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 김려령 장편소설
김려령 지음 / 창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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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만남은 있어도 우연한 이별은 없다.

장점이 단점으로 단점이 더 큰 단점으로 서서히 부각됐다.

누가 뭐래도 제눈에는 예뻤던 것이 남들보다 더 흉하게 보였다. 못 견디게 싫었다.

남편을 포획한 아내. 더는 아내로 볼 수가 없었다. (213페이지)

 

“상대가 원하지 않는 것은 하지 않는 거, 그게 사랑이야.”

 

우리는 각자의 방식대로 사랑하는 사람들이지만,

적어도 이 소설에서 말하는 사랑의 정의는 공통되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상대를 꽉 쥐고 있는 사랑은 가짜라고, 또 그런 사랑에 끌려가는 이가 아플 것'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 순간 그 사랑을 위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면 그 방식의 사랑 역시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사랑을 하면서 아프지 않을 수 없으니,

어떤 방식으로든 덜 아프게 사랑하는 것만이 우리가 사랑 앞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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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이야기
미아키 스가루 지음, 이기웅 옮김 / 쌤앤파커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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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이런 상상 해본 적이 있던가? 미래의 어느 시대, 인간의 한계를 채워주는 시스템이나 로봇 같은 게 우리 삶에 익숙해진 상황을. 상상에서만 멈추지 않고 실제로 영화나 소설에 등장하는 소재이기도 하다. 이런 이야기를 만나는 게 새로운 경험은 아니다. 그런데 물리적인 게 아니라 정신적인 부분을 채워주는 이야기라면 다르다. 이 소설에서 시도하는 정신적인 부분의 삭제와 추가 같은 건, 언젠가 우리가 바랐던 여러 가지 중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내 기억 속에서 머물기를 원하지 않는 것, 내 기억으로 들어왔으면 하는 것. 그 어느 것이라도 우리는 그걸 선택하는 순간을 상상한다. 이유는 하나. 기억을 삭제하거나 추가하는 건, 우리가 불행이라고 여기는 순간을 사라지게 하려는 거다. 아픈 기억을 지우고, 행복하게 만들어줄 가짜 기억이라도 심어두려는 것. 그렇게 우리는 자기 슬픔을 지우려고 노력한다.

 

과거는 바꿀 수 없다, 그렇지만 미래는 바꿀 수 있다. 그런 사고방식은 기억 개조 기술의 보급과 함께 과거의 유물이 되어 갔다. 미래는 불명확하다. 그렇지만 과거는 바꿀 수 있다. (67페이지)

 

가짜 기억을 사고팔 수 있는 세상이었다. 치히로는 불행했던 성장 과정의 한때를 지우고 싶었다. 아내 외에도 다른 여자들의 '의억(나노로봇이 만들어낸 가공의 기억)'을 가지고 살았던 아버지와 자식인 치히로 외에 다른 아이들의 '의억'을 가지고 살았던 어머니 사이에서, 치히로는 상처받았다. 왜 옆에 아내가 있는데도 여자들의 의억이 필요할까, 왜 바로 앞에 당신 자식이 있는데도 아이들의 의억이 필요할까. 이해할 수 없었지만, 상처는 존재했다.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한 시간을 지우고 싶어서 업체에서 살 '레테(특정 시기의 기억을 제거해주는 나노로봇)'를 삼켰다. 하지만 잘못 설정된 알약은 레테가 아니라 '그린그린(가공의 청춘 시절을 제공하는 나노로봇)'이었다. 치히로의 기억에 소년 시절이 사라진 게 아니라, 그가 경험하지 않은 청춘 시절의 기억이 심어진 거다. 그 기억 속에 존재하는 나쓰나기 도카는 치히로의 첫사랑이었고, 현재의 어느 순간마다 도카는 추억이 되어 치히로의 기억에 소환된다.

 

잊으려던 기억 대신 만들어진 어느 시간의 기억이 내 머릿속에 들어왔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혹시 새로운 소설 한 편을 쓰는 기분은 아닐까? 어쩌면 이 기억 때문에 애써 지우려던 시간이 행복해지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알 수 없다. 새로운 기억이 나를 행복하게 해줄지 더 불행하게 할지는. 다만, 그 전의 불행보다는 낫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의뢰를 하고 알약을 삼키는 것일 테지. 치히로는 자기가 원하지 않은 기억을 갖게 되었으니 삭제하면 그만이다. 원래 바라던 행복을 향해, 다시 받은 진짜 레테를 삼키면 된다. 의뢰하지 않은 기억 따위 삭제하면 그만인데... 그러지 못했다. 의도하지 않은 순간에도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도카의 존재가 그를 혼란스럽게 했다. 거짓 기억인 걸 알면서 거부하는데도, 순간순간 거짓과 사실 사이에서 흔들렸다. 자기 공간에 존재하지 않는 기억인 걸 알면서도 점점 확신할 수 없었다. 자기만의 기억이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생기고 있었다.

 

"기억이란 건 마음먹기에 따라서 너무나 쉽게 왜곡되기 마련이니까." (39페이지)

 

결국 인간은 믿고 싶은 걸 미게끔 되는 것이다. 진실을 견디지 못할 때 인강는 인식을 왜곡한다. 현실을 바꾸는 것보다 그쪽이 편하니까. (114페이지)

 

기억이란 얼마나 불완전한가. 같은 시간의 경험을 두고 서로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때 내가 이랬잖아. 아니, 그때 너는 저랬거든. 어느 날의 기억은 이렇게 서로 다른 이야기로 써진다. 우리는 이런 불완전한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치히로가 혼란스러운 이유도 이해가 된다. 삽입된 기억이 아니라 진짜 그의 과거일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빠져든다. 가공된 기억이라는 의심을 하면서도 도카와의 시간을 그리워한다. 둘이 함께한 시간의 행복을 찾고 싶지만, 불가능한 일이다. 도카는 실재의 사람이 아니니까. 그때 가공의 기억에서만 존재해야 할 도카가 치히로 앞에 나타난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가공의 기억에 존재하는 도카가 치히로의 인생에 뛰어들었던 것은 말 그대로 가공의 시간에 존재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런 도카를 현실의 치히로 앞에 내놓은 건 무슨 이유일까. 작가는 판타지 같은 사랑을 그려놓으며 독자를 설레게 했다가, 도카를 현실 속에 내놓음으로써 또 다른 이야기를 시작한다. LP판의 앞면 뒷면을 뒤집어가면서 들어야 앨범의 노래 전체를 들을 수 있듯이, 치히로와 도카의 시선으로 두 가지 이야기를 펼친다. 이어지는 도카의 인생은 치히로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부모님이나 친구들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자라온 시절, 천식 때문에 자연스럽게 격리되듯 살아온 시간이 그녀의 성장 기간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러다가 찾은 상상의 시간은 그녀에게 위로가 됐다. 다른 세상의 다른 사람들을 그리면서 이야기에 빠져 지내는 일은 그녀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치료 방법 같았다. 그녀의 이런 재능은 '의억기공사(가공된 기억을 만드는 전문 인력)'가 되게 했고, 어느 날 의억을 의뢰한 치히로의 이야기를 듣는다. 자기와 너무 닮은 치히로의 슬픔에 그녀는 자기 자신을 투입하여 그와의 시간을 구성하고, 치히로의 기억 속 첫사랑이 된다.

 

잘 생각해봤을 때 내게 잊고 싶지 않은 일 같은 건 하나도 없었다. 잊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잊고 싶지 않은 시간이, 잊고 싶지 않은 장소가 정말 하나도 없었다.

나는 그 사실에 아찔해졌다. 대개의 사람들이라면 자신의 기억이 사라지도 있다는 걸 알면, 무엇보다 먼저 잊고 싶지 않은 일들을 적기 시작할 것이다. 그걸 몇 번이나 거듭 읽으며 뇌에 각인시키려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내게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잊어버릴 수 있다면 잊어버리고 싶은 쓰라린 기억을 도려내고 나면, 남은 것은 빈껍데기와 같은 무가치한 기억밖에 없었다. (248페이지)

 

기억하고 싶은 사람과 기억을 지우고 싶은 사람의 만남이 가능한지 묻고 싶다. 삭제와 추가는 엄연히 반대의 의미가 아니던가. 기억 삭제를 원하는 사람에게 의뢰하지도 않은 기억의 추가를 설정한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까? 사실 도카에게는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 갑자기 발병한 신형 알츠하이머(예전의 기억부터 사라지는)에 걸린 스무 살 인생이, 무엇을 기억하고 갈 수 있을까. 도카는 치히로와 다르지 않은, 불행하고 아팠던 시간보다 아름다운 첫사랑 하나쯤 간직하고 싶었던 것 같다. 도카의 간절한 바람이, 기도가 반영된 의억이 실재가 되어버린 일. 도카가 의억기공사로 일하면서 추구했던 의미와 같다. 그렇게 이해하고자 한다면 도카의 발칙한 장난도 사랑스러워 보인다. 점점 사라져가는 자신의 기억에 아름다운 추억 하나 심어두고자 하는 바람 같은 게 느껴진다. 힘들고 슬프게 자라온 시간에 그 정도의 보상은 허락되어도 좋지 아니한가. 그러면서 동시에 읽히는 감정. 자신과 다르지 않은 치히로의 시간도 자신의 존재로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것을 느끼고 싶었다고 말이다.

 

"인생에는 이따금 그런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는 거야. 행복하기만 한 인생이 그리 흔하지 않듯이, 불행하기만 한 인생도 그리 흔한 게 아냐. 도카는 도카의 행복을 조금만 더 믿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 (341페이지)

 

가짜 기억과 가짜 추억으로 현실과 허구를 넘나들며 들려주는 청춘의 사랑으로, 우리가 바라는 삶이 무엇일지 고민하게 하는 이야기다. 가짜이지만 경험하지 못한 기억을 심어놓는 게 괜찮은 건지, 경험으로 녹아든 기억을 인위적으로 삭제하는 게 괜찮은 건지. 살아가는 모든 순간에 겪는 온갖 경험의 기억이 우리를 슬프게 하는 일이 많을 텐데, 그때마다 우리는 삭제 버튼 하나로 그 슬픔을 다 지울 수 있을지도 궁금하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결국, 우리가 하루하루 잊어가면서 살아가는 동안 남는 건 사랑뿐일까, 하고. 만들어진 사랑일지라도, 가짜 사랑일지라도, 환상일지 몰라도, 그게 나를 존재하게 하는 힘이 될지도 모른다. 나를 구원할 유일한 방법이 사랑일 수도 있다니... 사랑을 불신하고 청춘의 시간이 불행했던 이들에게, 살아가는 또 다른 의미를 찾는 순간이 된 것만 같다.

 

 

* 본 리뷰는 출판사 경품 이벤트 응모용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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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없는 기분
구정인 지음 / 창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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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은 상당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만큼 피곤한 일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 에너지를 뿜어대면서 활력이 생기기도 한다. 뭔가 모순되고 아이러니한 말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미워하는 일이 힘껏 애써야 하는 일이 되는 게, 열심히 해야 하는 일이 되는 게 슬프다는 것 말고는 나름대로 장점이 있는 거 아닐까 싶었다. 그건 내가 아버지를 미워하면서 생기는 이상한 마음이기도 했고, 누군가와 적대적인 관계에 있을 때도 비슷하게 작용했다. 용서하지 않을 거야, 가만두지 않을 거야, 절대 내가 먼저 손 내밀지 않을 거야, 하는 마음의 다짐이 내 표정을 악하게 만들더라도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내가 받은 그대로를 돌려주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고 믿었다.

 

혜진에게 어느 날 걸려온 한 통의 전화. 아버지가 고독사했단다.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연락을 했던 게 언제였는지 떠올려 봐도 한참 전이다. 아버지와 혜진은 그런 사이였다. 누군가는 참 이해하기 어려운 가족 관계라고, 어떻게 자식이 아버지한테 그럴 수 있느냐고 따져 물을지 모르겠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혜진의 마음과 태도가 이해되더라. 나부터도 그랬지만 여러 매체에서 보여주듯 이해할 수 없는 부모들의 태도가 이런 관계를 만들기도 한다는 걸 알아서일까. 그렇게 소식을 듣고 언니와 함께 찾아간 경찰서에서는 아버지의 죽음과 그 죽음을 처리하는 절차를 알려준다. 황당하지만 부모의 죽음을 알리는 경찰 앞에서 뭐라고 표현할 방법은 없다. 그저 서류상 자식이라는 관계를 부정할 수 없으니 이제 처리해야 할 일들을 처리하면 된다.

 

이런 기분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왕래 없던 아버지가 고독사 했고, 3주간 방치된 시신이 이웃의 신고로 발견되었으니 가족이 와서 수습을 하라는 연락을 받는 일. 연락을 받는 순간에는 놀라긴 했겠지만, 곧 화가 나지 않았을까? 혜진은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할 생각도 없다. 그녀가 자란 세월의 흔적들을 떠올리면 아버지의 죽음 따위 관심 밖의 일이어야 했다. 아버지가 평생 가족에게 해왔던 일이 무엇이던가? 가출과 외도를 일삼고, 사업과 주식 투자에 몰두하다 가산을 탕진했다. 그런 이유로 집안의 가장은 엄마가 되었으며, 항상 부족한 생활에 시달려야 했던 가족들이다. 아이였던 혜진과 언니는 따뜻한 가정을 꿈꾸기보다 집을 들락날락하는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게 되는 어른 같은 아이로 자랐고, 그런 남편을 아이들의 아버지로 인정하며 살아가야 했던 엄마의 슬픔은 어느 정도일지 가늠할 수조차 없다. 그런 힘든 생활을 견뎌오다가 부모님은 헤어졌고, 그렇게 헤어진 뒤에도 아버지는 변한 게 없었다. 툭하면 일을 벌이고 자식들에게 돈을 요구했으며, 마치 아버지의 그런 행동은 너무 당연한 일이라는 듯 당당했다. 가족들에게 조금이라도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면 그럴 수 있었을까 싶지만, 애초에 그런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가족이 이렇게 상처받고 와해할 지경에 이르게 만들지는 않았겠지. 오랜 세월 그런 아버지를 감당할 수 없어서 인연을 끊고 지낸 게 2년쯤 전이다. 그러니 아버지의 고독사를 알리는 전화가 혜진에게 반가울 리 없다. 한 번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을 거다.

 

아버지가 밉고 화가 나지만, 자식이라는 이름으로 감당해야 할 과정이었다고 생각하고 처리해나갔다. 그리고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일상으로 돌아가야 했다. 남편과 아이가 있는 자기 가정의 행복한 일상으로 돌아가야 맞는 거였다. 하지만 이상했다. 장례를 치르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일이 너무도 힘들었다. 끼니를 제대로 챙길 수도 없었고, 아이를 돌볼 수도 없었다. 집밖으로 나가는 일이 점점 어려워졌고, 다른 사람을 만나는 일도 힘들었다. 남편이 옆에서 집안일을 많이 해주고 아이를 돌봐주기는 했지만, 그래도 혜진의 일상이 있다. 혜진이 움직이고 돌아다니면서 챙겨야 할 그녀만의 일상이 있다. 그것도 해내지 못한 나날이 이어지던 어느 날은 극단적인 상상을 하기도 했다. 자꾸만 아버지의 마지막 공간이 생각났다. 오래되어 방치된 시신, 그런 곳을 깨끗하게 치우고 나가야 하는 임무를 해결하기 위해 청소대행업체를 찾았다. 그리고 지워지지 않는 냄새를 마주해야 했다. 방치된 아버지의 시신이 남긴 건 오래되다 못해 젓갈 냄새가 나는 유품과 빚이었다. 견디고 일어서야 했다. 남편과 병원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상황에 부닥친다.

 

주인공의 마음을 생각했다.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싶어 막막했다. 오랜 세월 힘들게 한 사람이 죽었는데, 그럼 다 정리된 기분으로 개운해야 했는데, 아직 끝나지 않은 뭔가와 마주해야 하는 이 기분을 뭐라고 불러야 하느냐는 말이다. 나는 그걸 아주 깊은 나락으로 떨어진 기분이라고 생각했는데, 혜진은 그런 기분을 '기분이 없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기분이 없는 기분. 형체가 없는 기분일까? 뭘까?

“기분이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고, 기분이 없는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혹시, 내 마음이 없어진 기분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하지 못하고, 저렇게 해야 하는데 몸과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상태. 급기야 '나'라는 사람의 존재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가 아니었을까. 크게 바라는 것 없었다. 그녀는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자기 삶을 지키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자꾸만 들여다보던 마음은 엉망이었다. 감정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기분이 없는 기분이라는 게 뭔지, 아무런 감정도 생기지 않는 상태가 기분이 없는 기분이 아닐까 싶다는...

 

인간이기에 자연스럽고 가능한 일들. 좋은 거 앞에서는 좋아하고, 싫은 거 앞에서는 싫어하는 기분이 드는 게 당연했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 당연한 일을 느낄 수 없다는 게, 감정을 잃어버렸다는 게 너무 슬프게 들린다. 부모의 부재가 불러오는 상실감 같은 게 아니었다. 미워하던 사람이 사라졌다는 개운함이 아니었다. 분명 아버지는 죽었는데, 그 죽음을 받아들이는 일이 이렇게 힘든 일일 줄 몰랐다. 그건 아버지의 고독사 때문일까? 아니면 살아오는 동안 아버지 때문에 힘들었던 성장 과정 때문이었을까? 알 수 없다. 그저 알 수 있는 건, 이 기분이 우울하다는 것과 이 우울을 떨쳐버려야 원래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거다. 그 힘든 여정을 혜진은 시작했다.

 

가끔 들려오는 고독사가 내 아버지의 이야기가 된다는 상상을 해본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고독사는 사회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고독사가 왜 이르게 되었는지를 들여다보게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홀로 생활하게 되는 과정이 누구나 비슷하지 않겠지만, 이런 경우의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가족을 힘들게 하고 가족과 헤어진 아버지가 그런 죽음으로 세상을 마무리했다는 게 안쓰러울 법도 하건만, 왜 나는 혜진의 아버지에게 자꾸 분노가 이는 걸까. 왜 그런 마지막으로 끝까지 가족들을 힘들게 하고 떠나는 걸까 싶은 원망이 들었다. 결국은 마음의 병까지 얹어주고 떠난 당신을, 당신이 죽었는데도 용서할 수가 없다는 화가 치밀었다. 이것도 우울이라면 나도 치료를 받아야 하는 거겠지만, 한 사람의 존재가 다른 사람들을 얼마나 피폐하게 하는지 그대로 증명하는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치료가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고 또 얼마나 큰 노력을 해야 할까 싶지만, 언젠가 혜진도 평범했던 일상으로 돌아가는 치유의 결말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녀가 경험한 슬픔과 우울은 가슴에 새겨져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생긴다. 한번 내 몸에 들어왔던 병이 나가고 면역력이 생겼을 것 같지만, 사실 언제나 같은 강도로 오는 병이 아니더라도 그 병은 비슷하게 또 마주해야 할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남는다. 나는 그렇더라.

 

우울증이 생겨서 '기분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기분'이 된다는 것. 기분이 없는 기분에 빠지게 되는 과정이 너무 생생하게 들려온다. 어쩌면 이런 비슷한 기분을 우리도 종종 느끼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다만 그 기분을 그대로 표현하지 못해서 진단받지 못한 병이 되어버려 그대로 흘러가게 내버려 두곤 하지 않았을까. 어떤 방식으로든 우울증이라는 긴 터널을 통과해야만 하는 우리 앞의 일들에 어떻게 대처해나가야 할지 묻기도 하는 것 같다.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때의 감정이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었으면 한다는... 현실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대부분이겠지만, 그 문제들에 따라오는 감정의 문제는 누가 해결해주기 어렵다. 혼자 견뎌내야 하지만 분명 주변의 도움도 간절해진다. 가족과 친구, 혹은 전문가의 진료까지도 손을 내밀어야 한다. 방법을 몰랐던 건 아닌데, 선뜻 손 내밀기 어려워서 주저하던 것을 이제는 당당하게 마주해야 한다는 것을 알겠다.

 

혜진에게 어느 날 닥친 아버지의 고독사는 그동안 혜진의 마음에 담아두었던 산을 하나 넘어가는 일이었다. 이 산을 통과하지 못한다면 다음 길을 걸어갈 수 없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오랜 세월 그녀의 삶에 발목을 잡고 있던 것을 통과하는 기분이었다. 한 사람에 관한 거의 모든 감정을 털어내고 행복을 찾는 일은 너무 어려웠지만,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어떻게 건너가야 할지, 사람마다 다르고 각자의 경험이 다르고 지금 처한 환경도 달라서 혜진과 같은 방식을 그대로 적용할 수 없을지 몰라도, 세상을 통과하는 방법 하나를 배운 것만 같다. 가족이라는 관계에서 발생하는 온갖 감정과 우울을 어떻게 감당하고 살아가야 하는지, 우리가 바라는 구체적인 위로와 치유 방식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혜진이 방문했던 병원의 선생님이 하는 말처럼, “우리 목표가 약을 끊는 것은 아니잖아요? 잘― 지내는 것. 그게 우리 목표”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 조금은 알게 되는 이 기분. 우리에게 필요한 건 막연한 위로가 아니라, 이 삶을 유지하고 오늘을 잘 지내는 게 목표가 되는, 행복해질 수 있는 구체적인 위로였던 거다. 나 스스로 잘 지내게 될 일상으로 가는 길을 이렇게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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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사람의 속마음 비채×마스다 미리 컬렉션 2
마스다 미리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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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도 우리나라와 비슷할까? 지역의 특색을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 분명 그 지역 특유의 분위기와 유명한 것들이 있어서겠지. 모두가 다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려울지 몰라도, 지역이라는 특성이 분명 작용하는 게 있을 것 같다. 내가 사는 전라도는 이렇다, 충청도는 이렇다고 말하는 것처럼. 한국에서도 곧잘 즐기는 다코야키, 유명한 한신 타이거즈, 나는 잘 모르겠지만 개그계의 본산 요시모토라는 인물도 자주 언급되는 걸 보면, 마스다 미리는 오사카의 여러 가지를 자랑하고 싶은가 보다. ^^

 

마스다 미리가 전하는 오사카는 그녀의 고향이기도 하지만, 그녀의 성장 시절을 그리워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아마도 '오사카'는 꿈을 찾아서 도쿄로 갔던 그녀가 마음의 위안을 받는 이름이기도 했을 것 같다. 우리에게도 종종 그런 순간이 있지 않은가. 학교나 직장 때문에 집을 떠나서 생활하곤 할 때, 낯선 곳에서 마주하는 모든 게 외로워질 때, 공부나 사회생활이 힘들어서 마음을 기대고 싶을 때 생각나는 사람이나 장소 말이다. 그건 엄마일 수도, 친근한 고향일 수도, 오랫동안 함께해온 친구일 수도 있다. 그녀가 전하는 오사카는 이 모든 것이 함께한 장소이다. 동네 상점 주인의 친절한 응대, 누구에게나 느껴지는 다정한 말투, 특정 기념일에 강으로 뛰어들면서 자신감을 뽐내는 이들. 희극을 보러 간 공연장의 화장실에 무료로 비치된 요실금 패드 이야기에는 나도 한참을 웃었다. 웃다가 소변이 찔끔하면 사용하라는 의미인가 싶은 저자의 생각이 그대로 상상이 되어 전해진다.

 

 

지방에 살다 보면 사투리가 자연스럽게 튀어나오기도 하는데, 여기를 벗어나면 사투리를 쓰지 않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 나도 사투리를 쓰나? 대화 상대에게 물어보면 아니라고 하는데, 내가 오랫동안 써 온 말이기에 잘 느끼지 못하는 부분도 있다. 장난삼아 엄마가 쓰는 사투리를 일부러 쓸 때가 있는데, 그럴 때가 아니라면 말투에 사투리가 묻어나지는 않는 듯하다. 그런데 저자도 그렇고 내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그렇고 대개 고향을 떠나면서 사투리를 고치려고 노력한다. 지방에서 서울로 갈 때, 오사카에서 도쿄로 갈 때. 다른 이들과 대화하면서 고향을 드러내지 못할 이유는 없는데, 이상하게도 말투는 표준어로 쓰고 싶어진다. 그러면서 고향의 말은 점점 잊히고, 현재의 주거지와 고향의 구분이 생긴다. 그러면서 또 우리는 표준어와 사투리를 동시에 배우기도 한다. 예를 들면 표준어로 '부추'라고 부르는 것을 전라도에서는 '솔'이라고 부르곤 한다. 웬만한 대화에서 만물상처럼 '거시기'라는 단어 하나로 다 통하기도 하는데, 나는 아직도 이 단어가 가장 궁금하고 신기하다. 있잖아, 거시기. 거기, 거시기. 저기, 거시기. 그거, 거시기 있잖아. 뭐 이런 말들이 계속 들려오면 정신없는데, 나는 전라도에 살면서도 뼛속까지 전라도 사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동안 자세히 살펴보려고 하지 않아서 몰랐는데, 오사카는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곳이라고 한다. 유니버설 스튜디오, 오사카 성, 도톤보리 거리의 맛집 등 보이는 곳곳이 매력이 넘치는 곳이라고. 하지만 무엇보다도 오사카의 자랑은 '오사카 사람들'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저자의 오사카 사랑이 그대로 느껴진다. 그곳에 존재하는 물리적인 것들을 차치하고 그곳에 존재하는 사람들을 최고의 자랑이라고 느낀다는 게 어느 정도의 감정인지 감히 상상되지 않는다. 그곳에서 자라면서 얼마나 따뜻함을 느꼈으면, 얼마나 많은 사람의 애정 어린 인간미를 느꼈으면 이런 마음이 가능할까 싶다.

 

일본과 다르지 않은 우리나라의 환경도 느끼게 된다. 남북으로 길게 생긴 나라라는 공통점에 지역에 따라 각양각색인 사투리에 놀이문화의 다양성까지. 마스다 미리가 전하는 고향의 풍광과 좋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푸근한 곳이라고 증명하는 듯하다. 여탕과 엄마에 이어 오사카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이 세 가지 때문에 지금의 자기 모습이 있다고 말하는 저자는 아마도 오랫동안 이 세 가지를 가슴에 품고 살아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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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를 돌보는 일을 잘하지 못한다. 그래서 아이를 낳는다는 것조차 두려움을 가졌던 적이 있다. 어떻게 키워야 하나, 잘 돌보지 못하면 어쩌나... 엄마가 돌보는 작은 화분 몇 개에서 꽃이 피는 걸 지켜보면서도 내가 돌볼 몫으로 화분을 만든 적은 없다. 애완동물을 곁에 두지 않는 이유도 비슷했다. 이 녀석을 내가 잘 보듬어줄 수 있는 자세가 되어 있지 않으니 내 곁에서 외로워하거나 홀대받다가 죽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고 그랬다. 그러니 내게 애완동물은 멀리서 거리를 두고 보는 대상이다. 누군가의 강아지 고양이를 그저 한 발짝 떨어져서 보는 정도. 그런데 이 책을 읽다 보니, 과연 누가 누구를 돌보는 게 인간과 애완동물 사이에 존재하는 전부였던가 싶다.

 

 

비가 내리던 어느 날 미유는 작은 상자 안에 있던 고양이 초비를 거둔다. 버림받은 고양이였지만 미유에게 속하게 된 초비. 오랫동안 유지한 친구와의 우정과 친구를 통해 알게 된 남자친구 사이에서 아픔을 겪는다. 그림을 그리는 레이나의 집에 드나들던 고양이 미미는 떠돌면서도 레이나의 곁을 찾아든다. 시니컬한 레이나 곁에 아무도 없을 것 같은데 고양이 미미는 길고양이와 집고양이의 중간쯤 행동으로 레이나 옆에 있는 듯 없는 듯 생활한다. 1년 동안 집안에서 나가지 않던 아오이에게 고양이 쿠키가 찾아온다. 아오이의 엄마가 분양받은 고양이다. 세상과 단절하고 싶고 밖으로 한발짝도 나갈 수 없는 아오이에게 대화 상대가 되고 친구가 된다. 노부인 시노의 곁에 까칠하고 힘센 고양이 구로가 애완견 존의 자리를 차지한다. 개인 존과 친구 아닌 친구 사이였던 구로는 어느 날 사라진 존의 자리를 대신하면서 시노 부인의 활력소가 된다.

 

화자 '나'로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처음에는 세상의 장면을 묘사하는 부분에서 별다른 걸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가 점점 드러나는 '나'는 고양이의 시선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묘했다. 고양이가 보는 세상의 모습, 고양이가 하는 말들, 고양이가 겪는 감정의 변화들까지. 어쩌면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감정으로 세상을 보고 고양이들 사이의 관계를 만들어가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인간 세상과 다를 바 없는 고양이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그들의 생태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지켜보게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또 다른 화자 '나'는 인간의 시선이다. 연작소설처럼 이어지는 네 편의 단편에 등장하는 인간은 모두 '그녀', 여자다. 젊은 여자 나이 든 여자. 세상 만만하게 살아가도 좋으련만, 각자의 상처와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이다. 신뢰가 없는 연애 아닌 연애를 했다가 친구도 애인도 잃은 여자, 자기 재능을 너무 믿고 있다가 뒤늦게 좌절하는 여자, 우정에 실패하고 1년 동안 집안에서 파묻힌 여자, 결혼생활에 지친 시집살이에 이제 혼자가 됐지만 외로운 여자.

 

"누가, 누가 좀."

나는 그녀가 소중한 사람과의 연결고리를 잃었음을 알았다.

"누가 좀 나를 구해줘."

그녀는 언제까지고 울었다.

우리를 실은 이 세상이 끝없는 암흑 속에서 계속 돈다.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 46페이지)

 

처음 생각할 때는 이 여자들이 고양이를 집안에 들이면서 떠돌이 고양이를 거두는 것이 아닐까 했다. 길에서 흔히 보는 고양이들의 거처를 마련해주면서, 먹이를 주고 돌봐주는 일 정도로 여겼다. 그런데 다른 면이 조금씩 보이면서 누가 누구를 돌보는지 알 수 없게 됐다. 삶의 여러 가지 것들로 지키고 힘든 인간에게, 고양이는 돌봐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옆에서 공생하는 대상이었던 거다. 고양이의 언어로 하는 말을 인간이 알 수는 없지만, 서로 이야기가 통한다. 하고 싶은 말이 전달된다. 이게 가능할까? 등장인물들과 네 마리의 고양이, 한 마리의 개가 차근차근 풀어가는 이야기를 듣다 보니 알겠다. 이들이 하고 싶은 말은 굳이 소리로 하는 말이 아니어도 괜찮았다는 것을. 표정과 마음으로 전달하는 말이 서로에게 전달되는 기적(?)을 몸소 보여주는 이들이었다. 인간이어도 동물이어도 상관없다. 서로의 마음을 읽고 감싸 안아줄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강하기만 한 인간은 없지만 계속 약하기만 한 인간도 없으니까."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 99페이지)

 

네 마리의 고양이가 각자 다른 것 같지만, 고양이들은 또 고양이들과 함께하는 주인들의 사연은 조금씩 연결되어 있다. 그들의 슬픔이나 상황이 낯설지 않다. 살면서 겪게 되는 여러 가지가 이들의 이야기에 담겨 있는 듯하다. 진학 문제, 남녀 문제, 우정 문제, 결혼생활의 문제 등 여자들에게 공통으로 다가오는 고민이 그대로 전해진다. 지나고 보니 별일 아닐 수도 있는 이야기 앞에서는 어른 사람 마음을 흉내 내면서 읽게 되고, 내가 아직 감당하지 못한 문제 앞에서는 그들의 고충을 짐작하면서 읽게 된다. 사는 내내 우리가 털어내지 못할 삶의 힘겨움을 고양이와 여자의 일상으로 공감하게 하는 이야기다.

 

이미 애니메이션으로 선보인 적 있는 이야기라 그런지, 영화의 포스터나 스틸컷으로 장면들을 상상하는 재미가 있다. 흥미로운 소재에 평범한 일상이 어우러져 판타지와 드라마 두 가지 장르를 만나는 기분이다. 특히 인간 세상과 다를 바 없는 동물들의 세상이 웃기면서도 씁쓸하다. 그냥 길고양이들이라고 생각했는데, 길고양이들에게도 나름 관할 구역(?)이 있고 그렇게 정해진 구역에 발을 디디는 것은 남의 구역을 침범하는 게 된다. 바로 전쟁의 시작인 거다. 고양이들의 난투극이 어떻게 펼쳐지는지 본 적이 없어서 다 알 수는 없으나, 인간 세상의 구역 싸움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지만 지역의 터주대감같이 그 구역의 오래된 노견 존의 지혜가 고양이들끼리의, 고양이와 인간의 교감을 이뤄내는 게 신기하기도 하다.

 

달리고 달리다가 그제야 알아차렸다. 세상이란 내 생각과 다르다는 걸.

세상의 크기는 내 상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무서워.

아오이도 분명 이걸 두려워했던 거야.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 141페이지)

 

단순히 인간의 시선으로 보는 애완동물이 아니라, 인간과 함께하면서 교감하고 성장하는 반려동물이라는 말이 잘 어울린다. 괜히 더 착해지고 싶은, 누군가를 더 이해하고 싶은, 내 인생을 조금 더 아껴주고 싶게 하는 이야기다. 내가 다 알지 못하는 반려동물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끈끈한 뭔가를 엿본 기분이다. 이제 길에서 마주하는 고양이들이 다시 보일 것 같다. 그들의 사연과 사정을 머릿속으로 상상하며 길을 걷게 될 것만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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