팡쓰치의 첫사랑 낙원
린이한 지음, 허유영 옮김 / 비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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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로 이 책의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 한참을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무슨 말을 하더라도, 이 책의 느낌을 읽은 그대로의 느낌대로 표현한다는 건 어려울 것 같다. 공감한다는 말은 너무 과장된 것 같고, 이해한다는 말도 거짓말 같고... 그 어떤 말로도 위로나 이해가 될 수 없다는 걸 알게 됐다. 어쩌면 나 역시 남의 일로 치부하며 지나갔을, 혹여 내 자식에게 생길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못 하는 방관자였을지도 모르겠다. 누군가가 말하지 못하고 끌어안고 살아왔을 고통의 시간을 이렇게라도 듣게 된 건, 이제는 방관자(방관자 역시 가해자일지도 모를)로만 남아있어서는 안 된다는, 적극성을 가지게 된 계기로 남을 듯하다. 이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고하는 린이한의 유서였다.

 

빨간 글씨 : 왜 할 줄 모른다고 했을까? 왜 싫다고 하지 않았을까? 왜 안 된다고 하지 않았을까? 이제 와서야 이 모든 일이 그 첫 순간에 결정되었다는 걸 알았다. 억지로 욱여넣은 건 그인데 내가 죄송하다고 말한 그 순간에. (43~44페이지)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 친해지고, 영혼의 단짝이라고까지 불러도 좋을 두 아이, 팡쓰치와 류이팅. 어린 시절부터 함께해온 시간으로 쌓은 게 있다. '나'와 '너'를 동일시해도 괜찮을 만큼 하나의 존재처럼 보였다. 처음에는 이 둘의 관계나 마음이 여린 시절 뭘 모르고 가지는 절친의 과장된 의미인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시간이 점점 흐르고, 이 아이들의 관계 이상의 성장 모습이 보이면서 더 큰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 날 낯선 파출소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으로 이팅은 쓰치의 숨겨진 비밀을 알게 된다. 쓰치의 이야기가 비밀이 될 수밖에 없던 이유가 쓰치의 일기장으로 드러나면서, 이팅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일인지 생각한다.

 

이 소설은 쓰치의 이야기지만 이팅의 시선으로 읽어가게 되러데, 그게 독자의 시선과 같은 위치에 있는 듯하다. 쓰치의 일기를 발견한 이팅이 쓰치가 겪은 지난 5년의 세월을 재구성한다. 문학을 배우겠다며 찾아간 리궈화의 집. 쓰치와 이팅은 오직 여학을 배우려는 목적이었다. 문학 강사 리궈화를 믿고 학업을 목적으로 찾아간 곳에서 쓰치는 되돌릴 수 없는 성폭력의 시작을 경험한다. 리궈화는 처음부터 쓰치를 강간할 목적으로 손을 내민 거였다. 선생이란 이름을 더럽히는 일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람, 어린 소녀들의 순진한 마음을 세뇌하듯 문학의 문장들로 사랑을 착각하게 하는 위선자였다. 리궈화가 쓰치를 상습적으로 성폭행하면서 길들이는 동안, 쓰치는 자기 자신을 버리지 않는 법을 배워야 했다. 선생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하는 사람이 아니라, 선생을 사랑하면서 이 모든 행위가 사랑이라고 여겨야만 했던 거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 상황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사랑이 아니고서는 이 관계의 비정상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사랑했다. 리궈화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쓰치 자신이 선생님을 사랑한다고 믿었다.

 

"이건 선생님이 널 사랑하는 방식이야. 알아듣겠니? (중략) 넌 선생님을 좋아하고 선생님도 널 좋아해. 우린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았어. 이건 서로 좋아하는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상의 일이야. (중략) 넌 왜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니? 너무 많이 와버렸다고 나를 나무라도 좋아. 하지만 내 사랑을 원망할 수 있어? 너 자신의 아름다움을 원망할 수 있어? 게다가 며칠 있으면 스승의 날이잖아. 넌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스승의 날 선물이야." (90~91페이지)

 

미처 몰랐던 마음을 이제야 듣는 기분에 답답했다. 뭔가 잔뜩 오해해서 서먹해지고 더없이 친했던 사이가 낯설어지는 느낌이 드는 채로 멀어지는 관계가 되는 듯했는데, 뒤늦게 진실을 알게 되면서 생기는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들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일. 쓰치가 겪은 일을 그렇게밖에 바라볼 수 없었다. 내가 다 들어주지 못해서, 말하지 못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서 이런 상황까지 오게 한 건 아닐까 하는 죄스러운 마음. 그건 이원 언니가 느끼는 마음과 닮기도 했다. 쓰치의 전화가 그냥 안부 전화만은 아닐 터였는데, 쓰치가 망설이면서도 결국 꺼내지 못한 말이 무엇인지 좀 더 파헤쳐볼 생각을 못 했다는 게 아쉽고 안타깝고 미안해진다.

 

그 후 20여 년 동안 리궈화는 자신을 좋아하고 동경하는 여학생들이 세상에 널렸다는 걸 알았다. 성을 금기시하는 사회 분위기가 그에게는 최고의 방패였다. 여학생을 강간해도 세상은 그게 그녀의 잘못이라고 했다. 심지어 그녀 자신조차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죄책감 때문에 그녀는 그의 곁으로 되돌아왔다. 죄책감은 아주 오래된 순수 혈통의 양치기 개였다. (123페이지)

 

이런 일들은 왜 가능한 것일까. 오래전부터 계속되어온 유교적 환경이 그렇기도 하겠지만, 점점 더 개인주의로 변하는 세상도 한몫하는 듯하다. 게다가 입시 위주의 교육이 치열한 학습의 장으로 만들면서 리궈화 같이 선생이라는 이름의 대상에게 내 딸을 믿고 맡기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되기도 했을 테지. 리권화에게 여학생을 조달하던 그 관리자 역시 여자였는데, 나와 직접 관계없는, 나에게 피해가 없는 일이라고만 생각했던 걸까? 특히 이런 폭력은 쓰치의 이웃 첸이웨이와 결혼한 이원에게서도 비슷하게 확인된다. 이원은 남편에게 폭력을 당하고 한여름에도 목이 올라오는 긴 소매 옷을 입고 생활한다. 쓰치와 이원은 서로의 상황을 알아보지만 직접 얘기해본 적은 없다. 쓰치에게 무슨 일이 있구나 하면서도 캐묻지 못하는 이원, 이원이 맞고 사는 걸 알면서도 묻지 못하고 주변에 알리지도 못했던 쓰치. 무엇보다 궁금한 건 쓰치의 부모가 왜 나서지 못했나 하는 거다. (아마 이 책을 읽은 많은 독자가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내 딸에게 왜 성교육이 필요한지 알지 못하고 차단했으며, 딸의 변화와 심리를 조금 더 세심하게 들여다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좋은 학교로의 진학, 우등생, 학업이 최우선이라는 것만 확인하고 싶었겠지.

 

사실을 말하는 게 뭐가 그리 어렵다고,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다. 합의된 성관계가 아니며, 사랑도 아니며, 성폭행을 당했다고 말하지 않아서 생긴 일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다. 이팅이 처음 쓰치와 리궈화의 만남을 듣고 불륜이라고 여기면서 더는 듣지 않으려고 했던 것을 떠올려보면,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열세 살의 어린여자 아이가 무엇이든 터놓고 말할 유일한 상대라고 여긴 절친에게 들은 말은, 더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겠다는 결론에 이르렀을지도 모른다. 나를 가장 이해해주고 보듬어줄 거로 믿은 대상에게 들려온 말이 부정의 대답이었는데 뭐가 더 필요할까. 내 딸에게 성교육이 웬 말이냐고 여기는 쓰치의 엄마 역시 쓰치가 인생을 의논할 대상은 되지 못했던 거다. 그래서 쓰치는 자기가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그게 폭행의 대상을 사랑으로 만드는 거였다. 리궈화와의 시간이, 쓰치가 성폭행을 당하던 상황을 낙원으로 만들어야만 했다. 결국, 낙원으로 만드는 일에 실패하고 말았지만, 쓰치에게는 제일 나은 방법이었으리라.

 

월요일에는 이름이 '희(喜)'자로 시작하는 모텔에 그녀를 데려가고 화요일에는 이름이 '만(滿)'자로 시작하는 모텔에, 수요일에는 '금(金)'자로 시작하는 모텔에 그녀를 데리고 갔다. 희, 만, 금 모두 길한 글자였다. 책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녀를 송두리째 사로잡을 수 있었다. 문학이란 얼마나 좋은 것인가! (197~198페이지)

 

문학의 생명력은 가장 참담한 상황에서도 언어로 유머를 캐내는 데 있다. 그건 남들에게 떠벌이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자기 혼자 느끼는 즐거움이다. 문학은 쉰 살 아내와 열다섯 살 연인에게 똑같은 사랑시를 읊어줄 수 있는 것이다. (289페이지)

 

아이러니하게도 이 소설에서 쓰치에게 고통을 더하게 해준 것도 문학이고, 쓰치에게 고통을 덜어주던 것도 문학이다. 이원 언니와 같이 문학 작품들을 접하면서 문학의 즐거움이나 문학 작품 속 주인공들의 삶을 배우는 게 성장하는 모습이라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문학에서 발견하는 삶의 아이러니나 지혜 같은 것들. 아마 지금 문학을 읽는 우리에게도 비슷한 경험을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문학을 먹이로 리궈화는 손을 뻗었다. 이 어린 소녀에게 달콤한 쿠키를 입에 물려주듯이, 문학으로 미끼를 던지고 문학 작품 속 문장들로 그의 폭력을 사랑이라고 감싸며 들려주었다. 이원 언니 역시 문학 작품을 꾸준히 접했지만, 그 문학이 그녀의 인생을 구원하지는 못했다. 문학 작품은 그녀 옆에서 그냥 존재하고만 있었을 뿐이다. 쓰치와 이원에게 문학은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리궈화의 입에서 나오는 포장된 문장들로 쓰치는 무너져갔지만, 한편으로 쓰치는 문학으로 그 위기를 간신히 넘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기록. 쓰치는 일기를 썼다. 하루하루, 리궈화의 폭력을 기록했으며 그녀가 겪는 마음을 적었다. 문학이 가지는 힘의 양면이 그대로 드러난 부분이 아닐까 싶다.

 

오늘의 여성들이 마주하는 고통스러운 경험. 말하기 어려워서 더 쌓이는 비극들. 그 마음들이 문학으로 드러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저자의 말처럼, 이 세상에 문학이 있어서 다행이다. 쓰치에게는 그 문학이 달콤한 사탕발림이 되어 판단 오류를 일으키기도 했지만, 저자에게 문학은 세상의 폭력을 알리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 독자에게는 여성들이 겪는 비극을 마주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여전히 강단에 서 있는 리궈화 같은 사람에게, 형태가 없는 사회가 하나가 되어 협조하는 가해를 마주함으로써 우리가 기억해야만 하는 일을 남겼다. 편 가르기가 아니라, 어느 편에 서는 게 정의를 찾는 방법인지 계속 묻게 할 작품이다. 그 질문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잠재적 쓰치, 이원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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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끝나고 나는 더 좋아졌다
디제이 아오이 지음, 김윤경 옮김 / 놀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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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끝이 있다. 그게 사랑이라도 말이다. 사랑의 끝에 이별이 있거나, 사랑으로 함께하는 시간 계속되어 영원한 헤어짐으로 끝이 나거나. 사랑의 끝이 힘든 것은 전자이리라. 그것도 헤어짐을 통보 받은 처지에서는 더더욱. 내가 하는 사랑은 최선을 다했어도 이런 결말일 수밖에 없는 건가 하면서, 이런 내가 다른 사람에게 다시 사랑받을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에 떨거나. 무엇보다 이별이 이별에만 한정되는 게 아니라 일상 전체를 아우르는 분위기로 거듭나기도 한다는 것. 인생의 커다란 한 부분을 실패한 것만 같고, 무엇을 해도 안 될 것 같은 좌절감에 앞으로의 시간을 내다보지 못하고 현재의 절망만을 보는 상태로 계속되기도 하는 일이 무서운 거다. 이별은 아프고 힘든 일이지만, 인생의 중요한 시간을 포기해도 좋은, 나 자신의 행복을 보지 못하는 잘못을 저지르는 건 안 될 일이다. 그냥, 또 한 번의 사랑이 끝났을 뿐이다.

 

 

남남으로 돌아가는 게 이별이에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과거의 자신과 한 걸음 멀어질 수 있습니다. (57페이지)

 

이별은 일방적이어도 괜찮습니다. 상대를 설득시킬 필요가 없을뿐더러 경우에 따라서는 직접 만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요.

남아 있는 정을 싹둑 잘라버리고 비정해질 것. 그게 서로를 위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119페이지)

 

사랑이 끝나고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 누군가의 위로는 힘이 되기도 한다.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져, 같은 따뜻한 말들.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지금의 이별이 별것 아닌 것처럼 생각하게 하는 말들. 정말 주문처럼 다 잘 될 거라고 믿게 되는 말들. 그게 가장 필요한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아주 많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이별 후에 정작 필요한 말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것 같다. 이별 후 정말 들어야 할 말은 냉정하고 따끔한 말들, 착각 속에 허우적대다가 시간 낭비하지 못하게 현재의 모습을 보게 하는 말들, 내 인생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찾게 하는 말들이 필요했던 건 아닐까? 저자는 이별 후의 다양한 사례들을 들려주면서, 더욱 정확하고 분명한 말로 위로를 전한다. '아직 사랑이 끝나지 않은 건 아닐까?' 하면서 희망 고문에 시달리는 일, 상대가 건넨 달콤한 이별의 말에 또다시 허무하게 시간을 허비하는 일, 전 애인의 흔적을 따라다니며 사랑이 끝났음을 인정하지 않는 일을 그만두어야 함을 경고한다. 동시에 이별의 후유증으로 다음 연애가 두려워 연애 세포를 죽이는 사람들, 많은 사람을 만나고 있어도 외로움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람들, 이별 후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일상의 곳곳에서 전 애인을 떠올리는 사람들을 보듬는다. 울고 싶은데 참지 말라고, 좀 외로우면 어떠냐고, 당신을 불안하게 하는 연애에 그만 끌려다니고 이별을 선택한 건 아주 많이 잘한 일이라고. 당신은 너무 강한 사람이기에 이 모든 일을 건너왔다고. 그렇다면 우리가 맞이하는 이별은 무엇이 문제였을까? 더욱 현명하게 이별을 대했다면, 우리는 이별을 인생에서 통과하는 하나의 문으로만 여겨도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해서 일어나는 판단과 감정을 다시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다.

 

이미 경험했겠지만(곧 경험하겠지만) 사랑을 하면서 생기는 크고 작은 문제들로 이별은 찾아온다. 그때마다 제대로 된 답을 찾지 못하면, 우리는 똑같은 시행착오를 반복하면서 사랑으로 인한 불행과 이별을 반복한다. 저자의 말을 들어보면, 이미 끝난 사랑을 인정하지 못하거나, 그건 사랑이 아닌 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설픈 배려의 말을 사랑이라 착각하고, 상대의 표정에서 읽히는 무관심을 못 본 척하고, 이미 변해버린 사람을 붙잡고 있으려고 애쓰며, 아직은 사랑이라고 믿고 싶은 순간들을 놓기 싫어서. 의미 없는 희망 고문은 상대가 쳐놓은 그물일 때도 있지만, 자기 스스로 만들기도 하는 거 아닐까? 그럴 때마다 매번 자기 자신을 볼 타이밍을 놓친다. 끝난 마음에 미련 두지 않고 이별을 인정해야만 하는 건,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다. 상대를 사랑하느라 나를 보지 못한 시간을 이제라도 되찾아야 한다는 걸 저자의 따끔한 충고로 알게 된다.

 

아무리 듣기 좋게 늘어놓은들 밑바탕에 깔려 있는 뜻은 '더 이상 널 사랑하지 않아'입니다. 그럴듯한 포자에 마음을 뺏겨 진실을 보지 못해서는 안 돼요.

상대방의 행복을 위해 이별을 택하는 사람은 없어요. 이별이란 가슴 시릴 정도로 냉정한 거예요. 이별이 아름다운 추억이 되는 건 훨씬 더 나중의 일입니다. 지금은 아무 생각 말고 마음껏 우세요. 그래도 돼요. (73페이지)

 

이별 후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이별을 감당하는 정도가 다르다는 걸 알았다. 이 슬픔을 감당하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처럼 발을 동동 구르고,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만 같았는데 판단 오류였던 듯하다. 오히려 '무엇을 하지 않는' 시간이, 지나간 시간과 나의 감정들을 되돌려볼 기회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제야 확인한다. 그런 시간이 가져야만 이별은 깔끔하게 소화되고, 나 자신의 모습을 찾아주며, 다시 시작할 용기를 만든다. 그 시작이 또 다른 사랑이든 그 무엇이든.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뻔한 이별의 위로, 흔한 사랑에 관한 조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런 주제의 글을 처음 접한 것도 아니었고, 생소하게 다가오는 이야기도 아니었기에 그동안 익숙하게 보아왔던 사랑에 관한 많은 지침서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이 책의 문장 곳곳에서 발견하는 이성적인 한 마디가 마음에 들어온다. 따끔하게 가슴을 찌르기도 하고, 후회했던 순간을 떠올리게도 한다. 저자가 이야기에 비슷한 경험을 기억해내면서, 그때 미처 대처하지 못한 바보 같은 모습을 저장했다. 온갖 이유로 꺼냈던 말들, 들었던 말들이 결국은 '더는 너를 사랑하지 않아'라는 하나의 의미를 가리키고 있었는데, 그걸 모르고 지지부진 끌고 가려고 애썼던 어리석음을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다는 바람을 품게 한다. 나는, 우리는 행복해져야만 하는 사람들이니까. 물린 말이지만, 사랑이 끝났다고 해서 우리 인생이 끝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사랑의 가장 중요한 스킬은 사랑하는 법도 사랑받는 법도 아닌 이별하는 법입니다. 이별을 통해 살아하는 법과 사랑받는 법을 배우고 더 나은 사랑을 위해 나아갈 수 있으니까요.

잘 헤어질 수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어요. 사랑을 제대로 한 사람은 같은 눈물을 두 번 흘리지 않아요. 한번 이별을 결심했다면 확실히 혼자로 돌아오세요. (205페이지)

 

그러니까, 제목 그대로다. '사랑이 끝나고 나는 더 좋아졌다'라고 말할 수 있게, 사랑할 때의 나보다 (때로는 불안하게 보이는) 사랑이 끝난 후의 내가 더 성장해 있는, 사랑을 제대로 보는 법을 가르쳐주는 책이다. 사랑을 똑바로 보는 눈을 가졌다면, 이별 역시 현명하게 배우고 감당할 수 있다. 나답게 살아가는 법, 슬퍼할 가치도 없는 일에 혼자 틀어박혀 있지 않고 좋은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나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서툴렀던 사랑과 이별을 당당하게 맞이하는 법을 배우게 한다. 누군가 이별을 하고 있다면, 사랑이 힘들어서 고민하고 있다면, 다시 시작할 사랑에 두려워하고 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펼쳐 봐도 좋겠다. 사랑과 이별을 넘어서서, 인생 사는 법을 한 수 배우게 하는 책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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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ㅣ 문학동네 시인선 101
문태준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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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봄이 돌아오니 - 문태준

 

누군가 언덕에 올라 트럼펫을 길게 부네

사잇길은 달고 나른한 낮잠의 한군데로 들어갔다 나오네

멀리서 종소리가 바람에 실려오네

산속에서 신록이 수줍어하며 웃는 소리를 듣네

봄이 돌아오니 어디에고 산맥이 일어서네

흰 배의 제비는 처마에 날아들고

이웃의 목소리는 흥이 나고 커지네

사람들은 무엇이든 새로이 하려 하네

심지어 여러 갈래 진 나뭇가지도

양옥집 마당의 묵은 화분도

 

 

아까 낮에 몸을 좀 많이 움직였더니 너무 더워서 샤워를 하고 나왔는데, 문득 드는 생각이.

'아, 지금은 봄이잖아?!'

그렇잖아. 아직은 4월이고, 아직은 봄이고, 아직 반팔 보다는 긴팔이 자기 역할을 할 때잖아.

그런데도 한낮의 더위가 움직임을 불편하게 하기 시작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아니, 믿기 싫은 거다. 이 기온이 봄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만 같아서.

아무리 좋아하는 계절이 없어도, 마치 제자리인 것처럼 자기 자리를 찾아 돌아가는

사계절의 확실한 구분이 좋아서 견딜 수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그 구분은 희미해지는 것만 같다.

이제는 자기 지분을 넓히는 계절들, 내가 싫어하는 계절들 때문에 우울해진다.

 

문태준 시인의 시 구절처럼,

봄이 오는 소리는 제법 향긋하고 살랑거리고 괜한 흥이 날 것만 같은데.

현실에서 마주하는 봄은 너무 짧아서 아쉬우니 이 짧은 순간을 놓치지 말라는 경고처럼 들린다.

얇은 아우터를 걸어놓고 가만히 쳐다보다가,

'이걸 세탁해서 넣어두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참을 고민하다가 그냥 놔두었다.

한낮에는 제법 흘리는 땀 때문에 샤워까지 할 정도였지만,

답답해서 나가본 이 시간의 바깥 공기는 아직도 겨울과 봄 사이에 걸쳐 있는 것만 같다.

별것도 아닌데,

계절 하나를 잃어가는 것만 같아서 우울해지기도 하고,

다시 내년에 봄이라는 계절은 찾아오겠지만 올해 같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서글퍼지기도 하고,

내년에는 또 이 봄이 얼마나 짧아질까 벌써부터 걱정스러운 마음에 서운해지기도 하는, 그런 밤이다.

 

지금 이 봄이, 또 언제 있었냐는 듯 그렇게 훌쩍 지나가버리겠지만,

다시 돌아온 봄은 아직 진행중이어서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 같지만,

그 위로가 언제까지 힘을 발휘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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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4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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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다짐과 확신을 하는 게 살아가는 거라고 여기던 때가 있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이렇게 살아가야겠다, 하는 다짐을 하는 건 삶에 당연히 필요한 요소인 것 같았다. 짧은 인생이지만 경험으로 아는 확신들이 옆에서 그 다짐을 응원하며, 눈에 확연히 보이는 분명하고 좋은 길로 가는 것을 열어준다고 믿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살면서 겪고 알게 되는 것들로 그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있다는 믿음이 사라졌다. 어설프게 한 마디 더해보자면, 확신할 수 있는 건 우리가 나이 들어간다는 것뿐이다.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아는 것과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지 상상하는 것이 보태지는 정도가 전부라는 것을 알게 되는 거다. 지금 내가 아는 건 그 정도이다. 그러니 이 소설 속의 남자 다다시가 사는 방식이 처음에는 이해되지 않았다가도, 그의 일상을 몇 달 옆에서 지켜보면서 다른 생각이 비집고 들어오는 거다.

 

다다시는 이혼을 하고 오래되고 낡은 집을 얻어 이사를 온다. 차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 타고 다니던 차도 판다. 그가 구한 오래된 주택의 이곳저곳을 손보며 지금 할 수 있는, 해야만 하는 요소들에 충실할 뿐이다. 집주인 소노다 씨가 그 오래된 주택을 다다시에게 임대하면서 내건 조건은 하나뿐이다. 내부의 불편한 부분을 수리하거나 변경하는 건 괜찮지만 집의 겉모습만은 그대로 유지해달라는 것. 다다시는 소노다 씨의 요구에 어긋나지 않게 집의 수리를 이행한다.

 

나는 성격이 급한 편은 아니지만, 뭔가 빨리 처리해야 할 일 앞에서는 분명하고 빠른 결정을 하는 편이다. (물론 아닐 때도 분명 있지만...) 시골이나 자연의 정경 앞에서 시원하고 속이 탁 트인다는 감정의 발산을 하기도 하지만, 그런 환경이 나의 주거지가 되는 것은 또 원하지 않는다. 자연의 푸르름과 느긋함은 그저 내가 가진 일상을 한 번씩 벗어나고 싶을 때 만나고 싶은 공간이다. 그러니 굳이 주택을 이상형으로 삼아 주거지를 결정하는 다다시의 선택이 쉽게 이해되지는 않았다. 그는 무슨 생각으로 일상의 편리함을 버리고 여기저기 손 볼 곳이 많은 집을 선택했을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그가 소노다 씨의 오래된 주택으로 들어가 집의 수리를 하나씩 해가면서 찾아가는 안정된 공간의 모습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보이던, 연기가 집안으로 들어와 사용할 수 없었던 벽난로를 가나가 수리하던 그때, 무언가 삶의 방식이 찾아지는 기분이었다.

 

결혼생활을 유지하면서 만났던 불륜 상대 가나를, 다다시는 이혼 후에 우연히 다시 만난다. 처음부터 다시 연애의 감정으로 가나를 대한 것은 아니지만, 자연스럽고 익숙하게 가나와 친숙해진다. 그냥 연인 관계로만 본다면 가나와 다다시 사이가 재회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삶이라는 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아서, 선명한 감정 앞에서 선명하지 못한 태도로 일관할 수밖에 없는 게 있다. 가나는 아버지의 병시중을 해야 하고, 다다시는 가나의 환경에 어떤 제안도 쉽게 할 수 없다. 그런 가나가 다다시의 벽난로를 고쳐(?)준다. 연기가 굴뚝으로 좀 더 가깝게 빨려 들어가게 만들어주면서 벽난로 바닥에 벽돌을 몇 개 쌓는다. 집안으로 들어오던 연기는 벽돌 몇 개로 높이를 높여주니 마치 처음부터 그랬다는 것처럼 굴뚝으로 향해 피어오른다. 엉터리로 만든 벽난로에 안정되게 불을 피우는 일. 그건 벽돌 몇 개를 쌓음으로써 정상인 벽난로가 된 모습에서 가능해 보였다.

 

마치 우리 인생이, 가나가 경험한 기억을 토대로 쌓은 벽돌 몇 장으로 달라진 벽난로 같았다. 부족한 자리에 뭔가를 쌓으니 제자리를 찾는 느낌. 몰랐던 것을 하나씩 알아가는 기분. 다다시의 현재가 그랬다. 그는 알았을까? 그의 불륜을 아내가 알면서도 말하지 않다가 이혼 시점에 꺼내놓은 일, 그가 아내와 이혼하게 될 거라는 일, 오래된 주택에서 소노다 씨가 돌아올 때까지 몇 년은 충분히 살 수 있을 거로 생각했지만 그 시간이 너무 짧을 거라는 걸. 소소한 것 같지만, 마치 다 알 것 같지만, 처음 생각처럼 되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누군가를 만나고 결혼을 하고 그 생활을 유지하는 게 정상이라고 여기며 살아왔겠지만, 이제 그가 바라는 정상은 혼자만의 삶이다. 혼자여서 편한 오늘의 일상인 거다. 저녁에 근처 공원을 느긋하게 걷기도 하고, 고양이와 눈을 맞추며 인사하고 밥도 챙겨주고. 그는 이 소설 제목의 한 단어처럼 우아한 삶을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누군가의 일상에 끼어들기도 하고, 예정에 없던 집을 짓게 되기도 하는 일이 인생에 비집고 들어온다.

 

"오래된 걸 이것저것 손보는 게 즐겁거든.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정원도 업자를 부르면 되살아나고, 다다미도 이불도 손질하면 새것이 되고, 장지도 덧문도 마찬가지야. 부엌 공사도 그랬어. 어둡지, 간장 냄새 나지, 전체적으로 기름때가 묻어 있었지만, 물론 그건 그것대로 운치가 있었지만, 싹 고쳤더니 몰라보게 좋아졌어. 수명이 다해가던 게 되살아나는 게 뭐라 말할 수 없이 기쁜 거야." (85페이지)

 

그는 다시 마련할 공간을 어떻게 만들어갈까? 아마도 혼자여서 편한 삶을 유지하면서, 그와 관계된 사람들 틈에서 감정을 쏟아내며, 소노다 씨의 처음 만났던 주택처럼 늙어갈 것이다. 물론 그런 흐름은 나에게도 적용되겠지. 알 수 없는 일투성이로 때로는 여유롭게, 때로는 다급하게 오늘을 살아가고 있겠지. 분명하고 확신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인생에서, 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 그런 일상을 살아가고 있을 것만은 선명하다. 아무도 모르는 내일을 살아가는 게 우리여서, 그렇게 살면서 채워진 시간 속에서 어느 날 문득, 오래된 집 한 채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런 집을 하나 발견한다면, 그 오래된 집을 보고 다다시처럼 여기저기 손보면서 하나하나 바뀌는 집의 모습을 보는 즐거움을 만나게 될지도... 만약 그런 순간이 온다면 조금씩, 다시 고쳐가면서 그 공간에 머무르고 싶을 것 같다. 한 치 앞도 모를 내일을 사는 방법은, 그런 즐거움으로 오늘을 채워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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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어타운 ㅣ 베어타운 3부작 1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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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는 매우 자극적인 감정일 수 있다.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을 친구와 적, 우리와 그들, 선과 악으로 나누면 세상을 훨씬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고 훨씬 덜 무서워할 수 있다. 한 집단을 똘똘 뭉치게 하기에 가장 쉬운 방법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어렵다. 요구사항이 많다. 증오는 간단하다. (374페이지)

 

그다지 특별하지 않았다. 아니, 특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매일 뉴스에서 보던 이야기를 반복해서 듣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그리고 그 뉴스의 내용은 역시 특별하지 않았다. 우리 사는 주변의 이야기를 뉴스라는 보도로 다시 듣는 것뿐이었으니까. 프레드릭 배크만이 전하는 또 하나의 뉴스를 듣는 기분이었는데, 뭔가 이상하게, 묘하게 달랐다. 이게 프레드릭 배크만 식의 공감 능력일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의 출간작을 계속 읽어왔음에도 이런 느낌은 생소하다. 잔잔한 감동에 훈훈한 마무리가 여운으로 남는, 흐뭇한 미소를 짓게 하는 게 그동안 그의 작품을 만난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번 작품은 아프고 씁쓸한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게 우리 현실인 것만 같아서 서글프게 한다. 사건과 상황에 무력해지는 기분에 내가 내민 손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만 같아서 고개가 숙여졌다. 왜 우리는, 이런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걸까, 싶은 무의미한 질문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보도된 내용 그 이후, 마침표 다음의 이야기까지 듣는 것만 같아서 설명하기 힘든 뭉클함이 다가왔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고, 가해자의 목소리가 커서 피해자의 목소리는 힘을 잃고, 돈과 권력이 피해자의 숨을 죽이고, 가해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일상을 살아가는 일. 너무 흔하게 들어와서 새롭지도 않은 이 일이 이곳에서만큼은 다르게 들려온다. 작가가 전하는 문장의 힘이었던 걸까. 어떤 상황을 전하는 이야기인데, 그 사이사이에 작가의 읊조림 같은 문장들에 그들의 상황 속에 독자가 들어가 있는 느낌이다. 아주 가까이서 듣는 분위기다.

 

 

삼월 말의 어느 날 야밤에 한 십대 청소년이 쌍발 산탄총을 들고 숲속으로 들어가 누군가의 이마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이것은 어쩌다 그런 사건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11페이지)

 

의미심장하다. 하나의 사건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아주 자세하게 들려주겠다는 다짐이라도 하려는 듯해서 무거운 마음으로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베어타운, 그곳에서 일어난 사건이 어떻게 마무리되면서 총소리를 울리게 했는지 듣고 나면 우리 사는 세상을 한 번 더 예리한 눈길로 둘러보게 된다. 비극의 시작인 하키, 하키로 하나가 된 마을, 하키와 마을 구성원이 함께 만들어가는 이익의 산물들, 하나의 집단이 되어 얼마나 이기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 그대로 보여주는 것만 같은 이야기다.

 

베어타운 그곳의 힘이 되는 건 하키다. 케빈은 하키 유망주이기도 하고, 힘 좀 쓴다는 집단의 자녀이기도 하다. 마을 사람들은 하나가 되어 자기네 하키 팀이 이기기를 응원한다. 응원의 목소리에 답이라도 하듯 그들의 팀은 승리한다. 그리고 축배를 든다. 이겼으니 무조건 다 된다는, 무엇을 하더라도 용서가 된다는 무임승차 티켓이라도 얻은 걸까. 그날 밤, 축제가 한창인 것 같은 분위기를 즐기며 웬만한 일에는 눈감아 줄 수 있다고 한껏 아량을 품어주던 그 날. 하키 유망주 소년이 십대 소녀를 성폭행한다. 누군가는 그 장면을 목격했다. 이야기는 그 이후의 장면에 주목한다. 가해자의 행동, 피해자의 공포, 목격자의 침묵. 힘을 가진 이들이 다수의 목표를 위해서 피해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냐는 식의 해결을 위해 모두가 눈을 감고 피해자의 아픔을 모른 척한다. 내 아이의 미래를 위해 부모라는 이름으로 감싸 안으려고만 한다. 정작 무엇이 아이를 해치는 일이 되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잘못을 덮어주기만 하는 게 아이를 위한 일인 걸까? 당장 오늘의 안위가 아니라 좀 더 멀리 내다봐야 할 순간의 모습을 그리지 못하는 것이 그대로 보인다. 그런 일의 결과는 지나고 나서야 아는 법이니까.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그때(과거의 사건) 그렇게 넘어가면 안 되었다는 것을 알고 후회하는 일이 생기곤 한다. 이미 먼저 세상을 살아온 부모가, 어른이 해주어야 할 일을 망각하는 순간 아이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 채로 혼란을 품고 성장할 것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알지 못하는 감정을 배울 기회가 사라진 채로. 그러니까 이런 공감 능력.

 

가해자에게 성폭행은 몇 분이면 끝나는 행위다. 피해자에게는 그칠 줄 모르는 고통이다. (245페이지)

 

요즘 일어나는 미투운동의 기저에는 이런 감정의 고통이 자리한 것이다. 가해자에게는 지나간 일이고 기억하지 못 하는 일로 흘러갈지 몰라도, 피해자에게는 그 일이 일어났던 순간의 고통 속에서 멈춰 있는 시계를 보는 일일 것이다. 그 순간에 분명히 짚고 넘어가지 않는다면 가해자는 피해자가 잃은 것이 무엇인지 절대 알지 못한다.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들이 어떤 오늘을 보내고 있는지 모를 것이다.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감추고 누르고, 모른 척하는 일은 비겁하고 이기적인 일에 멈출 뿐이다. 피해자의 아버지가 평생을 일궈온 하키에 대한 애정이 자식의 고통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 어떤 것도 인간의 도리를 무시한 채로 이뤄질 수는 없는 일이기에...

 

인간이 서로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 토론을 벌이다보면 거의 항상 '인간의 본성'을 둘러싼 논란으로 귀결된다. 이것은 생물 선생님이 설명하기에도 쉽지 않은 주제다. 인간이라는 종족은 똘똘 뭉치고 서로 협력한 덕분에 살아남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강자가 약자의 희생을 딛고 번영을 구가함으로써 발전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디쯤에 선을 그어야 하는지 항상 의견이 분분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어디까지 이기적이어도 될 것인가. 얼마나 서로를 챙겨야 하는가. (391페이지)

 

많은 인물이 등장하지만, 그들 각자의 인생이 펼쳐지겠지만, 베어타운에서 벌어진 그 일을 누구나 기억해야만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켜야 할 것들, 간직해야 할 말들이 있는 것이다. 작가가 풀어내는 이야기의 흐름이 이번에는 다르게 다가오는 이유를 생각해 보니, 문장 하나하나가 아포리즘처럼 가슴에 와 닿아서다. (그렇다고 그의 전작들이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는 건 아니다. 유독 이번 작품이 더 크게 다가온다는 의미다.) 쇠락한 작은 마을이 버티기 위해, 조금이라도 나아가는 데 필요한 무언가가 있겠지만, 그 무언가가 마을 사람들이 하나가 되는 뭉침이겠지만, 적어도 불의 앞에서는 정의가 목소리를 내는 것이 제외되어서는 안 된다. 마을의 안위를 위해서라는 비겁한 변명이 차지할 자리는 없다.

 

특히나 이 소설이 매력적이었던 건, 결말이 의외였다는 거다. 나는 마지막에 피해자가 말했던, 단 하나의 총알만 필요하다고 말했던 부분에서 누군가의 죽음을 예상했다. 그렇지. 피해자와 가해자 둘 중 하나가 사라져야 끝나는 일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거다. 내가 많이 극단적이고 어리석었다는 생각이 들었던 순간이, 마야가 그 하나의 총알을 사용하던 목적을 알고 나서다. '아, 꼭 누군가 한 사람이 사라지지 않고서도 증오를 표현하고, 복수의 감각을 갖게 되고, 가해자를 벌할 수도 있는 거였는데...' 첫 페이지 첫 단락의 문장들이 담은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다. 누군가의 이마에 댄 방아쇠가 어떤 답을 제시하는지 이제야 알았다. 집단 속에서 사는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 피해자가 되어서도 정당한 목소리를 내가 어려울 때, 인간의 이기심을 누를만한 답을 찾고 싶어지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작가가 전하는 메시지가 너무 많아서 버거울지 몰라도, 적어도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하나도 버려서는 안 되는 태도이기에 의미가 있다. 프레드릭 배크만 식의 철학적 사유에 감동으로 뭉클해지는 순간을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더불어 인간다움이 뭔지 또 한 번 생각할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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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8-04-21 0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새 일어나는 미투운동이 떠오르는 소설이군요 마침 이런 소설을 쓰다니... 아니 예전이라고 이런 소설이 없었던 건 아니겠습니다 작은 마을이 하키로 더 알려지는 것보다 작은 마을에 함께 사는 피해자 한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게 좋을 텐데... 그런 결정을 하는 곳이 얼마나 될지... 피해자는 자꾸 피해만 보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피해자 마음을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프레드릭 배크만 소설을 다 읽어 보지 않았지만, 어쩐지 지금까지 나온 것하고 조금 다른 것도 같지만, 아주 다르지 않겠지요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


희선

구단씨 2018-04-23 00:13   좋아요 0 | URL
그러네요.
피해자는 계속 피해자라는 이름을 달게 되는 것 같아요. 그게 많이 안타깝고, 아픈 일이었어요.

프레드릭 배크만 소설을 저도 한두권 읽어봤는데요. 전작보다 이 작품이 훨씬 무게감 있고 좋던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