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일반판)
스미노 요루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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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면 섬뜩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보면 이보다 더한 부드러움이 없을 것 같은 이야기.

이미 원작으로 그 아련함을 증명한 소설이기에 이번 영화 개봉이 기대된다.

예고편만으로도 가슴이 설레는 기분에, 서늘해지는 가을인데 봄 느낌이 나기도 한다.

살짝, 오래전의 어떤 시간이 떠오르기도 하고. ^^

읽는 재미, 보는 재미, 두 마리 토끼를 선사하는 작품이 될 것 같다.

오랜만에 추억여행 하고 싶게 만드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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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과 혀 - 제7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권정현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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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지?' 싶은 순간, 아프고 상처받은 사람들만 남겨놓고 소설은 끝나버렸다. 다른 국적, 다른 배경을 가진 세 사람이 만들어낸 역사의 한 시절은, 서로가 바라는 게 달랐어도 결국 같은 의미를 남겨놓았다. 살아야 한다. 아니, '이렇게 살아냈으니 살아야 한다'는 게 맞는 말일까. 어쨌거나 예상하지 못했던 결말에 세 사람의 인연이 어쩌면 처음부터 하나로 엮인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칼로 잘라내도 의미를 잃지 않은 혀의 감각으로 모든 것을 이겨낸 이들의 운명이라고.

 

요리사 첸의 아버지는 도마 위에서 태어났다. 그런 아버지의 영향이었을까. 첸의 요리 솜씨 또한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다만, 그의 출생과 시대적 배경이 그의 요리를 우아하게 만들지 못했을 뿐이다. 첸은 비밀 자경단원이 되어 적지에 위장하고 들어간다. 일본 관동군 사령관 모리(야마다 오토조)의 군대를 몰락시키겠다고 자기 목숨을 걸다니. 최고의 요리로 모리의 혀를 사로잡을 요리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 첸의 뒤에는 위안부 출신의 조선인 아내 길순이 있다. 길순 또한 첸의 작전이 실패하면 바로 투입될 계획으로 늘 긴장한 상태다. 길순에게는 적진으로 뛰어들어 많은 사람을 상대하는 것보다 모리 한 사람만 사로잡으면 더욱 빠른 길로 가는 거였다. 일본 관동군 사령관 모리는 그의 군대를 이끌고 일본의 전쟁 승리를 이끌어야 하는 사람이지만, 소설에서 보는 그는 오히려 전쟁보다는 요리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다. 맛을 안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맛의 기억에 빠져 아직 헤어 나오지 못한다고 해야 할까. 전혀 어울리지 않을 듯한 세 사람이 한국, 중국, 일본의 배경이 되어, 세상에 없는 요리를 맛보며 역사 속으로 스며든다.

 

소설이기에 허구일 테지만,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일본군 사령관 야마다 오토조는 실존 인물이라고 한다. 그의 실제 이야기에 더해진 게 어느 정도일지는 모르겠으나, 모리라는 인물은 전쟁에 대해 조금 다른 시선을 갖게 한다. 강력한 군인의 모습이어야 할 그의 캐릭터는 오히려 군대를 이끄는 사령관으로서는 맞지 않는 이미지다. 전쟁을 무서워하며, 미륵불의 아름다움에 집착하고, (예상하지 못했던) 맛을 탐미하는 인물이다. 그가 빠져드는 맛의 세계에는 어김없이 어머니가 등장한다. 피가 낭자하고 전쟁터라는 배경에 음식이 끼어들 자리가 있을까 싶지만, 이들 모두 음식과 맛에 매료되어 혹은 그 음식을 무기로 상대를 누를 수 있는 계획까지 세운다는 게 사실이다. 그 맛 때문에 모리는 첸의 시한부 목숨을 약점으로 채용하게 되고, 첸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자기의 요리 실력으로 자경단원의 임무를 수행하려 하며, 길순은 그런 두 사람이 경쟁하듯 맛의 세계에 빠져들 때 그 맛을 보며 목숨을 유지해가는 여인이다. 물론 이들 각자가 가진 요리와 맛에 대한 생각이나 태도가 우리가 보는 전부가 아닐지도 모른다. 다만, 자기만의 기억으로 채운 세상에서 취한 듯한, 기다리는 듯한 감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는 게 맛이었다.

 

무언가를 입에 넣어 씹는 순간은 인간이 자신의 생 앞에서 가장 진실할 수 있는 시간이다. 매운맛을 견뎌낸 소고기들이 혀에 부드럽게 녹을 때 비로소 고통조차 달콤해진다. 적들이 넘실거리며 국경을 넘어와 온몸이 무거운 사슬갑옷을 입은 것처럼 거북해질 때도 나는 한 끼의 식사 앞에서 여유를 부릴 것이다. 나는 어머니의 다리를 베고 누워 먹던 분고규의 평화를 아직도 기억한다. 식탁에 빈 접시가 덩그마니 남게 될 풍경을 머리에 드리며 달그닥거리는 소리조차도 아름답게 들리는 시각, 원형의 식탁을 점령하고 앉아 나는 당장 내일 죽어도 좋으니 이 순간만큼은 평화롭다고 외칠 수 있다. 내가 진정으로 신을 느끼는 순간은 포화에 살이 찢긴 시체를 목격할 때가 아닌, 부지런히 뭔가를 먹는 그런 순간이다. (122페이지)

 

다 알 수 없는 요리들, 그 요리가 풍기는 냄새, 그 요리가 오른 상 위의 모습을 그리면서 읽게 되는 장면이 많다.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고, 풍성해야 할 것 같은 장면에서 느끼는 건 오히려 죽음과 가까이 있다는 감각이다. 한 사람은 죽이기 위해 요리를 하고, 한 사람은 죽이기 위해 먹고, 한 사람은 그들 사이의 긴장감을 다 알지 못한 채로 위로가 되는 자리에서 또한 그 요리를 맛본다. 그때마다 생각한다. 맛은 무엇일까, 하고. 그 맛을 느끼는 혀는 무엇으로 맛을 책임지는가, 하고. 긴장감이 서리는 전쟁의 한복판에서 이들이 벌이는 맛의 싸움은 무엇을 보여주려 하는지 궁금증이 쉬이 가시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첸과 모리의 보이지 않는 싸움이 계속 떠올랐다. 혀는 목숨을 구하는 무기가 되기도 하면서 약점이 되기도 했다. 요리사에게 가장 필요한 맛을 보는 일, 누군가에게는 느끼기 위해 맛을 보는 일. 이 두 가지를 한꺼번에 가진 그것, 혀. 첸이 세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처럼 요리하고, 모리가 첸의 요리에 점점 길드는 일이, 어쩌면 그때 진행되고 전쟁의 상황을 대신 보여주는 것 같았다. 점점 일본의 패망이 가까워져 오던 시기, 전쟁을 두려워했던 모리가 중국인 요리사가 내놓는 맛에 빠져들면서, 또 다른 인물이 놓은 함정까지도 알아채지 못하는 우둔한 눈을 만들어놓은 것. 그러면서도 국적이나 상황을 떠나 생존의 우선을 위해 손을 뻗는다.

 

모리와 첸, 길순이 각자의 시점에서 하는 이야기가 개인의 역사이면서도, 세 나라가 흘러온 현재의 모습이었다. 먹는다는 일. 어느 시대를 살고 있어도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일이기도 하다. 그런 음식에 깃든 추억과 아련함은 어떤 위기를 극복하게도 하지만, 한없는 나락으로 떨어트리기도 한다. 첸과 모리의 기억의 대조적이면서도 닮은 이유일지도 모른다. 칼을 휘두르며 목숨을 위협하다가도 혀로 느끼는 맛으로 서로를 위무하는 게, 언제 어디서나 적용되는 인간의 모습이 아닐까 한다. 삶과 가까운 감각들. 장교식당의 화덕이나 극락사의 공양간에서 풍기는 냄새, 그 냄새로 평온해지는 마음, 눈앞에 드러나는 음식의 다채로움으로 나도 모르게 풀어지는 마음. 결국, 음식 앞에서는 불가능한 화해는 없다고 말하고 싶은 것으로 들린다. 길순이 극락사의 부엌으로 그들을 끌어들인 것처럼... 그러고 보면 음식이 아니라 부엌이란 공간의 힘이었던가? 여러 가지 재료를 가져와 다듬고 자르고, 굽고 끓이고 익히면서, 하나의 그릇에 내놓아지고, 그렇게 내놓은 음식을 입에 넣는 자리에 모인 이들이 하나가 되는 듯한 힘을 가진 곳. 어쩌면 그들이 말하는 그 모든 게 결국 하나였을지도 모르겠다. 첸 아버지의 도마, 그 도마 위에서 춤을 추던 칼, 세상 어디에도 없는 요리, 그 요리의 맛을 보며 채워가던 마음이.

 

나는 여전히 말하고 싶다. 이제 우리의 내기는 끝이 났다고. 나는 무엇도 요리하지 않았고 당신은 무엇도 먹지 않았다. 우리는 다만 외로웠을 뿐이라고. 나는 요리를 했고 당신은 접시를 비웠다. 불과 싸우던 나의 시간도, 맵거나 짜거나 달콤하거나 시었을 온갖 요리의 맛들도, 우리를 아프게 했던, 시대가 만들어낸 순간의 고통일 뿐이라고. 한 접시의 요리가 깨끗이 비워지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증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그 짧은 순간 나는 잘린 혀들이 말하는 소리를 듣는다. (318-319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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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애인 있어요
다온향 / 이지콘텐츠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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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애인' 키워드에 충실한 소설. 내용도 뻔하다. 아닌 척하지만 나는 오래전부터 너를 좋아했다, 그런데 이제는 참지 못하겠어서 고백하고 말았다, 관계가 어그러지는 게 싫어서 너를 친구 이상으로 대하지 못하겠다, 등등. 굳이 말하지 않아도 어떻게 전개될지 눈앞에서 그려진다. 그런 소재의 소설이 가져야 할 무기는 역시, 뻔하면서도 지루하지 않게 이끌어가는 능력이라고 해야 할까. 안 봐도 이미 결말 다 아는 걸 굳이 계속 읽을 이유는 없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흥미를 떨어트리지 않고 끝까지 밀고 가는 거, 그게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 의미로 보면 이 소설은 알면서도 페이지를 넘기게 되지만, 너무 몰입하면서 재미를 느끼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분위기였다. 의외로 등장인물이 많아서 각 커플의 이야기를 듣는 재미도 있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개취. 등장인물들 모두에게 할애한 분량 때문에 주인공 커플이 더 돈독해질 수 있는 구석구석의 에피소드가 탄탄하지 못한 느낌도 있다.

 

스물셋. 오총사의 집합은 여전했다. 집합의 이유도 똑같았다. 정원의 실연을 위로하기 위한 자리였으나, 모두가 심드렁했다. 정원이 실연당하는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이더냐. 이번에는 차이는 시간이 좀 빨랐을 뿐이지 뭐, 별다를 게 없었다. 그래서 친구들도 그러려니 하고 술이나 마시고 있던 그때. 늦게 나타난 은표는 그런 정원의 상태를 알면서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다만 부어라 마셔라 하면서 뻗어버린 정원을 가만히 데려다줄 뿐이었다. 이때부터 감지가 된다. 아, 은표가 정원을 오래전부터 좋아하고 있었군! 아니나 다를까. 은표는 오래전에 이들이 어린 마음으로 우정을 쌓아갈 때부터 정원을 좋아하고 있던 거다. 그게 성인이 되고 이십 대의 중반을 향해가는 지금 마음을 술렁이게 한다. 고백할까? 말까? 술 취한 정원을 업고 가는데 제정신이 아닌 정원과 제정신인 은표는 이야기한다. 서른이 되어서도 각자 짝이 없으면 서로 애인해주자고. 그리고 7년 후. 오총사는 서른이 된다.

 

서른이 되었다고 오총사가 어디 가랴. 동건만 애인이 생기고 나머지 네 명은 여전히 솔로였다. 그게 그들 사이에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은표의 정원을 향한 갈증만 커가고 있을 뿐이다. 밤바다를 보러 갔던 그때, 정원이 갑작스레 응급실을 찾게 되면서 싹이 튼 은표의 마음은 더는 참을 수 없게 된다. 그날 이후로 은표는 정원을 자기 여자로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남들 앞에서도 그 마음을 감추지 않는다. 이미 게임 끝인데 뭘 더 가리고 말고 할 거야. 그때부터 정원과 은표 싯구싯구하는 장면들이 빠짐없이 등장하는데, 자고로 어른의 연애란 이런 것이다, 하고 알려주기라고 하고 싶은 건지. 스물셋 그때는 말도 못 하고 가슴앓이 했던 것이, 지금은 노골적으로 표현하면서 누가 봐도 민망한 건 잠시였다. '너네도 알 건 다 알잖아?'라는 눈빛으로 대신 말하며 당당하게 그들의 연애를 즐긴다.

 

이 와중에 어렸을 적에 은표에게 고백했다 거절당한 하정과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모를 주혁의 관계가 화기애애해지는데, 한번 말 꺼내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일단 말을 하고 나면 직선적이고 적나라해지는 게 이들 오총사의 매력인가 보다. ^^ 애들이 거침이 없어. 망설이고, 아프고 슬퍼하고, 후회도 하는 이들이지만, 결국 자기가 한 선택 앞에서는 거리낄 게 없어지잖아. 그에 따른 책임도 알고. 그러니 당연하게 당당해도 되고. 남들 앞에서 '나, 애인 있어요!'라고 우쭐하며 말하는 이들의 표정이 저절로 그려진다. 그래도, 니들 애인 있어요. 그래서 뭐, 어쩌라고? (좋겠다...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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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파이 이야기 (특별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토미슬라프 토르야나크 그림 / 작가정신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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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문장으로 풀어내는 장면을 독자가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물론, 그 문장만으로도 소화 가능한 경우가 대부분일 테지만, 이렇게 일러스트와 함께하는 소설을 읽을 때면 상상하기만 했던 장면을 눈앞에서 마주함으로써 이야기의 이해가 훨씬 빨라진다. 영화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로 흥미로움은 배가 된다. 실제로 『파이 이야기』는 이미 영화화되어 관객의 사랑을 받은 적도 있어서인지, 이번 일러스트 특별판은 소설과 영화의 만남처럼 문장과 장면이 함께 만들어낸 애니메이션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처럼 장면을 다 그리지 못해 이야기의 흐름을 놓칠까 겁이 나는 독자에게 안성맞춤인 형태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아직 소설로도 영화로도 만나지 못한 나에게 이 책을 만난 지금이 행운인 것을.

 

 

인도에서 동물원을 운영하는 가족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형, 그리고 주인공인 파인 파텔. 계속 인도에서 지내는 것의 불안함 때문이었을까. 이 가족은 캐나다로 이민을 위해 동물원 일부를 정리한다. 그렇게 남은 동물 몇몇과 캐나다행 화물선에 오른다. 하지만 이들이 캐나다에 무사히 도착하는 것을 신이 허락하지 않았나 보다. 그들이 탄 배는 태평양 한가운데에 침몰하고 살아남은 이는 파이와 동물뿐이다. 하이에나, 얼룩말, 오랑우탄, 벵골 호랑이와 함께 구명보트에 오른 파이는 생존의 잔인한 현장을 목도한다. 다리를 다친 얼룩말을 하이에나가 잡아먹고, 두 동물의 싸움을 저지하던 오랑우탄을 하이에나가 또 잡아먹는다. 결국, 가장 힘이 센 벵골 호랑이가 하이에나를 처치하기에 이르고, 구명보트에는 파이와 벵골 호랑이만 남았다. 비상식량은 한정되어 있고, 잔인한 호랑이와 인간의 동거는 계속될 수 없었다. 망망대해에서 구조를 바라는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고, 모든 것을 잃은 파이는 오직 이 순간에 살아남아야 한다는 다짐뿐이다. 호랑이는 같이 구명보트에 타고 있던 동물들을 다 잡아먹었는데, 이제 남은 건 파이뿐인데, 결국 파이도 호랑이의 밥이 되어버리고 마는 걸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파이는 227일간을 표류하며 살아남았다. 호랑이와 대치하며, 긴장하며, 배고픔을 참으면서 말이다. 그게 가능했을까? 일반적으로 생각해보면, 육지도 아니고 표류하는 바다 위에서 인간이 호랑이에게 당하지 않고 살아남은 게 있을 수 없는 일로 보인다. 불가능했다. 호랑이가 없었어도 그 위기를 벗어나는 건 어려웠을 일이다. 그런데도 2백여 일이 넘는 시간을 버티며 육지에 도달한 파이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전달하려는 것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소설은 처음부터 긴장하게 했는데, 파이가 신을 언급하면서부터였다. 보통 하나의 종교를 가지는 게 일반적이었다면, 파이는 여러 신에 대한 존중을 표했다. 그가 아는 많은 신에게 기도했다. 그게 안 될 일이었을까? 각 종교의 사제들은 자기가 섬기는 신을 파이도 섬기기를 바라면서 이끌고자 했으나, 파이는 그러지 않았다. 우리나라식으로 하자면, 교회, 성당, 절 모든 곳에 의미를 두고 그 모든 신에 기도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렇게 언급된 신으로 파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는 것들을 이야기하려나 싶은 찰나, 그들이 오른 배의 침몰과 파이의 표류 이야기는 또 다른 이야기를 꺼낸다. 어쩌면 이 소설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모든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우리의 인생이 한 편의 소설에 가까운, '만들어지는 이야기'라거나. 그렇게 듣게 된 이 소설의 2부에 해당하는, 거의 3백여 페이지에 달하는 태평양 한가운데의 파이 이야기는 생존에 관한 문제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본능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2부에 해당하는 태평양 표류기는 모든 시간이 바다 위에서 진행된다. 하나씩 죽어가는 동물들, 결국 살아남은 호랑이와 파이가 어떻게 그 시간을 견뎌오는지 들려주면서, 생존을 위해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러니까 이런 것. 우리 삶은 보편적으로 흐르는 것과 동시에, 이성이란 것이 탑재되어 본성이 먼저 나아가려는 것을 막는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늘 이성적인 판단을 앞세우고 사는 것일 테다. 그러한 일상을 보내는 게 우리의 평소 삶이라면, 파이가 벵골 호랑이 리처트 파커와 함께한 생존기는 수시로 찾아오는 절망과 위기의 순간에 본능이 이성을 누르고 튀어나오는 순간을 증명한다. (이 소설의 3부에서 나오는 이야기로 유추하자면 인간에게 내재한 생존을 위한 본능의 잔인함이 어떠한지 그대로 확인할 수 있다) 신에게 갈구해도, 누군가 나를 구해줄 거라 희망을 품으려고 애쓰는 와중에도 이성이 우리를 살게 하지는 않는다. 위기에 빠지는 순간마다, 특히 그 위기가 생존과 관련 있을 때는 더더욱 본능이 이성을 앞선다. 하이에나, 얼룩말, 오랑우탄, 호랑이가 살아남기 위해 싸우듯이 상대의 목숨을 앗아간 것은 그러한 생존과 본능을 위한 일이었다. (3부에서 이 동물들의 의미가 더 깊게 드러난다) 이 동물들이 파이와 공존하면서, 자기 존재를 위해 어떻게 행동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공포의 대상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지를. 강인해지고 잔혹해질 수밖에 없다. 목숨을 앞에 둔 우리는 그렇게 된다.

 

"지금 우리가 들러보지 않은 동물들도 위험하단다. 그것들이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는 생각은 하지 마. 생명이 있는 것은 아무리 작아도 방어를 한단다. 동물은 뭐든 사납고 위험해. 죽이지 않을지는 몰라도 다치게는 하지. 사람을 긁고 물어서, 상처가 붓고 곪지. 고열이 나고 열흘씩 입원해야 되기도 하고." (69페이지)

 

모든 생물은 광기가 있어서, 때론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방식으로 행동한다. 이런 미치광이 기질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것이 적응의 원천이기도 하니까. 그런 기질이 없으면 어떤 종도 생존하지 못할 것이다. (72~73페이지)

 

내 목숨이 위협 받을 때는, 생존을 향한 이기적이고 무시무시한 갈망도 동정심도 가려져버린다. (189페이지)

 

동시에, 수많은 선택에 관한 고민을 안겨주기도 한다. 앞서 말한, 어떤 순간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생존이 달라진다. 파이(동물들)가 이성을 앞세웠다면 평소의 모습대로 했다면 상대의 강인함에 고개 한 번 들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고, 본능을 앞세웠다면 자기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 치열하게 싸웠을 것이다. 파이의 아버지가 누누이 말했던 동물의 방어기제, 본성을 이미 알기 때문이다. 그러니 살아가는 모든 순간에 신에게 간절히 바라는 기도를 하면서도, 실제로 응용하게 되는 건 목숨을 건 사투, 본능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본능을 누르고 살면서 세상의 이치에 순응해야 할지, 나를 시험하듯 모험 속에 내던져야 할지 항상 선택의 길에 서게 될 것이다.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던 절망을 생존의 희망으로 바꾼 파이처럼 살아가기 위해, 수없이 많은 내적 갈등을 겪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때마다 또 고민한다. 무엇이 이성과 본능, 무엇이 나를 살게 할 것인지를.

 

 

"세상은 있는 모습 그대로가 아니에요. 우리가 이해하는 대로죠, 안 그래요? 그리고 뭔가를 이해한다고 할 때, 우리는 뭔가를 갖다 붙이지요. 아닌가요? 그게 인생을 이야기로 만드는 게 아닌가요?" (459~460페이지)

 

이렇게 유명하고 사랑받은 작품을 이제라도 읽게 된 게 다행이다. 문장과 일러스트가 함께 보여준 재미도 영화를 보는 것 같아서 흥미로웠다. 특히 색채가 강해서인지 동물들과 바다의 장면들이 더 생생한 느낌이다. 사진 한 장으로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 움직이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로 생동감이 넘친다. 문장에서 보이는, 동물과의 대치에서 흐르는 긴장감, 이대로 생존할 수 있는지 고민하게 되는 심각함, 낯설고 생소한 바다의 분위기까지 일러스트가 그대로 전한다. 마치 읽는 이가 파이가 되어 그 바다 위에서 표류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말이다. 올컬러 일러스트 40여 점이 수록된 이번 특별판이, 아직 파이 이야기를 만나지 못한 독자와 관객에게 호기심을 더해줄 것 같다. 문장과 장면 속으로 빠져들어, 힘껏 싸우고 헤엄쳐 육지에 도달할 그 순간까지의 모험을 피부로 느끼게 될지도 모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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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7 15: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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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8 15: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eBook] SALTY SALTY SALTY(솔티 솔티 솔티)
하얀어둠 / 스칼렛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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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책이 있다. 읽기가 망설여져서 미루고 미루다가, 가끔 궁금하긴 하지만 책 선택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아주 완벽히 잊히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기억될 자리의 불안함을 남겨놓는 책. 하얀어둠의 <솔티 솔티 솔티>는 내게 그런 책이었다. 종이책 출간 당시의 입소문에 내 취향이 아닌 듯하여 저기 멀리 미뤄둔 책이면서, 궁금함은 늘 남아있는 책. 호불호가 심하게 나뉘는 것 같아서 내내 망설였다. 종열이의 걸쭉한 욕사포가 거슬리면 읽기 어려울 것이고, 이 짠내나는 남자를 이해하면 한없이 소중한 책이 될 거라고, 누군가가 그랬다. 그 말이 맞더라. 속내를 들여다보고 나니, 순간순간 치고 들어오는 먹먹함이 문장 곳곳에 스며들더라. 여전히 종열이가 쏟아내는 욕이나 막말은 거북하지만, 그가 진심과는 다르게 거칠게 말하는 걸 알게 된 순간 괜히 눈물이 날 것만 같다는 걸...

 

처음부터 등장하는 종열이의 '씨발' 라임은 많이 거슬렸다. 어디 그것뿐이랴. 종열이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은 욕 아니면 거친 말이었다. 그냥 모르는 사이로 지내도 옆에 지나가는 것조차 싫은 사람. 나에게 종열이의 첫인상은 그랬다. 중국집 운영하는 종열이는 모든 것을 아끼는 남자였다. 최소한의 생필품을 제외하고는, 그에게 소비라는 건 없었다. 한겨울의 맹추위마저도 그에게는 별것 아닌 일상이었다. 뭐 하러 난방을 돌리냐, 뭐 하러 핸드로션을 따로 사는 거냐, 뭐 하러 오래 씻으면서 낭비를 하냐, 등등. 그의 생활은 아끼고, 안 쓰고, 또 아끼고 안 쓰는 것이다. 내가 힘들게 번 돈 남의 아가리에 처넣어주는 건 죄악이라 여기는 사람 같았다. 그런 종열이 앞에 나타난 정지안은 그의 절약 개념을 서서히 무너뜨리는 여자였다.

 

왕따 당하던 남동생의 죽음. 남동생의 죽음을 시작으로 지안의 가정은 무너진다. 곧 어머니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지안 홀로 남았다. 그런 그녀의 삶이 편할 리 없다. 아르바이트로 대학 생활을 이어가던 중, 호프집에서 운명을 맞이한다. 남동생을 죽음에 이르게 한 무리, 죄는 무거운데 형벌은 너무 가벼워 일상을 누리는 자들. 그들을 눈앞에서 본 지안은, 그들이 자기 남동생의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것을 보고,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호프집 주방에서 가져온 칼로 그 무리의 주동자를 찔렀다. 다행히 그의 목숨은 건졌으나 하반신 마비의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안은 징역 6년을 선고받고 담담하게 형을 치른다. 그리고 6년이 흘렀다. 교도소 문을 열고 나온 그녀에게 남은 건, 몇십만 원의 돈과 작은 가방 하나. 그녀의 작은 몸 하나 뉠 곳이 없다. 일할 곳도 없었다. 그때 종열이 지안의 앞에 나타난다. 무작정 끌고 그의 집으로 간다. 잠잘 곳, 먹을 것, 누군가의 그늘 같은 안도를 내놓은 종열은 왜 지안에게 손을 내밀었을까.

 

이해가 안 되는 시작이었다. 그렇게 끌고 갔다고 순순히 종열을 따르던 지안이나, 욕과 거친 말을 쏟아내면서도 지안을 놓지 않고 끝까지 데리고 간 종열이나... 생판 모르던 사이였던 두 사람이 왜 그렇게 만나야만 했을까. 알 수 없다고,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읽어 가는데, 문득문득 울컥해져서 혼났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도무지 내 취향이 아닌 이 글을, 이 주인공들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운데, 왜 자꾸 이들의 삶을 엿보고 싶은지 모르겠다. 종열이의 짠내는 그럴 수밖에 없는 역사를 가졌다. 지안이의 현재는 종열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다. 돈 때문에 서글펐고, 돈이 분노하게 했고, 돈을 아끼며 살아야 했던 종열의 시간을 이해하고 싶어졌다. 그런 기억을 가진 누구나 종열과 비슷한 생활을 만들지 않았을까. 돈이 없이는 그 어떤 것도 불가능한 세상에서, 그 순간 종열이 선택한 게 죽음이 아니라 짠돌이 생활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 그래서 오랜 시간이 흘러 지안이를 만나게 된 게 마치 운명처럼, 서로를 보듬고 살 수밖에 없는 사이가 된 거라고 말이다.

 

방끈 짧은 남자와 전과자 여자가 세상을 살 방법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범한 삶을 이뤄낼 기회가 얼마나 있을까. 사회의 사각지대에 머문 두 사람을 한가운데로 끌어내 무언가를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착각이 들 만큼, 절망에서 삶의 의지를 불러오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그렸다. 그들이라고 남들처럼 살고 싶지 않았을까? 예쁘고 멋있게 차려입고, 맛있는 음식 먹으면서, 보기에 그럴싸한 집에, 한겨울에도 반소매를 입고 다닐 정도로 난방을 켜고, 구멍 난 운동화를 버리고 새 신발을 사는 일들. 매일 웃고 사는 일상이 그렇게 갖춰진 것들 때문이라면 못할 것도 없겠지. 그런데 이 두 사람의 삶의 목적은 그런 물질적인 것들이 아니었다. 살아야 하는 일, 살아내는 일이 우선이었던 거다. 누군가가 행하는 소비의 일상이, 그들에게는 삶의 우선순위가 아니었던 거다.

 

세상의 바닥을 살던 두 사람이 만난 오늘이, 점점 내일을 그리는 일상이 되어가는 기적을 본 것만 같다. 꼭 돈 때문이 아니더라도, 누군가 지금 가장 울고 싶은 순간에 이 책을 펼쳐 든다면 어김없이 빠져들고 말 것만 같다. 그들의 간절함을 엿보면서 위로받을 수 있을 것만 같다. (다만, 종열이의 지독한 츤데레를 예뻐해 줄 수 있다면 말이지.) 종열이의 말투나 지안이에게서 볼 수 없는 자존감에 화가 나다가도, 어쩌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들과 같은 삶을 이어온 이들이 겪는 현실이 그대로 묻어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불러올 때면 침묵하게 된다. 전혀 알지 못했던 누군가의 삶을 확인하는 기분이 이런 걸까 싶을지도... 혹시 종열이의 욕이, 거친 말이 그의 삶을 대신 표현하는 걸 알게 되면 그나마 조금은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진심을 드러내는 방식이 그러하여 거슬리더라도 이 소설을 끝까지 읽어줄 아량이 저절로 생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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