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커버 보스
정이연 지음 / 봄출판사(봄미디어)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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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눈을 뜨니 내 옆에 웬 낯선 여자(남자)가 누워 있다?'

솔직히 새로운 설정은 아니다. 이런 에피소드로 시작된 이야기가 신선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짧고 굵다는 건 이 소설을 두고 한 말 같다. ^^ 장편소설 분량을 딱 반토막 낸 분량으로, 해야 할 말만 간단명료하게 적어놓은 듯한 분위기. 군더더기 빼고 느슨해지는 분위기 빼고, 치고 빠지는 기술이라고 해야 할까. 짧은 시간에 좀 더 몰입해서 볼 수 있는 요소가 다분하여 즐기기에 충분한 소설.

 

오랜만에 한국으로 들어온 강욱의 어느 날 아침. 햇살의 따가움에 잠을 깨고 일어났는데, 자신의 침대에 웬 여자가 누워 있다. 간밤에 술을 마신 것도 아니고, 원나잇을 즐기는 것도 아닌데 술이 떡이 되어 누워있는 이 여자는 누구인가? 이상한 여자일세. 그게 한번이면 아량을 베풀어 볼만도 하건만, 두 번이나 반복되는 건 또 뭔가. 도대체 이 여자가 자신의 집에 어떻게 들어온 건지 몰라 신경이 거슬리던 사이, 여자의 가방 속에서 신원을 확인한다. 희미하게 웃음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그리고 여자의 약점(?)을 쥐고 거래를 한다. '너 나한테 빚 졌다!'

 

얼마 후, 강욱과 여자는 태용건설에서 재회한다. 여자는 신입사원 강욱의 상사 김수현. 외모 멀쩡하고 일 끝내주게 잘하는데 워커홀릭이다. 자신의 침대 위에서 본 여자와 회사에서 마주한 여자의 이미지가 다르다. 이 여자, 뭘까? 시건방진 캐릭터 그대로 강욱은 느물느물 자신감 넘치는 신입으로 수현을 대하고, 겉으로 단단하게 보이는 수현은 강욱의 놀림 같은 관심에 공격당한다.

 

실실 쪼개며 속을 끓게 만드는 남자의 매력이 상큼하다. 딱 눈길이 가게 만들어졌다고 해야 하나. 까칠한 듯하면서 말랑말랑한 마음을 갖고 사는 매력덩어리를 그대로 심어놓은 것처럼, 얄미운데 딱밤보다는 괜히 옆구리를 찔러주고 싶은? 뭐, 좋다는 얘기지. ^^ 그런 강욱이 자신의 배경을 숨기고, 목적을 두고 신입사원으로 입사하였기에 그 사실을 수현이 알게 될 때를 대비해 준비를 한다. 수현에게 향하는 마음을 표현하는데 시간차 계획을 세운다. 두 사람 사이에 알게 모르게 생긴 비밀. 이 잘난 남자가, 자신에게 미친듯 관심을 보이는 남자가, 기껏 신입사원이었던 남자가, 사실은 내가 다니는 회사의 오너일지도 모른다!! 그럴 수 있는 거야?!

 

많은 이들이 가볍게 웃고 즐겼으면 좋겠다는, 작가의 짧은 후기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드라마적 분위기가 충분히, 보편적으로 즐길 수 있게 한다. 장편과 단편 그 사이의 장점을 살려 짧고 굵게 즐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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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한의학 - 낮은 한의사 이상곤과 조선 왕들의 내밀한 대화
이상곤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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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에 지배받는 몸을 건강하게 지키기 위해... 『왕의 한의학』

 

 

사극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서 봤던 조선 왕의 모습은,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손가락 끝으로 천하를 호령하는 사람이었다. 시쳇말로 수행원들 줄줄 달고 살며, 앉은 자리에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편한 생활이 몸에 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너무 익숙하면 가끔 심심하기도 하겠지만, 사실 편하게 살고 싶은 건 인간이 가지는 바람이기도 하니 부럽다는 생각이 더 크게 작용한 적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누리기 위해 감당하고 이겨내야 할 것도 많았다는 것. 단순히 흥미로만 만나던 그 시간의 이야기를 즐길 요소도 있지만, 그 이면의 것들이 오히려 진실에 가까운 게 아닐까 추측해보기도 한다.

 

이상곤의 『왕의 한의학』은 조선 왕의 질병과 역사를 연결한다. 어느 사건이 일어난 때, 어떤 환경의 지배를 받고 있었을 때 왕의 건강이 보내는 신호를 말한다. 굳이 왕이 아니어도, 일반인인 우리를 살펴봐도 마찬가지다. 마음을 건드리는 사건이나 고민거리가 생길 때 몸은 이상 신호를 보내고 반응한다. 온갖 방법으로 그 치료를 하겠지만, 그 근원을 뽑아내기 전에는 완전히 아물지 않는다. 왕의 자리에서도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의 의료행위는, 한의학으로 왕의 건강을 예방하고 치료하며 역사와 함께 해왔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의 기록으로 시간을 추적하고 왕의 몸을 다시 진찰한다. 그 기록 안 왕들의 모습은 다양했다. 병명, 증상, 치료법도 여러 가지가 함께 했지만, 저자의 글을 바탕으로 보면 그 자리에서 생길 수밖에 없는 스트레스가 모든 병의 근원이었던 듯하다.

 

고대의 주례(周禮)를 충실하게 복원한 조선 왕실의 상사(喪事)는 살인적이었다. 아마 세종은 그 첫 희생자였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신하들의 고기 섭취 권유에 덧붙이는 세종의 말은 그가 고기 마니아였고 대식가였다는 가설을 부정하기에 충분하다. “내가 본디 병이 없고 늙지도 어리지도 않으니 어찌 감히 뒷날에 병이 날까 봐 고기를 먹겠느냐.” (27페이지 세종)

 

왕의 자리에 앉기도 전에 이미 몸의 이상은 시작된 거나 마찬가지다. 선대의 상을 치르면서 예를 갖추느라 오랜 시간 몸을 상하게 했고, 왕위에 오르자마자 시작된 격무는 피로한 몸을 더 혹사하곤 했다. 권력 다툼의 중심에서 온몸은 긴장으로 풀어질 줄 몰랐다. 저자는 조선 왕실의 의학과 발전되어가는 과정을 들려준다. 몇몇 왕을 제외하고 태종부터 고종까지 실록을 바탕으로 해석하듯 비밀스러운 한의학을 풀어낸다. 그 결과부터 말하자면 역시, 가면 하나를 쓰고 살았던 조선 왕들에게 드러나는 증상들이 마음의 고통을 증명했다. 아무리 숨기려 해도 결국 다 숨기지 못했던 듯하다. 밖으로는 백성들의 안위를 돌보며 안으로는 수도 없이 밀려드는 위협과 싸워야 했다. 정치, 경제, 사회 전반을 아우르는 모든 것을 다스리고 관여해야 하는 묵중한 업무와 신하들과의 밀당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위협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그 흔적은 고스란히 몸에 남았다. 세종은 워커홀릭으로 비만이었고, 폭군으로 알려진 연산군은 시대의 색골이었다. 숙종은 화증과 눈병으로 평생을 앓았고, 헌종과 철종은 종마의 역할을 충실히 하느라 골골했다. 고종은 불면증으로 고생했다. 그 와중에 의외로 보였던 사람이 영조다. 정조는 장수한 거로도 유명한데, 평소 자신의 체질을 잘 알고 질병에 대비한 것으로 유명하다. 자기 관리가 철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그에게도 나중에는 화병의 징후가 보이는데, 그건 허약체지이었던 그가 자기 관리로도 결국 감출 수 없었던 고질병이 아니었을까.

 

저자의 역사 해설과 함께 조선 왕의 증상을 들으면서 알 수 있었던 건 세세한 기록과 진료로 처방과 치료를 했다는 건데, 그 안에서도 의학은 자주적으로 독립하지 못하고 정치권의 손 안에 있었던 것 같다. 내의원 삼제조의 영향 아래서 온전한 의술을 펼치기는 어려웠을 거라는 것. 한편으로는 왕실의 의료 행위가 국가적인 일이라는 것을 상기하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힘의 작용을 완전히 무시하시는 못했을 듯하다. 게다가 조선왕조의 성리학적 통치나 권력 투쟁은 왕들의 발병을 만들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정치적 갈등과 초상을 치르는 과정이 온갖 질환을 불러와 세상을 떠나게 하고, 독살설을 내놓는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기록된 조선의 왕실의 의료 기록을 볼 때 독살되었을 것이라고 확언할 수 있는 왕은 거의 없다고 한다. 독살이라기보다는 의료 과실에 가까운 원인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눈앞에서 아비의 죽음을 목격하고 평생 그 한을 풀기 위해 애쓴 정조는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견디며 살아야 했을까? 정조의 질병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아버지의 비참한 죽음이 가져다준 트라우마가 화증이 되어 평생 그를 괴롭혔다. (335페이지 정조)

 

가만히 듣다 보면, 이들의 모든 병은 화병에 가까워 보인다. 물론 그 화병 한 가지로 그들의 목숨이 위태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화병을 시작으로 합병증처럼 다른 병들이 줄줄이 따라온 것 같다. 종기는 기본으로 생기는 게 비일비재했고, 소화불량과 과로는 스트레스로 직행했다. 왕의 자리라는 것이 이들의 건강을 좌우해 기인한 것이 아닐까. 무엇 하나 내 마음대로 하는 게 쉽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감내해야 하는 것들이 온갖 병을 불러오고 있었음이라. 말 그대로 왕노릇이 수명을 단축시킨 것이다. 가장 기본적인 것조차 거부당하며 시작되는 질병의 참모습이다.

 

역사 해석과 함께 풀어놓은 저자의 관점은 한의학의 새로운 면모를 보게 하면서, 현대인에게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게 한다. 왕의 자리라는 위치만 다를 뿐 우리 살아가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만성적이고 고질적인 스트레스, 때를 맞추기 어려운 식사로 인한 소화불량, 불면증 같은 시대를 거슬러도 비슷한 질병들을 안고 사는 우리의 모습을 비춘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처방과 치료법이 워낙 방대해서 다 옮겨 적을 수가 없는 게 아쉽지만, 그들의 증상을 보고 처방하고 치료한 과정을 통해 한의학의 역할과 발전, 동시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는 처방임을 알게 되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보약처방이 많았고 침구술 같은 외과 치료가 경외 시 되었다는 것도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것 같다. 아마도 서양의학의 도입과 함께 변화되어 가던 과정도 한몫한 건 아닐까 싶다. 조선 시대 의학이면서 상당히 적극적인 치료법이었고, 오늘까지 계승된 것이 많다니 믿어볼 만 하다. 역사와 의료를 함께 들을 수 있어서 진지했고, 차근차근 풀어가는 그 설명에 믿음이 간다. 한의학은 자연과의 조화라는 말에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순간 신호를 보내는 몸이 그걸 증명하고 있으니 말이다.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듣는 재미도 있었지만, 환경이 인간을 병들어가게 하는 과정과 그 치료를 위한 자세를 배우게 하는 실용적인 책이다. 읽는 내내 진지했고 많이 배울 수 있었다.

 

사람에게 죽음에 이를 세 가지 경우가 있는데

이는 다 자초하는 것입니다.

잠들 때를 놓쳐 숙면의 시기를 놓치거나,

먹고 마시는 것을 조절하지 못하거나,

과로하거나 지나친 편안함에 젖는 것이

그것입니다.       - 『공자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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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이란 단어 끝에 매달린 눈물을 멈추게 할 치료약은 없는 듯하다. 그리움이 밀려오는 그 시간을 흘려보내는 수밖에는. 시간이 만들어낸 그리움이 시간으로 흐릿해지길 바라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다. 눈물이 나면 나는 대로, 아프면 아픈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그저 흘러가게 내버려두는 수밖에. 누구, 다른 방법 알고 있다면, 좀, 알려줘...

 

2회 모두 챙겨보게 된 <무한도전 토토가>가 한없이 눈물을 흘리게 했다. 그렇게 화려하고 흥겨운 무대에, 왜 눈물이 나는지 알 수 없어 그냥 흐르게 놔두었는데, 다 끝나고 생각해보니 그건, 그리움이었다. 가수들이 인터뷰에서 했던 말처럼, 언제 이런 자리가 또 만들어질지 몰라서 더 그리워질 시간. 나에게도, 그들에게도 찾아왔을 그 순간이 눈물로밖에 표현될 수 없었던 듯하다. 전성기라 불러도 좋을 시간을 묻어두고 살았을 그들에게 이번 무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많은 감정을 분출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1990년대에 십 대 후반 이십 대를 살았던 나에게도 온갖 감정이 범벅이다. 자신들의 화양연화를 되돌아보고, 다시 모인 자리가 기쁘고 즐거운데도 눈물을 훔치는 그들의 모습에서 가슴 속 말들을 읽는다. 힘들지만 좋았던 시절, 좋은 줄도 모르고 그저 익숙하게 지냈던 시간, 다시 모여 이렇게 노래 부르고 행복하지만, ‘언제 또 우리 다시 뭉치자’라는 말을 쉽게 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는 것. 지금 각자의 자리에서 만족해야만 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많은 이해관계가 얽혀있고, 20대가 아닌 30, 40대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 선뜻 할 수 없는 말이라는 것 알고 있기 때문에... 길에서 우연히 예전에 아는 사람을 만났을 때, 순간적인 반가움에 아는 척하지만 누군가가 먼저 ‘언제 한 번 밥이나 먹자.’ 하는 말이 영혼 없는 약속이 되어버릴까 봐, 선뜻 꺼낼 수 없는 말이 됨을 아는 것과 같은 의미.

 

그래서 계속될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아닌 지금 이 순간 들려오는 <토토가>의 노래가 기쁘면서 눈물이 나는 거 아닐까.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판타지가 없음을 알기 때문에 이들의 이 무대가 지금 이렇게 눈물이 날 정도로 아프고 좋다는 것. 나이를 먹고 체력이 달려 춤추면서 힘들어하고, 그때와 똑같이 분장을 했지만 얼굴의 주름이 다 가려지지도 않는... 그래서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동시에 같이 나이 먹어가고 있음을 공감하며, 닿지 않는 손을 뻗어가며 다독이고 싶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틀에 박힌 향수라고 해도, ‘추억팔이’라고 말해도 괜찮다. 내 힘으로는 불가능한 시간의 소환이 이렇게 이루어진다는 게, 어느 한 때를 노래로 공유했다는 것 자체가 그저 감사해서, 추억이라 부를 시간을 만들어낸 게 기적 같아서 좋은.

 

배순탁의 <청춘을 달리다>도 비슷하다. 그의 전문적인 음악 지식을 풀어내고 있지만, 그 배경은 1990년대, 그가 이십 대를 보내던 시절의 이야기가 곳곳에 녹아있다. 

 

 

때때로 음악은 특정한 시절을 소환하는 마법을 부린다.

그리고 내 경험에 의하면, 어려운 시절보다는 좋았던 시절이 소환될 때, 눈물이 왈칵 차올라서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 되고는 한다.

시간이 흐르면 나쁜 기억들은 사라지고, 행복했던 기억만이 남는 것과 비슷한 이치일 것이다. ‘돌아오지 않아’라는 진실을 그 어떤 바보가 모르겠는가. 그럼에도 이 곡을 지금까지도 듣는 이유는, 거기에 아버지와 나의 환한 미소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머물러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음악은 때로 이렇게 받을 수 없는 사람에게 거는 전화가 된다.

부치지 못한 편지가 된다. 나처럼 나중에 땅을 치면서 후회하지 말고 지금 잘해야 한다. 돌아오지 않는다. 절대로.

- 46~47페이지 <청춘을 달리다>

 

 

 

1년쯤 전, TV를 잘 보지 않았던 그때도 <응답하라 1994>에 빠져 본방송을 챙겨볼 정도였다. 주변에서 웬일인가 싶어 이상하다는 눈빛을 보내곤 했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거, 우리 그때랑 너무 똑같잖아!’ 라면서 미치도록 공감하며 다음 회를 기다렸다. 우리의 20대, 너무 그립고, 서툴러서 아쉬웠던 그 시간이 보고 싶었다. 그래서 봤다. 드라마가 너무 재밌다며 몰입했고 중독됐다. 그땐 그게 전부인 줄 알았다, 그저 재밌는 드라마라고... 근데 오늘 <무한도전 토토가>를 보면서 그 드라마를 떠올리니, 스토리 자체가 만드는 몰입보다 그 배경에서 계속 들려왔던 음악이 더 생각났다. 그 때문인 듯하다. 눈이 아닌 귀로 저절로 그 시간을 소환해내는 것. 물론 눈과 귀가 같이 영향을 받았기에 그 시너지가 엄청났을 테지만, 음악이 아니었다면 그 정도의 감동을 만들어내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짙어진다. 그 시대의 음악이 빠져서는 이야기가 안 될 정도로...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잠시 잠깐, 시간이 멈춰있었다. 그 시간의 감동과 열기가 행복하면서 두렵기까지 하다. 이 순간이 지나면 한바탕 꿈에서 깨어난 후유증을 견디기 어려울까 봐. 휴...

 

어느덧, 누구는 세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고, 누구는 가수보다 예능인으로 더 각인되었고, 누구는 혼자 두 사람 몫의 노래를 하며 행사를 뛰고, 누구는 한류의 한가운데서 여전히 활동하고 있고... 그때 매일같이 얼굴 보며 왕성하게 활동했던 그들의 지금 자리는 너무 달랐다. 그래도,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에 다른 생각은 낄 자리가 없는 듯하다. 지금, 이렇게 행복하면 좋다는 듯, 다행이라는 듯...

 

 

프로그램이 끝나고 이십여 년을 함께 한 친구에게 문자를 한 통 보냈다.

'졸업하고 우연히 남철이를 만난 적이 있어. 우리가 슬리퍼 버렸다는 거, 알고 있더라고... 그냥 웃더라.'

그 친구와 나만이 알 수 있는 암호 같은 문장을 전송했다. 가수들에게 오늘의 시간이 여운으로 길게 남아 힘들 것처럼, 나에게도 한동안 마음을 무겁게 할 여운으로 남아있을 듯하다. 그리운 어떤 게 빨리 잊히기만을 기다릴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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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부모 얼굴이 보고싶다 ㅣ 무대 위의 문학 1
하타사와 세이고.구도 치나쓰 지음, 추지나 옮김 / 다른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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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이 끝나고 난 후... 『니 부모 얼굴이 보고싶다』

 

 

직접 경험해보지는 않았지만, TV나 책을 통해서 봤던 심리치료 과정에서, 서로의 처지를 바꿔놓고 같은 상황을 경험하게 하는 장면이 있다. 상처받은 사람은 그 정신적인 고통을 전문가와의 상담으로라도 덜어내야만 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상황극, 역할극 같은 것처럼 보인다. 아주 작은 무대(무대라고 할 것도 없는 어떤 장소) 위, 어떤 상황이 펼쳐진다. 언제 어느 때, 이런 일이 있었고, 나는 그 일로 이런 고통을 받았지. 대충 이런 내용의 연극이 펼쳐진다. 고통 받았다고 여긴 사람은 그 반대의 관점을 연기한다. 실컷 흥분하며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과격해지기도 한다. 그 맞은편의 누군가는 침묵하거나 듣기만 하거나, 고개를 숙이고 있다. 연극이 끝나고 나면 서로에게 한발 더 다가서는 분위기를 느낄 수도 있다. 보는 사람이 느끼는 그 감정이 진실일지 아니면 그 순간의 가면일지는 모르겠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살아가는 동안에 바뀐 그 입장에서 상대를 봐야 할 때가 생각보다 많을 수도 있다는 거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연극이 많이 생각났다. 연극으로 먼저 오르고 난 후 소설이 된 이야기다. 우리나라에서 낭독회로 진행되었을 때도 상당히 주목받았다고 한다. 비단 일본에서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증거다. 새삼 얘기하는 게 불필요한 일처럼 느껴질 정도로 익숙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너무 흔한 일상처럼 되어버렸다는 게 아픈 이야기라는 것. 이런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오고 있는, 계속되어야만 하는 이유도 같을 것이다. 이 책이 조금은 다르게 다가오는 이유는 단순히 왕따 문제나 청소년의 자살 문제를 그리고 있다는 것을 넘어서서, 그 아이들의 든든한 배경이 되는 부모의 진짜 얼굴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중학교 교실의 이른 아침. 한 여학생이 자기 반 교실에서 자살했다. 그리고 유서로 보이는 편지가 담임선생님에게 도착한다. 편지의 맨 끝에는 같은 반의 아이 다섯 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학교에서는 이 다섯 명을 따로 대기시켜 놓고 아이들의 부모를 호출한다. 학교에 도착한 다섯 명의 학부모들은 저마다 자신의 아이가 그럴 리가 없다, 착한 아이들이다, 내 아이를 격리해 놓지 마라, 죽은 아이가 행실이 올바르지 못했다, 편지가 조작된 것이다, 등등. 자신의 자녀가 죽은 아이의 가해자라는 것을 처음부터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겠지. 부모에게는 자식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 있을 것이다. 자신의 아이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착각인 줄도 모르고,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외침만 반복한다. 그런데 죽은 아이는 담임선생님, 그룹에서 외면당한 자신과 같이 밥을 먹어준 친구, 아르바이트하던 신문보급소의 소장에게 각각 편지를 보냈다. 감사의 말과 함께 편지의 끝에는 똑같이 다섯 명의 이름을 적어서...

 

가해자의 학부모가 모이기 시작한 그 순간, 즉 이 연극의 처음 부분부터 나는 숨이 턱턱 막혀왔다. 한 생명이 스스로 선택한 죽음이었다. 중학교 2학년, 소소한 수다에도 까르르 웃음이 날 것만 같은 가벼움마저 사랑스러운 나이, 인생의 큰 그림보다 당장 바로 앞의 유치한 우정이 소중하다고 여길 수 있는, 정말 순수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게는 그 시간을 미처 다 반짝이지도 못하고 버린 것에 대해 아파해도 모자랄 고통일 텐데... 불태우고 찢어버린 편지를 앞에 두고 '이제는 없는 일이다.'라는 간단명료한 마침표로 만들어버리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 무서웠다. 같이 그룹을 만들어야만 유지되는 게 중학교 생활이라니 인정하고 싶지도, 믿고 싶지도 않지만 요즘 아이들의 학교생활이 그런 모양이라니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그 무리의 형성이나 유지되는 근거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를 동반한다. 그냥 미워, 그냥 싫어. 약해 보이니까, 만만하니까, 한번 찔러보니 말을 잘 들으니까. 또 어떤 이유가 더 있으려나... 사실 특별한 이유가 없어 보였다. 그룹 안에서 한 아이를 밀어내고, 왕따를 시키고, 횡포와 폭력, 협박을 일삼는 이유가 그저 무리와 한 개인이라는 차이 말고는 없던 것이다. 협박에 못 이겨 아르바이트해서 상납을 하고, 그것마저 채우지 못하니 가해자들이 나서서 원조교제를 시키는 것도 너무 당연한 것처럼 이루어진다.

 

그룹에 들지 못하면 외톨이가 되고, 아주 교묘한 따돌림으로 들키지도 않게 하는 고단수의 행동을 하는 아이들이 중학생이라니... 그 나이의 아이들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이야기를 볼 때마다 나는 그 아이들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상태로 되돌아가고는 한다. 현직 교사가 직접 쓴 이야기는, 그가 직접 경험한 내용이 아니지만 간접 경험으로 보고 듣고 상담한 많은 내용을 근거로 써졌기에 상당히 사실적이다. 그런 부분에서 결코 지나칠 수 없는 시선이 바로 부모의 입장에서 취해야 할 자세다. 그것도 가해자의 부모 처지에 놓였을 때 어떤 시선과 생각으로 행동하고 말해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 책에서 보이는 가해자의 부모들은 한결같았다. 계속 드러나는 아이들의 이름 앞에서도 부정했고, 설사 그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오점만 찾아내려 했다. 피해자가 했던 그 불법적인 행동(중학생 신분으로 아르바이트한다거나, 원조교제를 하는 것 같은)만 들춘다. 그러한 행동이 이루어져야 했던 배경에 자신의 아이, 가해자가 있었음을 처음부터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더군다나 자신들이 저지른 일에 대해 전혀 반성하지 않는, 매일같이 얼굴 보고 지냈던 사람이 사라졌다는 것에 아무런 감각도 없는 아이들. 겨우 십 년 조금 넘게 살아온 시간 동안 그 아이들에게 그런 인성이 갖추어진 것은 무슨 이유일까.

 

단숨에 속내를 끄집어낸 엔도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부모들을 휙 둘러보더니 조용히 곱씹듯이 말했다.

"오늘은 운이 좋았네요. 소원을 이뤘습니다. 줄곧 궁금했거든요. 걔들 부모들은 어떻게 생겨 먹었을까."

엔도는 다시 한 번 부모들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휴대전화 화면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어서 사과해. 미치코한테 사과해! 어서!" (103페이지)

 

밖에서 행동할 때 자주 나오는 말이면서, 그 말 때문에 행동거지를 조심해야 하는 이유가 되는 것에 부모가 있다. 아이가 밖에서 잘못된 행동을 할 경우 대부분의 사람은 '집에서 부모가 그렇게 가르쳤나?' 하는 생각을 먼저 할 것이다. 결혼한 여자의 입장에서 시댁에서 가장 듣기 싫은 말은 '너희 친정에서는 그렇게 가르치더냐, 하는 말이라고 했다. 그만큼 한 사람의 성장이나 인성에 있어서,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가장 먼저 관계를 형성하는 부모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중요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잘못된 것을 지적하면서 굳이 그 배경에 부모를 대입해 판단하는 게 익숙해서일 수도 있지만, 그만큼 부모의 가르침이나 부모의 태도가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을 드러내는 부분일 수도 있다. 이 이야기가 처음 상연되었던 연극에서 멈추는 게 아니라 굳이 소설로 다시 써져야만 했던 이유가 이렇게 설명된다.

 

이야기의 중반을 넘어서면서 그 진실이 하나씩 드러난다. 누구나 그 진실을 알고 있다고 해서 다 꺼낼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만 같다. 미치코의 진실을 알고 있던 신문보급소의 소장은 하루 늦은 자신의 행동에 울분할 수밖에 없었고, 아이들의 진실을 알고 있던 부모는 그 진실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처리하는 방법을 먼저 가르쳤다. 나의 예상은 여기서 빗나갔다. 연극의 막이 내려지기 전에 많은 것들이 제 자리를 찾아갈 기회가 만들어지는 것으로 마무리되지 않을까 했었는데... 긍정적인 다음 장면도, 가해자 부모의 태도가 달라질 거란 희망도, 가해자인 아이들의 인성에 대해서도, 온전하게 기대할 수가 없었다. 마지막 장 누군가의 말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으니 다음 행보를 가르쳤던 것일까.

 

연극이 끝나고, 단 하나의 조명만이 무대 위를 비추고 있는 듯하다. 시신이 되어 누워있는, 피해자인 미치코의 표정을. 마치, 이제야 좀 편하다는 얼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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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늦은 시간에 걸려오는 전화나 문자가 무서운 적이 많았다. 지금도 그런 무서움이 아주 사라진 건 아니지만 익숙해져서 그런지 아니면 조금 무뎌진 건지, 예전보다는 덜 하다. 뭐 별것도 아닌 걸로 그러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좋은 경험이 아니었기에 그 기억이 더 오래가는 듯하다. 위험한 말이 오고 가서가 아니고, 안 좋은 소식이나 듣고 싶지 않은 소식이 많아서였다. 절대 유쾌하지 않을 일들.

 

그런데 언젠가부터 한밤중에 도착하는 소식 중에는 외로움, 혹은 쓸쓸함이 담겨 있는 것도 많았다. 자정을 전후로 들어오는 문자가 특히 그랬다. 밤이라는 시간 때문일 수도 있고, 그 외로움을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어서였을 수도 있다. 그렇게 문자를 보내는 이는 내가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었고, 대개 가까운 사이였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라는 말을 웃음과 같이 건넬 수 있는 사람들이어서 다행인... 때로 바쁜 시간이 지난 후 찾아온 여유에 안부를 물을 수 있는 시간이거나, ‘그냥’이라는 이유로 스스럼없이 말문을 열 수도 있는 시간. 그래서 한밤중의 문자가 안 좋은 소식들로 불안한 것보다 괜히 마음이 허해지는 순간으로 변해가곤 했었다.

 

 

외로운 밤이 있다.

'아니 이건 그리움이야, 아니 이건 고독이지, 고독은 나의 친구인걸' 하고

아닌 체해보아야 어쩔 수 없이 사무치는 건, 외로움이다.

외로움에는 눈물이 없다.

메마른 가슴이 괴롭게 사람을 들쑤시는 밤.

(쓸쓸해서 비슷한 사람 194페이지)

 

 

 

이상한 밤이었다.

요즘, 이상하게 잘못 걸린 전화가 자주 온다. 일주일에 두세 번쯤, 그것도 밤에 주로. 지금 번호를 사용한지 1년쯤 됐는데, 그동안 잘못 걸린 전화 어쩌다 한번 받기는 했어도 요즘처럼 자주 오지는 않았다.

 

 

 

언젠가 이런 문장을 읽은 적이 있어.

‘자신을 완벽하게 고백하는 것은 어느 누구라도 불가능하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을 고백하지 않고서는 어떤 표현도 불가능하다.’

비루한 고백을 들어줘서 고마워. 오랫동안 옆에 있어줘서 정말 고마워.

마지막으로 어떤 주저도 없이 말할게.

행복해라, 꼭. (말하자면 좋은 사람 198페이지)

 

 

 

며칠 전 금요일 밤, 자정이 거의 다 되어 가는데 문자 한 통이 들어온다.

 

“00아, 잘 지내니?”

모르는 이름이기에 잘못 온 문자려니 싶어 무시했다.

몇 분쯤 지나자 다시 또 문자가 들어온다.

“00아, 나야. 보고 싶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상대방에게 문자를 전송했다.

“문자 잘못 보내셨습니다.”

상대가 잘 알아들었겠거니 했다. 잘못 수신된 문자라고 친절하게 알려주기까지 했으니, 알아듣고 이젠 문자를 안 보내겠구나 했다. 그런데 이 사람 이젠 문자가 아니라 전화를 걸어온다. 순간, ‘이걸 받어, 말어?’ 몇 초의 고민을 했더랬다. 굳이 잘못 보냈다는 문자에 왜 전화를 걸어올까 궁금하기도 했지만, 내 알바 아니라는 마음이 커서, 귀찮아서였다. 그래도 한 번 더 친절해도 될 것 같아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정말 00 휴대폰이 아닌가요?”

“모르는 분입니다. 전화 잘못 거셨어요. 제가 이 번호를 1년 전부터 사용하고 있습니다.”

“정말인가요?”

“네.”

바로 전화를 끊을 줄 알았다. 전화를 잘못 걸었다는데, 상대방은 자기가 찾는 사람이 아니니 당연히 끊어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 남자, 전화를 끊지 않는다. 할 수 없이 내가 먼저 전화를 끊겠다고 말하고 종료 버튼을 누르려고 했다. 말을 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이 남자가 먼저 말문을 연다.

 

“죄송합니다. 00은 헤어진 여자 친구인데요.”

그래서?

“참고 참다가 1년이 넘어서야 전화를 했어요. 보고 싶어서요.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요.”

그런데?

“그 사이 전화번호가 바뀐 걸 몰랐어요. 너무 당연하고 익숙한 번호라 계속 사용하고 있을 줄 알았어요. 그래서 문자 잘못 보냈다는 말이 거짓말인 줄 알고 전화까지 하게 되었네요... 죄송합니다.”

“네.”

“......”

“저기요?”

“네.”

더 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어서 평소 하던 대로 했다. 나와 상관없는 이 얘기를 더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찾는 분의 전화번호가 바뀐 걸 알았으니, 이제 이 전화를 끊어야하지 않겠어요?”

“아, 예. 그렇죠. 그래야죠...”

근데 왜 끊겠다는 말이 없어?

내가 먼저 끊어야겠다고 다시 말하려고 하는 순간, 상대가 다시 말문을 연다.

“정말 거짓말인줄 알았어요. 그런데 00과 목소리까지 비슷하네요. 처음엔 본인인데 아닌 척하는 줄 알았어요. 근데 말의 억양이 달라서 아닌 걸 알았어요. 그쪽은 목소리가 좀 더 낮네요.”

“저에게 더 하실 말씀 있으세요? 저는 그쪽과 계속 통화할 이유가 없는데요.”

냉정하게 들릴 정도로 딱 잘라 말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의미 없는 대화를 계속할 이유도 없었다. 상대를 배려하고 싶어도, 내가 해결해줄 수 있는 게 없으니 시간낭비라고 생각했다. 모르는 사람을 찾아 데려다 줄 수도 없잖아...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사람 말투가 정말 스팸전화 끊듯이 ‘뚝’ 끊어버릴 수 없게 했다. 그렇게 나 혼자 고민하고 있는데 다시 이어져오는 말.

“보고 싶은 거 그동안 잘 참았는데, 오늘은 정말 못 참겠어서요. 한마디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안하던 짓을 했어요. 죄송했습니다. 제가 먼저 끊겠습니다...”

뚜. 뚜. 뚜...

 

그렇게 전화가 끊겼다. 귀신에 홀린 듯했다. 오 분에 가까운 시간동안 뭐가 지나갔나? 뭐지, 이건? 아, 진짜...

 

 

 

그게 뭐 어때서, 라고 생각하는 순간 증기처럼 아득한 두려움이 나를 덮친다.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잊음으로써 얼마나 많은 시간 토막들을 잃어버리고 살아왔을까.

진짜는 죄다 도둑맞고,

내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자아의 금고 속에는 엉뚱한 모조품만 잔뜩 쟁여져 있는 느낌이다.

스물두 살의 첫새벽처럼 나는 텅 빈 주방 앞에서 나지막이 읊조린다.

누가 너를 내게 보내주었지? (비자나무 숲 262페이지)

 

 

 

 

멀쩡한 기분이었다. 두통이 좀 심했던 거 말고 특별히 더 나쁠 게 없었다. 피곤해서 일찍 자려고 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게 뭐야? 잠들려고 했던 기운을 다 깨워놓고 이상하게 멜랑콜리한 기분까지 남겨놓다니. 그 사람은 그렇게 전화를 끊고 괜찮아졌는지 어땠는지 몰라도, 그녀의 전화번호가 바뀐 것을 알고 이제 삭제하고 개운해졌는지 몰라도, 이젠 정말 그 미련을 버렸는지 몰라도... 나는 괜히 우울해졌다. 전혀 모르는 남인, 누군가의 외로움이 쓸데없이 전염된 듯했다. 수화기 너머 누군가의 쓸쓸함이 그대로 건너온 듯했다. 뭐가 이래. 아, 이런 거 정말 별론데.

 

 

잠이 다 깼다. 이대로 잠들기는 어려울 듯하여 양양의 책 제목이 생각나서 들춰보다가 문득, 내 전화번호 전 주인이 궁금해졌다. 나에게 온 잘못 걸린 전화는 남자를 찾는 전화도 있었지만 대부분 여자를 찾는 전화였다. 같은 이름의 여자를 찾고 있었다. 전화번호를 바꾸면서 번호연결 서비스를 사용하지 않은 듯했다. 그 말은, 굳이 바뀐 전화번호를 전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지 않다는 의미 아닌가. 본인이 먼저 전화번호를 알려주지 않는 이상 타인이 그 번호를 알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갑자기 나에게 잘못 걸려온 전화를 생각해보니, 1년 동안 이 사람들은 내 전화번호 전 사용자와 연락이 없었다는 건가? 왜,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1년이란 시간이 지난 후에 그 사람을 찾는 거지? 전화한 그 남자는 1년 동안 어떤 시간을 보냈을까. 혹시, 좁은 편도 1차선 같은 길을 가고 있었을까. 같은 마음으로 같은 방향으로 갈 수 없는 길, 상한 마음에 '나 없이 잘 지내지 말라'고 소심한 복수라도 했던 걸까. 그래도 결국 쓸쓸해진 마음을 어쩔 수 없어 그녀를 찾았던 걸까.

 

 

한 사람을 떠올렸다. 늦은 밤 전화해서 내려앉은 목소리를 들려주던, 늦은 퇴근길에 걸음은 무겁고, 불 꺼진 집에 들어와 시어진 김치에 물을 만 밥으로 허기를 달랬다던, 외롭다고 푸념을 늘어놓던 목소리. 누구나 사는 게 비슷하다고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는데 이제 와 생각해보니 외롭다고 말하던 사람의 가슴은 쓸쓸했겠구나, 싶다. 이런 거였구나. 양양이 평범하다면 평범한 일상을 두고 말하면서 이런 제목을 붙인 이유를, 어쩌면 알 것도 같다.

 

늦은 밤 불쑥 이 책을 펼쳐 들었던 건, 제목에서 흐르는 그 쓸쓸함 때문이다. 아닌 체하려고 해도 안 되는, 말로 다 하지 못한 침묵이 기어코 또 다른 말이 되어 뛰쳐나오고야 마는 것. 함박눈이 펑펑 내리며 추위가 더 짙어지고, 양양의 노랫말이 되어버린 그녀의 끼적임은 그래서 '비슷한 사람'이란 이유로 우리를 붙든다. 닮아있음을 부정하지 말라고, 닫힌 창문 열고 손 뻗으면 바로 닿는 사람들이라고... 살아가는데 때로 말이 없어도 되고 표정이 없어도 되고 혼자여도 되지만, 가끔은 딱 한 마디가 필요한 때가 있다. 더도 말도 덜도 말고 딱 한 마디만. '어쩌면 우린, 비슷하구나.' 느낄 수 있는 찰나의 순간이 필요할 때. 이 책에서 그녀가 뿜어대는 사소하고 하찮은 일상 같은 시간 앞에 괜히 민망해진다. '너도 그렇잖아' 건네는 한 마디에 모든 감정을 읽힌 듯 얼굴이 붉어진다. 나도 모르는, 혹은 모른 척하고 싶었던 감정을 타인이 살피고 말해주는 것만 같아서다. 전화를 잘 못 걸었던 그 남자에게 괜찮아질 거라는, 진심어린 한 마디라도 해줄 걸 그랬나 싶은 마음에 뒤늦은 후회를 한다.

 

 

 

 

외롭게 혼자 맞이하는 쓸쓸한 죽음도 있고

사랑하는 이들에게 둘러싸여 떠나는 행복한 죽음도 있겠지.

하지만 어차피 떠날 때는 우리 모두 혼자다.

(기억해줘 184페이지)

 

 

 

 

나답지 않게, 전혀 상관없는 남의 일에 신경이 쓰여 생각의 오지랖을 넓혔다.

이상하게, 괜히 쓸쓸해지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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