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슬픔을 훔칠게요 - 김현의 詩 처방전 시요일
김현 지음 / 미디어창비 / 2018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왜 이렇게 닮은 걸까요. 사랑에 아파하고, 앞날의 불안함에 슬퍼지고, 가족의 고통에 공감하는, 일상의 많은 부분에서 찾아오는 슬픔과 기쁨의 크기가 왜 이렇게 비슷한 걸까요. 그나마 내 안에 자리한 슬픔을 그때그때 다 털어놓으면 속이라도 후련해질 것을, 그게 또 항상 가능한 일은 아니잖아요. 어쩌면 평생 말을 못 하고 품고 지낼 수도 있고요. 내가 지금 이런 걱정을 하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까 봐, 이런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게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게 될까 봐, 타인이 들어봤자 해결될 문제도 아닌 게 되어버릴까 봐... 그러게요. 그런 것 같기도 해요. 곰곰이 생각해보면, 결국 내가 품고 끝까지 가지고 가야 할 감정과 문제들일 텐데 말해서 뭐하나 싶은 생각도 들고요.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내 마음을 알아주기나 할까 싶은 절망도 생기고요. 그래서 망설이게 돼요. 내 마음을 표현하는 일, 내 안의 말들을 꺼내놓는 일을요. 마치, 우리의 그런 망설임을 아는 것처럼 시인은 말합니다. 들어줄 테니 꺼내 놓아보라고, 당신의 슬픔을 모조리 가져가겠노라고. 별거 아니면 어떠냐고, 누구나 다 그런 일들 겪으면서 살아가고 살아왔노라고, 그러니 같이 얘기 좀 해보자고.

 

그렇게 모여진 사연들을 듣고 시인이 내놓은 처방전을 묶어놓은 책입니다. 누군가의 조심스러운 사연에 시인이 건네는 처방전은 바로 시(詩)였습니다. 어느 시인이 먼저 했던 말을 가져와서 마치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마음을 읽었노라고, 누군가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느냐고, 또 그렇게 흘러갈 수 있는 게 우리 인생이지 않겠느냐'고. 사람들의 사연에 시인 역시 조심스럽게 자신의 이야기를 합니다. 한때 우리가 겪었을 이야기를, 슬픔과 아픔을 건너가는 방법이 참 많더라는 것을, 우리가 건넨 위로의 한 자락이 생각보다 큰 힘이 될 거라는 것을요. 듣다 보니 참, 이 말도 별거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 이런 말 종종 들어왔고 잘 알고 있잖아요. 몰라서 사연을 보내는 게 아니었잖아요? 그런데도 자꾸만 듣게 되고 듣고 싶어지는 건, 누군가의 한 마디가 힘이 되는 때가 많다는 것 역시 우리가 알기 때문이니까요. 인생에 찾아오는 크고 작은 일들이 그때마다 잘 건너가기를 바라는 건 우리 모두의 바람일 테니까요. 그래서 자꾸 듣게 됩니다. 시인이 처방해주는 시와 시인의 말을요.

 

헤어질 때 더 다정한 쪽이 덜 사랑한 사람이다. 그 사실을 잘 알기에 나는 더 다정한 척을, 척을, 척을 했다. 더 다정한 척을 세 번도 넘게 했다. 안녕 잘 가요. 안녕 잘 가요. 그 이상은 말할 수 없는 말들일 뿐. 그래봤자 결국 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

(94페이지, 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 - 이제니)

 

첫 애인과 오랜 연애 끝에 이별을 택했다는 사연. 잘했다고 생각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남은 허한 감정. 이 마음을 어떻게 다독여야 할지 묻는 일에 시인은 '허물어진 연애의 자리에 후두둑 떨어져 앉은 나뭇잎을 상상하는 그럴싸한 일, 그때 듣는 소리가 사랑이 무심히 스쳐 지나가는 소리일 거라고, 그러니 이별은 옳다고 말합니다. 모든 이별은 옳다. 그런가요? 누군가와 헤어지면서 후회보다는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려고 애쓰던 기억들이 떠오르는데, 그건 그냥 내가 그 시기를 잘 건너가기 위해 최면을 걸듯 되뇌는 말이라고 생각했거든요. 한 번도 그 헤어짐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고 하진 않았던 것 같아요. 그냥 조금 아프다 말겠지 하는 바람이 전부였는데, 시인의 말을 듣고 있자니 이별이 옳다는 게 이해가 되려고 해요. 그렇게 이별하면서 하나의 연애가 완성되어 간다고 하는 말이, 참 괜찮게 들리더라고요. 이별이 슬프지만은 않은 게 되어버리는 일, 이거 좀 괜찮은 걸요?

 

육아에 지친 아기 엄마의 사연에 황인숙 시인의 「걱정 많은 날」을 처방하면서, 어느 날 옥상에 벌렁 누워 낮잠에 빠지는 상상을 건넵니다. 지금 자기 삶이 멈춰있는 듯하고, 자기만의 시간이나 성취감을 잃은 채로 살아가는 게 잘못된 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지금 당신은 힘찬 도전자라고 응원합니다. 엄마일 때의 나, 부모가 된다는 위대한 일을 지금 당신이 하는 거라고요. 가장 희소식은 뭔지 아세요? 아기가 건강하게 자라서 먼 훗날 언젠가 '중2'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ㅋㅋ 그러니 지금의 육아가 너무 힘들어도 조금만 참아주세요. 곧 헬 게이트가 열릴 테니까요. 이러면 조금 위로가 될까요? ^^ 미안해요. 웃어서. 그런데 곧 닥쳐올 중2병의 전쟁터에 투입될 부모를 생각하면 육아에 힘들어하는 지금 모습이 워밍업 같아서요. 부모가 된다는 건 어려운 일이기도 하지만, 기쁜 순간도 같이 찾아오는 거니까. 지금 어떤 도전 하나를 통과하는 거로 생각하면 어떨까요. 누군가는 시도할 수 없는 도전을 당신은 지금 해내는 중입니다.

 

갑자기 아들을 잃은, 당신에게는 오빠가 사라진 순간을 어떻게 보내고 계시는가요? 어느 날 아들을 잃은 엄마의 슬픔에 딸이 펜을 들었습니다. 오빠를 잃은 순간에 멈춰있는 엄마의 시계가 다시 돌아가게 하고 싶은데, 어떻게 그 슬픔을 통과할 수 있을까요? 엄마의 슬픔을 날아가게 할 방법이 무얼까 시인도 같이 고민합니다. 엄마와 오빠가 함께했던 이곳의 추억이 흘러가듯, 오빠가 지금 있는 그곳의 시간도 새롭게 흘러가고 있을 거라고. 나도 나를, 엄마도 엄마를 생각하면서 이곳의 시간을 흘려보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엄마'라는 단어가 다가오는 많은 의미를 또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엄마에게도 엄마가 그런 존재였겠지요. 그러면서 엄마의 안위를 걱정하는 딸의 마음도 읽습니다. '위로는 기다리는 게 아니라 찾아 나서는 거'라는 어느 시인의 말을 가져와서 위로의 의미를 다시 씁니다. 엄마의 안위를 걱정하는 당신은 위로를 적극적으로 찾아 나선 사람, 당신이 그렇게 찾아 나선 위로 때문에 엄마의 안위를 챙기게 되는 거라고 말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와 닿았던 말입니다. 위로를 찾아 나선다... 왜 우리는 우리의 슬픔을 앞에 두고 위로가 찾아오기만을 기다렸던 걸까요? 그 위로가 저절로 찾아오는 게 가능한 걸까요? 시인에게 사연을 보낸 이들은 스스로 위로를 찾아 나선 이들이었습니다. 주저하면서도 말을 시작하면서, 그 위로를 시인에게 찾으려 했던 건지도 모릅니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순간을 건너가는 방법 참 많이 있겠지만, 시인과 주고받은 사연으로도 위로가 된다는 게 너무 좋습니다. 대한민국에 슬픔의 사연을 가진 많은 이의 목소리가 이곳에 모여 기운을 냅니다. 취업 준비생의 불안함, 육아 초보 엄마의 고충, 첫사랑과의 이별, 짝사랑을 첫사랑으로 시작한 소년, 가까운 이의 죽음. 우리가 살아가면서 충분히 겪는, 보편적인 상황들이잖아요. 너도 겪고 나도 겪는, 그래서 공감할 수밖에 없는 슬픔이요. 다들 비슷하게 살아가는 모습에 찾아오는 슬픔도 다 비슷해서, 같이 찾아보고 싶은 위로의 순간들이었어요.

 

봄, 여름, 가을, 겨울. 4개의 계절이 흐르는 동안 시인에게 도착한 사연들에서 추려 올라온 이야기들에 많이 공감했어요. 특히 그때그때 어울리는 시는 어떻게 찾아냈는지 궁금하면서도, 이런 시가 이미 세상에 나왔다는 게 그 공감과 위로에 더 힘이 되었던 것 같아요. 이미 이 순간을 겪어간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구나 싶은 느낌이요. 나도 잘 건너갈 수 있겠구나 싶은 힘이 생기는 거 말이에요. 다양한 시인과 시를 만나는 기쁨과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 같은 생생함에 위안이 됩니다. 우리 이렇게 잘 살아가고 있구나 싶은 안도가 생기는 것 같아요. 맞죠? 잘 살아가고 있는 거?

 

살다보면 긴 휴가보다 짧은 휴식이 더 절실해질 때가 있습니다. 위로란 휴가보다는 휴식 같은 거지요. 수요일 오후에 반차를 내고 허허로이 걷거나 혼자서 미술관에 가고, 극장에서 영화를 한편 보고 나와 마주치는 저녁 일몰은 다른 수요일 퇴근길의 그것과는 어딘가 달라도 다릅니다. 살아 있지요. 하루를 잘 놓아주는 법을 배우기 위해 잠시 숨 돌릴, 위안의 시간이 필요하진 않나요?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습니다. 한 숨을요. 잠시, 숨을 쉬세요. 마치 숨을 멀리에 놓아주는 법을 배우는 것처럼. (209페이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손홍규 지음 / 교유서가 / 201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종종, 뭔가를 쓰고 싶다고 생각한 건 엄마 때문이다. 엄마를 생각하면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은데, 그 말을 다 하고 살아갈 수 없어서. 그저 가슴 속 말들을 쏟아낼 게 필요했다. 그래서 가끔 썼다. 말이 안 되는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썼다. 그 말이 되고 안 되고의 기준은 내 마음이 하는 말이면 충분하다는 생각에서였다. 하고 싶은 말 다 꺼내놓고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라고 생각하니, 적어도 말이 아닌 문장으로 써 내려간다면 조금은 개운하지 않을까 하는, 뭔가 풀어내고 싶은 이유도 있었다. 누구나 그런 의미 하나쯤은 마음에 품고 살아가지 않을까? 뭔가를 하고 싶은 이유 중의 하나 정도는 계산할 수 없는 간절함 같은 거라고 말이다. 문학이 삶을 말한다고, 그동안 문학으로 슬픔과 절망을 말해왔다고 하는 작가의 마음도 비슷할 것 같다. 그가 말하는 삶이 문학과 닿아 있고, 그 문학으로 슬픔과 절망을 담아 세상에 터트려 놓은 말일 터였다. 그러니 공감할 수밖에 없다.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의 다음 문장을 알 것 같기도 했다. 우리는 그렇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내내 슬픔과 절망을 안고 살아왔을 테니까, 앞으로도 그런 삶을 살아갈 테니까 말이다.

 

그렇게 적어 내려간 마음이 산문이라는 이름으로, 일상의 말들과 의미 없게 들릴 지라도 해야만 했던 말들로, 해가 기우는 저녁의 느낌으로 다가왔다. 오늘의 그가 존재하기까지 어떤 시간을 걸어왔는지, 그가 하는 문학의 토대는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들려준다. 물론 그가 이 글을 적은 이유가 그게 전부는 아닐 테지만, 적어도 듣는 우리는 그가 문학을 계속해야만 했던 까닭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가 아이의 생채기에 마음의 상처를 생각하는 것은 어른이 된 후에야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가 아이였던 시절의 아픔을 불러올 때마다, 성장하면서 겪은 결핍의 순간마다, 소설가가 되어도 다 채우지 못한 문학의 바람이 떠오를 때마다 따라오는 사연들이 쌓여 저녁의 슬픔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하는 말을 이해한다고 하면 내가 너무 거만한 것일까? 적어도 그가 말하는 슬픔의 모습을 알 것 같아서 이렇게 말하고 싶다. 당신의 슬픔과 기쁨, 상처와 고통이 지금 당신의 글을 채우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창밖의 어둠은 한층 두터워졌고 나는 습관처럼 이런 잠언을 떠올린다. 어둠이 깊을수록 새벽은 가까우리니. 그러나 새벽은 매번 가까워졌다가 매번 되돌아갔다. 마찬가지로 밤은 어김없이 다가온다. 앞으로 내가 견뎌야 할 밤들 역시 무자비할 것이다. 시대의 전위가 되고 싶은 작가적 욕망은 비난받을 필요가 없으나 너무 앞서 달려갈 필요도 없다. 추억이 없는 자는 오래 견디지 못하므로 한 번쯤 무릎을 꿇고 발 아래 귀를 대어볼 일이다. 저 지하에서 어떤 소리가 들린다면 그 소리가 바로 비참했던 한국의 밤들일 테다 - 문학은 그렇게 하지 않는 거다. (143페이지)

 

문학을 소라고 말하는 강렬한 한 문장에 꽂혀 그의 문학이 궁금해졌다. 물론 나는 그의 소설과 산문을 살짝 맛본 적이 있지만, 그의 작품 세계를 이야기할 만큼 그의 작품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오히려 이번 책이 그를 알아가는 큰 계기가 되었다. 그의 문학의 근원과 그가 생각하는 세상과 그가 향하고 싶은 삶의 방향을 들은 것만 같다. 그는 한밤의 소와 마주하던 눈빛, 소의 생애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그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아름다운 한 생을 본 것 같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아직 풀어내지 못한 글로 그 생애를 표현하고 싶어지지 않았을까? 어느 날 소가 태어나고, 또 팔려가는 것을 보면서 그는 문학을 계속해야 하는지 묻고 싶었을 것 같다. 생계를 책임지던 소를 팔면서, 아버지가 보내는 눈빛의 말을 그는 들었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문학을 계속해야겠느냐고. 가난한 시골살이의 모든 것일지도 모를 것을 잃어가면서 계속해야 할 존재였느냐고 스스로 묻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많은 것이 결핍된 채로 서울 생활을 시작했고, 누군가에게 얹혀살면서 문학을 계속 했다. 또 언젠가 일어났던 일, 탈곡기에 잃은 아버지의 오른쪽 검지를 생각하며 또 한 번 문학을 생각했을 것이다. 장갑의 검지 부분을 잘라내면서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잃어버린 손가락일까, 아니면 이 손으로 계속 책임져야 할 식구들의 생계일까. 아버지는 1톤 트럭에 다시 한번 생을 건다. 그 트럭에 무엇이든 실어다가 팔았다. 평생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대단한 영업 실력을 뽐낼 수는 없었겠지. 장사하는 시간이 쌓여갔다고 해서 아버지의 수입이 월등히 나아지진 않았다. 그런 아버지의 생을 보면서 그의 결핍은 계속되었고, 그 안에서 문학도 계속됐다.

 

사실 나는 절망을 말하고 싶다. 절망한 사람을 말하고 싶다. 절망한 사람 가운데 정말 절망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많지 않은 이유를 말하고 싶다. 멀쩡하게 웃고 떠들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고 슬퍼하고 사랑을 나누는 사람인데 깊이 절망한 사람이기도 하다는 걸 말하고 싶다. (75페이지)

 

특히 절망에 관한 이야기를 아버지와 함께 들려줄 때는 어떤 간절한 몸부림을 보는 것 같다. 슬픔과 절망의 본질을 아버지에게서 찾았다. 손가락 하나를 잃은 아버지는 아무렇지 않은 듯 다른 일을 찾아 바쁘게 몸을 움직였다. 손가락을 잃은 아버지는 절망하지 않았다. 아니. 절망했으나 절망하지 않은 것처럼 살아왔다. 감추고 싶었던 그 절망을 어린 아들은 나중에서야 볼 수 있었다. 그때는 미처 보이지 않았던 것처럼, 슬픔을 몰랐고 불안을 견디는 법을 몰랐던 것처럼 말이다. 아버지의 손가락은 그에게 문학이 된다. 그가 문학을 하게 되는 이유는 많겠지만, 무언가 그가 문학을 잃지 않게 끝까지 붙잡아주는 게 있다면, 그건 그 무엇도 아닌 아버지의 손가락이었으리라. 누구에게나 그런 의미가 하나쯤 존재한다고 믿는다. 내가 뭔가를 끼적이고 싶은 모든 순간에 엄마를 떠올리는 것처럼.

 

내가 어릴 적의 엄마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무엇이든 했다. 콩나물을 길러서 팔았고, 집에 작은 공간을 만들어 통닭을 튀겨 팔았다. 온 집안에 기름 냄새가 배어 빠지지 않은 느끼함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엄마가 마지막으로 했던 것은 분식집이었는데, 아이러니한 건 엄마는 분식 종류의 음식을 못 했다는 거다. 김밥 떡볶이 같은 분식집의 기본을 못 했는데도 엄마가 했던 가게의 상호명은 '00분식'이었다. 엄마는 그 분식집에서 백반을 팔았다. 시장에 작은 상가를 얻어 백반을 팔고 주변 상인들과 교류하며 지냈다. 이 가게를 참 오래 했는데, 여동생의 결혼 비용에 보태려고 가게를 정리했다. 마침 가게가 잘 안 될 무렵이기도 했고, 엄마의 육체가 이런저런 병을 안고 있어서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는 여동생의 결혼이 아니었다면 그 가게를 당분간 운영하지 않았을까 싶다. 작가의 아버지가 집안 전부였던 소를 팔아서 학비를 대준 것처럼, 엄마에게도 시장의 작은 가게는 그런 의미였을 것 같다. 부모가 부재중일 때 작가가 소의 여물을 먹여주었던 것처럼, 나는 학교가 끝나고 엄마의 가게로 갔다. 미처 다 정리하지 못한 설거지를 했고, 단체 손님 예약의 음식을 같이 준비했다. 손님이 없어 한가한 시간의 무료함을 같이 즐겼고, 가게에 필요한 서류상의 문제를 같이 알아보고 준비하곤 했다. 하나하나 떠올려보면 웃으면서 여유 있던 시간보다, 바로 앞의 순간을 넘어가느라 애쓰던 기억이다. 내일은 조금 더 나아지겠지 하는 바람으로 버티던 날들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겹쳐지는 건 그런 감정이다. 지금의 그가 문학을 할 수 있게 바탕이 되었던 시간이, 엄마의 삶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면서 내가 인간답게 살아가는 마음을 배운 것과 같다. 살아가는 모든 순간에 최선을 다해 걷는 것. 누구나 자기만의 간절함을 품고 살아가듯, 내 안의 간절함도 꺼내주려 애쓰며 살아가는 것. 작가에게는 그게 문학이었듯, 나에게도 어떤 형체가 되어 나타날 것이기에 계속 애쓰며 살아가야 하는 게 주어졌다.

 

그와 한방을 쓰던 할머니, 세상을 떠난 고모의 장례식장, 그가 좋아하는 작가의 말들을 떠올리며 절망 그 너머의 삶을 기다린다. 슬픔과 절망에 가득 찬 게 삶이겠지만, 이제 그 삶은 슬픔과 절망만으로 채워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시사한다. 마주하고 건너가야 할 전쟁쯤으로 여기며, 그 전쟁의 승리로 만날 희망의 삶을 노래한다. 인간답게 사는 것, 누군가를 알아가는 것, 문학으로 꿈을 꾸게 하는 것. 무엇 하나 버리고 싶지 않은 것들로, 슬픔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는 지점을 떠올리게 한다. 어쩌면 우리는 결국 그것을 찾아가려는 몸부림을 치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희망, 내일, 꿈같은 것. 그것들을 포기하게 하는 많은 것으로부터 싸우는 게 운명인 존재들 말이다. 매일 저녁 귀가하는 그 길에 다친 마음을 부여잡고 있을지라도, 그걸 견디면서 가는 게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는 일. 그게 우리가 인간으로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듯, 우리가 해야 할 최소한의 예의이자 의무라는 듯...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세계에서는 인간의 존재 또한 아이러니일 수밖에 없다. 인간은 꿈을 꾸어서 인간이기 때문이다. 꿈을 꾸지 못하는 인간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인간은 아이러니라는 미로에서 길을 잃었고 아직도 헤매는 중이다. 그곳에서 인간은 더 이상 신비로운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다시 신비로워져야 한다. 탈신비화된 이 세계에서, 다시 말해 부르주아들만이 꿈을 꾸는 이 세계에서 꿈을 꿀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부르주아들과 다른 꿈을 꾸는 건 인간의 삶을 재신비화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내가 문학을 하는 이유다. 그리고 본래 인간은 신비로웠음을 잊지 않는 이유다. (91페이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9-01-11 09: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25 1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칠엽수는 겨울 동안 싹을 틔워 봄이 오면 숲의 어떤 나무보다 일찍 잎이 돋습니다. 그리고 단숨에 꽃을 피웁니다.
칠엽수 꽃은 촛불처럼 생겼습니다. 그 꽃을 볼 때마다마리카는 어린 시절 온 가족이 함께 장식했던 크리스마스트리를 떠올립니다.
그리고 칠엽수 꽃에는 벌들이 많이 찾아옵니다. 벌들을보면 야니스를 다시 만난 것처럼 반갑습니다.
 한여름에 녹색 가시가 돋친 열매가 주렁주렁 열립니다.
그 껍질 안에는 동그란 씨앗이 들어 있습니다. 야니스가 마리카에게 선물한 바로 그 갈색 씨앗입니다.
어느덧 칠엽수는 올려다봐야 할 만큼 훌쩍 자랐습니다. 순식간입니다. 인생과 같다고 마리카는 생각했습니다. 마리카의 인생도 순식간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예상하지 못한 일을 당해도 웬만한 것은 충분히 버텨 낼 수 있다. 뜻밖에닥친 일이라는 이유로 책임을 회피하면 현실 자체가 지속 불가능할 정도로큰 혼돈에 빠질 것이다. 혼돈은 점점 확대되어 모든 질서와 미래와 감각을삼켜 버릴 것이다. 현실을 무시하면 머지않아 지하 세계를 지배하는 혼돈의 여신이 나타날 것이다. 눈을 부릅뜨고 보지 않으면 가짜 현실과 실제 현실 사이가 점점 벌어져 결국 우리는 그 틈새에 빠지고 그 결과는 참담할 것이다. 현실을 무시하면 혼란과 고통의 심연에 빠져 허우적댈 수밖에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부모란 부모이기 이전에 이룩해야 할 것이 아직 많은 두 사람이지요. 
저는 당분간 혹은 앞으로 오랜시간 동안 
부모가 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저는 아직시작도 하지 못한 도전을 
당신은 이미 수행하고 계시는군요.

 삶은 도전의 연속이라고들 하지요. 
생각이 많은날, 걱정이 많은 날, 
내가 나를 잃어버린 것처럼 느껴지는 날, 
옥상에 벌렁 누워 구름을 보다가 스르륵 낮잠에 빠져든다는 상상의 나래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기막힌 도전이지요. 
어쩌면 당신은 이즈음 아무것도하지 않고 안주해 있는 사람이 아니라 
무엇이든 해내고 있는 힘찬 도전자인지도 모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