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이야기
미아키 스가루 지음, 이기웅 옮김 / 쌤앤파커스 / 201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혹시, 이런 상상 해본 적이 있던가? 미래의 어느 시대, 인간의 한계를 채워주는 시스템이나 로봇 같은 게 우리 삶에 익숙해진 상황을. 상상에서만 멈추지 않고 실제로 영화나 소설에 등장하는 소재이기도 하다. 이런 이야기를 만나는 게 새로운 경험은 아니다. 그런데 물리적인 게 아니라 정신적인 부분을 채워주는 이야기라면 다르다. 이 소설에서 시도하는 정신적인 부분의 삭제와 추가 같은 건, 언젠가 우리가 바랐던 여러 가지 중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내 기억 속에서 머물기를 원하지 않는 것, 내 기억으로 들어왔으면 하는 것. 그 어느 것이라도 우리는 그걸 선택하는 순간을 상상한다. 이유는 하나. 기억을 삭제하거나 추가하는 건, 우리가 불행이라고 여기는 순간을 사라지게 하려는 거다. 아픈 기억을 지우고, 행복하게 만들어줄 가짜 기억이라도 심어두려는 것. 그렇게 우리는 자기 슬픔을 지우려고 노력한다.

 

과거는 바꿀 수 없다, 그렇지만 미래는 바꿀 수 있다. 그런 사고방식은 기억 개조 기술의 보급과 함께 과거의 유물이 되어 갔다. 미래는 불명확하다. 그렇지만 과거는 바꿀 수 있다. (67페이지)

 

가짜 기억을 사고팔 수 있는 세상이었다. 치히로는 불행했던 성장 과정의 한때를 지우고 싶었다. 아내 외에도 다른 여자들의 '의억(나노로봇이 만들어낸 가공의 기억)'을 가지고 살았던 아버지와 자식인 치히로 외에 다른 아이들의 '의억'을 가지고 살았던 어머니 사이에서, 치히로는 상처받았다. 왜 옆에 아내가 있는데도 여자들의 의억이 필요할까, 왜 바로 앞에 당신 자식이 있는데도 아이들의 의억이 필요할까. 이해할 수 없었지만, 상처는 존재했다.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한 시간을 지우고 싶어서 업체에서 살 '레테(특정 시기의 기억을 제거해주는 나노로봇)'를 삼켰다. 하지만 잘못 설정된 알약은 레테가 아니라 '그린그린(가공의 청춘 시절을 제공하는 나노로봇)'이었다. 치히로의 기억에 소년 시절이 사라진 게 아니라, 그가 경험하지 않은 청춘 시절의 기억이 심어진 거다. 그 기억 속에 존재하는 나쓰나기 도카는 치히로의 첫사랑이었고, 현재의 어느 순간마다 도카는 추억이 되어 치히로의 기억에 소환된다.

 

잊으려던 기억 대신 만들어진 어느 시간의 기억이 내 머릿속에 들어왔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혹시 새로운 소설 한 편을 쓰는 기분은 아닐까? 어쩌면 이 기억 때문에 애써 지우려던 시간이 행복해지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알 수 없다. 새로운 기억이 나를 행복하게 해줄지 더 불행하게 할지는. 다만, 그 전의 불행보다는 낫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의뢰를 하고 알약을 삼키는 것일 테지. 치히로는 자기가 원하지 않은 기억을 갖게 되었으니 삭제하면 그만이다. 원래 바라던 행복을 향해, 다시 받은 진짜 레테를 삼키면 된다. 의뢰하지 않은 기억 따위 삭제하면 그만인데... 그러지 못했다. 의도하지 않은 순간에도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도카의 존재가 그를 혼란스럽게 했다. 거짓 기억인 걸 알면서 거부하는데도, 순간순간 거짓과 사실 사이에서 흔들렸다. 자기 공간에 존재하지 않는 기억인 걸 알면서도 점점 확신할 수 없었다. 자기만의 기억이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생기고 있었다.

 

"기억이란 건 마음먹기에 따라서 너무나 쉽게 왜곡되기 마련이니까." (39페이지)

 

결국 인간은 믿고 싶은 걸 미게끔 되는 것이다. 진실을 견디지 못할 때 인강는 인식을 왜곡한다. 현실을 바꾸는 것보다 그쪽이 편하니까. (114페이지)

 

기억이란 얼마나 불완전한가. 같은 시간의 경험을 두고 서로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때 내가 이랬잖아. 아니, 그때 너는 저랬거든. 어느 날의 기억은 이렇게 서로 다른 이야기로 써진다. 우리는 이런 불완전한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치히로가 혼란스러운 이유도 이해가 된다. 삽입된 기억이 아니라 진짜 그의 과거일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빠져든다. 가공된 기억이라는 의심을 하면서도 도카와의 시간을 그리워한다. 둘이 함께한 시간의 행복을 찾고 싶지만, 불가능한 일이다. 도카는 실재의 사람이 아니니까. 그때 가공의 기억에서만 존재해야 할 도카가 치히로 앞에 나타난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가공의 기억에 존재하는 도카가 치히로의 인생에 뛰어들었던 것은 말 그대로 가공의 시간에 존재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런 도카를 현실의 치히로 앞에 내놓은 건 무슨 이유일까. 작가는 판타지 같은 사랑을 그려놓으며 독자를 설레게 했다가, 도카를 현실 속에 내놓음으로써 또 다른 이야기를 시작한다. LP판의 앞면 뒷면을 뒤집어가면서 들어야 앨범의 노래 전체를 들을 수 있듯이, 치히로와 도카의 시선으로 두 가지 이야기를 펼친다. 이어지는 도카의 인생은 치히로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부모님이나 친구들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자라온 시절, 천식 때문에 자연스럽게 격리되듯 살아온 시간이 그녀의 성장 기간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러다가 찾은 상상의 시간은 그녀에게 위로가 됐다. 다른 세상의 다른 사람들을 그리면서 이야기에 빠져 지내는 일은 그녀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치료 방법 같았다. 그녀의 이런 재능은 '의억기공사(가공된 기억을 만드는 전문 인력)'가 되게 했고, 어느 날 의억을 의뢰한 치히로의 이야기를 듣는다. 자기와 너무 닮은 치히로의 슬픔에 그녀는 자기 자신을 투입하여 그와의 시간을 구성하고, 치히로의 기억 속 첫사랑이 된다.

 

잘 생각해봤을 때 내게 잊고 싶지 않은 일 같은 건 하나도 없었다. 잊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잊고 싶지 않은 시간이, 잊고 싶지 않은 장소가 정말 하나도 없었다.

나는 그 사실에 아찔해졌다. 대개의 사람들이라면 자신의 기억이 사라지도 있다는 걸 알면, 무엇보다 먼저 잊고 싶지 않은 일들을 적기 시작할 것이다. 그걸 몇 번이나 거듭 읽으며 뇌에 각인시키려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내게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잊어버릴 수 있다면 잊어버리고 싶은 쓰라린 기억을 도려내고 나면, 남은 것은 빈껍데기와 같은 무가치한 기억밖에 없었다. (248페이지)

 

기억하고 싶은 사람과 기억을 지우고 싶은 사람의 만남이 가능한지 묻고 싶다. 삭제와 추가는 엄연히 반대의 의미가 아니던가. 기억 삭제를 원하는 사람에게 의뢰하지도 않은 기억의 추가를 설정한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까? 사실 도카에게는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 갑자기 발병한 신형 알츠하이머(예전의 기억부터 사라지는)에 걸린 스무 살 인생이, 무엇을 기억하고 갈 수 있을까. 도카는 치히로와 다르지 않은, 불행하고 아팠던 시간보다 아름다운 첫사랑 하나쯤 간직하고 싶었던 것 같다. 도카의 간절한 바람이, 기도가 반영된 의억이 실재가 되어버린 일. 도카가 의억기공사로 일하면서 추구했던 의미와 같다. 그렇게 이해하고자 한다면 도카의 발칙한 장난도 사랑스러워 보인다. 점점 사라져가는 자신의 기억에 아름다운 추억 하나 심어두고자 하는 바람 같은 게 느껴진다. 힘들고 슬프게 자라온 시간에 그 정도의 보상은 허락되어도 좋지 아니한가. 그러면서 동시에 읽히는 감정. 자신과 다르지 않은 치히로의 시간도 자신의 존재로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것을 느끼고 싶었다고 말이다.

 

"인생에는 이따금 그런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는 거야. 행복하기만 한 인생이 그리 흔하지 않듯이, 불행하기만 한 인생도 그리 흔한 게 아냐. 도카는 도카의 행복을 조금만 더 믿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 (341페이지)

 

가짜 기억과 가짜 추억으로 현실과 허구를 넘나들며 들려주는 청춘의 사랑으로, 우리가 바라는 삶이 무엇일지 고민하게 하는 이야기다. 가짜이지만 경험하지 못한 기억을 심어놓는 게 괜찮은 건지, 경험으로 녹아든 기억을 인위적으로 삭제하는 게 괜찮은 건지. 살아가는 모든 순간에 겪는 온갖 경험의 기억이 우리를 슬프게 하는 일이 많을 텐데, 그때마다 우리는 삭제 버튼 하나로 그 슬픔을 다 지울 수 있을지도 궁금하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결국, 우리가 하루하루 잊어가면서 살아가는 동안 남는 건 사랑뿐일까, 하고. 만들어진 사랑일지라도, 가짜 사랑일지라도, 환상일지 몰라도, 그게 나를 존재하게 하는 힘이 될지도 모른다. 나를 구원할 유일한 방법이 사랑일 수도 있다니... 사랑을 불신하고 청춘의 시간이 불행했던 이들에게, 살아가는 또 다른 의미를 찾는 순간이 된 것만 같다.

 

 

* 본 리뷰는 출판사 경품 이벤트 응모용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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