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지가 달리고 싶을 때 - 2020 화이트 레이븐즈 선정도서
마리카 마이얄라 지음, 따루 살미넨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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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아주 작고 사소한 일에서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곤 한다. 예를 들면, 숙제하려고 책을 펼쳤는데 갑자기 엄마가 방으로 들어와서 숙제하라고 말하면 하기 싫어지는 삐딱함 같은 것. 엄마는 아이가 숙제하지 않음으로써 감당해야 할 그 후의 일을 생각하면 관심을 표현하는 것인데, 아이의 시선에서는 알아서 하려고 했는데 간섭과 잔소리를 듣는다고 여기게 된다. 별거 아닐 수도 있는 이런 일조차 우리는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간다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일 텐데, 자기 마음대로 달리거나 멈출 수 없는 로지의 일탈이 왜 이렇게 뭉클한지 모르겠다.

 

 

2번 경주 개 로지는 오늘도 트랙을 달렸다. 앞으로 힘차게 나아갔다. 결승선을 넘고 우승했다. 관중석의 함성은 로지에게도 들렸다. 오늘의 우승은 2번 개 로지라고, 얼마나 영광일까. 우승까지 했으니 뿌듯한 마음에 오늘의 기쁨을 충분히 누려도 될 것 같다. 한순간의 긴장이 다음 날 아침까지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싶은 마음은 나만 느끼는 건 아니지? 하지만 로지의 마음은 달랐다. 그냥 쉬고만 싶었다. 우리 안에서 보내는 밤이 불안하고 편하지 않았기에, 로지에게 오늘 밤은 편히 쉴 수 있는 시간이 아니다. 그렇게 깜빡 잠이 든 로지는 꿈을 꾼다. 꿈속에서 숲과 들판을 내달리고, 로지의 발은 자꾸 움찔거린다. 온몸으로 꿈을 꾸고 있는 거다. 매일 트랙을 달릴 때마다 앞만 봐야 했던 로지. 경기장 주변의 자연에 코를 킁킁거리고 싶다가도 바짝 따라붙는 다른 개들 때문에 시선을 돌릴 수가 없다. 그렇게 지친 날이면 오늘 밤처럼 어김없이 꿈을 꾼다. 자유롭게 달리고, 여기저기 구경하고, 누군가와 함께하기도 하는 그런 장소와 시간을 누린다. 오직 꿈에서만.

 

 

이런 날이 매일 반복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매 순간 긴장하고 초조하고, 내 뒤를 바짝 쫓는 많은 것으로 잠시라도 편할 수 없는 날들이 계속된다면, 오늘 하루를 무사히 넘길 수나 있을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싶다. 불안한 마음에 한 끼의 식사도 편하게 하지 못하고 소화불량을 달고 살겠지. 매일 밤 불면에 시달릴 것만 같다. 그런 날들을 로지가 보내고 있다고 생각하면, 마치 모르는 다른 사람의 일처럼 보기 어렵다. 그래서일까. 다음 날 경주에서 미친 듯이 트랙을 달리던 로지가 결승선을 넘고서도 멈추지 않았던 마음을 알 것 같다. 경기장 울타리를 훌쩍 넘어 사라진다. 경기장은 혼돈에 빠졌지만, 로지는 상관하지 않는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보면서, 그 시선이 향하는 대로 달린다.

 

 

 

들판 위로, 달리는 기차 옆으로, 숲속으로, 어느 집 정원 앞으로, 낡은 서커스 천막을 지나고, 도심의 계단을 오르고, 시내 한복판을 지난다. 거센 물살의 바다를 건너고, 뭍에 다다른 로지는 어느 조그만 마을의 작은 공원에 닿는다. 거기서 개 두 마리를 만난다. 세 다리로 걷는 갈색 개 이다와 점박이무늬 개 시리. 누구라도 자기 의지대로 걷고 달린다. 로지는 마음에만 품었던 생각을 이다와 시리를 만난 후 확신한다. 이렇게 자유롭게 달릴 수 있었는데, 내가 달리고 싶은 곳을 향해 갈 수 있었는데, 왜 그동안 경기장 안의 세상에만 머물러 있었을까? 경기장 안에서 달리고, 경기장 안의 우리에서 잠들고. 마치 로지의 세상은 처음부터 그곳이라고 정해져 있던 것처럼 다른 곳을 보지 못하고 살아왔을까. 사람들이 환호하는 경주 개로 살아가는 게 로지에게 주어진 운명이었을까?

 

워낙 개에 관해 관심이 없어서인지, 이 책의 설명을 보면서 처음 알았다. 그레이하운드는 세상에서 가장 빠른 개이고, 시속 70km까지 달릴 수 있기에 태어난 순간부터 경주견으로 살아가곤 한다고. 그렇게 하운드레이싱을 누군가는 박진감 넘치는 오락이자 스트레스 해소의 도구로 여긴다고 한다. 인간의 이기심이 이렇다. 왜 반대의 시선에서 보지 못하고 자기만의 생각으로 생명 있는 존재를 도구로 여길까.

 

다르지 않았다. 이 책은 경기장을 달리던 로지의 시선으로 우리가 익숙하게 알아 왔고 살아가는 하나의 세상을 보여주었다. 어떤 향기에 끌리는 바라보고 싶은 것들, 어떤 환경에서 달리고 싶은지를, 무엇을 위해 달려야 하는지를 보게 한다. 무엇보다 어디로 향해 가고 싶은지 달리는 로지가 일으키는 바람을 맞으며 생각하게 된다. 어떤 꿈을 꾸면서 잠드는 밤인지, 왜 달리고 싶은지. 자유를 찾은 로지는 드디어 어느 지점에 도착한다. 같이 달리던 이다와 시리를 기다리려고 잠시 멈추고 숨을 고른다. 거기가 마지막인 줄 알았다. 누구에 의한 강요이건 자유롭게 달리건, 어느 정도 달렸으니 이제 좀 쉬려고 멈춘 게 아닐까 싶었는데...

 

달리는 개 로지를 만난 건 낯설지 않은 감각을 불러온다. 우리와 다를 것 없는 익숙한 하루를 보는 것 같았다. 매일 똑같은 일상과 매일 똑같이 외치고 생각하는 말들을 떠올린다. 지금 하는 것들 앞에서 '왜?'라는 의문을 한 번쯤은 떠올려도 좋을 것 같다. 내가 원하지 않는 트랙 위에 섰을 때 우리는 어떻게 달려야 하는지 고민하고 선택해야 한다. 그 선택의 기준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지만, 선뜻 그 진심대로 갈 수 없을 때가 많은 게 인생이라고 또 주저앉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한다. 정해진 대로만 가는 게 익숙한 우리 삶일 수도 있지만, 어느 날 경기장의 울타리를 넘어 달리던 로지의 모습처럼 우리도 달리고 싶어서 달리는 순간을 느껴야 하지 않을까. 이제까지 우리가 달려왔던 그 길이 어떤 마음이었는지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이야기였다. 동시에 앞으로 우리가 달리고 싶은 길이 어떤 길이어야 하는지 고민해보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이 이야기의 마지막은 의외였다. 로지가 멈춘 지점이 그토록 원하던 것이 있는 곳인 줄 알았다. 자유롭고, 경쟁에서 벗어난 곳이니 거기서 머물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로지는 "우리 더 달릴까?"라고 말했다. 그동안 남의 의지대로 버텨온 달리기였기에 어떻게 다시 달리겠다는 말을 그렇게 쉽게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마치 로지의 달리기는 이제 시작인 것처럼 발을 구르고 있던 거다. 왜? 로지에게는 이제 '2번' 경주 견이라는 이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같이 어울리던 갈색 개 이다의 실수로 로지의 옷이 찢어졌다. 입고 있던 옷이 사라졌으니 추웠지만, 오히려 로지는 홀가분해보였다. 내낸 옥죄었던 '2번'이라는 이름표는 버리고 새로운 이름으로 달리면 되는데 뭐가 문제냐고 묻는 것처럼 말이다. 옷이 찢어지고 좀 추우면 어떠랴. 이제 다시 달리기 시작하면 체온도 오르고 땀도 나고, 바람이 그 땀을 식혀주면서 또 개운해질 텐데.

 

순위가 매겨지지 않는 세상을 꿈꾸지만, 사실 그런 세상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질 수 없는 기회에 우리는 또 도전하고 달리면서 닿고 싶은 지점을 바라볼 것이다. 그래도 한 가지, 그렇게 닿고 싶은 곳, 달리고 싶은 이유가 누군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로지가 이제 다시 달리고 싶은 이유도 같은 거였다. 달리고 싶어서 달리는 것. 그렇기에 다시 달릴 수 있는 것이다. 다르면 다르다고 인정하고, 누구의 답이 아닌 내가 정한 답을 찾아갈 수 있는 시도가 어떤 달리기를 만드는지 보여주는 그림책이다. 첫 페이지를 열고 로지의 달리기를 보는 순간부터 울컥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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