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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
소재원 지음 / 작가와비평 / 2016년 8월
평점 :
들을 수 없는 답을 앞에 놓고 한없이 소리 높여 얘기하는 것만 같다. 실제 내 입에서 나온 소리는 없는데 내 목은 진즉에 쉬어버린 것 같다. '누가 말 좀 해줘. 이 사고에 대해 책임을 지란 말이야!' 여기저기서 이런 말을 끊임없이 쏟아내는데, 정작 대답을 해야 할 사람들은 말이 없다. 벽을 보고 얘기하는 기분. 그럴 때는 말이 안 통한다면서 금방 뒤돌아서야 하는데, 그럴 수도 없다. 한 사람의 목숨이 거기 있다. 그가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그 안에 갇힐 수 있는 일이었다. 분명하게 해결해야만 다른 희생이 없는 거다. 책임을 회피하며 모른 척하는 일이 대답인 것처럼 행동하고, 안전에 대한 문제가 뒷전으로 밀려나고, 욕심에 눈먼 자들의 배가 불러오는 만행이 더는 없어야만 했다. 왜 그들이 일으킨 사고에 엉뚱한 희생자만 계속 나와야 하는 걸까...
주말부부로 지내던 이정수는 그날도 어김없이 아내와 딸이 기다리는 집으로 향했다. 딸의 생일이었고, 생일케이크를 차에 싣고 달리는 길이었다. 그 길에서 마주한 터널을 통과하던 중, 터널은 무너졌고 그는 무너진 터널 안에 갇혔다. 그의 차 앞뒤가 돌덩이로 꽉 막힌 것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구조 작업이 시작되었으나 더디게 이뤄지고 있었다. 터널을 뚫어야 할지 무너진 돌덩이들을 하나하나 걷어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동시에 언론은 쉬지도 않고 터널 붕괴 사건을 내보냈다. 시공사와 관계자들은 터널 공사를 설계대로 진행하지 않았으며, 뒷돈 거래가 있었다. 하청업체 누군가는 양심선언을 했다. 불과 6개월 전에 완공된 터널이 무너진 건 예정된 일이었다. 사람들은 그의 생존을 빌었으며 하루빨리 구조작업이 이뤄지기를 바랐다. 그의 바람 역시 마찬가지. 곧 구조될 거로 믿으며 그 안에서 생존하려는 사투를 벌였다.
"살아있단 말이야. 나는 지금 살아있단 말이야. 죽은 사람처럼. 희망 없는 이야기를 꺼내지 말라고."
"내 남편은 죽어 가는데! 내 남편은 황당한 사고 속에서 죽어 가고 있는데! 국가가 잘못한 억울함으로 배고픔과 싸우며 죽어 가는데! 당신들은 뭐야! 내 남편에 대한 자료가 하나라도 있는 거야? 지금 뭐하는 거야! 당신들 뭐하고 있는 거냐고!"
하루 이틀, 이주, 한 달이 넘도록 이정수는 구조되지 못했다. 쉽지 않은 구조작업이었다. 구조작업만 순조롭게 이뤄진다면 아무것도 바랄 게 없었다, 고 생각하던 찰나. 또 다른 시선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의 구조를 이유로 통제했던 도로 때문에 근처 마을 노인이 사망하게 되고, 생사를 알 수 없는 한 명 때문에 다수의 희생과 손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사람들은 분노했다. 그의 휴대폰 배터리는 방전되었고 외부와 연락이 되지 않았다. 아무도 그의 생사를 알지 못했고, 그 역시 자기가 살아있다는 목소리를 외부로 전하지 못했다. 그에 사람들은 그가 죽었을 거라고 말하며 그의 구조가 계속되어야 하는지 의문을 품었다. 점점 그와 그의 아내를 향한 비난이 계속되고, 많은 사람이 그의 구조에 대한 결단을 하라고 종용한다.
답답했다가, 화가 났다가, 누군가를 이해도 했다가... 결국에는 아프기만 한 결말을 봐야만 하는 건지 묻고 싶은 순간, 또 하나의 '손가락 놀이'에 말문이 막힌 채로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아니, 어쩌면 이건 '답정너'일지도 모르겠다. 언제나 그래 왔던 것처럼 대중의 흐름이 어떻게 변할지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가, 그래도 이건 아니겠지 싶은 마음으로 읽게 되면서 그 '답정너'를 피해가기를 바랐다. 적어도 우리 사는 세상에서 더는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을 담은 바람이었는데 여전했다. 계속되는 사고에는 늘 비슷한, 같은 원인이 있었다. 제대로 시행하지 않은 작업에서 재난은 이미 예견되어 있던 거다. 홍수나 쓰나미만이 재난은 아니잖아. 이런, 인간의 욕심으로 무시하고 버린 양심 때문에 늘 사고는 일어난다. '안전하게 설계했다고, 그 상태 그대로 확인받은 대로 시공했어야지, 왜 지시를 무시하고 당신들 맘대로 잘라먹고 주머니 채우면서 선량한 시민을 희생자로 만들어?' 그것뿐이었다면 시시비비를 가리는 게 더 간단했을지도 모른다. 눈에 보이는 뻔한 일에 책임자가 있으니까. 거기에 보태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손가락은 살인을 시작했다. 하나둘, 상처 입고 죽어가는 건 누가 책임질 수 있을까.
이정수는 믿었다. 터널 밖의 상황을 알 수 없고 전문 구조자의 말을 들었다. 오직 한 가지. 자기가 구출될 거라 믿으며 버텼다. (그 아이들도 그랬을 거다. 곧 구출될 거로 믿으며 가만히 있으라고 하니 가만히 있었다) 매뉴얼대로 구조작업을 펼쳐도 별 진전이 없었다. (그때도 그랬다. 그렇게 구조에 힘을 쏟았어도, 구조되지 못한 수많은 생명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사람들은 말이 많아졌고 비수를 꽂는 말들로 또 다른 희생자를 만들었다. 손가락이 무기가 된 일방적인 총격전이었다. 아무런 무기도 준비되지 못한 사람은 방어조차 하지 못하고 그 총알을 다 맞을 수밖에 없었다. 애초부터 그 방어가 가능하기나 했던 걸까? 다수의 공격 앞에서? 코너로 몰아가며 스스로 항복하라고 종용하는 그들의 잔인함에 대항할 수 없었다.
누구나 자기 입장에서 살아간다. 같은 상황을 두고 어디에 서 있느냐에 따라 판단이 달라진다. 그걸 이중적인 모습이라고 불러도 된다면, 그런 이중성은 누구에게나 존재할 것이다. 그걸 이해한다며 무조건 동조하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그런 모습을 가지고 사는 게 인간이라는 것은 안다. 다만, 이 소설에서처럼 희생자에게 판단과 선택을 강요할 권리가 그들에게 있을까, 하는 궁금증은 여전하다. 그들이 심판할 수 있는 문제인가 하는 의문은 계속된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말하는 게 진정 정의인지 묻고 싶다. 그들이 말하는 게 정의라면, 그들이 내세운 정의는 살인 무기가 된다. '정의=살인'을, 당신은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나? 당신에게 똑같이 적용된다고 해도?
터널이 무너지면서 재난의 경고로 시작된 이 소설은 얼굴 없는 살인자들의 살인과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새삼스러울 것 없이 오랜 시간 동안 봐왔던 일이다. 그들이 내는 목소리, 그들이 쳐대는 자판의 소리가 어느 전쟁터에서 들려오는 총소리 같다. 살이 떨리게 무섭다. 이정수와 그의 아내 김미진은, 우리는 기적을 기다리는 게 아니었다. 당연한 일상과 행복을 되찾으려는 것뿐이었다. 그게 얼굴 없는 당신들의 심판을 받아야만 하는 일이었던가?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개봉된다고 해서 관심 두고 있었다. 영화의 예고편으로 느낀 것은 또 하나의 재난 영화가 새로 만들어졌나 보다, 하는 거였다.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재난 그 이상의 것을 들려주고 있었다. 내가 이정수라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내가 김미진이라면 어떤 행동을 취하고 어떤 선택을 했을까, 내가 구조 전문가였다면 끝까지 그의 구조를 외칠 수 있었을까. 나 역시도 사람들에게서 보았던 이기적이고 이중적인 모습 그대로 판단하지 않을까 싶어서 무서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