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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이 - 심윤경 장편소설
심윤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1월
평점 :
드라마 <스카이 캐슬>은 다음 회를 기다리고 싶을 만큼 스토리가 흥미로웠다. 대한민국 교육의 현실을 보는 것 같기도 했고, 그 안에서 부모와 아이와 학교가 어떻게 존재하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종영에 가까이 갈수록 드라마는 미스터리 같은 분위기를 풍기며, 김주영 선생의 과거가 어땠는지, 혜나를 죽인 범인이 누구인지, 예서는 영재처럼 되어갈 것인지 지켜보게 한다. 결말까지 보고 나면 시원할 것 같았는데, 오히려 허무했다. 3대째 의사 가문을 만들어야 하는 예서 엄마 한서진은 결국 아이가 행복해지는 길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공부보다는 인간다운 아이로 성장하기를 바라게 된다. 여기서 마무리되었다면, 우리는 현실을 잠시 잊은 채로 드라마 같은 결말을 꿈꾸며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봤을지도 모른다. 예서 엄마도 이렇게 변했으니, 무조건 공부를 잘해서 최고의 삶을 누리려는 사람들의 지나친 행보가 달라질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드라마는 현실을 비켜 가지 않는 듯했다. 예서 엄마는 변했지만, 제2의 예서 엄마의 등장을 막을 수 있는 세상은 없었던 거다. 그렇다면 왜 이런 부모가 존재하는 것일까. 왜 부모는 이런 다그침과 그들이 완벽한 성공이라고 믿는 과정을 자식에게 강요하는 것일까? 자식의 생각을 한 번이라도 물어보고 행동하고 있는 것일까? 혹시, 부모니까 자식의 행복을 당연하게 책임지고 싶어서? 하지만 그게 답이 아니라는 것은 이 소설의 결말이 잘 보여준다.
처음 설이의 미래를 상상할 때도 그랬다. 보육원 앞 음식물 쓰레기통에서 발견된 아이 설이는, 새해 첫날 새벽에 발견되었다고 해서 '설'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설이의 발견 자체가 이슈가 되었고, 풀잎보육원은 여러 곳에서 후원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설이의 그 후 삶은, 발견되었을 때의 관심처럼 빛나지 못했다. 세 번의 파양과 함묵증을 겪었다. 보육원 이모와 함께 살게 된 설이는 사립 '우상초등학교'로 전학 가게 된다. 그동안의 환경과 너무 달라서 설이가 적응하기도 전에 옆자리 시현은 설이의 학교생활을 힘들게 하는 존재로 설이와 대립한다. 왕따, 학교 폭력을 겪으면서도 설이는 버틴다. 그 학교에서 살아남기 위해 강인한 존재로 변신한다.
나에게 소중한 것은 너무 힘겹게 찾아오고 너무 쉽게 사라졌다. 왠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나는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집 안을 돌아다녔다. (108페이지)
초등학교 6학년 아이가 거친 욕을 하고, 만만하지 않게 보이려고 사나운 화장을 한다. 설이가 우상초등학교에서 살아남는 방식이었다. 학교에서도 설이를 마냥 미워할 수 없는 게, 설이는 공부도 잘하고 외부의 온갖 대회에 나가 상을 휩쓴다. 그러니까 문제로 보면 문제이기도 하지만, 공부를 잘하니 문제는 문제가 아닌 게 되어버리기도 하는 설이의 학교생활인 것이다. 고급 사립초등학교 아이들이 그렇게 바라는 일, 그들의 인생에서 1순위로 획득하고 싶어 하는 그 공부가 설이에게 놀이처럼 보이니 이 무슨 아이러니인가. 설이는 국가 보조를 받고 살아가야 하는 아이다. 보육원 이모의 임대 아파트에 산다. 그러니까 우상초등학교의 환경은 설이가 전혀 경험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 그 무대 위로 올라간 설이가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그게 아니라도 이미 세 번의 파양으로 설이의 심신은 지칠 대로 지쳐있었을 텐데, 어른들의 결정으로 만든 이 모든 일을 감당해야 하는 건 설이었다. 이상하다. 설이의 인생, 설이가 중심이 되어 흘러가야 맞는 건데, 왜 아무도 설이에게 묻지 않았을까? 설이가 어려서? 설이가 가난해서? 원래 어른들이 하라는 대로 해야 하니까? 설이의 주변에서 설이에게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질문 없는 그 문제의 답을 설이는 스스로 찾고 있었다.
소설은 설이 주변의 많은 사람을 한명씩 등장시키면서 궁극적으로 해야 할 이야기를 차곡차곡 쌓아간다. 풀잎보육원 원장은 설이에게 처세술을 가르치는 냉정한 스승 같았고, 설이의 담임선생은 말로만 품어주는 좋은 사람이었다. 설이가 다니는 병원의 곽은태 선생은 설이가 바라는 가정의 이상향을 상상하게 했다. 읽다가 보면, 곽은태 선생이 설이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보여주는 인물처럼 보인다. 병원에서 만난, 어떻게 보면 공적인 사이지만 사적인 관심과 이해를 보여주는 사람이었는데, 오히려 이 소설 속에서 가장 한국적인 부모였던 것이다. 자기가 자란 환경을 이겨내는 방식의 삶을 그의 아내와 함께 아이에게 강요한다. 오히려 설이와 함께 사는 보육원 이모가 가장 이상적인 부모의 역할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이모는 계산하지 않았다. 아이의 마음을 읽을 줄 알았다. 가족이 무엇인지 묵묵히 행동으로 증명하는 사람 같았다. 조건 없는 사랑. 대가 없는 행동. 그렇게 읽고 보니, 이 소설은 대한민국 교육계와 공부를 우선으로만 요구하는 부모를 고발하는 소설이 아닌 것 같다. 아마도 사랑을 말하고 싶었나 보다. 인간적인 감정과 조건 없는 사랑을 퍼부어주는, 그런 감정이 바탕이 된 가족을 그리고 싶었던가 보다. 결국은 사랑을 찾게 하는 일, 공부와 학벌과 재력을 갖추고자 애쓰는 부모 역시 자식에게 주고 싶었던 것은 사랑이었으리라. 단지, 방식이 틀렸을 뿐이다.
읽으면서 계속 기억에 남는 인물이 있었다. 풀잎보육원 원장. 한때 풀잎보육원을 여기저기 드러냄으로써 후원을 받고, 아이를 좋은 가정에 입양 보내면서 그 아이가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진짜 부모는 아니지만 사랑으로 아이를 보내는 방법을 찾느라 애썼다고 믿고 싶은 사람. 하지만 이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많이 외로웠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돌보는 아이를 조건부 사랑으로 키웠던, 착한 일을 하고 공부를 잘해야 사랑하는, 어떤 임무를 완수해야만 인간다운 대접을 받는 사람으로 여겼다. 보육원의 아이들을 돌보고 직원을 대하는 것조차 사업을 하는 것으로 보이게 했다. 어쩌면 부모의 어긋난 욕망을 그대로 표출하는 대표적 인물이 아니었나 싶다. 정작 자기 인생에서는 무슨 일이 생겨도 찾아와줄 가족이 없는 외로운 사람. 바쁘지 않은 시간에 찾아오는 외로움을 감당할 수 없었기에 그렇게 보육원 일에 몰두하고 앞장선 게 아니었나 싶을 정도였다. 원장의 말년에 비추는 젊은 시절의 모습이 더 외로워 보였던 건, 빡빡하게 보내는 일정에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어도 정작 간절한 순간에 옆에 남아있는 사람이 없었던 현실이 더 서늘했다. 그때 생각이 났다. 어쩌면 우리가 보는 많은 부모는, 소설 속 시현의 부모를 비롯한 우상초등학교의 많은 부모가 아이들에게 바랐던 것은, 외로움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바쁘고 정신없이 살아가게 바탕을 만들어주려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은...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 빈틈없는 일상을 보내야만 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로 들린다.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계속 노력하고 달려야 하니까 말이다. 부모 자신들이 겪었던, 위로 오르기 위한 과정이 힘들었다는 것을 잊고 지금의 결과만 생각하는 현실에, 아이의 시간을 투자하여 만들어주고 싶은 미래였다. 바쁘게 달리고 많은 것을 얻고 살아가는 일상을 주겠다는 맹렬한 욕망. 그렇게 얻은 인생에 외로움은 덤이다. 드라마 <스카이 캐슬>의 차 교수가 그렇게 노래하던, 피라미드의 꼭대기로 올라가야 한다고 외치던, 결국 자기가 외로움에 빠지고 괴로워지던 결말. 그 드라마 속 피라미드의 정답을 찾은 이가 누군지 기억하는가? 우 교수의 아들 수한이다. 우 교수 부부 역시 주변 환경에 휩쓸려 아들에게 피라미드의 꼭대기로 가야 한다고 우길 때 수한이 말한다. 중간. 피라미드의 무게중심은 여기 중간에 있다고. 그러니 딱 거기가 좋다고.
사랑과 욕심, 감사와 미움처럼 극과 극으로 다른 것이 그 경제조차 알 수 없을 만큼 한 덩어리로 합쳐진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원래 그렇게 뒤섞여 있는 거라는 결론으로 끝나는 게 분하고 억울했다. 내 인생 다 바쳐서라도 그것들을 한 겹 한 겹 발라내 각각의 요소로 분리해놓고 싶었다. 온통 뒤섞인 감정들의 무더기 속에 화사한 사랑과 감사는 맨 거죽에 겨우 한 줌뿐, 뒤로는 시커먼 욕심과 날선 미움들뿐이었다고 세상에 목청껏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 폭발적인 눈물은 원장님과 나 사이에 사랑과 감사가 겨우 한 주먹은 아니었다고 소리 없이 속삭였다. 그것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크고 무거웠다. 사랑과 감사가, 욕심과 미움이 각각 얼마만큼인지 따지는 건 의미가 없고, 하나하나 발라내서 확인하려면 어쩌면 내 인생을 다 털어 쓰고도 모자랄 만큼 긴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고 눈물이 소리 없이 속삭였다. (256~257페이지)
우리가 어렸을 적의 기억, 어른이 된 지금 아이를 바라보는 시선.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다를까 생각해보게 했다. 내가 살아온 흔적이 정답은 아닌데, 어른이 된 우리는 자주 자기 생각과 욕심을 아이의 바람과 동일시한다. 그 착각과 오해로 어긋나기 시작한 부모 자식 관계는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 보여준 설이의 선택이 완전한 답이라고 할 수는 없다. 세상은 변하고, 그 세상 속에서 부딪히며 살아가는 설이도 어떻게 변하고 또 다른 선택을 할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어린 나이에 설이가 겪은 온갖 일들이 허투루 보낸 시간은 아닐 것이다. 설이가 경험한 일들을 바탕으로 이제 하고 싶은 말을, 바라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아이가 되었으니까. 어쩌면 아이든 어른이든,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가슴 속 말을 표현하며 대화할 수 있는 것 아니었을까. 내 마음을 상대에게 강요하는 게 아니라 건네져 오는 말을 듣는 것과 같이해야 하는 거,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도 어김없이 적용되는 대화의 법칙이라는 거. 사랑은 일방적일 수 없으니까, 주고받아야 완성되니까. 우리가 마음을 꺼내놓는 순간 사랑은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