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염둥이 조카들의 학년이 올라갈수록 책의 분위기도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다.

7월 말부터 지난주까지, 무슨 순서 정해놓은 듯 언니네랑 동생네가 다녀갔는데

그때마다 아이들과 어떻게 놀아줘야 할지 몰라서 고민이 된다.

몸을 움직이는 건 내가 귀찮고 더워서 안 되겠고

그래봤자 늘 해준 것처럼 책으로 더위를 날리게 해주어야겠다고...

아낌없이 에어컨 틀어놓고 늘어져 있는 시간을 보낸 게 전부지만,

시원한 극장에서 영화 보고 먹고 쇼핑한 게 전부지만,

그래도 좋다는 얘들이 아직은 귀엽다. 아직은... (좀 더 크면 늙어서 안 귀여움 >.<)

 

확실히 아이들 방학이 되면 신간이 많이 나오기는 하는가 보다.

좋은 책들로 여름을 잘 보냈으니, 곧 다가올 명절 연휴 선물을 또 고르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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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하게 안아줘
김선민(하니로) 지음 / 청어람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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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충분하다... 『따뜻하게 안아줘』

 

3년 정도 같이 살아줄 남자가 필요했다. 엄마에게 남은 시한부 인생이 조금 더 밝고 웃을 수 있기를 바라며 남자를 찾았다. 빨리 결혼할 수 있는 사람, 이왕이면 엄마에게 다정하게 대해줄 사람이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마리는 결혼을 준비했다. 근데 뭐, 그게 쉽나. 마음처럼 그런 상대 만나는 건 쉽지 않았다. 이 정도면 됐다 싶은 남자는 마리의 구역에서 바람이 났고, 마리는 다음 남자를 찾아 나섰다. 그때 마리의 앞에 맞선 상대로 나타난 남자는 기승언. 어렸을 적 같은 동네에서 오가다 얼굴 보면 인사하는 정도였고, 동창인 정언의 형이었다. 그런 그가 왜 맞선남으로 자기 앞에 앉아 있는지 모르겠지만, 솔직하게 말했다. 엄마를 위해 결혼을 해야 한다고, 그냥 한 번 만나볼 사람이 아니라 결혼할 사람이 필요한 거라고. 그에 승언은 답할 수 없다며 거절했고, 마리는 다른 사람을 찾기 위해 맞선 자리에 또 나간다. 거기서 다시 승언을 만난다. 이번에는 승언도 어느 정도 결심을 하고 나왔다. 같은 자리, 두 번째 만남. 상대의 요구를 알아듣고 나온 자리이니, 그냥 한 번 맞선보다는 생각은 아닐 터. 그의 제안은 하나였다. 어차피 결혼을 목적으로 만난 사이, 이제 연애를 하자고.

 

김선민의 글을 좋아한다. 모든 작품을 다 읽은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 취향 맞고 분위기 좋아서 좀 심심한 글이었어도 다른 작품 보이면 읽어볼 수 있는 마음이 드는 호감. 그런 작가의 19금 소설이라니. 그 전에도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접한 김선민의 19금 소설은 이 작품이 처음이다. 그래서 더 궁금했던 듯하다. 말랑하면서도 담백하고, 큰 악역 없이도 지루하지 않게 읽었던 기존의 글에서 더해진 19금의 조화는 어떨까 하고. ^^

 

처음에는 맞선이란 소재에 결혼과 연애가 바뀐 이야기일 거로 생각했는데, 결혼 전에 이미 마음을 풀어놓은 상태로 연애하는 두 사람을 보니 괜히 실실 웃음이 쪼개진다. 거칠 것 없어 보이는 마리가 품고 있는 약한 면을 보면서, 누구나 앓이 하나쯤 갖고 산다는 걸 인정하게 된다. 엄마를 무시하고 괴롭히는 할머니를 인간적으로, 어른으로 존경할 수 없었다. 강해지고 싶었던 건 지키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였고, 그렇게 지키고 싶은 사람이 엄마였다. 그런 엄마가 시한부라니. 더 사랑해도 부족할 시간에 남겨진 시간이 얼마 없다니 뭐라도 해야 했다. 잘 사는 모습, 행복한 모습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택한 게 결혼이다. 좋은 사람 만나서 이렇게 잘살고 있다, 태어난 아기들의 예쁘고 싱그러운 모습 보면서 엄마도 기운을 냈으면 좋겠다, 싶은 바람으로 살아가던 즈음 승언을 만났다. 그를 만난 게 얼마나 다행인 건지, 심성이 반듯한, 좋은 사람에게 좋은 마음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한번 선택한 일에 최선을 다하고 진심으로 대할 줄 아는 사람. 내 사람의 마음을 당연하게 우선하는 사람인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당연한 거 아냐?

 

승언의 매력을 참 예쁘게 그려놨는데, 특히 태도 분명하게 보이며 거절을 잘하는 이 남자가 너무 맘에 든다. 나는 말을 직선적으로 하는 사람이 좀 부담스러울 때가 많은데, 그에 반해 어떤 일을 앞에 두고 분명한 결정-그게 거절이라 할지라도-을 하는 사람이 좋다. 상대가 상처받을까 봐 지지부진하게 끄는 한 마디는, 결국 어장관리밖에 안 된다. 그의 곁에서 후배랍시고, 같은 아픔을 가진 동지라고 해도, 그 선을 넘는 경우를 받아들일 수 없던 그가 뱉은 한 마디, "짐 싸서 나가라"고 했을 때는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었다. 아, 거절은 이렇게 하는 거구나. 군더더기 없이 간단명료하게, 한 마디로, 내가 아닌 마음을 강요당하지 않게, 더는 오해의 여지 없이. 아닌 걸 알았을 때 분명하게 말하는 법을 이 남자에게 사사하고 싶을 정도였다. 상대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 없이, 어떤 상황에서 거절하기 미안해서 우물쭈물했던 기억을 떠올려보니 결과가 좋은 적이 없었다. 결국은 그 미안함이 또 다른 상황, 오해, 상처를 남기던 걸 보면, 미안함에 단호하지 못했던 건 결코 좋은 방법이 아니었던 거다. 이렇게 또 하나를 배운다. 내 것을 지켜야 할 때는 그것만 볼 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에는 분명하게 선을 그을 것, 옳다고 여기는 일, 내 마음을 전하고 싶은 일에는 온 힘을 다하면 될 것.

 

거기에 당찬 마리의 성격도 매력적이다. 거칠기만 할 것 같은 그녀가 마음을 전하는 상대에게는 한없이 너그럽고 부드러워지는 모습이 선해 보인다. 어떤 조건으로 사람을 선택해야만 했던 그녀의 의도가 불순해 보이지만은 않는 게 그런 것 같다. 그 진심이 통했으니 승언 같은 남자 만나서 보듬고 안아주는 포근함을 알게 되는 거고. 따뜻함이란 이런 거구나, 싶은 거 제대로 배웠을 그녀의 마음을 열어보고 싶다. 얼마나 따뜻해졌는지 그 온도 한 번 재보게 말이야.

 

세상이, 사람이, 마음이 따뜻해지는 건 순식간인 듯하다. 어느 순간 통해버리고야 마는 진심이 부리는 힘이 대단하다는 것도 증명하는 것 같고. 착하게 살아서 그런가 보다. 착하게 사는 게 바보처럼 보이기 쉬운 세상에서, 착하게 살다 보니 인간미 넘치는 남자 만나서 제대로 따뜻함을 알아가며 사는 이야기가 이렇게 훈훈할 수가 없다. 등장인물 대부분 선해서 그런가, 이런 결과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걸 보면...

 

큰 거부감 없이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책인데, 너무 술술 풀려가는 이야기에 흥미가 떨어질 수도 있겠다. 큰 사건이나 별다른 기복 없이 흐르면 또 심심함 느낄 독자가 있을지도 몰라서... 중반부터 두 사람의 스킨십이 제대로 드러나는데, 개인적인 생각은 그 씬의 절반을 줄이고 다른 에피소드로 극의 긴장감을 더했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싶다. 앞뒤 맥락 없이 등장하는 씬은 아니었지만, 그것보다는 두 사람 사이에 뭔가 더 단단하게 쌓이는 일들이 등장했으면 싶었다는 개인적인 바람 같은 거. ^^ 사람이 좀 웃긴 게, 누군가를 눈에 담는 순간, 상대가 궁금해지는 순간 이미 마음을 돌리기에 늦었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이대로 직행하는 게 진심일까 싶은 의심과 검열이 생긴다는 거다. 아니라고 한마디 보태면서 주춤거리고 싶은, 그렇게 해야 마음이 안심된다 싶은 거. 그래서 처음에 아니라고 말했던 승언의 태도가 2주 만에 변한 모습이, 그 후로 계속 정신 못 차릴 정도로 마음 드러내는 게 이해가 안 될 수도 있는데, 그건 그냥 그런대로, 그의 진심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더는 문제가 아닌 게 된다. 그래서 단호박 같은 승언의 진심이 더 빛나 보였던 시간.

 

크게 취향 타지는 않을 듯하다. 무난하게, 적당하게 잘 읽히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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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실
김별아 지음 / 해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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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삶을 소설화했다는 소식에 한 번 더 눈길을 주게 된다. 내가 몰랐던 시대의 한 삶이 이렇게 재조명되면 관심 두지 않을 수 없다. 여류소설가 김명순의 인생을 이렇게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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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
소재원 지음 / 작가와비평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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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을 수 없는 답을 앞에 놓고 한없이 소리 높여 얘기하는 것만 같다. 실제 내 입에서 나온 소리는 없는데 내 목은 진즉에 쉬어버린 것 같다. '누가 말 좀 해줘. 이 사고에 대해 책임을 지란 말이야!' 여기저기서 이런 말을 끊임없이 쏟아내는데, 정작 대답을 해야 할 사람들은 말이 없다. 벽을 보고 얘기하는 기분. 그럴 때는 말이 안 통한다면서 금방 뒤돌아서야 하는데, 그럴 수도 없다. 한 사람의 목숨이 거기 있다. 그가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그 안에 갇힐 수 있는 일이었다. 분명하게 해결해야만 다른 희생이 없는 거다. 책임을 회피하며 모른 척하는 일이 대답인 것처럼 행동하고, 안전에 대한 문제가 뒷전으로 밀려나고, 욕심에 눈먼 자들의 배가 불러오는 만행이 더는 없어야만 했다. 왜 그들이 일으킨 사고에 엉뚱한 희생자만 계속 나와야 하는 걸까...

 

주말부부로 지내던 이정수는 그날도 어김없이 아내와 딸이 기다리는 집으로 향했다. 딸의 생일이었고, 생일케이크를 차에 싣고 달리는 길이었다. 그 길에서 마주한 터널을 통과하던 중, 터널은 무너졌고 그는 무너진 터널 안에 갇혔다. 그의 차 앞뒤가 돌덩이로 꽉 막힌 것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구조 작업이 시작되었으나 더디게 이뤄지고 있었다. 터널을 뚫어야 할지 무너진 돌덩이들을 하나하나 걷어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동시에 언론은 쉬지도 않고 터널 붕괴 사건을 내보냈다. 시공사와 관계자들은 터널 공사를 설계대로 진행하지 않았으며, 뒷돈 거래가 있었다. 하청업체 누군가는 양심선언을 했다. 불과 6개월 전에 완공된 터널이 무너진 건 예정된 일이었다. 사람들은 그의 생존을 빌었으며 하루빨리 구조작업이 이뤄지기를 바랐다. 그의 바람 역시 마찬가지. 곧 구조될 거로 믿으며 그 안에서 생존하려는 사투를 벌였다.

 

"살아있단 말이야. 나는 지금 살아있단 말이야. 죽은 사람처럼. 희망 없는 이야기를 꺼내지 말라고."

 

"내 남편은 죽어 가는데! 내 남편은 황당한 사고 속에서 죽어 가고 있는데! 국가가 잘못한 억울함으로 배고픔과 싸우며 죽어 가는데! 당신들은 뭐야! 내 남편에 대한 자료가 하나라도 있는 거야? 지금 뭐하는 거야! 당신들 뭐하고 있는 거냐고!"

 

하루 이틀, 이주, 한 달이 넘도록 이정수는 구조되지 못했다. 쉽지 않은 구조작업이었다. 구조작업만 순조롭게 이뤄진다면 아무것도 바랄 게 없었다, 고 생각하던 찰나. 또 다른 시선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의 구조를 이유로 통제했던 도로 때문에 근처 마을 노인이 사망하게 되고, 생사를 알 수 없는 한 명 때문에 다수의 희생과 손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사람들은 분노했다. 그의 휴대폰 배터리는 방전되었고 외부와 연락이 되지 않았다. 아무도 그의 생사를 알지 못했고, 그 역시 자기가 살아있다는 목소리를 외부로 전하지 못했다. 그에 사람들은 그가 죽었을 거라고 말하며 그의 구조가 계속되어야 하는지 의문을 품었다. 점점 그와 그의 아내를 향한 비난이 계속되고, 많은 사람이 그의 구조에 대한 결단을 하라고 종용한다.

 

답답했다가, 화가 났다가, 누군가를 이해도 했다가... 결국에는 아프기만 한 결말을 봐야만 하는 건지 묻고 싶은 순간, 또 하나의 '손가락 놀이'에 말문이 막힌 채로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아니, 어쩌면 이건 '답정너'일지도 모르겠다. 언제나 그래 왔던 것처럼 대중의 흐름이 어떻게 변할지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가, 그래도 이건 아니겠지 싶은 마음으로 읽게 되면서 그 '답정너'를 피해가기를 바랐다. 적어도 우리 사는 세상에서 더는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을 담은 바람이었는데 여전했다. 계속되는 사고에는 늘 비슷한, 같은 원인이 있었다. 제대로 시행하지 않은 작업에서 재난은 이미 예견되어 있던 거다. 홍수나 쓰나미만이 재난은 아니잖아. 이런, 인간의 욕심으로 무시하고 버린 양심 때문에 늘 사고는 일어난다. '안전하게 설계했다고, 그 상태 그대로 확인받은 대로 시공했어야지, 왜 지시를 무시하고 당신들 맘대로 잘라먹고 주머니 채우면서 선량한 시민을 희생자로 만들어?' 그것뿐이었다면 시시비비를 가리는 게 더 간단했을지도 모른다. 눈에 보이는 뻔한 일에 책임자가 있으니까. 거기에 보태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손가락은 살인을 시작했다. 하나둘, 상처 입고 죽어가는 건 누가 책임질 수 있을까.

 

이정수는 믿었다. 터널 밖의 상황을 알 수 없고 전문 구조자의 말을 들었다. 오직 한 가지. 자기가 구출될 거라 믿으며 버텼다. (그 아이들도 그랬을 거다. 곧 구출될 거로 믿으며 가만히 있으라고 하니 가만히 있었다) 매뉴얼대로 구조작업을 펼쳐도 별 진전이 없었다. (그때도 그랬다. 그렇게 구조에 힘을 쏟았어도, 구조되지 못한 수많은 생명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사람들은 말이 많아졌고 비수를 꽂는 말들로 또 다른 희생자를 만들었다. 손가락이 무기가 된 일방적인 총격전이었다. 아무런 무기도 준비되지 못한 사람은 방어조차 하지 못하고 그 총알을 다 맞을 수밖에 없었다. 애초부터 그 방어가 가능하기나 했던 걸까? 다수의 공격 앞에서? 코너로 몰아가며 스스로 항복하라고 종용하는 그들의 잔인함에 대항할 수 없었다.

 

누구나 자기 입장에서 살아간다. 같은 상황을 두고 어디에 서 있느냐에 따라 판단이 달라진다. 그걸 이중적인 모습이라고 불러도 된다면, 그런 이중성은 누구에게나 존재할 것이다. 그걸 이해한다며 무조건 동조하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그런 모습을 가지고 사는 게 인간이라는 것은 안다. 다만, 이 소설에서처럼 희생자에게 판단과 선택을 강요할 권리가 그들에게 있을까, 하는 궁금증은 여전하다. 그들이 심판할 수 있는 문제인가 하는 의문은 계속된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말하는 게 진정 정의인지 묻고 싶다. 그들이 말하는 게 정의라면, 그들이 내세운 정의는 살인 무기가 된다. '정의=살인'을, 당신은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나? 당신에게 똑같이 적용된다고 해도?

 

터널이 무너지면서 재난의 경고로 시작된 이 소설은 얼굴 없는 살인자들의 살인과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새삼스러울 것 없이 오랜 시간 동안 봐왔던 일이다. 그들이 내는 목소리, 그들이 쳐대는 자판의 소리가 어느 전쟁터에서 들려오는 총소리 같다. 살이 떨리게 무섭다. 이정수와 그의 아내 김미진은, 우리는 기적을 기다리는 게 아니었다. 당연한 일상과 행복을 되찾으려는 것뿐이었다. 그게 얼굴 없는 당신들의 심판을 받아야만 하는 일이었던가?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개봉된다고 해서 관심 두고 있었다. 영화의 예고편으로 느낀 것은 또 하나의 재난 영화가 새로 만들어졌나 보다, 하는 거였다.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재난 그 이상의 것을 들려주고 있었다. 내가 이정수라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내가 김미진이라면 어떤 행동을 취하고 어떤 선택을 했을까, 내가 구조 전문가였다면 끝까지 그의 구조를 외칠 수 있었을까. 나 역시도 사람들에게서 보았던 이기적이고 이중적인 모습 그대로 판단하지 않을까 싶어서 무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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