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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달아서 끈적한 것 - 박상 본격 뮤직 에쎄-이 ㅣ 슬로북 Slow Book 2
박상 지음 / 작가정신 / 2017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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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여행을, 꼭 해야 해?' 나이를 먹으니 자꾸 편한 것만 찾으러 다닌다. 텐트? 오~노~! 허리 아파서 안 돼! 음식을 싸가서 먹자? 오~ 노~노~노~노~! 짐 보따리 바리바리 싸서 이동하는 것도 싫어. 그냥 무조건 편한 곳으로! 잠은 꼭 실내에서 자야 하고, 먹는 것은 어디 식당에서 먹거나 아주 간단하게. 오케이? 여행이란 무릇 이런 것이어야 한다는 기준이 생겼다. 편하게 다녀온다고 하는데도 어딘가를 한번 다녀오면 온몸이 혹사당한 것처럼 피곤한데, 힘들게 다니는 건 안 되는 말씀! 암만! 재충전을 위한 힐링이라고 하는데, 다녀오고 나면 꼭 피로가 오래가더라, 하는 후유증에 무조건 편한 여행을 외치곤 했다. 집 나가면 개고생한다는 교훈을 다시 깨닫고 오기는 싫다는 거다. 그렇지!
그런데 말이다. 무조건 편한 여행을 외치는 나에게 박상은 반박한다. 그냥 가는 거야~!(무슨 노홍철 말투처럼?) 반지하 방의 눅눅함이 싫어서 떠나고, 글이 잘 안 써져서 떠나고, 싼 항공권을 득템해서 떠나고. 말하고 보니 그렇다? 그가 떠나는 데는 이유가 너무 많아서, 오히려 떠나는 이유를 고르기가 더 어려운 거 아닌가! 그의 방랑은 글과 한 몸이 되어 그에게 찰싹 달라붙어 평생을 함께할 동반자로 보인다. (여자가 아니라 방랑이 동반자여서 싫은가, 그대?) 그런 방식의 그의 여행이 어떻게 흘러갈지 뻔히 보이지만, 막상 읽기 전에는 그 뻔함을 느낄 수 없다. 뻔함에, 뻔함에, 또 뻔함에 웃김까지 얹어진 그의 여행기, 음악 방랑기, 들을수록 짠내가 풀풀 난다. 아, 이 아저씨를 어쩌면 좋지?
그만의 여행법에 음악이 슬리퍼 뒤꽁무니처럼 따라붙는다. 아니면 그의 찌질한 일상에 음악이 술안주가 되어 주거나. 럭셔리한 여행도 아니요, 그럴싸한 식당에서 한 끼 해결하는 맛집 투어도 아니다. 의사소통에 혼란이 생겨서 그의 여행은 당연하게 문제로 시작하거나, 이탈리아의 험악한 남자들에게 데어버린 기억이나. 여행자가 한 번 겪을 만한 모든 일은 그에게다 모여서 다가온 듯하다. 박상 특유의 말투와 재치가 이 글을 더 신나게 한다. 그가 겪은 시간이 결코 신나게 보이지 않음에도 그렇게 만드는 게 그의 재주다. 우울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을 것 같은 순간에도 그의 익살은 빛을 발한다. '될 대로 되라지.' 하는 건 우리가 언젠가 꼭 한 번은 저질러 보고 싶은 일탈 같은 거 아닌가? 그런 일탈을 그는 일상으로 만들어버리고 말았으니, 아~ 정말 그의 일상에 뛰어들어보고 싶더라는 간절함이, 적어도 이 책을 읽는 순간만큼은 퐁퐁 샘솟는다. (그의 전작들 제목에서부터 알아보긴 했다. 역시, 범상치 않아.)
우리 눈으로 보면, '저건 제대로 된 게 아니여.' 하는 모든 순간 그에게 음악이 없었다면 어떻게 버텼을까? 그에게 음악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걱정이 되면서도, 나는 막 웃고 싶다. 깔깔깔. 솔직히 음악이 없었다고 해도, 그는 '혼자서도 잘 놀아요' 하는 자세로 아무렇지도 않게 그 순간을 막 건너갔을 것만 같다. (이상하게 그의 인생이 아무 걱정이 안 되는 건 나만 그런 거야?) 그의 말투와 외모가 눈앞에서 두둥실 떠다니는 것 같아서 그가 풀어내는 이 문장들이 너무 생생하기 때문이다. 간신히 오줌을 참고 있는데 <She>가 흘러나올 것은 무엇이냐. (그는 이때 노라조의 <니 팔자야>를 들었다고 말하는데, 나는 왜 <She>가 더 강렬하게 남았는지 모르겠다) 주변에서 봤던, 아기들 기저귀 떼고 소변 가리는 거 가르칠 때 생각난다. (상상 금지!) 어찌 되든 흘러가는 세상살이. 맞다, 걱정해서 뭐하냐, 아무 소용없지, 전인권이 긁는 목소리로 들려주는 <걱정 말아요, 그대>를 귀에 장착하며 잠시 눈앞의 문제들을 잊어도 좋은 거지 뭐. 장염을 앓으며 위로를 받았던 음악이 하필이면 <Patience>일 건 또 뭐란 말인지. 인내하라, 그러면 장염도 날아갈 것이니라, 아멘. 뭐 그런 기도문을 외우기 좋은 분위기였을까? 이한철의 <슈퍼스타>를 복음성가처럼 부르면서 대책 없는 인생들의 파이팅을 외치거나. 고만고만한 인생들에 '건배'를 불러주니 살아갈 만하더라는 통증 완화제 같은 거였거나. 봄날의 어느 날, 식당에서 메밀국수를 먹으며 <봄바람>을 떠올리기도 한다. 벚꽃과 떠나간 그녀와 속초는 장범준의 목소리를 그의 귀에 콕 박아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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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션스(Patience, 인내심)는 페이션트(Patient, 환자)와 한 끗 차이의 단어다. 술 마시고 이 곡의 제목을 떠올릴 때 종종 헷갈린다. 사는 일이 뭔가 안 풀리고, 할 일도 많은데 몸이 아프고, 좌절감과 통증과 외로움이 태풍처럼 밀려올 때 이 음악이라도 없었음 어쩔 뻔했나 싶다. 음악이 있는 한 인간은 절대 혼자가 아님을 다시 깨닫는다. (175페이지)
나는 우울한 기분을 고조시키기도 싫고 차분하게 가라앉히기도 싫어서 블론드 레드헤드의 <Misery Is A Butterfly>를 골랐다. 블론드 레드헤드의 음악들은 기본적으로 암울한 마이너 톤인데 리듬감은 뛰어나다.
그런데 리듬이 빠른 곡도 감정을 차분하게 만들거나 축축 처지게 한다. 이들의 음악은 여행을 출발할 때 듣거나, 막 시작된 연인과 스테이크를 썰면서 들으면 곤란하고, 우울이 집적거려 귀찮아 죽겠을 때 들어야 그저 그만인 것이다. (142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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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그렇게나 좋아하는 그가 소음을 견디기 어렵다는 게 의외였다는 말씀. 음악도 어디 보통 음악이더냐. 헤비메탈을 즐긴다는데, 소음(고음, 찢어지는 음?)에 익숙할 것 같은 그가 새소리를 못 견뎌 새하고 맞짱이라도 뜰까 궁금했는데, 영웅 베토벤의 이름 앞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한발 물러서다니! (아니, 박상, 나는 당신이 정말로 소음으로 귀를 고통스럽게 하는 새에게 한판 뜨자고 할 줄 알았단 말이오!) 하지만 나는 이제 안다. 그가 선한 사람일 것이라는 걸. 진짜 나쁜 사람이었다면 새소리를 신고하거나, 새를 사냥했을지도 모른다. (이러면 너무 심하게 나쁜 사람인가?)
이게 여행 에세이인가, 음악 에세이인가, 헷갈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게 또 무슨 문제가 될까? 그냥 헷갈려버려! 여행지에서 떠오른 음악이나, 음악을 듣다가 찾아오는 깨달음이나, '엄마 손은 약손~' 하면서 들려오는 멜로디에 아픔이 나아졌거나, 여행자의 꼬질꼬질함에도 주눅 들지 않게 귀를 감아주는 '퐈이야~'이거나, 혹시 '비포 선 라이즈'를 찍어볼까 작업용으로 내밀어 보는 노래이거나... 그게 어떤 이유로든 음악이 함께하는 삶에 방점을 찍은 이야기가 술술 풀려나온다. (사실, 그의 찌질하고 짠내 나는 순간에 포착된 음악이 더 많긴 하더라만. ㅋㅋㅋ 그래서 그의 이야기들이 더 웃음이 나긴 하더라만. ㅋㅋㅋ 왜인지 그의 여행법을 한번은 따라하고 싶기도 하더라만. ㅋㅋㅋ 그의 인생 메들리를 저장하고 싶을 정도로 공감이 된다는 게 이상하기도 하더라만. ㅋㅋㅋ) 10년 동안 전 세계를 누볐다는 그의 여행과 음악이 뭉쳐 쏟아낸 이야기가, 그의 방식대로 삶을 걸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시도를 품게 한다.
그의 웃김과 잘생김은 비례한다. 그가 안 웃길 때마다 그의 못생김은 전염병 번지듯 온 얼굴을 덮을 것이다. (이게 말이여, 방구여?) 본인 스스로 잘생겼다고 우기는(?)데 내가 뭐라고 할 말은 없지만, 그는 정말 대단하다. 그 자신의 잘생김(?)을 십분 활용할 줄 안다. 상상 그 이상의 니글거림을 이탈리아에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다. "저, 이번에 내려요."라는 광고도 그의 행보 앞에서는 달콤함이 죽는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도시 베로나에서 과감히 뱉은 그 말, "저 내일 베로나를 떠나요." 아아아악~~~ 이러지 마, 제발. 갑자기 숨쉬기가 힘들어지잖아. 숨이 막힌다고! 저런 작업 멘트 옳지 않아. (그런데 정말 이상하다. 한번은 따라 하고 싶어지는 이 마음은 뭐란 말이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이를 우째. 이런 달달한 멘트를 날렸는데도 그에게 돌아오는 건 콧방귀도 안 되는 것이었으니. '뭐, 어쩌라고?' 아마도 술집의 그 여자는 딱 그런 표정으로 그를 보지 않았을까? 그러면서 내민 감자칩 한 접시는 이별 선물도 뭣도 아니었다. 이 감자칩이나 먹고 떨어져! 까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
작가정신 '슬로북' 시리즈의 의미에 맞게 흘러간다. 병맛 나는 일상에서, 죽을 것처럼 괴로운 문제들에서 잠시 벗어나도 좋을, 눈과 귀로 하는 여행으로 작가에게서 시간을 얻게 한다. 이렇게 오늘을 보내도 괜찮을 것 같고, 지갑에 달랑 만원 한 장 남은 돈으로 어딘가로 향하는 고속버스를 탈 수도 있을 것만 같다. 한두 시간쯤 걸어서 목적지까지 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 별것 없이 맥주로 차린 밥상에 친구들을 초대해도 즐거울 것 같다. (아, 좋아. 편안해. 눈물 날 것처럼 슬픈데도 즐거워. 이거 뭥미?) 그는 너무 옛날 노래 얘기만 할 때도 미안한 마음을 표현했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원래 어느 순간 '그때 그 노래'가 떠오르는 때는, 다 옛날의 시간을 부르는 거다. 오늘을 기준으로... 응? 응답하라 시리즈나, 시그널의 음악이나 그때를 연상하는 장면들에서 저절로 흥얼거리게 되는 음악들이 삽입된 건 다 그런 이유 아닌가? 미안해하지 않아도 됩니다요. 귀에 찰싹 달라붙는 멜로디는 다 그런 세월을 통과한 것들이라오...
추억은 과거 한때 아름다움의 순간 포착이고, 절대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회한의 부작용이 있어서 아픈 것 같다. 잠시 흐뭇해하다 한숨이 나올 만큼 아픈 걸 알면서도 우리들은 또 아름다운 순간들을 수집하고, 추억을 저장할 수밖에 없는 존재 아닌가 싶다. (282~283페이지)
음악이야말로 삭막함의 반대말이다. 경제고 사회고 정치고, 삭막하게 정체된 우리의 지금 여행이 음악의 '뽀샵빨'로라도 좀 아름다울 필요가 있지 않을까. (72페이지)
지금의 속도가 아니라 내 마음의 속도로 오늘을 보내도 괜찮을 것 같은 편안함을 건네는 그에게, 꼭 한마디를 하고 싶다.
배우 이정재는 얼굴에 잘생김이 묻었지만, 당신의 얼굴(글)에는 웃김이 묻은 것으로도 충분할 것 같아요. 안 웃길 때마다 못생겨질 거라는 걱정은 넣어둬요. 지금 웃긴 거로도 당신의 잘생김이 당분간은 유지될 테니. 그러니! 계속 똥꼬발랄해줘요. 젭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