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한의학 - 낮은 한의사 이상곤과 조선 왕들의 내밀한 대화
이상곤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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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에 지배받는 몸을 건강하게 지키기 위해... 『왕의 한의학』

 

 

사극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서 봤던 조선 왕의 모습은,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손가락 끝으로 천하를 호령하는 사람이었다. 시쳇말로 수행원들 줄줄 달고 살며, 앉은 자리에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편한 생활이 몸에 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너무 익숙하면 가끔 심심하기도 하겠지만, 사실 편하게 살고 싶은 건 인간이 가지는 바람이기도 하니 부럽다는 생각이 더 크게 작용한 적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누리기 위해 감당하고 이겨내야 할 것도 많았다는 것. 단순히 흥미로만 만나던 그 시간의 이야기를 즐길 요소도 있지만, 그 이면의 것들이 오히려 진실에 가까운 게 아닐까 추측해보기도 한다.

 

이상곤의 『왕의 한의학』은 조선 왕의 질병과 역사를 연결한다. 어느 사건이 일어난 때, 어떤 환경의 지배를 받고 있었을 때 왕의 건강이 보내는 신호를 말한다. 굳이 왕이 아니어도, 일반인인 우리를 살펴봐도 마찬가지다. 마음을 건드리는 사건이나 고민거리가 생길 때 몸은 이상 신호를 보내고 반응한다. 온갖 방법으로 그 치료를 하겠지만, 그 근원을 뽑아내기 전에는 완전히 아물지 않는다. 왕의 자리에서도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의 의료행위는, 한의학으로 왕의 건강을 예방하고 치료하며 역사와 함께 해왔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의 기록으로 시간을 추적하고 왕의 몸을 다시 진찰한다. 그 기록 안 왕들의 모습은 다양했다. 병명, 증상, 치료법도 여러 가지가 함께 했지만, 저자의 글을 바탕으로 보면 그 자리에서 생길 수밖에 없는 스트레스가 모든 병의 근원이었던 듯하다.

 

고대의 주례(周禮)를 충실하게 복원한 조선 왕실의 상사(喪事)는 살인적이었다. 아마 세종은 그 첫 희생자였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신하들의 고기 섭취 권유에 덧붙이는 세종의 말은 그가 고기 마니아였고 대식가였다는 가설을 부정하기에 충분하다. “내가 본디 병이 없고 늙지도 어리지도 않으니 어찌 감히 뒷날에 병이 날까 봐 고기를 먹겠느냐.” (27페이지 세종)

 

왕의 자리에 앉기도 전에 이미 몸의 이상은 시작된 거나 마찬가지다. 선대의 상을 치르면서 예를 갖추느라 오랜 시간 몸을 상하게 했고, 왕위에 오르자마자 시작된 격무는 피로한 몸을 더 혹사하곤 했다. 권력 다툼의 중심에서 온몸은 긴장으로 풀어질 줄 몰랐다. 저자는 조선 왕실의 의학과 발전되어가는 과정을 들려준다. 몇몇 왕을 제외하고 태종부터 고종까지 실록을 바탕으로 해석하듯 비밀스러운 한의학을 풀어낸다. 그 결과부터 말하자면 역시, 가면 하나를 쓰고 살았던 조선 왕들에게 드러나는 증상들이 마음의 고통을 증명했다. 아무리 숨기려 해도 결국 다 숨기지 못했던 듯하다. 밖으로는 백성들의 안위를 돌보며 안으로는 수도 없이 밀려드는 위협과 싸워야 했다. 정치, 경제, 사회 전반을 아우르는 모든 것을 다스리고 관여해야 하는 묵중한 업무와 신하들과의 밀당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위협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그 흔적은 고스란히 몸에 남았다. 세종은 워커홀릭으로 비만이었고, 폭군으로 알려진 연산군은 시대의 색골이었다. 숙종은 화증과 눈병으로 평생을 앓았고, 헌종과 철종은 종마의 역할을 충실히 하느라 골골했다. 고종은 불면증으로 고생했다. 그 와중에 의외로 보였던 사람이 영조다. 정조는 장수한 거로도 유명한데, 평소 자신의 체질을 잘 알고 질병에 대비한 것으로 유명하다. 자기 관리가 철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그에게도 나중에는 화병의 징후가 보이는데, 그건 허약체지이었던 그가 자기 관리로도 결국 감출 수 없었던 고질병이 아니었을까.

 

저자의 역사 해설과 함께 조선 왕의 증상을 들으면서 알 수 있었던 건 세세한 기록과 진료로 처방과 치료를 했다는 건데, 그 안에서도 의학은 자주적으로 독립하지 못하고 정치권의 손 안에 있었던 것 같다. 내의원 삼제조의 영향 아래서 온전한 의술을 펼치기는 어려웠을 거라는 것. 한편으로는 왕실의 의료 행위가 국가적인 일이라는 것을 상기하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힘의 작용을 완전히 무시하시는 못했을 듯하다. 게다가 조선왕조의 성리학적 통치나 권력 투쟁은 왕들의 발병을 만들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정치적 갈등과 초상을 치르는 과정이 온갖 질환을 불러와 세상을 떠나게 하고, 독살설을 내놓는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기록된 조선의 왕실의 의료 기록을 볼 때 독살되었을 것이라고 확언할 수 있는 왕은 거의 없다고 한다. 독살이라기보다는 의료 과실에 가까운 원인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눈앞에서 아비의 죽음을 목격하고 평생 그 한을 풀기 위해 애쓴 정조는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견디며 살아야 했을까? 정조의 질병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아버지의 비참한 죽음이 가져다준 트라우마가 화증이 되어 평생 그를 괴롭혔다. (335페이지 정조)

 

가만히 듣다 보면, 이들의 모든 병은 화병에 가까워 보인다. 물론 그 화병 한 가지로 그들의 목숨이 위태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화병을 시작으로 합병증처럼 다른 병들이 줄줄이 따라온 것 같다. 종기는 기본으로 생기는 게 비일비재했고, 소화불량과 과로는 스트레스로 직행했다. 왕의 자리라는 것이 이들의 건강을 좌우해 기인한 것이 아닐까. 무엇 하나 내 마음대로 하는 게 쉽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감내해야 하는 것들이 온갖 병을 불러오고 있었음이라. 말 그대로 왕노릇이 수명을 단축시킨 것이다. 가장 기본적인 것조차 거부당하며 시작되는 질병의 참모습이다.

 

역사 해석과 함께 풀어놓은 저자의 관점은 한의학의 새로운 면모를 보게 하면서, 현대인에게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게 한다. 왕의 자리라는 위치만 다를 뿐 우리 살아가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만성적이고 고질적인 스트레스, 때를 맞추기 어려운 식사로 인한 소화불량, 불면증 같은 시대를 거슬러도 비슷한 질병들을 안고 사는 우리의 모습을 비춘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처방과 치료법이 워낙 방대해서 다 옮겨 적을 수가 없는 게 아쉽지만, 그들의 증상을 보고 처방하고 치료한 과정을 통해 한의학의 역할과 발전, 동시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는 처방임을 알게 되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보약처방이 많았고 침구술 같은 외과 치료가 경외 시 되었다는 것도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것 같다. 아마도 서양의학의 도입과 함께 변화되어 가던 과정도 한몫한 건 아닐까 싶다. 조선 시대 의학이면서 상당히 적극적인 치료법이었고, 오늘까지 계승된 것이 많다니 믿어볼 만 하다. 역사와 의료를 함께 들을 수 있어서 진지했고, 차근차근 풀어가는 그 설명에 믿음이 간다. 한의학은 자연과의 조화라는 말에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순간 신호를 보내는 몸이 그걸 증명하고 있으니 말이다.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듣는 재미도 있었지만, 환경이 인간을 병들어가게 하는 과정과 그 치료를 위한 자세를 배우게 하는 실용적인 책이다. 읽는 내내 진지했고 많이 배울 수 있었다.

 

사람에게 죽음에 이를 세 가지 경우가 있는데

이는 다 자초하는 것입니다.

잠들 때를 놓쳐 숙면의 시기를 놓치거나,

먹고 마시는 것을 조절하지 못하거나,

과로하거나 지나친 편안함에 젖는 것이

그것입니다.       - 『공자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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