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들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1
미나토 가나에 지음, 심정명 옮김 / 비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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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맛있는 건 다른 사람은 모르는 도넛 한가운데. 하지만 그걸 아는 사람은 도넛을 만든 적 있는 사람뿐이죠. (94페이지)


이번 여름 더위를 조금 더 일찍 느꼈다. 다른 사람들은 서늘하고 좋다고 말할 때, 나는 올여름 지독하게 더울 것 같다면서 혼자 손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여름보다 겨울이 견디기 힘들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체질이 바뀌었나 싶기도 하면서 그 원인은 은연중에 감지했다. 갑자기 찐 살이 피부 트러블을 일으키고 조금만 걸어도 땀을 흘리고 숨이 찼다. 사상 최대의 더위가 왔느니 어쩌니 해도, 실제로 내 몸이 변했기 때문에 더위를 더 잘 느끼는 건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길을 가다가 나보다 더 체격이 있는 사람들을 보면 힘들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이 뜨거운 날에 얼마나 땀을 많이 흘릴까, 숨을 헐떡이며 걷는 이 여름이 많이 힘들겠구나 싶다. 저절로 내 몸을 다시 한번 보게 된다. 나도 모르게 다른 사람 몸과 내 몸을 자꾸만 비교하게 된다. 예쁘게 맞는 옷 사기도 힘들고, 사람들 모이는 자리에서 저절로 주눅이 들고, 침울해진다. 좋은 말로 익숙하게 들어온, 사람의 외모보다 내면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 항상 통하는 건 아닌 듯하다.


아닌 척 거짓말 하고 싶지는 않다. 사실 남녀 불문, 예쁘고 키가 크고 뚱뚱하지 않은 사람에게 시선이 가는 게 익숙하지 않은가. 그중에서도 여성의 외모는 우리 일상의 여러 곳에서 다양한 형식으로 반영된다. 아름다운 외모가 많은 부분에서 우위를 차지한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입학이나 취업 면접에 대비해서 성형이나 치아 교정을 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예쁜 사람이 더 시선을 끌고 배려 받는다. 웃기게도, 친구들끼리 만나면 훈남 사장이 있는 커피점에 가기도 한다. 그냥 그 사람의 친절이 그 가게의 호감에 영향을 미치는 거지만, 꼭 외모를 곁들여 이야기한다. 잘생긴 사람이 친절하기까지 하다고. 나도 모르게 습관처럼 사람을 보는 일에 외모를 각인한다. 그 사람의 내면을 다 알아가기도 전에 외모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저장된다. 그러니 아름다워지는 게 누구도 선뜻 거절할 수 있는 제안은 아니지 않은지 묻고 싶다. 미나토 가나에가 이 소설로 묻고 싶은, "아름다워지면 행복할까요?"라는 질문에 하나의 대답으로만 채울 수 없는 이유를 듣는 시간이 된다.


인터뷰어가 되어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던 미용외과 원장 히사노. 평소 그녀의 의술은 미용을 위한 수술이 사람들의 치료가 된다고 믿었다. 우리가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는 것처럼 미용을 위해 수술을 선택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말한다. 어느 날 그녀는 초등학교 동창의 딸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외모는 뚱뚱했지만 성격이 명랑했던, 운동도 잘하고 매사에 주눅 드는 일 없이 자신감 있게 살아가는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게 놀랍기만 했다. 그래서 들어보고 싶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건의 진실을 알고 싶은 히사노는 죽은 아이를 아는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듣는다. 그 아이의 주변 환경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혹시 그녀가 그 아이에 대해 다 알지 못했던 진실이 숨어 있는지 묻고 다닌다. 그렇게 히사노는 초등학교 동창, 죽은 아이의 선생님들, 친구들까지 만난다.


히사노가 죽은 아이의 진실을 찾고자 만난 사람들에게서 들은 말은 의외였고 충격이었다. 그런 일이 있었느냐고 되묻고 싶을 정도로 낯선 이야기였다. 특히 죽은 아이의 이야기에 보태어져 히사노에 관한 이야기까지 더해지니 이 소설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의미를 더 찾고 싶어졌다. 앞서 말했지만, 히사노는 미용외과 원장이다. 외모에서 맘에 들지 않는 부분, 날씬하고 예뻐지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해준다. 심리 상담과 외과적 수술로 환자들의 마음을 낫게 해준다. 그게 뭐가 잘못된 건 아니다. 그녀가 틀리지 않았다고 배운 방식의 삶이었다. 그런데 인터뷰이들을 만나면서 그녀는 점점 자기 신조가 옳은 것인가 하는 의문을 품는다. 의외였던 건 죽은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만난 사람들이 다 과거에 히사노와 인연이 있던 사람들이었고, 그들의 기억 속 히사노를 꺼내면서 새로운 기억과 조우한다. 그들의 기억 속 히사노는 누구도 비교할 수 없는 외모를 가진 예쁜 여자였고, 그녀의 말 한마디에 상처받았고, 그녀를 질투하고 부러워했다. 그녀와 가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열등감을 가졌고, 마치 고요하고 우아한 여왕처럼 군림한 그녀의 옆에서 비슷한 존재로 머물고 싶다는 바람과 그녀와 같을 수 없다는 절망감에 휩싸였다.


그들의 입에서 꺼내 올려진 기억을 들을 때까지, 히사노는 정말 그들의 마음을 몰랐을까? 외모 때문에 좌절하고 비교당하는 슬픔을 몰랐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나는 아무 말 안 했어'라는 표정으로 주변 사람들이 만들고 쌓고 있는 외모의 우울을 그녀가 몰랐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미스 재팬까지 경험한 그녀가 외모 때문에 힘들었을 경우가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자기 때문에 힘들어지는 마음을 굳이 아는 척하거나 나서서 위로해줄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뿐이라는 추측을 해본다. 그 모든 시간에 그녀는 그들의 마음을 애써 드러내게 하거나 굳이 파고들어서 확인할 필요도 없었을 거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가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그 불편하고 절망적인 마음을 알지 못했을 것 같기도 하다는 양가감정을 느낀다. 정말 그녀가 몰랐을 수도 있겠다 싶은 마음. 왜냐고? 그녀는 다른 사람이 외모로 고민하는 그 자체를 경험해본 적이 없을 테니까. 그럼 이런 사회,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시선이 익숙해진 것에 누굴 원망하고 누구에게 화를 내야 할까? 애매하게도, 이런 상황과 마음을 다 안다고 해서 누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인지 뚜렷한 선을 그을 수 없다는 거다.


외모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몸무게 1kg에 일희일비하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고 외모가 전부라고 말하며 우선순위로 삼을 수도 없고, 외모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없다. 매일 거울 보면서 거슬리는 부분이 일상을 주눅 들게 할 수도 있고, 의술로 변화한 외모가 자신감을 심어줄 수도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외모가 이 정도여도 괜찮아, 더 중요한 건 따로 있으니까'라는 긍정의 사고, '아니야, 이 부분이 변화되면 나는 좀 더 건강한 삶을 만들 수 있어'라는 고민의 순간이 매번 찾아오기도 할 것이다. 분명한 건, 외모강박사회 자체가 사건을, 다양한 감정을 만들면서 인간에게 부정의 마음을 심기 좋은 배경이 된다는 거다. 그때마다 먼저 선택하고 싶은 의미가 달라지겠지. 그 의미에 힘을 실어주는 작가의 말에 시선이 머문다. 행복이나 아름다움의 기준을 타인에게 맡기지 말라고, 나에게 맞는 행복의 조각들을 끼워 넣기 위해 나에게 맞는 행복의 조각을 찾는 게 답이라고 말한다.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모르는 건 아니지만, 완전한 공감을 할 수 없다는 내 마음이 참 씁쓸하다. 아무리 타인의 행복이나 아름다움에 비교하고 싶지 않다고 하더라도, 나도 모르게 향하는 이 시선을 꽉 붙잡을 수가 없으니...


자살한 소녀의 방에 엄청난 양(소녀의 몸무게 숫자만큼이라고 하더라만...)의 도넛이 흩뿌려져 있었다는 사건으로 시작된 흥미로운 미스터리 소설이다. 이미 사건 현장의 묘사가 독자의 궁금증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면서, 읽으면서 느끼는 여러 가지 생각으로 마음이 복잡해지기도 한다. 그동안 작가가 독자에게 들려주었던 많은 이야기에 뒤지지 않는 만족감을 주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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룬샷 - 전쟁, 질병, 불황의 위기를 승리로 이끄는 설계의 힘
사피 바칼 지음, 이지연 옮김 / 흐름출판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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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룬샷은 발상의 전환과 가능성을 믿는다. 전략적인 상품을 볼 줄 알고, 꾸준한 노력의 결과를 기다린다. 개인이나 기업이 룬샷의 기회를 잡으려면, 지금이 아닌 앞으로의 결과에 더 집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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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문장 쓰는 법 - 못 쓰는 사람에서 쓰는 사람으로 땅콩문고
김정선 지음 / 유유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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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를 쓰기 시작했다는 건 아마도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거 아닐까? 듣는 사람이 있든 없든, 누구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표현 중의 하나가 글쓰기라고 생각한다. 그럼 지금 내가 쓰고 있는 몇 문장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잘 전달하고 있는지 또 궁금해진다. 그 궁금증을 해결할 방법은 하나다. 일단은 써야 하고, 그렇게 쓴 글을 자꾸만 들여다보고 고치고 또 고치면서 계속 확인해야 한다. 저자는 이 책 『열 문장 쓰는 법』으로 반전을 일으키면서 글쓰기의 노하우를 속성으로 전수한다.

 

누구든 훈련만 거친다면 제아무리 길고 복잡한 문장이라 해도 주어와 술어를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데 능숙해질 수 있다. (29페이지)

 

반복적인 연습을 통해 습관화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40페이지)

 

이 책의 구성이 좀 특이하다. 처음에는 저자의 전작처럼 그냥 잘 읽히는 글쓰기 산문처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챕터는 나누고, 그 챕터마다 글쓰기의 다양한 방법과 시도를 언급한다. 온라인 강의를 듣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총 24개의 챕터로 나누어 설명하는 글쓰기 연습 중에 기억에 남는 몇 가지만 소개해본다.

 

먼저 하나의 글을 자유롭게 쓰게 한다. (저자는 자기가 직접 쓴 글로 예시를 들었다) 그리고 한 가지씩 제안한다. 입장을 바꿔서 써보기('나만의 것'이 아닌 '너만의 것'에 대해 쓰기)로 내가 보는 방향에서 생각하고 쓰던 것을 반대의 입장에서 같은 상황을 보고 생각하게 한다. 이 부분은 '나만의 것'에서 '모두의 것'으로 쓰라는 다섯 번째 챕터와 연결되는데, 우리가 어떤 말을 들을 때 귀에 잘 들리고 안 들리고 하는 것 중의 하나는 나만의 것을 모두의 것으로 풀어내지 못해서일 수도 있다. 내가 아는 것을 모두가 알게 하는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말처럼 들려서 웃음도 났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해보면, 이는 또 소통의 문제와 연결되는 것 같기도 하다. 내가 하는 말이 모두가 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니라면, 저자의 말처럼 나와 모두의 거리를 좁히는 게 힘들 수도 있다는 의미일 테니 말이다.

 

말과 글의 차이도 경험하게 하는데, 이것은 내가 하는 말을 녹음해서 듣게 하는데, 진짜 피부로 확 와 닿는 가르침이었다. 같은 의미를 전달하는데, 목소리로 하는 말과 글로 표현하는 말이 너무 달랐다. 입을 통한 말은 너무 길고 장황해지는 경우가 많았고, 그런 단점을 보완하면서 차분하게 전달할 수 있는 게 글이었다. 이 경우는 나도 선호한다. 나는 그다지 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잘 전달되고 있는지 항상 걱정하고 의심하면서 상대방과 이야기한다. 같은 의미를 전달하는데 말하는 방식과 선택하는 단어에 따라 오해가 생기기도 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시간 여유가 있다면, 문자나 급한 전화 한 통 보다는 이메일이나 조금 천천히 말하는 방식이 좋다. 글쓰기는 나처럼 노파심에 무슨 말을 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사람에게 최적의 대화법이다.

 

같은 글을 짧게 쓰고 길게 쓰는 연습을 함으로써 차이를 눈으로 확인하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 같다. 짧게 쓰는 문장이 읽는 이에게 어떻게 전달되는지, 길게 쓰면서 느껴지는 이야기의 늘어짐은 또 어떻게 보완하면 되는지 동시에 알려주는 셈이다. 같은 재료를 놓고 활용하는 여러 레시피를 펼쳐놓은 것처럼, 어떻게 시도하면 같은 문장이 이렇게 다양한 결과물을 내놓는지 눈앞에서 확인시켜주는 게 놀라울 뿐이다. 의미 있게 들려왔던 부분은 '글쓰기는 공간이 아니라 시간을 채우는 작업'(챕터 12)이라는 거였다. 예를 들면, 우리는 어떤 경험이나 상황을 전달하고 싶을 때 시간 순서로 나열한다. 언제 일어났고 무엇을 먹었고 얼마나 일을 했으며 어떤 마무리를 했는지 적었다고 한다면, 그건 시간을 적은 것이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건 단순하게 시간의 흐름을 적은 게 아니다. 그 시간을 어떻게 적느냐에 따라 감정이 다르다는 것. 느리거나 빠르게 흐르는 상황의 시간이 글을 흐르게 한다. 자연스러운 흐름이 저절로 느껴진다면, 그건 시간을 채우는 문장 때문일지도 모른다.

 

24개의 챕터를 통과하려면 저자가 내준 숙제를 해야 한다. 저자가 먼저 자신의 글로 숙제를 하는 과정과 결과를 보여준다. 바로 앞에서 오답 노트를 보여주는 것처럼, 글의 다양한 변화를 체험할 수 있다. 그러다가 깜빡 속았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 알려준, 길게 한 문장 쓰기로 문을 열었던 첫 페이지로 돌아가고 싶어지는, 무슨 추리소설의 반전을 확인하는 순간 같다. 처음에 저자는 길게 이어지는 한 문장 쓰기로, 한 문장도 못 쓰는 사람에게 희망을 준다. 자, 써보자. 그렇게 길게 쓴 한 문장을 다시 끊어서 여러 문장을 만든다. 이는 길게 쓴 문장을 계속 살펴보면서 어떤 부분이 어색하고 이상하지 찾을 기회였다. 계속 쓰면서 읽고 또 보고 있자면, 연결된 한 문장에서 반복되는 단어가 없는지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가 표현되고 있는지 집중할 수 있다. 정작 가장 중요하고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내가 쓰고 싶은 대로 써지고 있는지 확인하는 거였다. 그 확인의 절차가 글쓰기 연습이다.

 

나누어 쓸 때 유의해야 할 점은 '그리고, 그래서, 그런데, 그러나(하지만)' 같은 접속부사와 '이, 그, 저' 같은 지시대명사를 되도록 쓰지 않고 문장을 이어 가는 겁니다. (61페이지)

 

꼭 글쓰기로 밥 벌어먹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요즘에는 글쓰기가 습관처럼 되어 간다. 간단하게는 SNS부터, 가까이에는 휴대폰의 문자에서도 글쓰기는 우리의 일상에 가깝다. 알게 모르게 모든 순간에 타인과 글로 소통하는 시대를 살아간다. 직장에서는 보고서를, 개인적으로는 일기나 메모를 쓰기도 한다. 어쩌면 누구나 글을 써야 하는 시대로 느껴진다. 하지만 우리에게 글쓰기는 피하고 싶은 숙제처럼 막막하고, 멀미가 날 정도로 괴로운 일이다. 저자는 이렇게 글쓰기가 어려운 이유가 '나만의 것'과 '모두의 언어'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를 좁힐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떻게 하면 그 거리를 좁힐 수 있을까 하는 고민과 노력이 바로, '나만의 것'이 '모두의 언어로' 번역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차근차근 그 과정을 거치면서, 내가 쓴 문장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지켜보는 흥미로움을 선사한다. 그 과정에서 저자가 일으킨 반전이 길게 쓰기에서 짧게 쓰기로 변신하는 거였다. 앞서 반전이라는 표현으로 이 책을 말했다. 저자는 요즘 강조되는 짧게 쓰기의 압박에서 벗어나라고 하면서 일단 한번 써보기만 하라는 듯이 길게 쓴 한 문장으로 시작했다. 같은 내용이면서 다른 문장으로 적으면서, 때로는 줄여 쓰고 늘여 쓰면서 분량으로 체험하는 시간을 말한다.

 

어떤 성격의 글을 어떤 방식으로 쓰든, 글을 쓰는 순간 우리는 이미 소통을 시작하는 셈이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겁니다. (19페이지)

 

결국, 처음 길게 쓴 한 문장으로 시작한 설명은 열 문장으로 바꾸어 쓰는 훈련이었다. 짧게 써야 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나 일단 쓰게 한 다음, 짧게 쓰는 목적지에 도달하게 한다. 누구나 말하는 짧게 쓰는 일을 재밌게 설명한다. 제각각 이유는 달라도 우리는 글을 쓰며 살아가고 있고, 또 글쓰기가 부담되는 건 사실이기에 저자의 이런 가르침이 귀하게 들려온다. 뭔가를 쓰면서 지금의 나와 조금은 다른 나를 발견하고 가꾸어 나가는 게 글쓰기라고 의미를 알려준다. 그 과정에서 서로의 소통은 물론이고, 더 넓게 많은 것을 보는 시야를 만들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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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ianjeon 2020-08-14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결하면서도 책의 핵심내용을 잘 전달해주는 서평이네요, 서평 잘 보았습니다!!
 



씨지브이 관람권 4매 있습니다.
6월 30일까지.
(하루 남았네요. ㅠㅠ)

코로나 때문에 극장에 못가서 남았어요.
혹시 하루 남았지만 6월 30일 화요일.
씨지브이에서 관람하실 분.
댓글로 상영 정보와 연락처 남겨주세요,
확인하는대로 예매해서 보내드릴게요.

댓글 확인 및 예매는 내일 아침 9시까지만 확인합니다.
씨지브이 일반관만 가능한 일반예매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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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어하우스 플라주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0
혼다 데쓰야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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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읽다 보면 뜨끔해지는 소설이 있다. 스멀스멀 머릿속을 파고들면서 괜히 고개 숙이게 하는 이야기 말이다. 혼다 데쓰야의 『셰어하우스 플라주』는, 전과자에게 방을 임대한다는 특이한 소재로 읽기도 전에 독자의 궁금증을 만든다. 도대체 어떤 곳이기에 세상의 시선을 한번쯤 받은 이들에게 방을 내어준다는 말인가. 입주자 중의 일부가 그런 조건이라는 게 아니다. 입주자 모두가 전과가 있고, 세상으로 스며들지 못해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찾아든 곳이다. 그곳에 모인 이들이 어떻게 같이 살아가고 있을까, 혹시 서로의 과거를 모두 드러내는 것도 가능할까 궁금했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선입견 있는 시선을 버릴 수 없는 조건을 가진 이들이 살아가는 마음이 궁금했다.

 

다카오는 각성제 사용으로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 약물을 즐기려다가 그런 건 아니다. 친구들과 함께했던 술자리에서 자기도 모르게 약물 복용을 하게 된 거다. 하지만 그 일 때문에 그는 모든 것을 잃었다. 직장에서 해고되었다. 살던 곳은 갑자기 화재가 나서 몸만 겨우 빠져나왔다. 그런 그에게 보호사는 셰어하우스 플라주를 소개해주었고, 큰 무리 없이 입주하게 됐다. 도대체 어떤 곳이기에 그의 전과 이력을 알고도 선뜻 방을 내주었는지 모르겠다. 일단 거처가 마련되어 있으니 안심이지만, 일정한 거처가 있다고 해서 쉽게 일자리가 구해지지는 않았다. 여러 곳에 이력서를 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알고 보니 그가 잘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전직과 같은 업종으로 계속 일을 찾았는데, 이미 그의 소문은 업계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던 것. 다른 쪽으로 눈을 돌려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그마저도 쉬운 일은 아니다. 당분간은 셰어하우스 주인 준코가 운영하는 플라주에서 일을 돕기로 한다.

 

일단 임대 조건은 나쁘지 않다. 월세가 5만 엔. 하루 세 끼 식사가 제공된다. 청소는 교대로 하면 된다. 방문이 없어서 사생활 보호가 안 될 것 같은 불길함은 있지만, 서로 간섭하지 않는 스타일이라 그것도 괜찮다. 입주 조건이 전과자인 것만 빼고는. 준코가 왜 이런 조건으로 세입자를 구하는지는 모른다. 언제까지 이런 조건으로 임대할지도 모른다. 다만, 지금 셰어하우스에 모인 이들이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 이들의 내일은 어떻게 될지 궁금할 뿐이다. 특이한 점은 서로의 과거나 오늘에 대해 굳이 간섭하거나 캐묻지 않으면서 사생활을 지켜주는데, 또 어느 순간에는 플라주에 모여 같이 식사를 하고 술도 마시면서 노래를 부른다. 마치 이 모임이 오래전부터 지속하여 온 것처럼, 서로가 허물없이 지내면서 가족처럼 여기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누구나 처음 들어왔을 때는 낯설고 어색해하던 게, 어느새 서로의 간격을 좁혀가는 게 눈에 보인다.

 

어디까지 가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태풍이 언제 멈출지도 알 수 없었다. (135페이지)

 

시오리는 말했다.

"인생이 그렇게 간단히 리셋되지 않아. 과거는 언제까지고 따라다녀. 속죄는 할 수 있어도 실수를 저지른 과거를 지울 수는 없어.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야." (262페이지)

 

당신이라면 어떤 마음일까? 아니,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렇게 묻는 나부터도 전과자라는 이력에 두려움을 가질 것 같다. 흔히 '빨간줄'이라고 말하는 인생의 오점은 그 자체보다는 오점의 내용이나 이유가 더 중요할 것 같지만, 그런 사연을 들을 기회는 많지 않다. 그래서 그들에게 있던 어떤 사실 하나만을 생각하고 판단하곤 한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저지른 죄로 벌을 받았다는 사실이 있다. 시간이라는 귀한 것을 잡히고 죄의 대가를 치렀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저지른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한번 저지른 일로 평생을 마음 다치면서 살아가야 하는 일이 옳은 것인가 하는 것은 계속 생각해야 할 문제다. 선뜻 다가가기 어려운 존재로 각인해야 하는지, 과거는 과거이므로 지금의 모습만 판단해야 하는지. 이런 마음은 셰어하우스 플라주와 의미가 통하기도 한다. '플라주'는 프랑스어 '해변', 바다와 육지의 경계선, 모호하게 계속 흔들리는 사람과 사람의 접점, 남과 여, 선과 악, 진실과 거짓, 사랑과 미움, 죄와 용서(278페이지)라고 해석한다. 해변이 정확한 선으로 그어서 표시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선이라고 여겼던 일은 때로 악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진실은 거짓과 정반대의 자리에 있지 않을 수도 있다. 죄와 용서가 서로 마주 보고 있기만 하지는 않는다는 것 역시 삶의 경험으로 아는 일이다.

 

다카오를 포함한 셰어하우스 입주자 여섯 명과 집주인 준코. 플라주에 드나드는 손님들과 보호사로 존재하는 몇몇 어른들까지. 이들의 어두운 과거를 아는 데도 나쁜 시선으로만 보지는 않았다. 한 사람으로 인정해주었으며, 하나의 존재로 나아갈 수 있음을 응원하는 것처럼 보였다. 읽다 보면 그들의 어두운 과거가 하나씩 들려올 때마다 그들을 겁내거나 욕해주고 싶은 게 아니라, 그들의 사연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왜 그런 일이 생겼을까, 어쩌다 그런 상황에 빠졌던 걸까, 이제 이들이 살아갈 세상의 시선은 또 어떻게 변화할 수 있을까 하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바빠진다. 거기에 어떤 살인자의 행방을 추적하는 프리랜서 기자가 셰어하우스에 잠입하면서 이야기는 현실적인 고민에 더해 흥미진진해진다.

 

프리랜서 기자가 한 살인자를 쫓고 있었다. 친구를 죽였다는 이유로 살인죄로 복역하다가 2심에서 무죄 판정을 받고 나온 한 사람이 있다. 기자는 그의 소식을 찾아다녔고, 그가 플라주에 세입자로 살고 있다는 걸 알고 위장하여 그곳에 세입자로 들어간다. 살인자의 모든 것을 밝혀내어 그가 무죄가 아님을 입증하고, 그 사건에 대해 다시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도록 그럴싸한 기사를 작성하리라 다짐한다. 그 부분이 조금 아리송했는데, 기자의 시선에서 펼쳐지는 셰어하우스의 모습을 봐도 처음부터 그 살인자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는다.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점점 살인자의 존재를 확인해갈 수 있지만, 선뜻 그가 정말 살인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범죄라는 게 얼굴에 써놓고 다니는 건 아니기에, 그가 얼마나 잔인한 짓을 저질렀는지 들려올 순간을 기대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분명 한 사람의 생명을 빼앗았다.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 그러나 이 나라는 법치국가다. 설령 죄를 저질렀어도 제대로 벌을 받으면 용서해주어도 좋지 않은가. 그 사람이 제대로 생생했는지 어떤지, 재범 가능성이 높은지 낮은지 그건 또 다른 문제일 터다. 일단 벌을 받은 사람에게는 재출발할 기회를 준다. 그 정도는 사회가 보장해주어도 좋지 않은가. (346~347페이지)

 

소설은 마지막에 다다르면서 준코가 왜 전과자들만 들어올 수 있는 셰어하우스를 열었는지, 프리랜서 기자가 왜 무죄 판정을 받은 살인자를 그토록 찾아 헤매면서 셰어하우스까지 들어오게 되었는지 드러난다. 오, 이런. 준코의 사연이야 혹시나 하면서 상상했던 일이기도 하지만, 기자의 잠입 이유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반전을 일으킨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를 향해가는 소설의 결말이 뭉클하다.

 

날마다 똑같아 보이는,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도 어느 하나 같은 파도가 아니다. 달라지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고 달라진 것을 슬퍼해서도 안 된다. (396페이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는 있다. 그 잘못을 반성하고 뉘우치느냐 아니냐 하는 태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로 셰어하우스 플라주는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그 잘못의 다음이 어느 방향으로 갈 수 있는지 긍정의 모습을 보여주는 예가 아닐까 싶다. 범죄자라는 과거가 주홍글씨가 되지 않도록, 다시 사회에서 사람들과 부딪히면서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그렇게 각자의 행복을 찾아가는 과정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누구에게나, 누구라도 생각해볼 문제에 작가는 추리소설로 흥미를 더해가면서 우리가 직접 부딪혀야 할 사회적 문제를 이야기의 중심에 끌어다 놓았다. 죄를 저지른 이들을 갱생한다고 만들어놓은 곳이 교도소나 법의 규율 안에 있는 곳이지만, 셰어하우스 플라주는 그 갱생의 성공을 감동적으로 이루어낸 곳이다. 현실에서 마주 하고 싶은 의미 있는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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