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과 혀 - 제7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권정현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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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지?' 싶은 순간, 아프고 상처받은 사람들만 남겨놓고 소설은 끝나버렸다. 다른 국적, 다른 배경을 가진 세 사람이 만들어낸 역사의 한 시절은, 서로가 바라는 게 달랐어도 결국 같은 의미를 남겨놓았다. 살아야 한다. 아니, '이렇게 살아냈으니 살아야 한다'는 게 맞는 말일까. 어쨌거나 예상하지 못했던 결말에 세 사람의 인연이 어쩌면 처음부터 하나로 엮인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칼로 잘라내도 의미를 잃지 않은 혀의 감각으로 모든 것을 이겨낸 이들의 운명이라고.

 

요리사 첸의 아버지는 도마 위에서 태어났다. 그런 아버지의 영향이었을까. 첸의 요리 솜씨 또한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다만, 그의 출생과 시대적 배경이 그의 요리를 우아하게 만들지 못했을 뿐이다. 첸은 비밀 자경단원이 되어 적지에 위장하고 들어간다. 일본 관동군 사령관 모리(야마다 오토조)의 군대를 몰락시키겠다고 자기 목숨을 걸다니. 최고의 요리로 모리의 혀를 사로잡을 요리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 첸의 뒤에는 위안부 출신의 조선인 아내 길순이 있다. 길순 또한 첸의 작전이 실패하면 바로 투입될 계획으로 늘 긴장한 상태다. 길순에게는 적진으로 뛰어들어 많은 사람을 상대하는 것보다 모리 한 사람만 사로잡으면 더욱 빠른 길로 가는 거였다. 일본 관동군 사령관 모리는 그의 군대를 이끌고 일본의 전쟁 승리를 이끌어야 하는 사람이지만, 소설에서 보는 그는 오히려 전쟁보다는 요리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다. 맛을 안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맛의 기억에 빠져 아직 헤어 나오지 못한다고 해야 할까. 전혀 어울리지 않을 듯한 세 사람이 한국, 중국, 일본의 배경이 되어, 세상에 없는 요리를 맛보며 역사 속으로 스며든다.

 

소설이기에 허구일 테지만,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일본군 사령관 야마다 오토조는 실존 인물이라고 한다. 그의 실제 이야기에 더해진 게 어느 정도일지는 모르겠으나, 모리라는 인물은 전쟁에 대해 조금 다른 시선을 갖게 한다. 강력한 군인의 모습이어야 할 그의 캐릭터는 오히려 군대를 이끄는 사령관으로서는 맞지 않는 이미지다. 전쟁을 무서워하며, 미륵불의 아름다움에 집착하고, (예상하지 못했던) 맛을 탐미하는 인물이다. 그가 빠져드는 맛의 세계에는 어김없이 어머니가 등장한다. 피가 낭자하고 전쟁터라는 배경에 음식이 끼어들 자리가 있을까 싶지만, 이들 모두 음식과 맛에 매료되어 혹은 그 음식을 무기로 상대를 누를 수 있는 계획까지 세운다는 게 사실이다. 그 맛 때문에 모리는 첸의 시한부 목숨을 약점으로 채용하게 되고, 첸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자기의 요리 실력으로 자경단원의 임무를 수행하려 하며, 길순은 그런 두 사람이 경쟁하듯 맛의 세계에 빠져들 때 그 맛을 보며 목숨을 유지해가는 여인이다. 물론 이들 각자가 가진 요리와 맛에 대한 생각이나 태도가 우리가 보는 전부가 아닐지도 모른다. 다만, 자기만의 기억으로 채운 세상에서 취한 듯한, 기다리는 듯한 감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는 게 맛이었다.

 

무언가를 입에 넣어 씹는 순간은 인간이 자신의 생 앞에서 가장 진실할 수 있는 시간이다. 매운맛을 견뎌낸 소고기들이 혀에 부드럽게 녹을 때 비로소 고통조차 달콤해진다. 적들이 넘실거리며 국경을 넘어와 온몸이 무거운 사슬갑옷을 입은 것처럼 거북해질 때도 나는 한 끼의 식사 앞에서 여유를 부릴 것이다. 나는 어머니의 다리를 베고 누워 먹던 분고규의 평화를 아직도 기억한다. 식탁에 빈 접시가 덩그마니 남게 될 풍경을 머리에 드리며 달그닥거리는 소리조차도 아름답게 들리는 시각, 원형의 식탁을 점령하고 앉아 나는 당장 내일 죽어도 좋으니 이 순간만큼은 평화롭다고 외칠 수 있다. 내가 진정으로 신을 느끼는 순간은 포화에 살이 찢긴 시체를 목격할 때가 아닌, 부지런히 뭔가를 먹는 그런 순간이다. (122페이지)

 

다 알 수 없는 요리들, 그 요리가 풍기는 냄새, 그 요리가 오른 상 위의 모습을 그리면서 읽게 되는 장면이 많다.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고, 풍성해야 할 것 같은 장면에서 느끼는 건 오히려 죽음과 가까이 있다는 감각이다. 한 사람은 죽이기 위해 요리를 하고, 한 사람은 죽이기 위해 먹고, 한 사람은 그들 사이의 긴장감을 다 알지 못한 채로 위로가 되는 자리에서 또한 그 요리를 맛본다. 그때마다 생각한다. 맛은 무엇일까, 하고. 그 맛을 느끼는 혀는 무엇으로 맛을 책임지는가, 하고. 긴장감이 서리는 전쟁의 한복판에서 이들이 벌이는 맛의 싸움은 무엇을 보여주려 하는지 궁금증이 쉬이 가시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첸과 모리의 보이지 않는 싸움이 계속 떠올랐다. 혀는 목숨을 구하는 무기가 되기도 하면서 약점이 되기도 했다. 요리사에게 가장 필요한 맛을 보는 일, 누군가에게는 느끼기 위해 맛을 보는 일. 이 두 가지를 한꺼번에 가진 그것, 혀. 첸이 세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처럼 요리하고, 모리가 첸의 요리에 점점 길드는 일이, 어쩌면 그때 진행되고 전쟁의 상황을 대신 보여주는 것 같았다. 점점 일본의 패망이 가까워져 오던 시기, 전쟁을 두려워했던 모리가 중국인 요리사가 내놓는 맛에 빠져들면서, 또 다른 인물이 놓은 함정까지도 알아채지 못하는 우둔한 눈을 만들어놓은 것. 그러면서도 국적이나 상황을 떠나 생존의 우선을 위해 손을 뻗는다.

 

모리와 첸, 길순이 각자의 시점에서 하는 이야기가 개인의 역사이면서도, 세 나라가 흘러온 현재의 모습이었다. 먹는다는 일. 어느 시대를 살고 있어도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일이기도 하다. 그런 음식에 깃든 추억과 아련함은 어떤 위기를 극복하게도 하지만, 한없는 나락으로 떨어트리기도 한다. 첸과 모리의 기억의 대조적이면서도 닮은 이유일지도 모른다. 칼을 휘두르며 목숨을 위협하다가도 혀로 느끼는 맛으로 서로를 위무하는 게, 언제 어디서나 적용되는 인간의 모습이 아닐까 한다. 삶과 가까운 감각들. 장교식당의 화덕이나 극락사의 공양간에서 풍기는 냄새, 그 냄새로 평온해지는 마음, 눈앞에 드러나는 음식의 다채로움으로 나도 모르게 풀어지는 마음. 결국, 음식 앞에서는 불가능한 화해는 없다고 말하고 싶은 것으로 들린다. 길순이 극락사의 부엌으로 그들을 끌어들인 것처럼... 그러고 보면 음식이 아니라 부엌이란 공간의 힘이었던가? 여러 가지 재료를 가져와 다듬고 자르고, 굽고 끓이고 익히면서, 하나의 그릇에 내놓아지고, 그렇게 내놓은 음식을 입에 넣는 자리에 모인 이들이 하나가 되는 듯한 힘을 가진 곳. 어쩌면 그들이 말하는 그 모든 게 결국 하나였을지도 모르겠다. 첸 아버지의 도마, 그 도마 위에서 춤을 추던 칼, 세상 어디에도 없는 요리, 그 요리의 맛을 보며 채워가던 마음이.

 

나는 여전히 말하고 싶다. 이제 우리의 내기는 끝이 났다고. 나는 무엇도 요리하지 않았고 당신은 무엇도 먹지 않았다. 우리는 다만 외로웠을 뿐이라고. 나는 요리를 했고 당신은 접시를 비웠다. 불과 싸우던 나의 시간도, 맵거나 짜거나 달콤하거나 시었을 온갖 요리의 맛들도, 우리를 아프게 했던, 시대가 만들어낸 순간의 고통일 뿐이라고. 한 접시의 요리가 깨끗이 비워지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증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그 짧은 순간 나는 잘린 혀들이 말하는 소리를 듣는다. (318-319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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