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어가는 우리는 각각 자신의 재능대로, 자신의 기질대로 열심히 삶을 견뎌 내는 중이었다. 어떻게 견디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놀든 일하든 배우든 실패하든 모든 삶은 그 자체로 소중하지 않은가. (초보 노인입니다 195페이지)
누군가가 나에게 나이를 물어보면,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아서 당황스럽다. 내 나이를, 내가 모른다. 금방 계산이 안 된다. 그래서 태어난 해를 말한다. 몇 년생이요. 그때마다 화들짝 놀란다. 내가 이렇게 나이를 먹었나? 높게만 보였던 엄마의 나이를 훌쩍 넘어 벌써 이 나이라고? 나, 많이 늙었구나. 나보다 더 나이를 드신 분이 들으면 뭐라고 한마디 할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어쩌나, 내 마음이 그런 것을. 나의 늙음을 더 확실하게 실감할 때는 주변의 아이들이 커갈 때다. 겨우 걸음 떼고 말을 할 줄 알면서 어린이집 다닐 때가 엊그제인데, 금방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오랜만에 만나니 훌쩍 커버린 아이가 놀랍기만 했다. 이제는 그 아이가 수능시험을 준비한다고 할 때 놀란 건 말할 것도 없고. 이 아이들이 커가는 것을 보면서 수시로 놀라다가, 그때마다 내 나이를 한 번씩 생각한다. 벌써 내 나이가 이렇게 되었구나 하는.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아직도, 늙지 않았는걸.
이 책을 읽다가 보니 ‘아직은’이라는 마음이 자꾸만 짙어진다. 나이 들어간다는 걸 인정하기가 쉽지 않다. 60세가 넘었으니 노인이라는 영역 안에 들어가는 건 당연할 걸까? 글쎄, 당연한지는 모르겠지만, 저자 역시 처음에는 너무 이상했다고 한다. 여전히 젊은 채로 ‘늙음’을 맞닥뜨린 것이 당황스러웠겠지. 특히나 노인이 모인 주거공간에 속하게 되니 더 어색하기만 했을지도 모른다. 퇴직하고, 더는 도시에서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지자 주택을 동경하다 실행에 옮겼는데, 그마저도 완벽한 선택은 아니었나 보다. 몇 달 만에 다시 주거지를 옮기며 선택한 곳이 실버아파트다. 이 아파트의 입주 조건은 딱 하나. 60세 이상만 입주할 수 있다는 것. 조건이 까다롭지 않고, 어차피 노인의 삶으로 진입하는 나이이니 뭐 얼마나 다를까 싶었다. 삼시 세끼 음식이 제공되고, 대형 병원으로 이어지는 전용 통로가 있다. 단지 내 사우나와 헬스장부터 바둑, 탁구, 기타 같은 취미 활동까지 가능하니, 노인에게 이보다 더 좋은 시설이 있을까 하는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는 걸, 저자가 들려주는 실버아파트의 일상으로 알게 됐다.
물리적인 나이가 말하는 노인과 자기가 부딪치는 노인의 마음은 달랐다. 입주민의 평균 연령이 80대인 실버아파트는 노인을 위한 최적의 맞춤형 주거지였지만, 저자 스스로 아직 노인이 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이 노인의 세상에 뛰어드는 게 쉽지 않았던 거다. 처음부터 이 아파트에서의 삶이 부담스러웠던 건 아니다. 저자가 이곳으로 이사하면서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아직은 완전히 흡수할 수 없는 문제가 있었다. 60세가 넘었다는 나이의 숫자와 노인이라는 자각이 별개의 문제라는 걸 인식했다. 저자는 이곳에서 초보 실버의 실체를 만나고, 생각과 실체의 차이가 크기에 오는 혼란은 생각보다 오래갔다. 노년의 현실을 마주한 혼란이 저자에게 노인이 된 자신의 모습을 그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저자는 이곳에서 그저 나이가 표현하는 노인과 마음이 말하는 노인의 차이만 발견한 것은 아니다. 실버아파트의 노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우연히 만나는 이웃과 대화하고, 뒷산을 오르면 산책하면서 비슷한 듯 다른 노인의 삶을 본다. 이웃에게 먼저 살갑게 다가오는 할머니, 현관문에 채소가 든 봉지를 걸어놓는 이웃, 아픈 아내를 돌보며 기타를 배우겠다는 할아버지, 예쁘게 치장하고 커피를 마시러 나오는 할머니, 고운 옷에 아름다움을 뽐내는 할머니까지. 누구 한 사람 똑같은 노인이 없었다. 노인은 다 똑같다고 생각했던 마음에 경고를 들은 기분이었다. 80대로 보이는 어느 노인이 60대의 저자에게 한 말이 계속 기억에 남는다. 지금이 제일 고울 때라는, 젊은 사람이 멋 좀 내고 다니라고, 이렇게 예쁠 때는 금방 지나간다고.
살아가는 삶의 모습과 향기는 여느 쌍과 비슷하나 한없이 조용하고 담담한 곳. 왈칵 울음을 터트릴 만큼 서러운 일도, 울화통을 건드릴 만큼 화나는 일도, 이치를 따져 가며 목청을 높일 일도, 견딜 수 없이 기쁘거나 슬픈 일도 모두 숙성되는 이곳. 늙는다는 게 이런 건가? 그러나 단순히 늙음이 답은 아니었다. 실버아파트에 살면서 만난, 기도서 여인과 비슷한 사람들이 머릿속을 스쳐 간다. 각각 다른 방식이었으니 남을 이해하고 생각하며 결구에는 사랑하는 마음마저 느끼게 하는 사람들이었다. (초보 노인입니다 114페이지)
60대의 엄마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은 “내가 50살만 됐어도….”였다. 하고 싶은 게 많고 아직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데, 이 나이가 되니 제약이 너무 많아서 못 하고 있다고 말이다. 혹자는 나이가 무슨 상관이냐 하겠지만, 분명 나이가 주는 제약이 있다는 걸 새삼 느끼는 요즘이다. 최근에 뭘 좀 배우고 있는데, 내가 이걸 배워서 어디에 써먹나 하는 생각이 멈추질 않는다. 어차피 배우려고 했으니까 시간 될 때 배우고 있는데, 이걸 다 배운 후의 일이 막막하다. 조금 더 일찍 할 걸, 내가 30대에 했어도 더 할 수 있는 게 많았을 텐데 하는 후회가 끊이질 않는다. 그래도 막상 시작했으니 끝을 보긴 해야 하는데, 불안한 마음이 항상 남아 있다. 내 마음의 나이와 공식적인 나이 사이의 차이가 점점 벌어질 때마다, 이 불안의 크기는 커질 것 같다.
그래도 변하지 않는 건, 내가 늙어 가고 있다는 거다. 노인의 초입에서 낯설기만 했던 저자의 감정과 다를 바 없을 테다. 버스에서 자리 양보를 받을 수도 있고, 회복 불가능하게 머리숱이 적어지는 것도 슬프고, 아침에 일어나면 얼굴의 베개 자국이 없어지는 시간이 길어지고, 병원에 갈 일은 점점 많아지고. 계속 생각해보니 노인이 되어서 좋은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내가 노인이 되지 않을 것도 아니니, 에휴. 남편이 항상 하는 말처럼,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마음을 좀 내려놓으라고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쉬우면 두통이 왜 생기냔 말이지.
마치 노인의 세계에 들어가는 예행연습을 지켜본 기분이다. 자신이 노인인지 거듭 되물으면서, ‘늙음’을 마주한 이의 푸념처럼 들리지만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노인이 모여 사는 아파트의 입주민의 관찰 기록이면서, 이 세계의 새로운 매력을 보여 준다. 평온하면서도 역동적인 노인들의 모습이 마냥 새로우면서도, 조용하고 쓸쓸하면서도 놓치지 않는 일상의 활기를 마주한다. 솔직히 이 이야기를 다 듣고도 나는 아직 적응하지 못한 노인의 모습이 있다. 갑자기 이사를 온 옆집에 불쑥 들어온다거나, 지나가는 이에게 차를 마시라고 붙잡고, 같은 자리에서 같은 말을 반복하며 인사하는(치매 노인) 일들처럼, 많은 상황이 낯설고 두렵다. 동시에 궁금해진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그 시간의 삶을, 느리고 불편해지는 노년의 일상을, 수시로 마주하게 될 주름진 육체의 고단함을 받아들이며 살아가야 하는 마음을 어떻게 다잡아야 할지 말이다. 그 나이를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조금은 미리 엿보는 마음에, 저자의 표현대로 초보 노인의 세계에 입성하게 되는 과정이 그래도 조금은 덜 낯설고 적응하기 쉽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추측도 생긴다.
혹시나 하는, 저자의 실버아파트 경험을 어둡게만 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저자가 실버아파트를 떠난 것이, 노인의 삶에 적응하지 못한 실패를 말하는 건 아니다. ‘아직’ 온전한 노년에 들어서진 못한 ‘젊은 노인’의 귀한 경험이라고 하는 게 맞을 듯하다. 총 3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2장이 실버아파트에서의 적응과 기록이라면, 3장은 초보 노인 저자의 솔직한 일상이 그려진다. 저자의 일상에서 눈여겨 볼만한 것은, 오랫동안 유지한 지인들과의 교류, 꾸준한 취미생활로 다져져 은퇴 후에도 계속되는 활발한 외부 활동으로 일상을 유지하는 거였다. 보통 젊은 시절에 활발하게 움직이다가도 나이 들고 은퇴하면서 점점 그 활동이 줄고, 거의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일도 많은데, 외부 활동을 더 늘리지는 않더라도 기존 활동을 계속하는 것만으로도 일상의 활기를 유지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준다. 나이 들고 아픈 곳이 늘어나기도 하지만, 아이들도 떠난 집에서 외로울 수도 있지만, 자신을 들여다보며 때로는 절망하고 위로하면서, 담담하게 죽음을 이야기할 수도 있는, 늙어 가는 그 시간이 싫지만은 않을 듯하다. 태어나서 살아가고, 또 나이 들어가는 그 과정이 너무 자연스러우니까.
어쩌면 나이가 든다는 것은 상당히 괜찮은 일이었다. 죽음을 기뻐할 것까진 아니어도 슬퍼할 일도 아니라는 것. 죽음에 대해 상당히 구체적으로 접근해 간다는 것과, 나름 계획까지 세워 볼 수 있다는 것. 심지어 ‘나를 죽게 하라’고도 할 수 있다는 것. 물론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게 죽음인 것은 알지만. 하여간. (나는 초보노인입니다 163페이지)
누구에게나 똑같지 않을 노인의 삶을 조금이나마 준비하는 마음으로 읽게 된다. 저자 역시 초보 노인으로 노인의 삶을 아직은 온전하게 적응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이 시행착오 같은 시간으로 노인의 삶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저자의 세대가 아니어도, 누구나 언젠가 만날 그 시기의 삶을 미리 엿본 시간에 많은 감정이 교차한다. 노인의 시간 한가운데 있는 엄마가 생각나고, 곧 50대 60대의 시간으로 들어갈 우리 부부에게 무슨 준비가 필요할지 고민하게 된다. 한 개인의 사소한 기록이라고 하기에는 의미가 크다. 보고 듣는 게 많았고, 주변의 비슷한 상황을 떠올리며 가까운 가족을 먼저 생각하게 되고, 무엇보다 계속해서 늙어 갈 나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무엇이든, 덜 외롭고 덜 아프게, 일상의 존재감이 무너지지 않게, 자연스러운 흐름을 받아들이고 적응하며 살아갈 수 있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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