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슬픔을 훔칠게요 - 김현의 詩 처방전 시요일
김현 지음 / 미디어창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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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이렇게 닮은 걸까요. 사랑에 아파하고, 앞날의 불안함에 슬퍼지고, 가족의 고통에 공감하는, 일상의 많은 부분에서 찾아오는 슬픔과 기쁨의 크기가 왜 이렇게 비슷한 걸까요. 그나마 내 안에 자리한 슬픔을 그때그때 다 털어놓으면 속이라도 후련해질 것을, 그게 또 항상 가능한 일은 아니잖아요. 어쩌면 평생 말을 못 하고 품고 지낼 수도 있고요. 내가 지금 이런 걱정을 하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까 봐, 이런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게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게 될까 봐, 타인이 들어봤자 해결될 문제도 아닌 게 되어버릴까 봐... 그러게요. 그런 것 같기도 해요. 곰곰이 생각해보면, 결국 내가 품고 끝까지 가지고 가야 할 감정과 문제들일 텐데 말해서 뭐하나 싶은 생각도 들고요.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내 마음을 알아주기나 할까 싶은 절망도 생기고요. 그래서 망설이게 돼요. 내 마음을 표현하는 일, 내 안의 말들을 꺼내놓는 일을요. 마치, 우리의 그런 망설임을 아는 것처럼 시인은 말합니다. 들어줄 테니 꺼내 놓아보라고, 당신의 슬픔을 모조리 가져가겠노라고. 별거 아니면 어떠냐고, 누구나 다 그런 일들 겪으면서 살아가고 살아왔노라고, 그러니 같이 얘기 좀 해보자고.

 

그렇게 모여진 사연들을 듣고 시인이 내놓은 처방전을 묶어놓은 책입니다. 누군가의 조심스러운 사연에 시인이 건네는 처방전은 바로 시(詩)였습니다. 어느 시인이 먼저 했던 말을 가져와서 마치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마음을 읽었노라고, 누군가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느냐고, 또 그렇게 흘러갈 수 있는 게 우리 인생이지 않겠느냐'고. 사람들의 사연에 시인 역시 조심스럽게 자신의 이야기를 합니다. 한때 우리가 겪었을 이야기를, 슬픔과 아픔을 건너가는 방법이 참 많더라는 것을, 우리가 건넨 위로의 한 자락이 생각보다 큰 힘이 될 거라는 것을요. 듣다 보니 참, 이 말도 별거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 이런 말 종종 들어왔고 잘 알고 있잖아요. 몰라서 사연을 보내는 게 아니었잖아요? 그런데도 자꾸만 듣게 되고 듣고 싶어지는 건, 누군가의 한 마디가 힘이 되는 때가 많다는 것 역시 우리가 알기 때문이니까요. 인생에 찾아오는 크고 작은 일들이 그때마다 잘 건너가기를 바라는 건 우리 모두의 바람일 테니까요. 그래서 자꾸 듣게 됩니다. 시인이 처방해주는 시와 시인의 말을요.

 

헤어질 때 더 다정한 쪽이 덜 사랑한 사람이다. 그 사실을 잘 알기에 나는 더 다정한 척을, 척을, 척을 했다. 더 다정한 척을 세 번도 넘게 했다. 안녕 잘 가요. 안녕 잘 가요. 그 이상은 말할 수 없는 말들일 뿐. 그래봤자 결국 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

(94페이지, 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 - 이제니)

 

첫 애인과 오랜 연애 끝에 이별을 택했다는 사연. 잘했다고 생각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남은 허한 감정. 이 마음을 어떻게 다독여야 할지 묻는 일에 시인은 '허물어진 연애의 자리에 후두둑 떨어져 앉은 나뭇잎을 상상하는 그럴싸한 일, 그때 듣는 소리가 사랑이 무심히 스쳐 지나가는 소리일 거라고, 그러니 이별은 옳다고 말합니다. 모든 이별은 옳다. 그런가요? 누군가와 헤어지면서 후회보다는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려고 애쓰던 기억들이 떠오르는데, 그건 그냥 내가 그 시기를 잘 건너가기 위해 최면을 걸듯 되뇌는 말이라고 생각했거든요. 한 번도 그 헤어짐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고 하진 않았던 것 같아요. 그냥 조금 아프다 말겠지 하는 바람이 전부였는데, 시인의 말을 듣고 있자니 이별이 옳다는 게 이해가 되려고 해요. 그렇게 이별하면서 하나의 연애가 완성되어 간다고 하는 말이, 참 괜찮게 들리더라고요. 이별이 슬프지만은 않은 게 되어버리는 일, 이거 좀 괜찮은 걸요?

 

육아에 지친 아기 엄마의 사연에 황인숙 시인의 「걱정 많은 날」을 처방하면서, 어느 날 옥상에 벌렁 누워 낮잠에 빠지는 상상을 건넵니다. 지금 자기 삶이 멈춰있는 듯하고, 자기만의 시간이나 성취감을 잃은 채로 살아가는 게 잘못된 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지금 당신은 힘찬 도전자라고 응원합니다. 엄마일 때의 나, 부모가 된다는 위대한 일을 지금 당신이 하는 거라고요. 가장 희소식은 뭔지 아세요? 아기가 건강하게 자라서 먼 훗날 언젠가 '중2'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ㅋㅋ 그러니 지금의 육아가 너무 힘들어도 조금만 참아주세요. 곧 헬 게이트가 열릴 테니까요. 이러면 조금 위로가 될까요? ^^ 미안해요. 웃어서. 그런데 곧 닥쳐올 중2병의 전쟁터에 투입될 부모를 생각하면 육아에 힘들어하는 지금 모습이 워밍업 같아서요. 부모가 된다는 건 어려운 일이기도 하지만, 기쁜 순간도 같이 찾아오는 거니까. 지금 어떤 도전 하나를 통과하는 거로 생각하면 어떨까요. 누군가는 시도할 수 없는 도전을 당신은 지금 해내는 중입니다.

 

갑자기 아들을 잃은, 당신에게는 오빠가 사라진 순간을 어떻게 보내고 계시는가요? 어느 날 아들을 잃은 엄마의 슬픔에 딸이 펜을 들었습니다. 오빠를 잃은 순간에 멈춰있는 엄마의 시계가 다시 돌아가게 하고 싶은데, 어떻게 그 슬픔을 통과할 수 있을까요? 엄마의 슬픔을 날아가게 할 방법이 무얼까 시인도 같이 고민합니다. 엄마와 오빠가 함께했던 이곳의 추억이 흘러가듯, 오빠가 지금 있는 그곳의 시간도 새롭게 흘러가고 있을 거라고. 나도 나를, 엄마도 엄마를 생각하면서 이곳의 시간을 흘려보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엄마'라는 단어가 다가오는 많은 의미를 또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엄마에게도 엄마가 그런 존재였겠지요. 그러면서 엄마의 안위를 걱정하는 딸의 마음도 읽습니다. '위로는 기다리는 게 아니라 찾아 나서는 거'라는 어느 시인의 말을 가져와서 위로의 의미를 다시 씁니다. 엄마의 안위를 걱정하는 당신은 위로를 적극적으로 찾아 나선 사람, 당신이 그렇게 찾아 나선 위로 때문에 엄마의 안위를 챙기게 되는 거라고 말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와 닿았던 말입니다. 위로를 찾아 나선다... 왜 우리는 우리의 슬픔을 앞에 두고 위로가 찾아오기만을 기다렸던 걸까요? 그 위로가 저절로 찾아오는 게 가능한 걸까요? 시인에게 사연을 보낸 이들은 스스로 위로를 찾아 나선 이들이었습니다. 주저하면서도 말을 시작하면서, 그 위로를 시인에게 찾으려 했던 건지도 모릅니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순간을 건너가는 방법 참 많이 있겠지만, 시인과 주고받은 사연으로도 위로가 된다는 게 너무 좋습니다. 대한민국에 슬픔의 사연을 가진 많은 이의 목소리가 이곳에 모여 기운을 냅니다. 취업 준비생의 불안함, 육아 초보 엄마의 고충, 첫사랑과의 이별, 짝사랑을 첫사랑으로 시작한 소년, 가까운 이의 죽음. 우리가 살아가면서 충분히 겪는, 보편적인 상황들이잖아요. 너도 겪고 나도 겪는, 그래서 공감할 수밖에 없는 슬픔이요. 다들 비슷하게 살아가는 모습에 찾아오는 슬픔도 다 비슷해서, 같이 찾아보고 싶은 위로의 순간들이었어요.

 

봄, 여름, 가을, 겨울. 4개의 계절이 흐르는 동안 시인에게 도착한 사연들에서 추려 올라온 이야기들에 많이 공감했어요. 특히 그때그때 어울리는 시는 어떻게 찾아냈는지 궁금하면서도, 이런 시가 이미 세상에 나왔다는 게 그 공감과 위로에 더 힘이 되었던 것 같아요. 이미 이 순간을 겪어간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구나 싶은 느낌이요. 나도 잘 건너갈 수 있겠구나 싶은 힘이 생기는 거 말이에요. 다양한 시인과 시를 만나는 기쁨과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 같은 생생함에 위안이 됩니다. 우리 이렇게 잘 살아가고 있구나 싶은 안도가 생기는 것 같아요. 맞죠? 잘 살아가고 있는 거?

 

살다보면 긴 휴가보다 짧은 휴식이 더 절실해질 때가 있습니다. 위로란 휴가보다는 휴식 같은 거지요. 수요일 오후에 반차를 내고 허허로이 걷거나 혼자서 미술관에 가고, 극장에서 영화를 한편 보고 나와 마주치는 저녁 일몰은 다른 수요일 퇴근길의 그것과는 어딘가 달라도 다릅니다. 살아 있지요. 하루를 잘 놓아주는 법을 배우기 위해 잠시 숨 돌릴, 위안의 시간이 필요하진 않나요?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습니다. 한 숨을요. 잠시, 숨을 쉬세요. 마치 숨을 멀리에 놓아주는 법을 배우는 것처럼. (209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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