 엄청난 양의 빨래가 생긴다.

이 무의미한 작업을 죽을 때까지 계속 반복하지 않으면 청결한 생활은 불가능한 모양이다. (318페이지)

 

이 소설은 제목처럼 정년 아저씨 개조 계획에 목적을 두지는 않는다. 그가 살아온 시간은, 남자는 밖에서 돈을 벌고 아내는 가정에서 살림과 육아를 책임져야 하는 역할 분담이 분명하게 있었다. 각자가 원하든 원하지 않던 간에 말이다. 누구의 탓도 아니다. 그 시대를 살아온 이들이나 세상의 방식이 그랬을 것이다. 인제 와서 그 방식에 원망해도 소용없다. 지금 우리는 21세기, 2020년을 살아가고 있으니까. 다만, 전업주부의 삶이 어떤 건지 들여다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게 한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하더라도, 아이를 돌보고 가사를 책임지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쇼지가 자기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고 아들에게 닥친 위기를 읽어낸 순간, 전업주부로 살아온 여성을 무시한 시간을 안타까워할 테니까. 세상이 얼마나 변해왔고, 지금까지 자기가 생각했던 게 얼마나 잘못되었던 건지 깨닫기 시작할 테니까. 밖에서 돈을 버는 일도 힘들지만, 육아와 가사노동 역시 그에 비할 바 없이 힘들고 중요한 일이라는 이해를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이제 쇼지는 아들 가즈히로를 개조하고, 주변에 자기와 같은 생각을 하며 살아왔던 남자들의 사고방식을 변화시켜야 하는 임무를 맡은 듯하다. 자기 세대와는 바뀐 현실에 적응하고, 좀 더 나은 세상과 가족을 위해서라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걸 이미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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툇마루에서 모든 게 달라졌다 3
쓰루타니 가오리 지음, 현승희 옮김 / 북폴리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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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이 된 내 모습을 상상한 적이 있다. 아마 '이렇게 늙어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에 가까운 마음이었을 것이다. 주변의 어르신들과 내 부모의 나이 듦을 생각하면, 그런 바람들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늘어난다. 집 근처 노인복지회관에서도 여러 강좌를 개설하고 회원들은 열심히 참여하고 즐긴다. 신나는 음악 소리, 시원하게 북을 두드리는 소리, 기합을 넣어가며 체조하는 소리, 조용히 인문학 수업을 진행하는 소리. 시골인데도 다양하다면 다양한 수업으로 의외로 참여자가 많다는 걸 알았다. 엄마는 난타 수업을 받으러 가다가 지금은 다른 일 때문에 수업에 참여하지 못하지만, 일주일에 두 번, 가서 사람들 만나서 어울리고 뭔가 힘껏 두드리다가 오니 속이 시원해진다고 했다. 물론 박자 맞춰서 따라가려니 연습이 많이 필요해서 힘들다고는 하는데, 그마저도 즐거운 투정인 것 같다. 솔직히 아직은 그 안에서 내가 즐기고 싶은 강좌는 없다는 생각에, 문득 걱정이 앞선다. 내가 노인이 된 후에 즐길만한 것을 찾지 못한다면, 너무 외롭거나 심심하지 않을까? 괜한 우울함에 몸과 마음의 노화 속도가 빨라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벌써 심란해진다.

 

 

예상하지 못한 만화 한 편에서 그 시간을 미리 만났다. 등장하는 두 사람 역시 예상하지 못한 조합이었다. 이치노이 유키는 75세의 할머니다. 3년 전에 남편이 하늘나라로 먼저 떠나고 혼자 남았다. 서예 교실을 운영하면서 개구쟁이 아이들을 만나는 시간이 유일한 교류의 모습처럼 보인다. 거기에 요리가 취미인, 주변에서 평범하게 볼 수 있는 노인의 모습이다. 어느 날 서점에 갔다가 요리책 대신 눈에 들어온 한 권에 책에 푹 빠진다. 표지가 너무 예쁜 만화여서 덜컥 집어 들고 왔는데, 이런. BL(Boy's Love)만화였다. 예쁘다는 이유로 표지만 보고 아무런 정보 없이 들고 온 책이 이랬다. 어쩜 좋아. 그런데 이상하다. 읽을수록 빠져든다. 이 젊은 소년들의 사랑에 자기도 모르게 빠져들면서 다음 권이 궁금해서 그냥 있을 수가 없다. 바로 2권을 사러 갔다. 유키 할머니가 BL의 세계로 흡수되는 순간이다.

 

서점에서 아르바이트하는 17세의 사야마 우라라. 소심한 성격에 주변에 친구도 없는, 그렇다고 왕따도 아닌데 사람들 사이에 잘 섞이지 못하는 아이. 아무도 모르지만 우라라는 BL 마니아다. 집안에서도 몰래 감춰두고 혼자만 읽는다. 누가 볼까 봐 신경 쓰여 책장에 꽂아두지도 않는다. 그런 우라라의 눈에 띈 유키 할머니는 단 한 번도 예상하지 못한 독자였을 것이다. 70대의 할머니가 BL 만화를 사러 온다? 재고 부족으로 할머니와 대화를 하던 중, 두 사람은 서점 밖의 만남이 시작된다. 마치 속마음을 들킨 것처럼, 58세의 나이 차는 저리 던져두고 빠져들어 버린 만화에 대해 열렬한 대화를 펼친다. 주변의 이상한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두 사람만의 세계를 즐긴다. 만화 속 주인공의 사랑과 갈등, 속마음에 관해 이야기한다. 읽으면서 느낀 여러 가지 생각과 감정도 허심탄회하게 쏟아낸다. 십 대 여학생과 칠십 대 노인의 우정이 이렇게 싹튼다.

 

지금은 조금 소원해졌는데, 그런데도 꾸준히 로맨스 소설을 즐긴다. 처음 로맨스소설을 만났을 때와 같은 마음은 아니지만, 어느 날 갑자기 BL 만화에 빠진 유키 할머니처럼 나도 나이 들어도 책을 읽는 노인이 되고 싶었다. 엄마가 돋보기를 쓰고 성경을 읽으시는 것처럼, 내 눈이 허락하는 동안에 로맨스 소설을 즐기는 노년의 삶을 상상했었다. 그런 상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누군가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서점의 서가에서 로맨스 소설을 꺼내 와서 계산대에 올려놓는 손님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언제나 상상에 머무르곤 했다. 밖에서 책을 읽을 때는 선뜻 로맨스소설을 꺼내놓지 못한다.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누가 볼까 신경이 쓰인다. 그러니까 나에게 로맨스소설은 집에서, 혼자 있는 시간에, 다른 사람은 모르게 나만 즐기는 책으로 머물러 있다. 그 나이에 무슨 로맨스 소설이냐고, 현실의 로맨스에 빠져야지 뭐하고 있느냐고, 현실과 로맨스 소설을 구분도 못 하고 있는 거 아니냐고, 그런 건 애들이나 보는 거 아니냐고 한마디씩 꺼낼까 봐. 내가 즐기는 장르의 소설을 하찮게 여길까 봐. 싫은 소리 듣는 게 싫어서.

 

하지만 누구나 각자가 빠져드는 거 하나쯤 있지 않나? 영화든 배우든 가수든, 피규어를 모으든지 밤낚시를 즐기든지. 그게 무엇이든 마음이 끌리는 자기만의 관심사가 있다. 좋아하는 드라마나 좋아하는 연예인이 있을 때, 온라인 속의 온갖 정보를 흡수하고 그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싶어진다. 드라마의 다음 전개,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의 사소한 것까지 궁금하다. 그래서 팬 카페에 가입하고 검색의 홍수 속에서 다양한 정보를 찾아다닌다. 유키 할머니가 처음 BL에 빠져들었을 때, 단순히 만화를 즐기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마음이 저절로 흐르고 있었던 거다. 이 마음을 누구랑 나누고 싶은데, 두 주인공의 갈등을 이야기하고 싶은데, 혹시 이런 마음은 아닐까 하는 토론도 하고 싶은데. 유키 할머니는 찾아보면 알 수 있는 그 방법을 몰랐다. 휴대폰의 문자도 돋보기를 쓰고 하나씩 쳐야 하는 할머니의 육체적 노화는 21세기의 젊음이 즐기는 방식에 따라가지 못한다. 그래서 우라라와 공통 관심사인 BL을 이야기할 때 삶의 활력소를 찾는다. 좋아하는 것을 읽는 즐거움을 확장한, 마음에 담아둔 것을 꺼내어놓는 것까지 알아간다. 어쩌면 그런 마음의 확장은 당연한 흐름인지도 모르는데, 나는 왜 그 확장의 방식에 나이라는 제한을 걸어두었을까. 이런 선입견과 편견을 가진 게 나뿐이었을까?

 

 

유키 할머니와 우라라.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지켜보게 되는 건, 늙음이 보여준 연륜과 경험, 따뜻한 조언 때문이다. BL을 즐기고 이벤트에 찾아다니기까지 하는 우라라를 보면서 유키 할머니는 조용히 읊조린다. 우라라도 그림을 그리면 좋겠다고. 그 말을 우라라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그냥 세상 좀 더 오래 살아온 분이 어떤 아쉬움에 하는 얘기라고 생각했을까? 소심하고 외톨이인 우라라가 몰입하고 즐길 수 있을 것을 발견하고 그걸 발전시킴으로써 생길 인생의 변화를, 유키 할머니는 알고 있었을까? 아마도 우라라의 젊음이 해낼 수 있는 가능성과 시간의 힘을 믿었을 것이다.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면서 청춘을 겪어보는 일, 그러다가 보면 어느 순간 자기가 더 행복해지는 일을 발견하게 되는 기쁨을 알게 되고, 삶의 만족을 겸손하게 배우면서 또 남은 시간을 이어가는 인생의 법칙을 알고 있기 때문 아니었을까. 유키 할머니가 일상에서 유일하게 즐기던 요리 때문에, 요리책을 사러 갔다가 발견한 한 권의 책 때문에, 그 책 때문에 십 대 소녀와 친구가 되고 요즘 세상의 한 모습을 보게 되는 일 때문에, 인생의 또 다른 즐거움을 느끼면서 갈증 내는 자신을 보는 일이... 꼬리에 꼬리를 물듯이, 죽을 때까지 알아갈 세상의 즐거움을 유키 할머니는 이미 알았다. 유키 할머니가 아는 그 즐거움을 우라라가 놓치지 않고 찾아가길 바라는 마음이었을 거로 생각한다. 나이라는 물리적인 단점을 가진 자기가 할 수 없는 것을 우라라는 할 수 있으니까. 뭔가를 오래 기다릴 시간이 없다는 아쉬움에 절망할지도 모를 자기보다, 언제나 시도하고 기다릴 수 있는 우라라가 그 도전의 즐거움을 알아가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서로를 발전시키는 관계에 나이와 성별이 무슨 상관인가 싶은 의미를 남기는 이야기다. 사실 나는 이 관계의 법칙을 이성 사이에서만 적용하는 거로 여겼다. 어떤 이성을 만나야 하느냐 하는 물음이 생길 때마다, 그 사람을 만나면서 내가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만드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사람을 좋아하는 일이 즐겁고, 그 사람과 함께하면서 내가 더 괜찮은 사람이 되어갈 수 있게 시너지효과를 일으키는 관계. 좋은 게 좋은 것으로 새끼를 치듯, 발전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 유키 할머니와 우라라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 관계가 꼭 이성 사이에서만 적용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나이를 초월하여 이어가는 관계에서도 그 '좋음'과 '발전'의 효과는 똑같이 적용된다. 유키 할머니를 만나면서 점점 서점의 아르바이트와 집순이에서 벗어나는 우라라의 변화, 나이 든 노년의 틀에 박힌 모습이 아니라 자기와 다른 청춘의 시절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유키 할머니. 그리고 둘 사이에 있는 BL. 왜 하필이면 BL일까 생각했다. 어쩌면 거기에 작가의 의도가 숨겨져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무언가를 좋아하거나 즐기는 데 나이를 구분하지 않는다는 것을 유키 할머니와 우라라를 통해 보여준 것처럼, 세상의 다양성을 인정하듯 편견을 없애주려는 그 매개로 BL을 함께 넣어놓은 게 아닐까 하고. 세상의 많은 시선이 세운 벽을 깨트려주려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편견 없는 사랑 이야기를 즐기고, 공통의 관심사를 이야기하면서 설레는 나이 불문 독자들의 모습이었다. 다만, 다음 이야기를 기다릴 수 있는, 남아 있는 시간이 다르다는 것뿐이다. 그건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이므로,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혹시 다음 권, 또 그 다음다음 권까지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분 좋은 기대감으로 살아갈 수 있겠지.

 

 

모든 것은 늙는다. 유키 할머니 딸의 말처럼 집도 늙는다. 지금 청춘을 보내는 우라라도 언젠가는 유키 할머니의 나이가 되겠지. 누구에게도 비껴가지 않는 늙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노년의 즐거움이 달라질 것 같다. 생각해본 적 없던 덕질에 인생의 또 다른 행복을 찾은 것처럼, 무엇이든 열정을 다해 좋아할 수 있다면, 그거면 충분하다. 간절하게 바라는 것들로 오늘 하루가, 기다리는 내일이 즐거울 수 있다. 아마 유키 할머니는 좋아하는 BL 시리즈의 다음 권을 보기 위해서라도, 조금이라도 더 건강에 신경 쓰면서 사실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가 아니라 서서히, 차근차근 다가오는 노년의 시간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묻는 이가 있다면 이 책을 보여주고 싶다. 하고 싶은 게 뭔지, 오늘의 즐거움이 뭔지 모르겠다는 청춘이 있다면 이 책을 보여주고 싶다. 누군가의 조용한 한마디에, 늦게나마 찾은 작은 기쁨에 인생의 방향이 확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어떻게 늙어갈지 내 모습이 궁금할 때마다 가장 먼저 종이책의 페이지를 넘기는 내 모습을 떠올린다. 지금도 좋지 않은 시력이니 아마 돋보기를 쓰고 있겠지. 조금은 더디 읽히는 인문서나 과학서보다는 아마 짧은 글을 읽고 있을지도, 몇 컷 만화에 담긴 많은 이야기를 듣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로맨스 소설 읽는 할머니로 늙어가고 싶다. 연애 세포가 죽어버려 설렘을 잊었어도, 소설 속 주인공들의 달달한 사랑에 지나간 내 젊음을 떠올리고 싶다. 로맨스 소설이 주는 즐거움을 놓치지 않고, 이야기 하나 하나 문장 속의 숨은 소리마저 들을 수 있는 독자로 오래 남고 싶다. 그렇게 좋아하는 거 즐기면서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게 늙어가고 싶다면 건강을 놓치지 않아야겠지. 그래서 책 읽다가 말고 운동화 꿰어 신고 있다. 운동이라고 부르면서 매일 걷던 그 길을 오늘도 빼놓지 않고 걷는다. 노년을 생각하는 늙은 여자 사람의 소박한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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