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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나의 시민들 ㅣ 슬로북 Slow Book 1
백민석 글.사진 / 작가정신 / 2017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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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열대야를 경험하는 요즘을 견디기가 힘들다. 밤의 더위로 잠을 자지 못해 아침에 일어나면 눈이 너무 아파서,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다. 한낮의 더위로도 성이 차지 않는지, 밤에까지 그 열기를 남겨두는가 보다. 그럴 때에 만난 쿠바의 이야기가 반가울 리 없다. 온도를 더 높이는 것 같았다. 덥고 습한 쿠바의 열기가 여기까지 전해져올 것만 같아서 무서울 정도였다. 아니, 읽기 전에는 그랬다. 한여름의 무더위에 이 책이 전하는 쿠바의 이야기가 끔찍한 온도를 더해줄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작가가 걸었던 쿠바의 도시, 아바나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다가온 것은 더위가 아니었다. 인간이 뿜어내는 열기였다. 소박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일상 속 뜨거운 온도였다.
누군가가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 '아바나'가 낯설다. 쿠바? 아바나? 익숙하진 않아도 들어왔던 그곳, '하바나'였다. 사실은, '하바나'보다는 그냥 쿠바라는 나라가 조금 더 익숙하리라. 그랬다. 시가를 물고 뿌연 연기를 뿜어대던 영화의 한 장면이 기억 전부일 수도 있는 나라. 체 게바라나 헤밍웨이,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처럼 더 생각나는 게 있지만, 뭐로 보나 낯설다는 감각은 비슷하다. 선뜻 여행지로 선택되는 것도 드문 나라이지 않을까. 쿠바와 한국은 가까운 문화권도 아닌데, 그런 쿠바로 향한 작가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그곳을 걷던 작가의 시야에 잡힌 많은 사람, 많은 장소가 이 책의 주인공이다. 작가 역시 주인공이 아닌 주변인이 되어 그곳을 보고 싶었나 보다. 그곳의 이야기를 풀어낼 자신에게 '당신'이라 부르며 그 발걸음을 뒤에서 보는 것처럼 말한다. 당신의 표정, 당신의 눈빛, 당신의 뒷모습까지 함께 보고 있으니, 그렇게 뒤따라가고 있으니, 어디 한번 가고 싶은 곳으로, 걷고 싶은 속도로, 마음껏 향해보시구려, 라고 말하는 듯이... 느리게, 천천히, 걷고, 바라본다. 그렇게 아바나의 여러 곳을 걸으며 발견한 유일한 것은 사람이다. 아바나의 시민들.
당신은 말한다. 아바나의 진정한 볼거리는 자연광관이나 유적보다 길거리를 걸어 다니는, 아바나의 현재를 구성하는, 과거를 짊어지고 미래를 향해가는 시민들인데. (136페이지)
아바나의 많은 볼거리들은 관광지도에 나오지 않는다. 그저 걷다가 우연히 마주한 장소, 우연히 도달한 시간에 당신은 매번 다른 매력을 발견한다. (237페이지)
쿠바의 수도 아바나를 다섯 구역으로 나누어 걸었다. 말레콘, 아바나 비에하, 베다도, 아바나만 건너, 커피톨리오 인근. 그 안에는 유명해서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도 있겠지만, 작가는 발걸음 닿는 그대로 걸었다. 때로는 길을 잃으면서 마주하게 되는 사람들, 골목의 풍경이 그를 사로잡았다. 말레콘을 걷다가 하루에도 몇 번이나 낯빛을 바꾸는 바다를 보고, 방파제를 때려 부술 만큼 힘이 센 파도를 본다. 도로 건너편까지 흠뻑 적셔놓는 파도에 마음까지 젖는데도, 다시 찾는 곳이다. 열대성 폭우를 만나 몸이 젖기도 했다. 등에 멘 가방이 열려 카메라가 다 젖어가는 줄도 모르고, 비 내리는 거리 풍경을 찍으려 했을까? 그 때문에, 그 순간 그곳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잃은 채로 계속 걷게 될 줄 알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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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를 다시 구하려 쿠바의 점포를 다녔지만, 없었다. 휴대폰 카메라로 대신하는 아바나의 풍경들. 카메라에 다 담지 못한 장면들은 기억에 의존하기로 한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문득 궁금해졌다. 그렇게 기억에 담은 풍경들이 한국으로 돌아와 그에게 얼마만큼의 사진으로 다시 인화되었을까. 이 책을 읽다 보면 점점 보이는 게 있다. 카메라에 담기지 못해 눈앞에 보이지 않는 기억 속 아바나는, 에세이와 소설 사이를 오가며 다 담아내지 못한 사진은 이야기가 되어 펼쳐진다. 석 달 동안 아바나의 곳곳을 걸으며, 그곳의 태양을 맞는다. 산책하듯 나선 걸음에 아바나를 겪는다. 열대성 폭우가 쏟아지고, 뜨거운 햇볕이 살을 태우는 것 같지만, 그보다 더한 매력이 잡아끄는 순간에 기꺼이 빠지고야 만다. 가이드북 없이, 계획이 없이 걷는 길은 그렇다. 모든 것이 예상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아마 그의 가방이 열리고 카메라가 젖어버린 것도 그래서겠지) 그렇게 마주한 곳에서 그는 그곳 사람들의 삶을 본다. 한국에서의 삶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사는 그들에게서 발견한 자유로움과 자연의 경이로움에 한 번쯤 가보고 싶은 곳이 될지도 모른다. 여전히, 그곳에서의 시간이 불편함을 준다는 건 변함이 없겠지만, 그것마저도 문제가 되지 않을 감각을 찾는다. 현실의 무게를 지울만한 무언가가 머릿속을 파고들어 올지도 모른다.
책의 앞부분에서 들려오는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궂은 날에도 변함없이 방파제로 나오는 낚시꾼 할아버지를 보며 작가는 궁금해한다. 하루에 얼마를 버는지, 집은 있는지, 나이와 학벌, 딸린 식구는 있는지, 같은 궁금증에 그는 알게 된다. 아바나에 닿은 그가 아직도 한국식으로 궁금해한다는 것이 아직도 서울에 있는 것과 같다는 걸. 낚시꾼 할아버지에게 그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한국식 가치관을 바리바리 싸 들고 온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 후로, 그곳 사람들의 모습 그대로를 보려 애쓴다. 그곳은, 한국식 셈이 끼어들 이유가 없는 곳이다. 여기서 여행의 목적을 떠올리게 된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쉬려고, 어떤 정보를 찾기 위해서, 누군가를 만나려는 것 같은. 여행의 목적은 다양하다. 여기를 떠나 각자가 정한 그곳을 향해 가는 이유는 많다. 하지만, 여기에서의 일의 연장선이 아니라면, 여행은 오직 그곳에서의 시간과 삶으로 채우는 게 맞는 게 아닐까 싶다.
하나의 장소는 여러 시간대를 통해 여전히 볼거리를 제공한다. 아르마스 광장의 성당은 어느 때는 합창단을, 어느 때는 댄싱팀을, 어느 때는 오케스트라를, 어느 때는 단정하고 꾸밈없는 예배 광경을 제공한다. 당신이 장소들을 남김없이 소비했다고 해서, 아바나를 다 본 것은 아니다. (163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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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가 선 자리가 곧 무대이고 태양은 조명이 되는 곳, 전문 댄서가 없으면 레스토랑 테이블에서 막 식사를 끝낸 연인이 나와 춤을 추어도 이상할 게 없는 곳, 거리의 악사가 부는 색소폰 소리가 멀리까지 퍼지는, 이방인의 카메라에 웃음을 보내는 자연스러움, 올드카의 소음에도 즐거워지는. 아바나는 그런 곳이다. 지리적으로는 중남미에 속하고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 국가라는 쿠바의 배경쯤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 오직 그곳의 사람들만 보게 된다. 그들의 삶에서 풍겨 나오는, 그들이 보는 세상을 사는 법에 한 번쯤은 매료될 것 같다. 그 어떤 자격 조건 없이 스텝을 밟는 거리의 춤꾼들에게서, 뭔가를 잃어버린 채로 떠나온 한국의 시간을 읽는다. 잃어버리고, 찾지 못한 어떤 것을... 한국에서의 속도는 잊고 아바나의 시민들이 걷는 속도를 그대로 보게 하는 순간이다.
아직 그 장소에 있는 듯이 아바나의 태양이 느껴진다. 태양을 찍지 않았어도 모든 사진에 태양이 있다. 낮이 지고 밤이 찾아와도 태양은 열기로 남아 있다. 낮의 눈부심도 잔상처럼 한밤까지 머물러 있다. 열기와 눈부심, 태양 아래 아바나는 모든 것이 뜨겁고 눈부시다. (303페이지)
미사여구가 가득한 문장이 없어도 글에서 보이는 표정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글이다. 뭔가 더해진 감정 없이 있는 그대로, 보이는 장면 그대로를 서술한 느낌. 문을 열고 내다보는 모든 게 피사체가 되는 것이 그곳에 있다. 소비가 아니라 생산의 즐거움을 뿜어내는 그곳 사람들의 표정에, 누군가는 이미 그곳으로 발걸음을 향했을지도 모른다. 변화, 기존의 사고를 벗어나 오롯이 여행지에서의 삶을 보게 하는, 여행의 의미와 만족감을 동시에 전해줄 곳이기에... 나를 감싸 안은 영혼의 족쇄를 벗어던질 수 있는 그곳, 아바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