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
박유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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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 한번 무너져본 이들은 어느 날 또다시 살던 집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낀다. 어느 날, 어떤 이유도 없이, 또다시 감금되어 세상으로 돌아올 수 없을 것만 같은 두려움이 미연을 따라다녔다. 외출했다 집에 돌아오면 창문을 모두 잠갔고, 텔레비전 속의 평온한 얼굴을 보고서야 잠이 들었다. 미연은 공포를 딛고서 비틀거리며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불량품 같은 삶, 정상으로 회복할 수 없는 삶이 뭔지 미연은 알 것 같았다. (79페이지)

 

삭제하거나 희미해질 수 없는 기억이 있다. 사건의 현장에서 4년을 보낸 미연의 현재는 지울 수 없는 기억에 영향을 받는다. 애써 감추려고 했던 과거는 그녀의 모든 일상에 끼어들었다. 아이의 성장 환경을 좌우했고, 남편과의 불화를 만들었다. 미연이라고 그러고 싶었을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표출되는 기억의 흔적들이 20년이 넘게 흘렀어도 그 힘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녀에게 형제복지원에 머문 시간은 집으로 돌아와서도 끝나지 않았다. 미연의 말처럼 '기억은 그림자 같은 것'이어서 언제나 그녀를 따라다녔다. 아무리 애써도 하얗게 되지 않는 날들이 그녀와 함께했다. 그 기억에 소환되기를 거부하면서 버티던 그녀의 일상에 더는 물러설 수 없는 순간이 왔다.

 

폴란드에서 입양아로 사는 준에게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한다. 출생의 진실을 몰랐던 준은 마주한 활자가 낯설면서도 무시할 수 없었다. 자기 엄마 은희가 어떻게 생활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알려준 거였다. 대한민국의 과거에 있던 형제복지원에 은희가 머물렀으며, 그곳의 참상은 너무 잔혹했다고. 준은 은희가 그곳에서 강간당하고 생긴 아이였으며, 태어나서 입양 보내졌다. 그리고 은희의 죽음. 검안서에는 신부전증으로 사망했다고 기록되었으나, 사실 은희는 탈출하다가 붙잡혀서 폭행에 시달리다 사망했다. 준이 받은 편지에는 아우슈비츠로 간 미연을 만나라는 내용이었다. 편지를 보낸 이는 준이 미연을 만나서 엄마 은희의 죽음에 관해 듣기를 바랐던 걸까. 준은 미연을 만나러 갔지만 자기가 은희의 아들이라고 밝힐 수 없었다. 하지만 준은 그대로 되돌아올 수가 없었기에, 이미 마주한 어떤 사실 앞에서 모른 척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기에 서울로 간다. 미연을 만나야 했다.

 

이야기는 1975년부터 1987년까지 운영되었던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이 바탕이 되어 그려진다. 그곳은 복지시설이라 불렸다. 거리의 노숙인이나 부랑자를 데려다가 잘 먹고 잘 보살펴 준다는 취지로 시작된 일에, 누군가는 이익을 취하느라 인간적인 선을 넘어선다. 인원수에 맞게 지급되는 수당을 챙기려고 과한 수를 맞춘다. 일반 시민과 어린이까지 눈에 보이는 족족 강제로 차에 실렸다. 동네 목욕탕에 다녀오던 미연, 등산 산책로에서 잠이 들어 늦은 밤까지 깨어나지 못했던 은수와 은희, 시시껄렁한 건달 등. 세상을 깨끗하게 만들겠다면서 거리의 사람들을 분별없이 데려갔다. 3천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강제 수용되었고, 513명이 사망에 이르렀다. 그곳에 인권이란 것은 없었다. 형제복지원의 원장은 나라를 위해 일한다면서 자화자찬하고 스스로 상을 주었다. 정부 보조금을 받고, 강제 수용된 사람들의 노동력의 그가 이루려는 일을 시켰다. 제대로 된 식사 한 끼 먹어본 적 없는 이들이 그곳에서 살아남을 방법은 오직 하나였다. 마치 없는 사람처럼, 그들에게 종속된 노예처럼, 숨죽이고 말 잃은 채로 살아가는 것.

 

거기는 시간이 흐르지 않았어. 그렇고 그런 날들이 무한히 반복됐지. 어제는 오늘이 되고 오늘은 내일이 됐어. 더 나아질 것도 더 추락할 것도 없는 불구덩이였어. 고통이 영원하다는 걸 알면서 살아야 하는 거. 그게 사람을 미치게 하는 거지. 미치지 않는 사람이 없었어. 미친 사람들은 빨간 약을 먹였어. (161페이지)

 

왜 그 많은 사람들이 말도 못하고 당하고만 있었느냐고 묻는 이가 있을까? 왜 3천여 명의 사람들이 그들을 쥐고 흔드는 몇 사람을 혼내주지 못했느냐고? 민주주의를 외쳐도 군대를 동원해서 사람들을 누르던 시절이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복지정책이라고 부르며 시작한 일에 누구도 반기를 들 수 없었으니, 그 든든한 배경을 등에 업고 나랏일을 한다는 사람에게 감히 대들 수 있는 사람 누구란 말인가. 그곳에 인권은 없었다. 폭력이 습관처럼 행해지고, 차마 사람이 먹을 수 없는 음식이 상 위에 오르는 일상이 당연한 곳이었다. 같이 있으면서 마음을 단단히 모으는 게 아니라 서로를 감시하며 긴장한다. 지금 내 옆에서 같이 잠을 자고 같이 버티는 한 사람으로 볼 수 없게 했다. 원장은 그곳을 군대식으로 정렬하면서 자기만의 세상을 견고히 했다. 같이 끌려왔지만 충성스러운 사람 몇 명을 뽑아 소대장으로 만들었다. 소대장에게 사람들을 감사하고 관리하게 조종했으며, 또 그 밑에는 조장을 두면서 잠자는 순간까지 감시를 멈추지 않았다. 소대장이 원생을 대상으로 하는 성행위를 못 본척했고, 원생들 사이에서도 생존을 위한 다툼이 있었다. 그곳이 사람 사는 세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아무도 없다. 그런데도 세상을 정화하겠다며, 노고를 위로한다며 정부는 형제복지원을 추켜세웠다.

 

내가 알 수 없는 시절의 이야기다. 그렇다고 소설 속 이야기만도 아니다. 언젠가 우연히 뉴스에서 봤던 장면이 스쳐 지나간다. 어떻게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싶어 현실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현실이라고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게 다반사였으니, 누군가의 입으로 들려오는 그 시간의 진실이 놀라울 뿐이었다. 분명 계속 진행 중인 이야기인데 생각보다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못했던 듯하다. 작가가 이 소설을 쓸 수밖에 없는 이유에 이런 관심의 부재도 보태고 싶다. 저자는 형제복지원 사건을 취재하고 보도했던 기자다. 그곳의 참상을 드러내기만 하는 게 목적은 아닐 터였다.

 

인권이라고는 찾을 수 없던 그곳의 생존자인 미연이 형제복지원의 실상을 알리는 일에 참여하기를 바라는 이의 시도로 멀리 폴란드에 있는 준까지 끌어들였지만, 정작 그곳에서 벗어나 생존을 버티고 있는 이의 마음까지는 읽지 못했던 걸까. 준의 엄마 그곳에서 죽은 이가 513명이나 되고 그렇게 죽은 사람 중의 한 명인 은희를 주인공으로 그곳의 이야기를 펼치는 듯하지만, 한국 현대사에 비극으로 남은 사건의 현재를 비추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절대 권력의 묵인 아래 펼쳐지는 인권 유린, 처벌받지 않고 희생자들의 기억에 파고든 가해자를 어떻게 봐야 하는가. 그곳에서 고통받고 현재까지 아파하고 있는 이들에게 그 시간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으로 계속되는 기억이다. 그렇기에 생존자이자 멀쩡히 현재를 잘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미연의 증언과 희생자가 낳은 아들이 입양아가 되어 찾은 이 땅의 현재를 비추고자 했을 것이다. 과거는 과거로 머물지 못하고 현재를 살아가는 이에게 고통이 되고 있다는 게, 끊어내려고 해도 그럴 수 없는 기억에 현재의 삶은 무너진다.

 

기억하지 않는다고 죄가 사라진 것은 아냐. 기억나지 않는다고 없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니고. 죄책감이란 게 없군. 기억도, 과거도, 죄의식도 아무것도 없이. (109페이지)

 

준의 엄마 은희의 이야기가 하나씩 들려오면서 형제복지원의 실상은 생생하게 묘사된다. 인간의 삶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곳이었다. 이유도 모른 채로 끌려와서 희생된 이들의 시간과 인생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그걸 보여주는 게 미연이었다. 미연의 아버지는 국가 고위직이었다. 4년 만에 딸이 돌아왔을 때 미연의 가족은 모든 것을 잊고 새로 시작하면 된다고 한다. 그 기억을 지우고 이제부터 잘 살면 된다고. 아마 가족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의 태도였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궁금하다. 가족들은 그냥 잊으라고만 하고 그 시간의 이야기는 묻지도 않았을까? 미연의 가족에게 수치스러운 일이 된다고 여겨 모른 척하고 싶었을까? 왜 내 딸의 억울한 시간을, 고통을 제대로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는 걸까. 내 가족의 상처보다 남들이 내 가족을 볼 시선이 더 중요했던 걸까. 잘 지내고 있다고 가면이라도 쓸 수밖에 없는 미연은 공부를 잘하는 학생으로 자라면서 모두에게 그 기억을 지워주려고 했다. 형제복지원의 희생자였지만 이렇게 멀쩡하게 정상적으로 잘 살아가고 있다고 증명해야 했다. 치유되지 않은 내면의 상처는 저기 멀리 밀어두고 말이다. 애써 기억을 지우겠다고 다짐해도, 있었던 일이 없었던 일이 되지는 않는다. 소설의 끝부분에서 박장대소했다. 미연은 평생을 그 기억 때문에 현실을 제대로 살아갈 수 없었는데, 그들에게 가해자였던 형제복지원 원장은 치매로 기억을 잃었다고 한다. 죄지은 자는 그 죄를 스스로 다 잊고 오늘을 살아간다.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지금 자기 앞의 피해자가 누구였다고 해도 상관없다는 듯이. 하루하루, 오늘만 기억하는 이에게 피해자들의 울부짖는 목소리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밤, 우리는 세상 밖으로 달려나갔다. 모두와 이별한 밤이었다. 우리가 버려진 그날 이후 지금까지 누구도 폐기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69페이지)

 

소설 속 캐릭터들은 실제 형제복지원의 희생자가 모티브가 된다. 실제와 소설의 구성이 엮여서 태어난 한 권의 소설이 오늘에 묻는 의미는 크다. 저자는 결코 드라마로 머물지 않는, 군사정권 시대가 만들어낸 실체를 마주함으로써 위태롭게 그 시간을 버틴 이들과 이 사건을 묵인하는 사회를 고발하듯 묻는다. 죽은 은희, 생존했지만 온전히 살 수 없던 미연, 우연히 출생의 진실을 마주한 준의 현재를 재현하면서 그 물음을 다진다. 513명이 죽었다는데 아무도 잘못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느냐고. 한 시대의 고통은 아직 끝나지 않은 기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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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는 지겨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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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지가 달리고 싶을 때 - 2020 화이트 레이븐즈 선정도서
마리카 마이얄라 지음, 따루 살미넨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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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아주 작고 사소한 일에서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곤 한다. 예를 들면, 숙제하려고 책을 펼쳤는데 갑자기 엄마가 방으로 들어와서 숙제하라고 말하면 하기 싫어지는 삐딱함 같은 것. 엄마는 아이가 숙제하지 않음으로써 감당해야 할 그 후의 일을 생각하면 관심을 표현하는 것인데, 아이의 시선에서는 알아서 하려고 했는데 간섭과 잔소리를 듣는다고 여기게 된다. 별거 아닐 수도 있는 이런 일조차 우리는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간다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일 텐데, 자기 마음대로 달리거나 멈출 수 없는 로지의 일탈이 왜 이렇게 뭉클한지 모르겠다.

 

 

2번 경주 개 로지는 오늘도 트랙을 달렸다. 앞으로 힘차게 나아갔다. 결승선을 넘고 우승했다. 관중석의 함성은 로지에게도 들렸다. 오늘의 우승은 2번 개 로지라고, 얼마나 영광일까. 우승까지 했으니 뿌듯한 마음에 오늘의 기쁨을 충분히 누려도 될 것 같다. 한순간의 긴장이 다음 날 아침까지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싶은 마음은 나만 느끼는 건 아니지? 하지만 로지의 마음은 달랐다. 그냥 쉬고만 싶었다. 우리 안에서 보내는 밤이 불안하고 편하지 않았기에, 로지에게 오늘 밤은 편히 쉴 수 있는 시간이 아니다. 그렇게 깜빡 잠이 든 로지는 꿈을 꾼다. 꿈속에서 숲과 들판을 내달리고, 로지의 발은 자꾸 움찔거린다. 온몸으로 꿈을 꾸고 있는 거다. 매일 트랙을 달릴 때마다 앞만 봐야 했던 로지. 경기장 주변의 자연에 코를 킁킁거리고 싶다가도 바짝 따라붙는 다른 개들 때문에 시선을 돌릴 수가 없다. 그렇게 지친 날이면 오늘 밤처럼 어김없이 꿈을 꾼다. 자유롭게 달리고, 여기저기 구경하고, 누군가와 함께하기도 하는 그런 장소와 시간을 누린다. 오직 꿈에서만.

 

 

이런 날이 매일 반복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매 순간 긴장하고 초조하고, 내 뒤를 바짝 쫓는 많은 것으로 잠시라도 편할 수 없는 날들이 계속된다면, 오늘 하루를 무사히 넘길 수나 있을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싶다. 불안한 마음에 한 끼의 식사도 편하게 하지 못하고 소화불량을 달고 살겠지. 매일 밤 불면에 시달릴 것만 같다. 그런 날들을 로지가 보내고 있다고 생각하면, 마치 모르는 다른 사람의 일처럼 보기 어렵다. 그래서일까. 다음 날 경주에서 미친 듯이 트랙을 달리던 로지가 결승선을 넘고서도 멈추지 않았던 마음을 알 것 같다. 경기장 울타리를 훌쩍 넘어 사라진다. 경기장은 혼돈에 빠졌지만, 로지는 상관하지 않는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보면서, 그 시선이 향하는 대로 달린다.

 

 

 

들판 위로, 달리는 기차 옆으로, 숲속으로, 어느 집 정원 앞으로, 낡은 서커스 천막을 지나고, 도심의 계단을 오르고, 시내 한복판을 지난다. 거센 물살의 바다를 건너고, 뭍에 다다른 로지는 어느 조그만 마을의 작은 공원에 닿는다. 거기서 개 두 마리를 만난다. 세 다리로 걷는 갈색 개 이다와 점박이무늬 개 시리. 누구라도 자기 의지대로 걷고 달린다. 로지는 마음에만 품었던 생각을 이다와 시리를 만난 후 확신한다. 이렇게 자유롭게 달릴 수 있었는데, 내가 달리고 싶은 곳을 향해 갈 수 있었는데, 왜 그동안 경기장 안의 세상에만 머물러 있었을까? 경기장 안에서 달리고, 경기장 안의 우리에서 잠들고. 마치 로지의 세상은 처음부터 그곳이라고 정해져 있던 것처럼 다른 곳을 보지 못하고 살아왔을까. 사람들이 환호하는 경주 개로 살아가는 게 로지에게 주어진 운명이었을까?

 

워낙 개에 관해 관심이 없어서인지, 이 책의 설명을 보면서 처음 알았다. 그레이하운드는 세상에서 가장 빠른 개이고, 시속 70km까지 달릴 수 있기에 태어난 순간부터 경주견으로 살아가곤 한다고. 그렇게 하운드레이싱을 누군가는 박진감 넘치는 오락이자 스트레스 해소의 도구로 여긴다고 한다. 인간의 이기심이 이렇다. 왜 반대의 시선에서 보지 못하고 자기만의 생각으로 생명 있는 존재를 도구로 여길까.

 

다르지 않았다. 이 책은 경기장을 달리던 로지의 시선으로 우리가 익숙하게 알아 왔고 살아가는 하나의 세상을 보여주었다. 어떤 향기에 끌리는 바라보고 싶은 것들, 어떤 환경에서 달리고 싶은지를, 무엇을 위해 달려야 하는지를 보게 한다. 무엇보다 어디로 향해 가고 싶은지 달리는 로지가 일으키는 바람을 맞으며 생각하게 된다. 어떤 꿈을 꾸면서 잠드는 밤인지, 왜 달리고 싶은지. 자유를 찾은 로지는 드디어 어느 지점에 도착한다. 같이 달리던 이다와 시리를 기다리려고 잠시 멈추고 숨을 고른다. 거기가 마지막인 줄 알았다. 누구에 의한 강요이건 자유롭게 달리건, 어느 정도 달렸으니 이제 좀 쉬려고 멈춘 게 아닐까 싶었는데...

 

달리는 개 로지를 만난 건 낯설지 않은 감각을 불러온다. 우리와 다를 것 없는 익숙한 하루를 보는 것 같았다. 매일 똑같은 일상과 매일 똑같이 외치고 생각하는 말들을 떠올린다. 지금 하는 것들 앞에서 '왜?'라는 의문을 한 번쯤은 떠올려도 좋을 것 같다. 내가 원하지 않는 트랙 위에 섰을 때 우리는 어떻게 달려야 하는지 고민하고 선택해야 한다. 그 선택의 기준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지만, 선뜻 그 진심대로 갈 수 없을 때가 많은 게 인생이라고 또 주저앉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한다. 정해진 대로만 가는 게 익숙한 우리 삶일 수도 있지만, 어느 날 경기장의 울타리를 넘어 달리던 로지의 모습처럼 우리도 달리고 싶어서 달리는 순간을 느껴야 하지 않을까. 이제까지 우리가 달려왔던 그 길이 어떤 마음이었는지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이야기였다. 동시에 앞으로 우리가 달리고 싶은 길이 어떤 길이어야 하는지 고민해보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이 이야기의 마지막은 의외였다. 로지가 멈춘 지점이 그토록 원하던 것이 있는 곳인 줄 알았다. 자유롭고, 경쟁에서 벗어난 곳이니 거기서 머물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로지는 "우리 더 달릴까?"라고 말했다. 그동안 남의 의지대로 버텨온 달리기였기에 어떻게 다시 달리겠다는 말을 그렇게 쉽게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마치 로지의 달리기는 이제 시작인 것처럼 발을 구르고 있던 거다. 왜? 로지에게는 이제 '2번' 경주 견이라는 이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같이 어울리던 갈색 개 이다의 실수로 로지의 옷이 찢어졌다. 입고 있던 옷이 사라졌으니 추웠지만, 오히려 로지는 홀가분해보였다. 내낸 옥죄었던 '2번'이라는 이름표는 버리고 새로운 이름으로 달리면 되는데 뭐가 문제냐고 묻는 것처럼 말이다. 옷이 찢어지고 좀 추우면 어떠랴. 이제 다시 달리기 시작하면 체온도 오르고 땀도 나고, 바람이 그 땀을 식혀주면서 또 개운해질 텐데.

 

순위가 매겨지지 않는 세상을 꿈꾸지만, 사실 그런 세상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질 수 없는 기회에 우리는 또 도전하고 달리면서 닿고 싶은 지점을 바라볼 것이다. 그래도 한 가지, 그렇게 닿고 싶은 곳, 달리고 싶은 이유가 누군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로지가 이제 다시 달리고 싶은 이유도 같은 거였다. 달리고 싶어서 달리는 것. 그렇기에 다시 달릴 수 있는 것이다. 다르면 다르다고 인정하고, 누구의 답이 아닌 내가 정한 답을 찾아갈 수 있는 시도가 어떤 달리기를 만드는지 보여주는 그림책이다. 첫 페이지를 열고 로지의 달리기를 보는 순간부터 울컥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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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김기훈 공무원 영어 해내다 실전동형 봉투 모의고사 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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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세 시’라는 말에 깜빡 속을 뻔했다. 깨어있다면 감성을 누리기에 충분한 시간 아니던가. 늦게까지 잠들지 못하는 밤, 아니 아침으로 향해가는 새벽 시간에 뭔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즐길 수 있는 시간. 책을 읽어도 좋고, 누군가 깨어있는 사람 또 없을까 싶은 마음으로 라디오를 켜놓고 있어도 좋다. 미뤄두었던 정리하지 못한 책을 꺼내놓고 이삿짐 싸듯 정리해도 괜찮겠지. 뭐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한다는 것만으로 기꺼이 깨어 있어도 좋은 시간이다. 그 시간에 깨어있는 게 내 의지라면 말이다. 이 책에서 마주하는 ‘새벽 세 시’는 내가 생각했던 감성과는 거리가 먼, 책임과 부담이 먼저 다가오는 시간이었다. 여러 이유로 겪게 되는 우리 몸의 변화가 가장 날카롭게 지각되는 시간이라고 했다. ‘통증의 들쑤심에 속절없이 지새우는 밤의 새벽 세 시를, 쏟아지는 잠을 떨치며 지친 몸으로 아픈 이의 머리맡을 지키는 새벽 세 시를, 나이 들어가며 ’전 같지 않은‘ 몸을 마주하게 되는 새벽 세 시’(12페이지)를 떠올려 보라고 말한다. 듣고 보니 몸에 찰싹 달라붙어 떼어지지 않는 삶의 무게를 보는 듯하지 않은가?

 

이 책은 우리가 아프고 나이 들며 살아가고 죽어가는 몸으로 사는 일에 관해 말한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삶의 그 과정이 적나라하게 들려온다. 그 과정에서 겪는 여러 가지 문제와 감당해야 할 일을 한 개인으로 몫으로, 가족의 일로 남겨둘 수 없다는 게 대다수의 생각이었다. 우리 모두 병명은 다를지라도 아픈 몸으로 살아가고 있다. 과거의 언젠가, 현재에, 앞으로의 어느 날에 그렇게 된다. 그래서 관심 두어야 할 문제들이다. 우리가 애써 무시하고 싶었던 고통과 질병을 마주하고, 그 정면에서 부딪히는 장면에 질문한다. ‘당신이 누군가에게 돌봄을 받아야 할 상황을 마주한다면, 당신이 그 돌봄을 수행해야 할 자리에 있게 된다면’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 우리 사회가 같이 안아야 할 본질적인 문제를 꺼낸다.

 

보호자는 불현듯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에 사로잡히지만, 동시에 도망칠 수 없다고 생각하거나, 차마 도망치지 못한다. 이 ‘차마’에 담긴 마음에 대해 생각한다. 많이 아픈 사람들 곁에서 돌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지금의 사회가 ‘보호자’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 마음은 어째서 수시로 진창이 되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곁에 머물 수 있게 하는 용기는 어디에서 나올 수 있는지, 우리는 간병하는 이들로부터 배워야 한다. 그리고 ‘같이’ 배우지 않는다면 아무도 배우지 못한다.(131페이지)

 

돌봄의 위기는 어디에서 오는지 궁금했다. 가족의 일이니까 마음을 다해 보살피면 된다고 여기던 일에 위기는 찾아온다. 전제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가족’이라고 그 돌봄의 책임이 당연한 건 아니다. 우리나라의 특성 때문인지 왜인지, 우리는 종종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가족같이’라는 말을 꺼낼 때가 많다. 서로 애틋하고 돈독한 관계를 만들어가고 싶다는 뜻일까? 이 말에 의미를 둔 적은 없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하니 가족 같다는 말이 언제나 정이 넘치는 관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거다. 돌봄의 위기가 그 ‘가족’에서 시작되고, ‘독박’에서 찾아온다는 말이 너무 와닿았다. 나도 한마디 거들면서 경험해본 사람만이 아는 그 양가감정을 슬쩍 꺼내놓아 본다. 상황이 그러하니까, 가족이니까, 누군가는 해야 하니까. 이런 이유로 누군가 독박 돌봄을 해야 한다면, 돌봄의 온전하게 이뤄지지 않는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들어지는 한 사람은 온전한 마음으로 환자를, 가족을 돌볼 수 없다. 그러다가 환자를 방치, 학대하는 일도 생긴다. 어느 순간 간병인에서 가해자가 된 이들의 마음을 누가 제대로 읽어줄 수 있을까.

 

성장하고 독립하면서 인생을 꾸려가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배워왔는데, 우리는 다시 독립적이지 못한 몸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우리가 찾아가는 젊음이 독립이었다면, 우리가 맞이하는 늙음은 의존이기도 하다. 하지만 의존의 상황은 두렵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묻는 말에 나오는 답은 늙고 병든 몸은 비용이고 짐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노동하지 못하고 도움이 되지 못하는 육체가 버겁다고 여긴다. 자신에게 찾아온 질병과 싸우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서조차 환영받지 못한다. 그렇다고 돌봄을 피할 수도 없다. 치욕이라 여기는 돌봄과 아픔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언제부터 돌봄이 이렇게 고역이 되었나. 이 책으로 알게 된 사실 하나는 우리나라의 돌봄 구조였다. 앞서 말한 독박 돌봄의 불균형이 돌봄을 긍정의 이미지로 보지 못하게 한다. 돌봄은 대개 가족 내 돌봄으로 이루어지고, 돌봄 노동자의 90% 이상이 여성이란다. 한국 사회가 만든 돌봄의 구조가 가족, 특히 여성에게 전가해온 현상이다. 그 안에서 돌봄은 고통과 희생이 되고, 때로는 학대와 방치에 가깝게 가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돌봄 경험은 여성의 주도가 되지 못하고 남성이 돌봄 경험으로 기록한 책들이 더 많다. 웃기게도 이건 육아와 비슷한 흐름으로 보인다. 남성의 돌봄은 기록으로 남겨져 남다른 지식과 경험이 되는 현상이다. 왜 누가 하면 당연하고 누가 하면 배워야 할 지식이 되는가? 이는 여성의 모성과 돌봄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뿌리 깊은 인식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봐야 할 문제라고 한다. 우리 몸의 아픔과 돌봄 문제에서 같이 해결해야 할 또 다른 사회 문제이다.

 

저자들이 한결같은 목소리로 하는 말은, 돌봄이 가정 안에서 누군가의 부담으로만 해결할 수 없다는 거다. ‘시민적 돌봄’을 강조한다. 누구나 아프고 죽어가는 존재가 될 수 있다. 인간이라면 그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 우리가 속한 사회에서 비슷하게 함께 살아가야 하는 돌보고 돌봄을 받는 관계가 된다. 이는 각자가 겪는 고통을 분담하는 차원에서 머무는 게 아니라, 시민으로 감당해야 할 ‘우리’의 일이라는 감각을 깨워야 한다고 말한다. 개인과 가정의 일이면서 동시에 사회의 정책이 반영되어 이 문제를 받아들여야 한다. 사회라는 게 그렇지 않은가. 절대 혼자 이룰 수 없는 집단이며, 그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공동의 부담이면서 ‘우리’가 되었을 때 받는 힘의 크기도 만만치 않으리라 믿는다. 그래서 계속 말하고, 소통하며, 듣게 하는 이야기다.

 

부담인 줄 알면서도 그동안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던 일에 다른 시선이 생긴다. 나는 환자로 누워있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보호자로 누워 있는 사람을 돌보는 시간이 더 많았다. 가족의 일이었고, 누군가는 해야만 했던 일이 나의 일이 되었다. 갑자기 닥친 일이라 간병인을 구할 수 없던 그때 꼬박 일주일을 환자 옆에 있던 어느 날, 자주 마주치던 수간호사 선생님이 나에게 빨리 간병인을 구하라고 했다. 장기전이 될 텐데, 지금 이러면 보호자가 버티지 못하고 쓰러진다고. 간병인이 구해지지 않은 것도 사실이지만, 간병 비용 부담도 상당했다. 어쨌든 나중에는 간병인과 교대하면서 병상을 지켰지만, 책에서 언급한 ‘독박’이란 분노를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온전히 내 몸을 챙기지도 못하면서 쌓여가는 감정적 육체적 피로는 또 다른 고통을 낳고 있었다. 아, 이래서 학대와 방치가 생길 수 있다고 하는 마음의 경험을 했다고 해야 하나. 저자들이 들려주는 많은 경험과 통계 자료들이 내 앞에서 춤을 추고 있는 듯했다. 저자들은 한때, 그리고 지금 아픈 몸으로 살고 있다. 그들이 하는 말이 더 절실하고 생생하게 들려오는 이유다. 건강하다고 여기는 이 몸이 언젠가 돌봄을 받는 몸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은 변함없으니까 말이다.

 

우리는 모두 아프고 늙으며 살며 죽는다. 이 모든 삶의 순간들에서 우리는 누군가의, 무엇인가의 돌봄에 의존한다. 또한 의존하면서 의존하는 다른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돌본다. 내용과 형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돌봄은 언제나 상호적이며 쌍방향적이다. 의존과 돌봄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큼 더 다양하고 세밀하게, 복합적으로 발화되고 청취되고 해석되어야 한다. 돌봄이 어떤 노동이고 어떤 윤리적 가치인가를 차이 속에서 보편적 합의로 구성해내는 것은 어렵지만 포기할 수 없는 우리 모두의 공통과제다. (21페이지)

 

이 모든 돌봄의 시간, 돌봄을 주고받았던 관계는 ‘나’의 일부다. 각자, 혼자 알아서 하는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우리는 언제나 서로의 짐이고, 또한 힘이다. (80페이지)

 

우리는, 누구나 새벽 세 시의 몸이 된다. 우리 몸이 늙어간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당신과 나, 모두의 문제 앞에서 우리는 돌봄의 현실을 같이 마주해야 한다. 지금이 아니라고, 멀고 먼 일이라고 여길 텐가. 피하고 싶을 수도 있다. 그 마주침을 최대한으로 미루고 싶기도 하겠지. 하지만 그 시간은 내 계획대로 찾아오지 않는다는 걸 이미 잘 안다. 어느 순간 우리 앞에 떡 하고 나타나 현실이 된다. 그러니 이 책의 저자들이 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듣고 돌봄의 고립된 세상에 남겨지지 않았으면 한다. 누구나 혼자 부담하기에는 외롭고 힘든 시간이 될 간병에 힘이 되는 ‘토로’이자 ‘토론’의 이야기인 이 책이 조금은 위로와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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