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사랑은 지금 행복한가요? - 기시미 이치로의 사랑과 망설임의 철학
기시미 이치로 지음, 오근영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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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람들은 이 세상에 자기 이외의 인간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언제 알게 될까요.

그것은 누군가를 사랑하기 시작했을 때입니다.

다른 사람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았던, 적어도 자신에게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을 동안은 무슨 행동을 하거나 생각을 하거나 할 때, 인생의 주어는 언제나 '나'입니다. 손에 잡으려 노력하는 행복 역시 '나의 행복'입니다.

그런데 누군가를 사랑하기 시작하면서 인간은 이런 상태에서 탈피하게 됩니다. 인생의 주어가 '나'에서 '우리'로 변합니다.

진정한 사랑을 깨달은 사람은 '나' 혼자만 살아봐야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야 비로소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자립이란 결코 혼자 사는 것, 자신의 일을 자기 혼자서 처리할 수 있는 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생각하고, '내'가 아니라 '우리'의 행복을 달성한다는 과제에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 바로 자립입니다. (165~166페이지)

 

 

사랑이 행복해야 했던 것인가?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랑이거나 사랑이 아니거나, 우리는 둘 중에 하나를 선택만 하는 것 아니었나? 그거 말고 사랑에 뭐가 더 필요했단 말인가. 누군가를 사랑하는데 이유가 없는 것처럼, 사랑하는 일에도 어떤 방식이 굳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못 했던 거다. 그저 사랑하는 동안에는 내 마음이 가는 데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다. 사랑이 끝났을 때는 내 마음이 더는 상대에게 향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거, 그게 전부였다. 헤어지고 슬퍼하거나 아프기는 했어도, 세월이 그 슬픔을 희미하게 한다는 것 또한, 안다. 사랑에 관한 어떤 물음이 구체적으로 필요하다는 생각을 못 한 채로 살아왔다. 그저 내 앞에 주어진 사랑에 임하기만 하면 되었기에 뜬금없는 저자의 물음이 당황스러웠다. 당신의 사랑이 지금 행복하냐고 묻는 이유가, 사랑이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뭐란 말인가?

 

전제부터 다시 해야겠다. 사랑이 행복해야 한다는 저자의 말을 인정하고 시작해야 이 책 속에서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말을 공감할 수 있다. 사랑은 그냥 사랑이 아니고, 우리가 노력하고 기술을 쌓아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몰랐던 게 아니다. 하지만 막연했다. 사랑하는 우리가 나 자신과 상대에게 쌓아가는 노력에 구체적인 게 없었다. 시시콜콜하게 드러내지 않아도 무던하게 흘러가는 것, 감정과 물리적인 노력이 합해져 이뤄가는 거라는 것, 그 정도였다. 그런데 저자는 참으로 구체적으로, 소소한 것들까지, 쉽지만 해내기 어려운 감정적인 문제까지 풀어내려고 애쓴다. 성숙하게 사랑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것들을 불러와서, 우리의 사랑을 돌이켜보고 생각하게 하고, 우리는 사랑에 얼마만큼의 능력과 기술을 가지고 있는 묻게 한다. 사랑하는 법을 알 때, 사랑도 인생도 행복해진다는 말을 증명한다.

 

사랑에 방법이 문제라는 게 무엇일까. 사랑은 능력이고 기술이라는 저자의 말이 낯설지도 모른다. 사랑이 무슨 공부도 아니고 전문직도 아닌데 말이다. 저자는 사랑의 정의부터 다시 쓴다. 사랑이란 '나와 상대가 함께 시간을 쌓으면서 관계를 만드는 일'이라고 했다. 그게 '사랑의 기술'이고, 서로가 함께하면서 공유하는 시간은 곧 '체험되는 시간'이 되어 사랑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사랑은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과 같다. 그러니 연애도 결혼도 혼자 할 수 없다. 우리가 사랑하면서 유지하고자 하는 연애나, 그 결과로 얻고 싶은 결혼도 같이 노력하지 않으면 이뤄질 수 없다. 흔히 상대와의 관계가 어긋나면 둘 중 하나의 문제를 찾곤 하는데, 그건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다. 저자의 말처럼, 그 문제는 '누구'에게가 아니라 '어떻게'에 관한 것이다. 둘 사이에 생기는 문제가 왜, 무엇 때문에 시작되었는지 원인을 찾아야 하지 누구 한 사람에게 책임을 묻는 건 문제 해결의 방법이 되지 못한다. 둘 사이에 일어나는 문제 대부분을 상대에게 책임 묻기로 한다면, 그는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고 성숙한 사랑을 할 수 없는 사람이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노력하는, 배우는 사랑이어야 하니까. 그래야 우리의 사랑이 행복할 테니까 말이다.

 

사랑은 '능력'의 문제이고 나아가서는 '기술'이라고 프롬은 생각합니다. 그리고 기술이라면 지식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빠지는 것'이 아니고 '쌓아올리는 것'입니다. (47~48페이지)

 

함께 지낸 시간이 '그저 보낸 시간'이 아니고 '체험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기쁨을 동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각자의 시간이 아니고, 둘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229~230페이지)

 

인생을 배우는 것처럼 사랑도 배울 수 있다는 저자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는 게, 요즘 내가 느끼고 있어서다. 살아오면서 내 인생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을 나 혼자 결정했다. 그건 사람을 만나는 일에서도 비슷하다. 만날 사람을 내가 정하고, 그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의 정리도 내 맘대로 했다. 내 생각대로 하면 되는 거였고, 그게 적용되지 않으면 싸우기도 하면서 결국 헤어지는 거겠지 싶은 일을 반복했다. 행복해지자고 연애하는 건데 내 맘대로 되지 않으니 행복하지 않은 건 당연했다. 그러니 끝날 수밖에. 그런데도 아쉽다거나 잘못된 걸 몰랐다. 그저 나의 말과 생각을 인정해주지 않는 상대에게 화만 냈다. 도대체 왜? 그러다가 지금 애인을 만나면서 나는 조금씩 변했다. 부정적인 마인드를 바탕에 깔고 사는 내가 긍정적인 마인드를 바탕에 깔고 사는 그와 대화가 통할 리가 없었다. 의심하고 확인하고 경계하는 내 생각이 '괜찮겠지, 나아지겠지, 어쩔 수 없지' 3종 세트를 남발하는 그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거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나는 안 되는 일 앞에서 나를 닦달하고 있는 걸 봤다. 내려놓고 잊어야 하는 걸 인정하지 못했다. 그의 말처럼,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해 나 자신을 들들 볶아댔다. 그의 말 한마디가 나의 사고를 바꾸게 하는 과정을 경험하면서, 혼자가 아니라 같이 해야 하는 게 사랑이라는 저자의 말을 인정하게 됐다. 나만 보고 나만 우선시하던 관계에서, 강요하지 않고 나아가야 할 상대와의 관계를 생각하는 게 많아졌다. 피곤하고 귀찮아서 걸려오는 전화를 무시하던 것도, 왜 그렇게 느리냐고 투덜대던 것도, 서로 식성이 달라서 짜증 내던 것도. 크고 작게, 서로가 달라서 힘들었던 순간들을 돌이켜보곤 한다.

 

생각이 다르다는 사실이 명확해졌을 때는 감정적이 되거나 힘을 사용해서 이견을 짓눌러 이기려고 들면 안 됩니다. 대화를 나누고 때로는 끈질기게 논쟁을 펼칠 수도 있어야 합니다. 생각이 다르다고 인정하는 만큼, 바로 그 폭만큼 우리는 대화할 수 있습니다. 생각을 맞추려고 하지 말고, 이렇게 다르구나, 알아간다고 생각하면서 대화하는 것이 비결일 수도 있겠습니다. (199~200페이지)

 

저자가 말하는, 같이 만들어가는 체험하는 시간에 나는 무엇을 보여줬던가 싶다. 그러다 점점 나를 돌아보게 되더라. 내가 상대에게 화를 내고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들이, 상대도 나를 보며 똑같은 감정을 느끼고 쌓아두고 있지는 않았을까? 차마 말하지 못하고 그대로 받아주기만 했던 거 아니었을까? 그때야 '아차' 싶은 후회, 내가 느끼는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던가 싶은 반문, 내가 맺은 이 관계에서 나는 무슨 책임을 지고 있었던가 싶은 깨달음이 밀려왔다. 나는 이 관계를, 상대를 존중하지 않았던 거다. 저자는 사랑의 기술은 서로를 대등하게 보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했다. 상대의 관심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고도 했다. 그러지 않으면 관계가 망가지는 건 순간이고, 망가진 관계를 회복하는 건 한참의 시간이 걸린다고. 그러면서 좋은 관계를 쌓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상대를 존경하고, 신뢰하고, 협력할 것. 나빠지려고 하는 관계에서는 그 관계 개선을 위한 시도와 방법을 찾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 것. 인간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고 그 사람이 유일무이한 존재임을 아는 능력이 존경이라고 했다. 상대의 과제 해결 능력을 믿는 것이 신뢰라고 했다. 결국은, 상대를 한 사람으로 존중하고 신뢰했을 때 '우리'의 사랑은 유지되고 성장한다는 말이겠지.

 

사랑하는 법을 알아야 사랑이 행복해진다는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그냥 하는 게 사랑이 아니라, 배우고 노력하며 얻는 게 사랑의 기쁨이라고 말한다. 모르지 않는다. 세상 그 어떤 일도 노력하지 않고 얻어지는 건 없을 테니. 저자는 거기에 한 가지 더 보탠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하는 노력은 힘들기만 한 게 아닌, 즐거운 과정이라고 말이다. 사랑, 연애와 결혼이 두 사람의 관계를 인생의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가기 위한 노력의 과정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피력하면서, 행복한 사랑을 완성해가는 기쁨을 알게 하려 애쓴다. 혼자가 아닌, 둘이서 해야 하는 협력이다.

 

사랑은 강요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상대를 사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상대가 우리를 사랑할지 여부는 상대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겐 결정권이 없습니다. 사랑받고 싶다면 사랑받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69페이지)

 

"사랑과 결혼은 인간의 협력에 있어서 본질적이다. 그 협력은 두 사람의 행복을 위한 협력일 뿐 아니라 인류의 행복을 위한 협력이기도 하다." (251페이지)

 

관계를 맺고 이뤄가는 게 어디 사랑뿐이겠는가. 이 책에서 저자는 사랑을 얘기하고 있지만, 저자가 말하는 내용은 사랑에만 머물지는 않는다. 찬찬히 들여다보면 우리가 맺는 모든 인간관계에서 적용되는 방법이다. 연애와 결혼을 넘어, 인간관계 전체를 아우르는 방법에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같은 상처를 받지 않겠다고 연애가 두려워 다시 시작하기 두려운 사람, 현재의 사랑이 어려운 사람, 배우자와의 관계가 위태로운 사람 등 우리의 사랑이 행복하지 않았던 이유를 찾으면서, 사랑하는 관계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저자가 전하는 메시지로 자기만의 방법까지 찾아간다면, 더할 나위 없을 테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배우는 일. 인생의 많은 일에서 부딪힐 때마다 우리가 찾는 방법이었다. 그 많은 관계 안에서 더 성장하고 나아가고자 애쓸 때, 우리는 행복을 만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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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이 - 심윤경 장편소설
심윤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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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스카이 캐슬>은 다음 회를 기다리고 싶을 만큼 스토리가 흥미로웠다. 대한민국 교육의 현실을 보는 것 같기도 했고, 그 안에서 부모와 아이와 학교가 어떻게 존재하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종영에 가까이 갈수록 드라마는 미스터리 같은 분위기를 풍기며, 김주영 선생의 과거가 어땠는지, 혜나를 죽인 범인이 누구인지, 예서는 영재처럼 되어갈 것인지 지켜보게 한다. 결말까지 보고 나면 시원할 것 같았는데, 오히려 허무했다. 3대째 의사 가문을 만들어야 하는 예서 엄마 한서진은 결국 아이가 행복해지는 길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공부보다는 인간다운 아이로 성장하기를 바라게 된다. 여기서 마무리되었다면, 우리는 현실을 잠시 잊은 채로 드라마 같은 결말을 꿈꾸며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봤을지도 모른다. 예서 엄마도 이렇게 변했으니, 무조건 공부를 잘해서 최고의 삶을 누리려는 사람들의 지나친 행보가 달라질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드라마는 현실을 비켜 가지 않는 듯했다. 예서 엄마는 변했지만, 제2의 예서 엄마의 등장을 막을 수 있는 세상은 없었던 거다. 그렇다면 왜 이런 부모가 존재하는 것일까. 왜 부모는 이런 다그침과 그들이 완벽한 성공이라고 믿는 과정을 자식에게 강요하는 것일까? 자식의 생각을 한 번이라도 물어보고 행동하고 있는 것일까? 혹시, 부모니까 자식의 행복을 당연하게 책임지고 싶어서? 하지만 그게 답이 아니라는 것은 이 소설의 결말이 잘 보여준다.

 

처음 설이의 미래를 상상할 때도 그랬다. 보육원 앞 음식물 쓰레기통에서 발견된 아이 설이는, 새해 첫날 새벽에 발견되었다고 해서 '설'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설이의 발견 자체가 이슈가 되었고, 풀잎보육원은 여러 곳에서 후원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설이의 그 후 삶은, 발견되었을 때의 관심처럼 빛나지 못했다. 세 번의 파양과 함묵증을 겪었다. 보육원 이모와 함께 살게 된 설이는 사립 '우상초등학교'로 전학 가게 된다. 그동안의 환경과 너무 달라서 설이가 적응하기도 전에 옆자리 시현은 설이의 학교생활을 힘들게 하는 존재로 설이와 대립한다. 왕따, 학교 폭력을 겪으면서도 설이는 버틴다. 그 학교에서 살아남기 위해 강인한 존재로 변신한다.

 

나에게 소중한 것은 너무 힘겹게 찾아오고 너무 쉽게 사라졌다. 왠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나는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집 안을 돌아다녔다. (108페이지)

 

초등학교 6학년 아이가 거친 욕을 하고, 만만하지 않게 보이려고 사나운 화장을 한다. 설이가 우상초등학교에서 살아남는 방식이었다. 학교에서도 설이를 마냥 미워할 수 없는 게, 설이는 공부도 잘하고 외부의 온갖 대회에 나가 상을 휩쓴다. 그러니까 문제로 보면 문제이기도 하지만, 공부를 잘하니 문제는 문제가 아닌 게 되어버리기도 하는 설이의 학교생활인 것이다. 고급 사립초등학교 아이들이 그렇게 바라는 일, 그들의 인생에서 1순위로 획득하고 싶어 하는 그 공부가 설이에게 놀이처럼 보이니 이 무슨 아이러니인가. 설이는 국가 보조를 받고 살아가야 하는 아이다. 보육원 이모의 임대 아파트에 산다. 그러니까 우상초등학교의 환경은 설이가 전혀 경험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 그 무대 위로 올라간 설이가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그게 아니라도 이미 세 번의 파양으로 설이의 심신은 지칠 대로 지쳐있었을 텐데, 어른들의 결정으로 만든 이 모든 일을 감당해야 하는 건 설이었다. 이상하다. 설이의 인생, 설이가 중심이 되어 흘러가야 맞는 건데, 왜 아무도 설이에게 묻지 않았을까? 설이가 어려서? 설이가 가난해서? 원래 어른들이 하라는 대로 해야 하니까? 설이의 주변에서 설이에게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질문 없는 그 문제의 답을 설이는 스스로 찾고 있었다.

 

소설은 설이 주변의 많은 사람을 한명씩 등장시키면서 궁극적으로 해야 할 이야기를 차곡차곡 쌓아간다. 풀잎보육원 원장은 설이에게 처세술을 가르치는 냉정한 스승 같았고, 설이의 담임선생은 말로만 품어주는 좋은 사람이었다. 설이가 다니는 병원의 곽은태 선생은 설이가 바라는 가정의 이상향을 상상하게 했다. 읽다가 보면, 곽은태 선생이 설이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보여주는 인물처럼 보인다. 병원에서 만난, 어떻게 보면 공적인 사이지만 사적인 관심과 이해를 보여주는 사람이었는데, 오히려 이 소설 속에서 가장 한국적인 부모였던 것이다. 자기가 자란 환경을 이겨내는 방식의 삶을 그의 아내와 함께 아이에게 강요한다. 오히려 설이와 함께 사는 보육원 이모가 가장 이상적인 부모의 역할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이모는 계산하지 않았다. 아이의 마음을 읽을 줄 알았다. 가족이 무엇인지 묵묵히 행동으로 증명하는 사람 같았다. 조건 없는 사랑. 대가 없는 행동. 그렇게 읽고 보니, 이 소설은 대한민국 교육계와 공부를 우선으로만 요구하는 부모를 고발하는 소설이 아닌 것 같다. 아마도 사랑을 말하고 싶었나 보다. 인간적인 감정과 조건 없는 사랑을 퍼부어주는, 그런 감정이 바탕이 된 가족을 그리고 싶었던가 보다. 결국은 사랑을 찾게 하는 일, 공부와 학벌과 재력을 갖추고자 애쓰는 부모 역시 자식에게 주고 싶었던 것은 사랑이었으리라. 단지, 방식이 틀렸을 뿐이다.

 

읽으면서 계속 기억에 남는 인물이 있었다. 풀잎보육원 원장. 한때 풀잎보육원을 여기저기 드러냄으로써 후원을 받고, 아이를 좋은 가정에 입양 보내면서 그 아이가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진짜 부모는 아니지만 사랑으로 아이를 보내는 방법을 찾느라 애썼다고 믿고 싶은 사람. 하지만 이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많이 외로웠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돌보는 아이를 조건부 사랑으로 키웠던, 착한 일을 하고 공부를 잘해야 사랑하는, 어떤 임무를 완수해야만 인간다운 대접을 받는 사람으로 여겼다. 보육원의 아이들을 돌보고 직원을 대하는 것조차 사업을 하는 것으로 보이게 했다. 어쩌면 부모의 어긋난 욕망을 그대로 표출하는 대표적 인물이 아니었나 싶다. 정작 자기 인생에서는 무슨 일이 생겨도 찾아와줄 가족이 없는 외로운 사람. 바쁘지 않은 시간에 찾아오는 외로움을 감당할 수 없었기에 그렇게 보육원 일에 몰두하고 앞장선 게 아니었나 싶을 정도였다. 원장의 말년에 비추는 젊은 시절의 모습이 더 외로워 보였던 건, 빡빡하게 보내는 일정에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어도 정작 간절한 순간에 옆에 남아있는 사람이 없었던 현실이 더 서늘했다. 그때 생각이 났다. 어쩌면 우리가 보는 많은 부모는, 소설 속 시현의 부모를 비롯한 우상초등학교의 많은 부모가 아이들에게 바랐던 것은, 외로움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바쁘고 정신없이 살아가게 바탕을 만들어주려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은...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 빈틈없는 일상을 보내야만 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로 들린다.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계속 노력하고 달려야 하니까 말이다. 부모 자신들이 겪었던, 위로 오르기 위한 과정이 힘들었다는 것을 잊고 지금의 결과만 생각하는 현실에, 아이의 시간을 투자하여 만들어주고 싶은 미래였다. 바쁘게 달리고 많은 것을 얻고 살아가는 일상을 주겠다는 맹렬한 욕망. 그렇게 얻은 인생에 외로움은 덤이다. 드라마 <스카이 캐슬>의 차 교수가 그렇게 노래하던, 피라미드의 꼭대기로 올라가야 한다고 외치던, 결국 자기가 외로움에 빠지고 괴로워지던 결말. 그 드라마 속 피라미드의 정답을 찾은 이가 누군지 기억하는가? 우 교수의 아들 수한이다. 우 교수 부부 역시 주변 환경에 휩쓸려 아들에게 피라미드의 꼭대기로 가야 한다고 우길 때 수한이 말한다. 중간. 피라미드의 무게중심은 여기 중간에 있다고. 그러니 딱 거기가 좋다고.

 

사랑과 욕심, 감사와 미움처럼 극과 극으로 다른 것이 그 경제조차 알 수 없을 만큼 한 덩어리로 합쳐진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원래 그렇게 뒤섞여 있는 거라는 결론으로 끝나는 게 분하고 억울했다. 내 인생 다 바쳐서라도 그것들을 한 겹 한 겹 발라내 각각의 요소로 분리해놓고 싶었다. 온통 뒤섞인 감정들의 무더기 속에 화사한 사랑과 감사는 맨 거죽에 겨우 한 줌뿐, 뒤로는 시커먼 욕심과 날선 미움들뿐이었다고 세상에 목청껏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 폭발적인 눈물은 원장님과 나 사이에 사랑과 감사가 겨우 한 주먹은 아니었다고 소리 없이 속삭였다. 그것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크고 무거웠다. 사랑과 감사가, 욕심과 미움이 각각 얼마만큼인지 따지는 건 의미가 없고, 하나하나 발라내서 확인하려면 어쩌면 내 인생을 다 털어 쓰고도 모자랄 만큼 긴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고 눈물이 소리 없이 속삭였다. (256~257페이지)

 

우리가 어렸을 적의 기억, 어른이 된 지금 아이를 바라보는 시선.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다를까 생각해보게 했다. 내가 살아온 흔적이 정답은 아닌데, 어른이 된 우리는 자주 자기 생각과 욕심을 아이의 바람과 동일시한다. 그 착각과 오해로 어긋나기 시작한 부모 자식 관계는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 보여준 설이의 선택이 완전한 답이라고 할 수는 없다. 세상은 변하고, 그 세상 속에서 부딪히며 살아가는 설이도 어떻게 변하고 또 다른 선택을 할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어린 나이에 설이가 겪은 온갖 일들이 허투루 보낸 시간은 아닐 것이다. 설이가 경험한 일들을 바탕으로 이제 하고 싶은 말을, 바라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아이가 되었으니까. 어쩌면 아이든 어른이든,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가슴 속 말을 표현하며 대화할 수 있는 것 아니었을까. 내 마음을 상대에게 강요하는 게 아니라 건네져 오는 말을 듣는 것과 같이해야 하는 거,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도 어김없이 적용되는 대화의 법칙이라는 거. 사랑은 일방적일 수 없으니까, 주고받아야 완성되니까. 우리가 마음을 꺼내놓는 순간 사랑은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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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너는 노땡큐 - 세상에 대들 용기 없는 사람이 뒤돌아 날리는 메롱
이윤용 지음 / 수카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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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는다는 건, 단순히 늘어나는 숫자만을 의미하는 건 아닌 듯하다. 나 같은 경우 늘어나는 나이와 주름살이 슬프기도 하지만, 참기만 했던 것들을 말하는 것도 늘어났다. 눈치 보느라 집어넣어야 했던 감정을 표출하는 일이 많아졌다. 남의 인생을 함부로 재단하며, 일상의 시시콜콜함까지 관여하려는 사람에게 차디찬 말 한마디 건넬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는 거다. 물론 이런 경우도 항상 가능한 건 아니다. 상황과 자리에 따라, 속에서는 부글부글 끓어오르지만 참아야 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아니까. 하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참아야 하는 자리가 그리 많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나를 함부로 대하는 것처럼 온갖 참견 다 하면서 말로 상처 주는 사람에게는 배려해야 할 예의 같은 건 챙길 필요가 없었다는 후회가 종종 있었으니까.

 

라디오 작가로 오랜 커리어를 쌓아온 저자가 세상을 향해, 자기 인생을 흔드는 사람을 향해 한 방을 날린다. 생각해보면 라디오라는 공간은 많은 사람의 온갖 사연이 몰려드는 곳 아닌가. 20년 동안 청취자들의 많은 이야기에 공감해 온 작가가 사연을 들으면서 차마 전파로 내보내지 못한, 꺼내고 싶은 말도 참 많았을 것 같다. 거기에 작가 자신이 겪은 일들에 하고 싶은 말을 더 보태고 싶었을 수도 있고. 방송에서나 사적이어서 말하지 못했지만, 자기가 쓰는 책에서는 마구 쏟아내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 공유하고 싶었겠지. 우리 이런 일로 가슴에 상처받는 일 더는 하지 말자고. 거절할 것은 거절하고, 차단할 것은 차단하면서 우리 인생 흔들리지 말자고 말이다.

 

내 앞에서 칭찬하는 사람은 뒤에서도 날 칭찬하는 줄 알았고, 나한테 잘해주면 그저 다 좋은 사람인 줄 알았고, 나에게 늘 자상한 남자는 다른 여자에게도 자상하다는 걸 몰랐고, 겉멋 부리기 좋아하는 남자는 인생에도 겉멋이 들어 성실하지 않다는 걸 몰랐으며 누군가는 내가 한 이야기를 토씨 몇 개 바꿔 뒤에서 아예 다른 이야기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는 걸 몰랐다. (122페이지)

 

생각해보면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마냥 쉬운 일도 아니지만, 하려고만 하면 가능한 일을 주저하면서 못 했던 거다. 내가 상처받는 것을 먼저 보지 않아서 그렇다. 내가 상처받고 내 감정이 아파하는 것을 인지하기 전에, 상대에게 밉보이면 안 된다는, 상대에게 싫은 소리 하는 건 안 된다는 판단이 앞서 나를 지키지 못했던 거다. 그렇게 나를 먼저 챙기지 못하고, 주변의 것을 보면서 착하고 괜찮은 사람 이미지를 챙기느라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냉정한 말을 건네지 못했던 시간을 소환한다. 그러면서 이제 인생에 독이 된 사람과 감정과 말들을 삭제할지 저장할지 선택해야 할 시간을 마주한다. 동시에 내 인생에서 힘이 되었던 사람과 따뜻한 말을 살포시 담아본다. 저자의 분위기를 그대로 옮겨보자면, '소심해서 세상에 대들 용기도 없고 억울하지만 따지지 못하는 성격에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는, 나에게 상처 준 사람들과 감정들을 내 인생에서 지워버리는 일'일 테니까. 이 작은 몸부림이 우리에게 주는 시원한 한방이 우리의 오늘과 내일을 행복하게 해줄 것만 같다.

 

경제 위기 시절에 겪은 사회의 쓴맛, 여러 번의 연애가 만들어준 남자를 보는 시각, 중독자처럼 일하면서 부딪히는 사람과의 관계. 사람들 사이에서 생긴 상처가 숨통을 조일 때마다, 그들이 자기에게 버리고 간 쓰레기들을 처리하지 못해 켜켜이 쌓아두기만 했다. 쓰레기를 쓰레기인 줄도 모르고 안고 살아왔다. 좋은 것만 기억하고 떠올리며 나아가기에도 부족한 시간이고 인생인데, 그걸 이제야 알게 된 거다. 그렇다고 후회만 하기에는 우리 인생이 너무 소중하니까, 아픈 일들은 하나씩 지우고 좋은 기억들 하나씩 품으면서 행복해질 생각만 하면 된다. 그중에서도 유독 마음에 오래 남은 구절이 있다. 우리가 찾았던 것은 거창한 말이 아닌, 그냥, 말 그대로, 마음을 다독여줄 단순한 한 마디의 위로였다는 것을.

 

승객 여러분, 오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소중한 사람과 따뜻한 저녁 보내시기 바랍니다.

 

순간, 아침부터 온종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이리 뛰고 저리 뛰던 나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나는 그만 울컥 눈물을 흘리고 말았던 것이다.

 

위로의 말이란 얼마나 단순하고 명료한 것인가.

우리가 언제 거창한 말을 바랐던가.

우리가 언제 잘했다는 칭찬을 원했던가.

 

그저 딱 한 번의 헤아림.

너의 고생을, 속상함을,

잘 해내고 싶은 부담감을, 간절함을

내가 알고 있다는 그 말 한마디면 되는 것을...

그저 그날 내 고생을 알아주는 한 사람만 있으면 되는 것을... (67~68페이지)

 

인생에서 독이 되는 관계를 티 안 나게 정리하는 방법이라고 말하지만, 그 방식이 참 소박했다. 그래서 더 웃음이 나기도 하지만, 정작 우리가 할 방법이 이거 말고 또 뭐가 있을까 싶어서 공감한다. 우연히 길에서 만난 고등학교 동창이 저자의 늦은 결혼을 걱정하면서 결혼정보회사에 가입하라고 하고, 오랜만에 전화를 걸어온 대학 동기는 대뜸 돈을 빌려달라고 하면서 저자의 경제 상태를 나무란다. 분명 듣는 사람이 화를 내야 하는 상황인데 저자는 사과부터 했다고 한다. 순간 나도 모르게 사과의 말이 나갔을 것이다. 내가 받은 상처가 보이기 전에 상대가 화를 내는 게 더 큰 일이라는 생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우리가 이런 선택을 하면서 나의 마음보다 상대의 감정을 먼저 읽는 것은, 관계가 어색해지고 서로 얼굴 붉히는 일이 싫어서 그랬던 것 같다. 내가 원하지는 않았지만, 자꾸만 나에게 부딪혀 오는 일들. 어쩔 수 없이 감당하는 게 답이 되어버린 상황들. 그때마다 상처를 가슴에 쌓아오던 방식이 잘못된 거였다. 이제라도, 하루라도 빨리 내 인생에서 그것들을 내보내야 할 때다. 버리고, 삭제하고, 당장!

 

버튼 하나만 누르면 될 일이었는데, 나에게 상처 주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람을 더 봐야 할지 고민해볼 필요도 없는 일이었는데, 무례하고 부당하게 나를 대하는 사람을 삭제하는 일에 야무지게 대처하지 못해 대나무 숲을 찾아다니는 일을 그만하고 싶다면, 저자가 전하는 방식에 귀 기울여보자. 한 번씩 인생을 리셋하고 싶은 순간이 있지 않은가. 지금이 딱 그럴 때다.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들과 부정적인 감정들을 정리하면서 한발 한발 나아가는 것만이 내 인생을 채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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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 - 권기태 장편소설
권기태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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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은하는 우리 위에서 서서히 돌아간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삶이라도 그 아래에서 함께 한다. (432페이지)

 

 

우주에 가보고 싶다는 인간의 바람은, 더는 바람이 아닌 현실에 되었다. 물론 그 현실이 지금 완벽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상상만 하던 시절에 비하면 현실에 가까이 와 있는 게 맞지 않을까?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으로의 이동이 가능하다고 믿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게 마냥 신기할 뿐이다. 내가 죽기 전에 우주여행이 가능해질까 싶지만, 어쨌든 우리 인간에게 우주로 향하는 일은 이제 상상에 멈춰있는 일이 아니다.

 

우주를 꿈꾸던 이진우는 우주인에 도전한다. 다행스럽게도 그의 직업은 생태 보호 연구원이다. 과학과 조금 더 가까이 있는 그는 우주인의 자격에 조금 더 가까이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 최초 우주인이 되기 위해 나선 그는 다른 도전자들과 함께 경쟁한다. 협력해야 같이 나아갈 수 있는 동지애도 느낀다. 주변의 많은 이가 경쟁자인데, 우주로 향하고 싶다는 같은 꿈을 꾸는 동료들 사이에서 그는 최종 선발까지 나아간다. 하지만 여러 위기를 극복하고 회사로 돌아온 그에게 남은 건 대기반 발령이라는 좌천 통보였다.

 

이진우는 우주인이 되려고 체력테스트를 통과하고 온갖 단계를 넘어서 최종 4인에 선발된다. 이제 이 고비만 넘기면 된다. 마지막 1명의 자리를 향한 몸부림은 시작되었고, 그 자리에 앉을 확률은 높아졌다. 오랜 시간 꾸어온 꿈을 이룰 수 있는 때가 된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관문처럼 놓인 그 문제 앞에서 그는 고민한다. 치열한 경쟁과 동료애를 같이 키웠던 대상을 밀고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그는 이 고비를 어떻게 넘어갈 것인가? 동료를 밀고하고 최후의 1인에 등극할 것인가? 아니면, 조금은 인간적인 감정에 더 치중할 것인가? 어떤 쪽으로든 결론은 내려야 하고, 그는 마치 인생 최대의 위기에 직면한 것처럼 힘든 시간을 보낸다.

 

살면서 많은 경쟁 상황에 놓인다. 때로, 이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해야만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마치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느냐 아니면 나의 마음 조금 더 안정되는 선택을 할 것이냐 망설이게 된다. 망설이더라도 선택은 해야 한다. 어떻게 해서든 결론을 내야 할 때가 대부분이다. 소설 속 이진우처럼, 진실을 밝히는 일과 목적을 이루는 일 중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나중에 후회를 덜 할 것인가 생각해야 한다. 반드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면, 무엇을 선택해야만 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는 우리 인생에 언제나 있었다. 왜 그래야만 하는 현실일까. 어려운 선택 앞에서 너무 괴롭기만 한데 말이다. 그의 말처럼, '인간의 물리학에는 왜 한 공간에 두 개의 선택이 있을 수 없단' 말인가. 평생의 꿈을 향해 달려가는 이들의 꿈이 실현되는 그 현장은 만만하지 않았다. 피만 없을 뿐이지 전쟁터였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이다.

 

사람도 너와 나, 우리는 무게 없이는 살 수가 없고 무게가 있는 곳에는 중력이 있다. 중력은 바람과 강, 밀물을 당길 때는 공평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갈 때는 오로지 개별적일 뿐이다. 버릴 과거는 없다. 아무도 모르니까. 피할 미래도 없다. 씨앗이 움트고 있으니까. 운명을 사랑해라. 그리고 가능성을 시험해봐라. 나아간 만큼 너의 인생이 된다. 다시 일어난 만큼 너는 강해진다. 그러니 반드시 생각해라. 이것이 끝이 아니라고. 너는 더 멀리 날아가야 한다고. (440페이지)

 

한때 우주인 선발 경쟁을 가까이서 지켜보았다던 작가의 말이 인상적이다. 우주인 선발대회에서 탈락한 한 공군사관학교 교관의 눈물을 지켜보면서 '이뤄질 수 없는 꿈'에 관해 생각했을 것 같다. 그러니까 우리 인생에서 수업이 많은 꿈을 꾸고 이루지 못한 꿈을 버리고, 또 새로운 꿈을 꾸기를 반복해나갈 수밖에 없는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그런 현실에서도 우리가 끝까지 지키고 버리지 말아야 할 삶의 태도 같은 것을 이진우로 대신 보여준다. 아무리 경쟁 상황에 놓여도, 간절한 꿈을 향해 가야만 해도, 내가 차지해야 할 자리가 바로 코앞에 있어도, 우리는 무엇을 지키고 선택해야 하는지 묻는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며 살아가야 할 경쟁 과정이겠지만, 그 과정이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것을 그린다.

 

이 소설을 13년 동안 취재하고 35번이나 고쳐 쓰면서,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다 담을 수 있었는지 독자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이 그대로 다 전달되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 말을 다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게, 같은 세상을 사는 우리가 느끼는 게 같거나 비슷하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누구나 자기가 바라는 인생과 꿈을 이루고 싶어 하지만, 때로는 이기고 지는 일을 경험하고, 그런 경험 앞에서 어떤 태도를 보여야 인간다운지를 배우고 아는 것. 작가는 치열하고 힘든 우주인 선발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꿈을 향해 도전하는 사람들의 감동적인 모습에 또 한 번 용기를 내고 싶은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매번 넘어지고 무너질 때마다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렇게 계속 꿈을 꾸고 이뤄나가려고 하는 게 사람이 살아가는 의미이자 목표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해, 후회 없이 살아갈 때 꿈에 가까워진다는 거...

 

너는 끝까지 가보았으니까. 그 말이 마치 성큼 걸음을 내딛듯이 나에게로 들어왔다. 너는 끝까지 가보았으니까…… 꿈이 스러져가도 최대치를 다했으니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거야. (442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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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 의심
도진기 지음 / 비채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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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죄판결의 기준은 무엇일까. 피의자와 피해자. 양쪽에서 주장하는 진실과 제시하는 증거가 나름 다 타당할 것이다. 물론 각자로서 말이다. 판사는 그들의 진술과 제시된 증거로 유죄 무죄를 가려야 한다. 이때 법은 어느 정도의 합리적 의심과 인간 사회에서 통용되는 상식을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법의 판결을 기다리는 우리의 입장이고, 판사는 그들이 배운 법의 원칙에 의한 판결을 내려야만 한다. 그때 적용되는 법칙 중의 하나가 합리적인 의심이라고 한다.

 

합리적 의심 없는 입증의 원칙 Proof beyond a Reasonable Doubt

의심스러운 때에는 피고인의 이익을 따른다(in dubio pro reo)는 원칙에 근거, 피고인이 범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합리적 의심'이 존재한다면 판사는 유죄를 선고할 수 없다.

 

의심은 있지만, 그 의심의 정도만으로 피고인이 범인이라는 확정을 내릴 수가 없을 때, 합리적 의심이 존재할 때 판사는 피고인에게 유죄를 선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일까 싶은데, 간단하게 피고인이 유죄라는 분명한 증거가 아니라면 유죄를 선고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혹여나 판결이 잘못되어 피고인의 무죄가 유죄로 둔갑하여 그의 삶이 고통스러워질 수 있기에 만들어진, 판결의 바탕이 되는 원칙이라고 봐도 좋겠다. 하지만 그 합리적 의심의 상황에서 판결을 내린다는 게 쉬운 일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작가는 이 소설로 보여준다.

 

한 여자가 법정 안으로 들어온다. 피고인 김유선은 애인을 살해한 죄로 구속되었다. 일명 '젤리 살인사건'이다. 검사는 애인이 젤리를 먹고 숨이 막혀 죽었다고 증언한 그녀의 말을 거짓이라고 판단했다. 검사는 그녀가 애인을 죽이고 젤리가 목에 걸려 죽은 것이라고 거짓 진술을 했다고 한다. 사고사로 판단하고 애인이 죽은 후 바로 화장을 하고 장례식까지 치렀는데, 갑자기 왜 이 문제가 불거졌나. 장례식이 끝나고 얼마 후에 김유선이 거액의 사망보험금을 받은 데 그 이유가 있다. 애인 사이에서 보험 수익자를 법적수익자가 아닌 애인이 받게 지정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그것도 헤어지려고 했던 사이에서? 피고인 김유선의 증언은 상식적으로 완전히 이해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녀의 주장에 유죄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이제 판결은 어떻게 내려질 것인가.

 

형사재판에서 유죄로 하려면 '합리적 의심 없는 증명'이 필요하다. (중략) 형사재판은 한 인간을 감방에 보낼까, 말까, 심지어는 교수대로 보낼까, 말까를 결정하는 일이다. 그 정도 증거로는 턱도 없다. 합리적인 선에서의 '의심'이 전혀 없는 수준까지 입증되어야 한다. 이것이 '합리적 의심 없는 증명' 원칙이며, 형사재판에서 유죄로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다. (131페이지)

 

몇 년 전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 하나가 떠오른다. 여자가 낙지를 먹고 죽었고, 애인이 보험금을 받았다. 이 사건은 대법원까지 갔고 피의자는 무죄로 풀려났다. 소설은 이 사건을 연상하게 한다. 피의자는 대법원 판결에서 무죄로 풀려났다. 소설은 현직 부장판사인 현민우가 일 년 전에 재판한 '젤리 살인사건'을 반추하는 것으로 풀어간다. 애인 사이의 남자와 여자가 젤리와 술을 사가지고 모텔에 들어갔다. 젤리를 안주로 먹던 남자가 질식해서 숨을 멈추었고,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며칠 후 사망했다. 여자는 애인의 사망보험금을 받고 독촉을 받던 돈 문제를 해결하고, 또 그 돈으로 다른 남자와 여행도 다녀왔다. 보이는 많은 것이 그녀를 살인자라고 지목한다. 하지만 법으로 증명해야 할 것들이 있다. 현민우 판사는 두 배석판사와 합의를 하면서 이 피의자에게 어떤 판결을 내려야 하는지 고뇌한다. 부장판사 현민우는 피의자 김유선이 유죄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두 배석판사는 무죄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현민우의 판단에 합리적 의심이 없는 입증을 거쳤는지 묻는다.

 

소설은 1년 전의 이 재판을 돌이켜보는 이야기로 진행되지만, 그 안에는 젤리 살인사건만 있는 게 아니다. 판사로서의 고뇌, 고충이 충분히 전달된다. 한 사람의 유명을 달리할 수도 있는 그 판결의 과정과 절차가 절대 쉽지 않은 일이며, 우리가 생각하는 법이 그리 간단하게 적용되어 유죄 무죄를 밝혀내지 못한다는 것을 보게 한다. 그러면서 저자의 바람이자 독자의 간절함을 담아 소설의 결말로 완성해낸다.

 

본문 중에서 나오는 말인데, 법이 정의를 위하지도 않으며, 판사가 정의의 수호자도 아니라는 말은 가슴을 써늘하게 했다. 무슨 사건이 발생했을 때, 우리가 그 사건에 개입되어 있을 때, 그 사건이 법의 판결을 받아야 하는 일이 생겼을 때, 우리는 법의 정의를 믿는다. 법의 원칙을 바탕으로 판사가 정의를 이뤄 내줄 것으로 믿는다. 법은 언제나 옳아서, 그 옳음으로 억울한 사람 없게 판결해줄 것이기 때문에, 라고 믿으며 공정한 판결을 기대한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한 것이 있다. 법은 상식과 동의어는 아니라는 것. 우리가 상식이라고 믿고 옳고 그름을 판단할 때, 법은 우리가 생각하는 상식과 같은 길을 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사건이 세 번의 재판을 거치면서 무죄로 판결되었을 때, 절망한 사람들이 많았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이 사건이 무죄로 판결될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명백한(?) 증거와 정황이 있는데! 저자 역시 이런 판결이 왜 나오는지 알 수 없고 궁금하던 이유로 이 소설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판사가 법을 기준으로 합리적 의심이 없는 입증을 거쳐야 하는 것과 다른 시선에서 보게 되었던 게 아닐까 싶다. 법이 온전히 보호해주지 못하는 정의를 찾아가는 판사를 보여주면서, 사법 시스템에 어긋난 과정과 선택으로 정의의 편에 선다.

 

저자가 판사 시절에 썼던 추리소설들과는 사뭇 그 맥락을 달리한다. 그는 스스로 이 소설을 법정소설이라고 했다. 분위기도 그렇지만, 소설의 흐름에서만 봐도 알 수 있다. 사건의 해결과 범인을 찾는다는 의미보다는, 하나의 사건과 그 사건이 법정 안에서 어떻게 흘러가고 판결 내려지는지 세세하게 드러낸 것 같다. 실제 사건을 보면서 가졌던 의문점과 판결에 한발 더 깊게 들어가서 본 기분이다. 그동안에 좀 더 자세히 들을 수 없던 내용이기도 했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법과 판결에 적용되어야 하는 법의 차이에 관해서도 알 수 있다. 그러면서도 영원히 끝나지 않을 숙제를 말한다. 법이 원칙으로 판결해야 하는, 상식에 맞는 판결이어야 하는 두 가지 사이에서 어떤 옳음으로 가야 하는지를.

 

판사에게 요구되는 건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솔로몬의 지혜로 내리는 획기적이고 기발한 판결이 아니다. '법과 절차를 빈틈없이 준수해서' '어떤 결정'을 내리는 일뿐이다. 그 결정이 옳을 것까지는 보장하지 못한다. (145~146페이지)

 

재판을 통해 범죄자를 가려낸다. 내 기준에선 결과가 아니라 '의도'의 선악이 더 중요하다. 그다음에는 격리. 그가 세상에 해를 끼칠 기회를 최대한 주지 않는다. (162페이지)

 

이미 들은 내용이어서 뭘 더 할 수 있을까 싶은 마음으로 읽었다. 재판 과정에서 보이는 답답함에 화가 났다가도, 소설이기에 가능한 반전과 결말로 조금은 후련해지는 느낌도 들고. 하지만 독자로서, 일반인으로서 영원히 궁금할 것 같다. 법의 기준이 정하는 판결과 인간의 감정과 상식이 담긴 판결의 차이는 얼마나 좁혀질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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