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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의 높은 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1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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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잃은 이들의 가슴 속에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남아있는 게 없는데도 살아가야 하는 게 또 우리 인간들이라, 그래서 살아갈 이유를 다시 찾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럼 어디로 가서 그 사랑을, 이유를 찾아야 하나? 그 사랑을 되찾는 길은 누가 알려줄 수 있나? 생각하면 할수록 어려운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오히려 그 길은 의외의 곳에서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생긴다. 얀 마텔의 이 소설 『포르투갈의 산』의 주인공들처럼 말이다.
저마다의 방법으로 그 길을 떠나고, 살아가는 의미를 찾아야 하는 이들이 한곳에 모여 상실을 견디는 순간을 그린다. 언젠가는 벗어나야 할 순간이기도 하고, 오늘이 아닌 내일을 살아가기 위한 우리의 자세이기도 하다. 누구나, 언제나 다가올 수 있는 일을, 어차피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면 어떻게 잘 건너가야 하는지 묻는 순간이기도 하다. 총 3부로 구성된 이 소설이 서로 다른 등장인물을 배치함으로써 드러내고 싶은 이유도 비슷하다. 그렇게 걷다 보면 찾아지는 어떤 곳을 향해 가는 길, 각자가 간절히 바라는 믿음의 종착역-우리는 그곳을 각자의 유토피아라고 부를지도 모르지만-을 마주하게 되리라는 것. 우리가 돌아가야만 하는 곳을 이렇게 지켜보면서 구원의 순간을 그린다.
사랑은 방이 많은 집이다. 사랑을 먹이는 방, 사랑을 즐겁게 하는 방, 사랑을 씻기는 방, 사랑에게 옷을 입히는 방, 사랑을 쉬게 하는 방. 이 방들은 또한 웃음을 위한 방, 이야기를 듣는 방이거나 비밀을 털어놓는 방이거나 심통이 나는 방이거나 사과하는 방이거나 단란함을 위한 방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새로 들어온 식구들을 위한 방들도 있다. 사랑은 집이다. 매일 아침 수도관은 거품이 이는 새로운 감정들을 나르고, 하수구는 말다툼을 씻어 내리고, 환한 창문은 활짝 열려 새로이 다진 선의의 싱그러운 공기를 받아들인다. 사랑은 흔들리지 않는 토대와 무너지지 않는 천장으로 된 집이다. 그에게도 한때 그런 집이 있었다, 그것이 무너지기 전까지는. 이제 그의 집은 어디에도 없고 ─ 알파마의 아파트는 수도사의 방처럼 을씨년스럽다 ─ 어느 집이든 발을 디디면 그의 집이 없다는 사실만 상기될 뿐이다. 애초에 율리시스 신부에게 끌린 것도 그 때문이라는 걸 토마스는 안다. 둘 다 집이 없다는 점 때문에. (35페이지)
1904년. 토마스는 고미술박물관에서 학예사 보조로 일한다. 운명이 그에게 이런 잔혹함을 줄 거로 생각하지 못한 순간에, 그는 아들과 아내와 아버지를 잃는다.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듯하다. 그때 토마스는 기록보관소에서 한 신부의 일기장을 발견한다. 17세기에 기록된 그 일기장으로 토마스는 신부가 남겨놓은 보물을 찾아서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향한다.
1939년. 에우제비우는 병리학자다. 그리고 두 명의 마리아. 사랑하는 아내 마리아는 둘이 같이 좋아했던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과 복음서를 이야기한다. 또 다른 마리아는 남편의 시신을 가방에 담아와 에우제비우에게 부검을 요청한다. 남편의 시신을 가방에 담아와 부검을 요구한 것도 평범하지 않은데, 부검의 이유도 특이하다. 남편의 사망 이유가 아니라, 남편이 살아온 시간을 듣고 싶어 하는 거다.
1981년. 피터는 40여 년을 함께한 아내를 떠나보내고 상원의원으로 살아온 정치에도 환멸을 느낀다. 출장지에서 우연히 마주하게 된 침팬지 '오도'에게 끌리고 오도와 함께 살기로 한다. 자신을 옥죄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침팬지 오도와 함께 고향인 포르투갈로 건너가 새로운 삶을 꾸린다.
그러고 나니 할 일이 없다. 3주 동안 - 아니 한평생일까? - 쉼 없이 움직였는데, 이제 할 일이 없다. 무수한 종속절과 수십 개의 형용사와 부사가 들어가고, 기발한 접속사들이 문장을 새로운 방향으로 끌어가는 와중에 - 예기치 못한 막간의 촌극까지 끼어들고 - 하이픈 없는 명사들이 난무하는 장문이 마침내, 놀랍도록 고요한 마침표와 함께 끝이 난다. 한 시간쯤, 꼭대기 층 계단참에 나가 앉아서, 지치고 조금 긴장이 풀리고 살짝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커피를 마시면서, 그는 그 마침표에 대해 생각한다. 다음 문장은 무엇을 가져오려나? (332페이지)
서로 다른 시간대의 세 남자가 '포르투갈의 높은 산'이라는 공통의 목적지를 찾아간다. 각자의 다른 이야기였지만, 결국에는 그곳에서 마주할 치유의 순간이 같은 거였다. 어찌 보면 그곳은 신비의 장소이기도 하지만, 인간이 가지는 슬픔과 고통, 분노를 털어내면서 마주하는 것은 예수의 여정을 이어가듯 그 끝에서 마주할 무언가로 우리는 슬픔을 정돈하는 시간을 만나게 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낯선 존재들과 마주침이 또 다른 이야기를 끌어내고, 계속되는 대화로 우리가 가둬두었던 상실과 직면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신비의 장소처럼 보이는 '포르투갈의 높은 산'은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으로 지정된다. 그것은 곧 사랑의 시작이자 사랑이 존재하는 '집'이라는 공간과 동의어가 되기도 하는데, 우리의 회복과 안정을 만들어주는 곳이라는 개념을 심어주기도 하는 것 같다. '집을 잃은' 우리의 상실감은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 차기 마련이지만, '집으로' 가는 여정을 통해 새로운 시간을 겪으면서, 결국 '집'에 도착해 우리 삶을 다시 시작하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인 것처럼... 그렇게 삶이 나아가는 것을 증명이라도 해주듯 흐르는 이야기에 또 한 번의 기적 같은 순간을 목도한다.
분위기가 상당히 묘해서 마치 환상 여행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전작 『파이 이야기』가 조금은 강한 느낌의 모험 같았다면, 이번 소설 『포르투갈의 높은 산』은 조금은 몽환적인 분위기의 여행 같은 느낌이다. 뭔가를 찾아야 할 것만 같은 목적과 오늘의 슬픔과는 다른 내일의 빛을 보려는 노력이 서서히 드러나는 것을 곧 확인하게 될 것 같다는 확신. 그렇게 우리는 잃은 사랑을 찾아가며, 남아 있는 삶을 향해가는 존재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