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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는 계속 읽는다 - F. 스콧 피츠제럴드와 <위대한 개츠비>, 그리고 고전을 읽는 새로운 방법
모린 코리건 지음, 진영인 옮김 / 책세상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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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하아, 영화가 아니라 원작부터 읽었어야 했다. 유감이지만, 나는 아직 《위대한 개츠비》를 읽지 않았다. 오랜 시간 읽고 싶은 도서 목록에 올려놓고도 선뜻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러다 아쉬운 대로 몇 년 전에 영화로 《위대한 개츠비》의 목마름을 대신 했다. 책을 읽지도 않고 오랜 시간 들어왔던 개츠비 이야기에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보는 눈요기까지, 뭐 이 정도면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웬걸, 이 책을 읽다 보니 하루라도 빨리 개츠비를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긴 거다. 도대체 한 작품, 한 작가를 어느 정도 좋아해야 이 정도의 열정을 뿜어낼 수 있는지 궁금해서다. 저자가 뿜어대는 개츠비 사랑에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잖나.

 

읽다 보니 개츠비가 전부는 아니었다. 한 작품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디까지 알 수 있는지 시험해보는 듯했다. 작품 속 배경에서 확인할 수 있는 시대상은 기본이고, 작품 속 인물들의 대사와 행동으로 사람을 읽는다. 그런 것을 넘어서서 작가의 모든 것을 파헤치는 기분이 들게 한다. 피츠제럴드에게 어떤 사람들이 있었는지, 작품 속 문장들은 현실 속 그와 어떤 교감을 나누는지, 그의 아내와 딸에게 어떤 삶을 허락했는지 하는 것들. 출간 당시에는 별로 드러나지 못했던 작품인데 왜 오랜 시간이 흘러 기다렸다는 듯이 개츠비 붐이 일었는지, 이 책을 쓰기까지 개츠비를 몇 번이나 정독했는지 하는 그림이 저절로 그려진다. 읽는 것에 머물 수 없는 저자의 마음을 한껏 듣는 재미는 《위대한 개츠비》를 쓴 피츠제럴드의 삶을 언급할 때다. 한 작품이 탄생하기 위해 글을 쓴 작가의 삶이 배제되지 않는다는 걸 알게 한다. 피츠제럴드의 삶, 가난과 가족과 글에 관한 이야기는 개츠비의 삶과 닮았다. 완벽하게는 아니어도 떼려야 뗄 수 없게 피츠제럴드는 개츠비에 자신을 투영한 듯하다.

 

데이지를 향한 개츠비의 사랑으로 비치기 쉬운 《위대한 개츠비》가 ‘계급을 다룬 미국의 소설 중 가장 위대’하다고 말하는 저자의 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보인 문장들의 해석 같은 부분은 읽을 때마다 고개를 절래 흔들게 한다. 애정이 넘쳐 매력이라 발견한 부분이기도 하겠지만, 문장 하나하나에 감정을 담은 것처럼 골라낸다. 어떻게 이게 가능하지? 라고 생각했는데, 부지런해야 덕후질이 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하는 순간이다. 연애도 부지런한 사람이 잘하는 것처럼, 책을 사랑하고 작가를 사랑하는 것 역시 그 부지런함과 호기심, 열정에서 비롯된다. 《위대한 개츠비》를 쉰 번도 넘게 읽었다는, 개츠비 사랑의 끝판왕으로 등극한 저자의 말은 이 책 한 권으로도 증명되고 남는다. 저자 스스로 그렇게 말하기도 했지만, 굳이 몇 번 읽었다고 말하지 않았더라도 이 책만으로 충분히 그 열정을 느낄 수가 있다. 참으로 덕후다운 모습이다. 《위대한 개츠비》를 읽는 것에서 끝내지 않은, 그의 모든 것을 궁금해하고 그걸 파헤치기 위해 전국 어디든 향했던 저자의 열정은 ‘나는 이렇게, 이 정도로 개츠비를, 피츠제럴드를 사랑한다오~’ 라고 외치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한 작품과 한 작가에서 머무르지 않고 곧 넓은 시선을 갖게 한다. 그건 이 책의 부제처럼 고전을 읽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으로 연결된다. 그저 책 한 권 읽는 것에서 끝내지 못할, 그 책에 대한 무한한 발견이 이어지는 책 읽기를 고전 읽는 방법으로 직접 보여준다.

 

피츠제럴드의 글쓰기(와 그의 인생)에 흐르는 위대한 주제는, 빠져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물 밖으로 머리를 계속 내밀고 있기 위해 노력하는 일의 고귀함이다. 피츠제럴드가 마지막으로 완성한 소설의 주인공 ‘딕 다이버’(이름은 비록 만화책에 나오는 바보 같지만)는 그의 작품이 무엇을 다루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그가 창조한 최고의 인물들은 들뜬 채로 인생이라는 물에 대책 없이 뛰어들고, 그다음엔 떠 있기 위해 싸워야 한다. 이야기의 결말에서 그들은 대부분 바닥에 완전히 잠기지는 않더라도, 밑으로 가라앉는다. 돈 문제로 인한 걱정, 그들을 집어삼키는 욕망, 과거의 무게 등이 물귀신처럼 그들을 아래로 잡아당긴다. (49~50페이지)

 

지극히 사적인 독서 양상을 보는 듯하지만, 그렇게 사적이지도 않은 것으로 들린다. 첫 페이지에서부터 보이는 저자의 행동이 귀엽다고 여겨질 정도다. 그때 꼭 그걸 보려고 그렇게 추운데도 기다려야 했어? 아, 질문이 어리석다. 불필요한 질문이다. 저자에게는 그게 당연한 일일 테니. 그때부터 눈치챘어야 했다. 개츠비 사랑을 마구 뿜어대는 저자의 발걸음은 그때 극장을 향하지 않고서는 참을 수 없었다는 것을, 그게 진리라는 것을. ^^ 그 열정으로 찾게 된 책과 자신의 삶 역시도 포함된다. 개츠비의 마지막 문장으로 비로소 한 사람의 인생을 제대로 본 것 같이 느꼈던 듯하다. 그건 ‘개츠비’라는 한 남자뿐만 아니라 그 작품 속 여러 인물들, 피츠제럴드, 그리고 개츠비를 읽는 독자를 포함해서 해당한다. 몇 초의 시간이라도 저마다 그 안에서 녹아든 자신의 모습과 인생을 반추하는 시간을 만날 것 같다.

 

“나는 아직도 충분히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더 열심히 보고 더 빈틈없이 읽고 싶기 때문에, 1년쯤의 시간이 흐르도록 내버려두고, 다시금 피할 수 없이 《개츠비》를 뽑아들게 될 것이다.” (376페이지)

 

아직 나는 그런 책을 만나지 못했다. 가끔 생각나면 한 번씩 다시 꺼내보는 책은 있지만, 저자처럼 오직 한 작품을 쉰 번도 넘게 읽을 만큼 애정을 줄 책이 나에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뭐, 평생 그런 책이 없어도 사는 데 지장 없겠지만, 저자의 열정을 보고 있노라니 살아가면서 그런 책 한 권쯤 나에게도 있었으면 싶다. 책을 좋아하고 계속 읽게 되겠지만, 그 안에서 이렇게 내 마음을 몽땅 퍼부어도 될 만한 한 권을 만난다는 것도 즐거울 것 같아서, 책을 더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다. 기다려본다. 언제가 될지 모를 그 순간을.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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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 스님의 행복 - 행복해지고 싶지만 길을 몰라 헤매는 당신에게
법륜 지음, 최승미 그림 / 나무의마음 / 201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읽는 내내, '나에게는 왜 그렇게 어려웠을까?' 하는 생각을 계속했다. 타인과 연결된 관계의 어려움이나 앞날의 걱정이 주는 공포, 내가 겪는 가족과의 갈등, 세상일의 많은 것이 누구에게나 어려웠을 거다. 그 모든 일 역시 내려놓음으로 달라질 것을 안다. 그 '내려놓음'의 다양한 의미와 형태도 잘 알겠는데, 한 번도 쉽지 않았다. 말로는 가능한데 마음이 따라가지 못하는 건 스님의 말씀처럼 욕심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가 바라는 것만큼 채워지지 않아서 더 무거워진다는 결론을 얻게 하는 책이다. 정말 가능할까? 매번 의심의 눈초리로 이런 글을 대하면서도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었다. 불가능하다는 대답을 듣고 싶지 않다는 바람으로.

 

3주마다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에 간다. 한번 가면 5~6시간을 검사와 진료로, 치료받고 기다리는 시간이 이어진다. 갈 때마다 지친다. 병원 가기 며칠 전부터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다.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부모한테 그걸 못하나,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겠지. 그 부모와 어떤 관계이냐 하는 게 문제다. 우리집의 가장은 엄마였고, 부모도 엄마였다. 우리 형제들은 한 번도 가장이고 부모였던 적이 없던, 존재 이유를 몰랐던 아버지에게 분노하며 자랐다. 이제 와 몸이 병들어 힘들어지니 가족들에게 뒤처리를 던져놓고 아버지 대우받으려 한다. 항상 화가 났다. 특히 남겨진 가족인 엄마와 나는, 오래된 집의 한겨울 웃풍에도 방문을 열어놓고 잠을 자야 할 정도의 열을 품고 산다. 그런 화를 끌어안고 매번 아버지를 병원에 모시고 가는 건 나다. 갈 때마다 생각한다. 왜 내가 해야 하지? 죽을 것처럼 하기 싫은데, 미칠 것 같은데... 웃긴 건, 이렇게 하는 것 말고는 이 상황의 답이 없다는 거다. 아무리 화가 나고 욕이 나와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니 계속 이렇게 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내 안의 화를 끌어안고 이 모든 게 끝날 때까지.

 

아버지와 나는, 병원 대기실에서도 누가 보면 일행인지 모를 정도로 떨어져 앉는다. 유독 대기 시간이 길었던 어제, 멀찍이 떨어져 앉은 아버지를 보니 꾸벅꾸벅 졸고 계시더라. 갑자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아버지의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는데 기분이 이상해졌다. 시한부로 죽어가는 몸, 제대로 걸을 수 없어 지팡이에 의지하고, 부실한 치아로 죽을 넘기고, 의사가 하라는 대로 하지 않으면서도 죽음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 가슴이 싸해졌다. 싸움도 복수도 되지 않을 상대를 앞에 놓고 지금 내가 무얼 하는 건가 싶었다. 순간, 미움과 분노로 가득 채운 지금 내 마음이 너무 불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대로 한번 웃어보지도 못하고 좋은 시간 흘려보내고 있다는 두려움까지. 변하지 않을 아버지의 모습과 이 상황에 나의 불행과 화가 겹쳐 보였다. 이대로라면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한순간도 행복해지지 않겠지. 내 안의 화가 사라질 날이 없겠지. 아니,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해도 이 화가 수그러들지 장담할 수 없을 듯하다. 그때는 또 그때의 분노와 후회가 나를 갉아먹을 것만 같다. 결국, 행복을 위해서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 이 순간의 마음을 바꿀 일만 남았다는 건가?

 

결국 모든 상처는 그 기억을 붙들고 있는 나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우리가 괴로운 것은 누가 상처를 줘서가 아니에요. 상처받을 일이 아닌데 상처받고, 그 상처를 내면에 품고 있다가 때때로 꺼내보면서 괴로워하기 때문입니다. (85페이지)

 

그때 자꾸만 생각나는 말. 작년에 만났던 신경과 선생님도 그랬고, 지난달에 만난 친구도 그랬다. 조금만 내려놓으라고. '내려놓으면 같은 문제가 재발하지 않지만, 현실회피는 재발한다'며 이제는 스님까지 내려놓으라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쉽지도 않기에 반복해서 듣는 말이다. 그 내려놓음이 누구에게나 같은 모양으로 적용되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렵다는 것일 테고. 어제 하루 내가 아버지를 지켜보면서 했던 생각을 떠올려보니, 조금은 알 것 같다. 풀리지 않은 상태로 계속 기다리기에는 내 인생이 너무 안쓰러워진다는 것을. 내가 내려놓은 것들로 내 위안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한 번에 이루어지지 않을 거다. 쉽지 않을 것도 안다. 그동안 많이 겪어봤으니까. 다만, 그 과정의 어려움이 조금씩 옅어지기를 바라면서 믿고 싶은 거다. 불가능이 아닌 가능이라는 말로 나를 채우고 싶어져서다. 가까이서 악다구니 써가며 싸울 때는 안 보이던 것이, 지금처럼 한 발 떨어져서 보니 다르게 보일 때가 있다. 이렇게라도 하나씩 배워가며 조금씩 내 안의 불행을 걷어내는 일. 그게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다. 걷어낸 불행의 자리에, 행복이 조금씩 채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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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 내가 쓴 글, 내가 다듬는 법
김정선 지음 / 유유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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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하지 않았는데 읽다 보니 재밌다. 저자의 전작 『동사의 맛』은 크게 관심도 없었기에 도서관에서 초반부를 읽다가 만 것을 보면, 이번 책이 내 눈에 들어올 만한 이유가 없었는데도 쉽게 잘 읽힌다. 문장을 쓸 때 자주 실수하는 것을 언급하는 것은 기본이고, 차근차근 설명하는 듯한 말투가 듣기 좋다. 가르치려 드는 것처럼 들리지 않아서 좋다는 거다. 이런 책이 처음 나온 것도 아니고, 저자가 하는 말을 처음 듣는 것도 아니어서 특별할 게 없는데도, 이런 이야기를 또다시 듣게 되는 이유는 그 실수를 반복해서 하는 나를 알고 있어서다. 특히 예시로 든 문장들이 너무 흔한 문장들이어서 그런 걸까. 첫 페이지를 여는 순간부터 계속 뜨끔거려 혼났다. 아, 이런 고질병. 저자의 말에 따르면 그건 익숙해서라는데, 틀린 말이 아니다. 내가 자주 쓰는 단어이고 익숙하게 사용하는 문장들이서, 그게 ‘이상’하다고 느낄 이유가 사라지는 거다. 이게 왜? 뭐가? 어디가 이상해? 이런 말이 부끄럽지만, 이상하다는 것을 알면서 무시할 때도 많았다. 나는 게으른 독자이기도 하지만, 게으른 리뷰어니까. ㅠㅠ 귀에 딱지가 앉게 듣는 말도 자주 까먹고, 몇 번을 들어도 ‘그런 말이 있었나?’ 싶게 집중해서 듣지 못할 때가 많고, 알아도 귀찮아서 손대지 않을 때도 있다. 저자는 문장을 손보는 여러 가지 이유와 방법을 말하고 있지만, 무엇보다 나에게 우선 필요한 건 게으름을 탈피하는 거다. 두 번 세 번, 그것도 부족하다면 열 번이라도 보고 무엇이 이상한지 계속 살펴보는 반복이 필요하다. 그래야 저자가 하는 말에 온전한 이해가 가능할 듯하다.

 

문제는 습관적으로 반복해서 쓰는 데 있다. 어떤 표현은 한번 쓰면 그 편리함에 중독되어 자꾸 쓰게 된다. (22페이지)

 

이십 년 넘게 남의 문장을 다듬어온 저자다. 문장을 다듬는 일에 법칙이나 원칙이 분명하진 않지만, 문장 안에 반복해서 등장하고 문장을 어색하게 만드는 표현은 주의해야 할 표현목록으로 만들어볼 수 있다고 한다. 그 목록이 바로 이 책이라고. 뭘 자꾸 더해서가 아니라, 내가 써놓은 문장에서 어색한 표현들을 발견하고, 그걸 빼거나 대체해서 깔끔한 문장을 만든다. ‘좋은 문장은 주로 빼기를 통해 만들어진다.(33페이지)’는 말을 오랫동안 들어왔다. 그 단어(문장)를 빼도 어색하게 들리지 않는다면 뺄 건 빼고 간결하게 만든다. ‘-적’, ‘-의’, ‘것’, ‘들’과 같은 말만 빼도 문장이 훨씬 좋아진다고, 필요 없는 요소를 가능하면 덜어내는 게 좋은 문장을 만드는 기본이라고 한다. (많이 들어봤쥬?) 아, 이렇게 다시 강조되는 말을 듣고 있자니 기본 중의 기본을 왜 자꾸 잊는 건지. 게다가 ‘있다’로 어색해지는 문장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 습관적으로 하는 말이 이렇게 눈을 가리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외국어에서 온 표현이라도 필요하다면 쓸 수 있지만, 한국어 표현을 어색하게 만들 때에는 조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외에도 문장을 쓸 때 특히 더 주의해야 할 동사와 명사 등을 언급하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좀 더 명확하고 잘 전달하게 한다.

 

이 책은 이렇더라, 하는 것보다 직접 펼쳐보고 자기 경험에 맞춰 골라내어 활용해도 좋겠다. 저자가 제시한 방법들에서 어디 하나 틀린 게 없는 듯하나, 자기가 고수하는 방식과 다를 수 있으니 굳이 강요하지는 않는다. 다만, 내가 경험한 것에 비춰보면 나 같은 경우 저자의 지적이 반복되어 들려와도 괜찮다는 거다. 내가 생각했던 것들, 알고 있는 것들을 이렇게 다시 들으며 한 번 더 따끔해지는 기분이 들어서다. 어색한 문장을 다듬는 방법 중간에 작가와 교정자 사이에 오가는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그들이 주고받는 메일에서 보게 되는 것도 교정 교열에 관한 내용이어서 볼만하다. 빨간 펜으로 그어지고 삭제되는 자리에 채워지는 문장들과 그 기준점을 살짝 엿볼 수도 있고,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감정적인 문제까지 생각해볼 수 있다.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어떤 책의 문장이 저자 혼자 만들어낸 것은 아님을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하고, 전문가의 교정으로 문장이 어떻게 변해 내 앞에 놓여있는지 알게 되는 부분도 있다. 새삼 몰랐던 것도 아닌데, 이렇게 비교해서 보니 더 확실하게 눈에 들어온다.

 

누군가에게는 그냥 한 번 읽고 끝낼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잊을 때마다 한 번씩 꺼내서 살펴보고 싶은 책이다. (‘나’라는 인간을 내가 아니까...) 앞에서 나의 게으름에 반복하는 실수를 언급한 것처럼, 몇 번씩 보고 또 보는 노력을 해야만 좋은 문장을 만들어낸다는 결론이 뻔히 보이므로, 그 방법밖에는 없으므로. 분명 내가 썼는데 이게 맞는 건지 어떤 건지도 모르겠고, 한국 사람이라 한국말을 쓰고 있는데 이게 어색한지 어떤지도 모르겠는 때 펼쳐보면 좋겠다. 물론, 한 번에 완벽하게 배우고 적용하면서 실수를 없앨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그게 안 된다면 별수 있나. 반복해서 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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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김밥을 못 싼다. 초등학교 소풍 때부터 도시락으로 김밥을 싸 간 적이 없다. 지금에야 드는 의문인데, 분명 유치원 때도 소풍을 갔고, 엄마도 같이 따라갔는데, 그때는 어떤 도시락을 싸갔던 걸까? 이상하게도 그때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 기억 속 소풍 도시락은 초등학교 때부터다. 그런 기억에서 엄마가 김밥을 싸주지 않은 일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슬픈 일이지만, 사실인데 어쩌랴. 가까이 사는 친구 엄마가 내 것 김밥까지 싸주시곤 했다. 중학교 때부터는 소풍 도시락을 거의 안 가지고 다녔고, 고등학교 때는 가방도 안 들고 소풍을 다녔으니 뭐, 도시락이 문제였겠나. 그런데도 유독 초등학교 소풍 도시락이 생각나는 건, 누구나 다 싸서 왔던 그 '김밥'이 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라는데 있다. 그 나이의 소풍 도시락에 김밥이 없다는 건 큰 슬픔이었고, 창피함이었고, 엄마를 원망할 만한 일이었던 거다. 지금에는 가까운 사람에게 '싸는 김에 우리 딸 것도 하나 싸줘.'라고 부탁할 수도 있는 일이고, 친구 엄마가 도시락을 싸줄 수도 있고, 무엇보다 김밥을 못 싼다는 게 무슨 큰일인가 싶지만, 그땐 그랬다. 지금은, 가끔 밥하기 귀찮다는 이유로 동네 분식점에서 김밥 두세 줄로 한 끼 때우는 엄마와 나를 떠올려보면 정말 별거 아닌 일인데 말이다. (여기서 살짝 투정을 더 부려보자면, 우리 엄마는 김밥도 못 싸지만, 떡볶이도 못 만들고, 카레도 못 한다. 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인데... ㅠㅠ) 나를 슬프게 했던 김밥이 이제는 그저 그런, 한 끼를 채우는 음식이 되어버렸다는 게 웃음 날 뿐.

 

 

 

 

 

 

 

 

 

<바나나 우유>저자 김주현의 기억 속, 세월 속 음식들도 그런 걸까. 어떤 간절한 순간을 떠올리게 하는 음식들이다. 좋아서 같이 먹고 싶었던, 따뜻해서 포근했던, 지금은 돌아갈 수 없어서 생각나는 맛. 오늘을 사는 모든 순간에, 그렇게 한 번씩 치고 올라오는 감정이 동시에 따라오는 음식이 있던 거다. 가족, 사랑, 일상, 여행. 삶을 채우는 어떤 테마를 떠올려도 따라오는 음식이 있다. 오늘의 절망을 목으로 넘기며 진한 한숨의 캬아~ 소리 내고 싶은 소주 한 잔, 너무 짧게 왔다 가는 벚꽃이 아쉬워 차로 마시는 봄날의 시간, 기어코 나오려고 하는 그 울음을 참아야만 했던 날 마시는 아포가토, 청춘의 사랑이 상큼하게 혀끝에 닿는 아이스티, 어려운 시절 최고의 음식이었던 탕수육과 비프가스, 늦은 밤 퇴근길 부모님이 품에 안고 왔을 뜨끈한 만두, 그리고 빨간 소시지 달걀말이. 아, 나도 잊을 수가 없다. 분홍 소시지...

 

나는 그걸 분홍 소시지라고 부르는데, 어렸을 적 항상 도시락 반찬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바랐던 음식이다. 지금이야 몇 천원이면 큰 거 하나 사놓고 몇 날 며칠을 먹을 수 있는 양인데, 그땐 그거 한 조각이 왜 그렇게 간절했는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아무 날에도 생각나지만, 특히 명절날 더 생각이 난다. 핑계 삼아 큰 거 하나 사두려고. 일 년에 두 번 명절에 전 부친다고 엄마가 장 볼 때, 나는 꼭 분홍 소시지 하나를 카트에 넣는다. 엄마는, 입안에서 달라붙고 밀가루 범벅이라 맛도 없는데 뭐하러 그걸 사냐고, 먹을 사람도 없다면서 잔소리를 한다. 그렇다고 안 살 나도 아닌지라, 내가 혼자 다 먹겠다며 기어코 하나 사서 명절 전 부칠 때 같이 부쳤다. 그러고 나서, 명절날 식구들이 모두 모여 식사하는데, 제부가 분홍 소시지를 엄청 맛있게, 많이 먹는 거였다. 엄마가 놀라 제부에게 물었다. “아무개야, 그 소시지가 그렇게 맛있냐?”, “어머니, 저 이거 학교 다닐 때 도시락 반찬으로 싸가고 싶었는데 못 했어요. 저희 형편이 어려웠거든요. 엄마가 이걸 도시락 반찬으로 싸주신 적이 거의 없어요. 너무 맛있네요. (쩝쩝~)” 와우,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분홍 소시지를 보고 나만 그런 기억이 있는 게 아니었던 거다. 내 눈은 찌릿~ 엄마를 한 번 향했고 엄마는 의외라는 듯 웃고 말았다. 그 후로 엄마는 명절이 되면 꼭 분홍 소시지 하나를 장바구니에 넣는다. 늙어서도 말 안 듣는 딸을 위해서가 아니라, 뭘 먹어도 예쁘기만 한 막내 사위를 위해서... 엄마의 예쁜 막내 사위가 좋아하는 분홍 소시지의 발견 내가 했거든?!

 

먹는 것에 관심 없어 하면서도 가끔 허기질 때가 있다. 나도 모르게 ‘배고파...’ 하고 혼잣말을 할 때, 그럴 때는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더라. 평소 먹던 양의 몇 배를 먹어도 배부름을 느낄 수가 없다. 늘 그렇듯,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그런 때는 배가 고픈 게 아니라 마음이 고픈 거다. 그 허기진 마음을 채울 수 있는 건 단순한 음식이 아니다. 유명 맛집의 소문난 음식도 아니다. 그때 그 순간, 내가 기억하는, 나를 데워줄 음식이다.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추억’이라 불러도 좋을 것들. 저자도 마찬가지였겠지. 웃고 울던 시절의 그리움에 음식을 부른다. 서글펐던 사랑이 끝나고도 어김없이 위로의 음식을 떠올린다. 뒤늦게 엄마가 좋아하는 음식을 알아채곤 미안함에 후회도 한다.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드냐고 눈물 나려고 할 때, 뜨거운 국물 한 모금에 오늘을 견뎌내기도 하는, 그런 일상. 특별할 건 없지만 어느 순간 특별해지고야 마는 마법을 일으킨다. 저자가 이야기를 시작하던 그때, 저자만의 특별함이 시작되었을 때, 공감을 일으키며 읽는 이들의 기억을 소환한다.

 

세월이 흘러서 뒤를 돌아보면,

아, 그때, 그 시각, 그 1초가 생각나.

그때 그 말을 할 걸, 그때 시원하게 화를 낼 걸, 그때 웃어줄걸…….

타이밍을 놓친 파스타는 형편없지. (111페이지)

 

2년 전에 읽었던 이 책을 다시 꺼내며 노란 표지와 바나나 우유를 지긋이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졌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와 사뭇 다른 느낌에 잠깐 당황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냥 흐르는 시간 속 맛있는 음식들로 다가와서 웃음 나고 재밌었고, 맛있는 음식을 떠올리며 눈과 입이 행복하기만 했다. 이번에 다시 만나는 이 글에서는 담담하지만 조금 더 깊어진 울림이 있더라. 지금 내 마음이 그때보다 더 고요해져서 그런지 왜인지... 그냥, 막연하게 떠올리는 음식이 아니라, 나에게도 순간순간 떠오르는 음식이 있다. 지금보다 시간이 더 흘러서 되돌아보면 오늘을 떠올리게 하는 또 다른 음식이 있을 것 같다. 시간이 지나고 지나서, 우리가 과거의 한 때를 떠올리게 되는 경우가 또 생길 텐데, 그 매개가 음식이라니 글이 더 맛있어진다.

 

작년에 접했던 어떤 글에서는, 응답하라 시리즈를 언급하면서 이런 말을 했었다. 왜 자꾸 과거로 돌아가는 이야기에 열광하느냐고.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맞다. 사람이 자꾸 뒤를 되돌아보기만 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는데, 이게 마냥 좋은 것은 아니구나.’ 싶어서 긴장했었다. 여전히 지나간 시간만 떠올리고 그리워한다면 좋을 건 없을 거다. 내일을 살기 위해 우선 앞을 봐야 하는 게 현실이니까.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어쩌면 오늘을 조금 더 버티게 하고, 어제의 추억으로 오늘이 웃는 날이 된다면 가끔은 이런 그리움을 불러오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여전히 앞을 보고 살아가고 달려야 하는 게 우리 삶이지만, 우리 추억 속에 이런 음식 하나 없다면 사는 게 너무 서늘하잖아. 맛있는 위로가 뭔지 모른 채로 살아가게 될 것 같다. 생각해보니, 그건 별로다. ^^ 저자를 위로해준 게 팔 할이 음식이었다는 게 나와는 좀 다르지만, 그 위로의 지분이 좀 다를 뿐이지 음식이 그 위로에 들어와 있는 건 마찬가지다. 지나간 사랑도, 울고 웃으며 묶여있는 가족도, 힘들어서 잘라내고 싶었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힘든 세 세상살이에서도, 음식이 불러오는 화해와 뜨끈함, 개운함, 쫀득함, 쌉싸래함이 있어서 다행이다. 삶을 아우르는 다양한 맛을 이렇게 알아간다...

 

아쉬워서 그리운 것들,

혹여 한번 다시 찾을 날이 있겠거니, 그렇게 그리워하며

사진 한 장 품고 사는 거. 심장에 그런 아쉽고 그리운 순간들을

사진 한 장처럼 품고 사는 거. 그게 꼭 바보 같기만 한 일은 아닌 듯하다. (248페이지)

 

노트를 펴고 먹고 싶은 목록을 하나씩 채우는 요즘이다. 얼마 전부터 치과 진료를 받고 있다. 이 치료가 다 끝나려면 빠르면 1년, 길게는 1년 반에서 2년 정도 걸릴 거라는 말에 ‘음, 그렇구나.’ 하며 단순하게 생각했는데, 막상 거의 음식을 먹지 못하는 생활이 이어지다 보니 평소에 좋아하지도 않는 삼겹살까지 먹고 싶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며칠 전에 엄마가 삼겹살 먹고 싶다고 할 때 못 이기는 척 먹으러 갈 것을. 엄마와 나는 식성이 달라서 같이 외식하기가 쉽지 않은데, 삼겹살도 그중 하나다. 안 먹는 게 아니라 못 먹는 상황이 되고 보니 엄마가 먹고 싶다던 음식부터 평소에 내가 좋아하지도 않던 음식들까지 떠오르곤 한다. 거기에 보태져 항상 맛있게 먹던 음식까지 덩달아 머릿속에서 춤을 춘다. 바삭한 튀김에 시원한 맥주를 한 잔 마셔야지. 절반쯤 익힌 스테이크도 먹고 싶은데. 엄마가 맛있게 담근 총각김치도 손으로 집어 먹어야겠고. 아주 진~한 초콜릿무스 케이크도 목록에 올렸다. 아, 김밥도 꼭 먹을 거다. 이번엔 사 먹지 않고 내가 직접 싸서 엄마에게도 줘야지. 하아, 슬프게도, 목록이 늘어날 때마다 배고픔도 커진다.

 

시간이 많이 흘러 오늘을 떠올릴 때, 나는 무슨 음식을 소환하고 있을까. 내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고, 웃음 나게 했던 음식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것 같은데, 꼭 그게 아니어도 괜찮을 것 같다. 그 시간을 불러오는 것만으로도 그 음식은 충분히 맛있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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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틸유아마인 ㅣ 언틸유아마인 시리즈
사만다 헤이즈 지음, 박미경 옮김 / 북플라자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가지지 못한 것에 더 마음 두기 마련이다. 번번이 실패할 때마다 내 몫이 아닌 건 아닐까 포기하고 싶다가도, ‘아직은’이라는 미련을 버리지 못해 계속 손을 뻗는다. 내 것이다, (언젠가는) 내 것이 될 거다, 간절히 바라는 게 이루어지지 않을 리 없다, 는 마음으로. 그게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 간다. 그러다 보면 인간으로 지녀야 할 이성이 점점 그 자리를 잃는 경우도 생긴다. 이성보다 내 안의 욕심이 감정을 휘두르며 판단을 잃는다. 이 소설 속의 범인처럼, 스스로 의사라도 되는 양 수술도 불사할지 모른다. 인간이 그런 마음과 자세를 갖는 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쉬울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이 여전히 남아 있다.

 

만삭의 임산부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범인은 잔인하게도 배를 가르고 아이를 꺼내려 했다. 무엇 때문에? 누가? 한 번, 두 번. 연쇄살인은 아닐 거로 생각하지만 알 수 없다. 수사관 로레인과 아담은 이 사건을 하나씩 파헤치기 시작한다.

쌍둥이 아들과 곧 태어날 딸을 돌봐줄 유모 구인광고를 낸 클라우디아. 그에 딱 맞는 유모 조가 고용된다. 클리우디아의 남편 제임스는 몇 달씩 바다에 나가 있는 해군이다. 곧 태어날 아기와 쌍둥이를 돌봐줄 이가 필요했다. 조는 그 일에 아주 적합했다. 아이들을 잘 돌봐주고 음식도 맛있게 한다. 거슬릴 게 없다. 하지만 낯선 이를 집안에 들인 클라우디아의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여러 번 실패를 거듭하고 이제야 품에 안게 될 아기다. 이번에는 꼭 이 아기를 만나볼 수 있기를 고대했다. 모든 건 곧 이루어질 거라 간절히 믿는 클라우디아는 불안하지만 조와 잘 지내며 아기가 태어날 날을 기다린다.

 

아이를 키우는 것 자체가 아니라, 내가 직접 낳은 아이를 통해 엄마가 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아니, 그보다 먼저, 아기를 갖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공식이 성립될 수 있나? 마트에서 물건 고르듯 손만 뻗으면 내 손에 들어오는 물건이 아니지 않나. 소설 속 누군가의 아이가 갖고 싶었다는 독백에, 반드시 아이를 갖게 될 거라는 믿음에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내가 아직 경험하지 못했지만,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된다는 게 얼마나 신성한 영역인지는 안다. 그런데도, 아이를 낳아보지 않은 나도 아는 걸 그 누군가는 자기의 욕심에 망각한 듯하다. 이런 끔찍한 범죄가 일어나고 마지막까지도 그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하는 걸 보고 있자니 분노가 인다. (마지막 에필로그의 심문 부분이 감정을 격하게 한다) 그릇된 판단이 가져온 건 누군가의 죽음뿐만 아니라, 엄마의 고귀한 영역까지 함부로 여기는 건 아닐까 싶은 안타까움까지 불러왔다.

 

이 소설은 범죄로 사건의 시작을 알리고, 여러 명의 주인공을 등장시키면서 각자의 숨겨진 사연을 조금씩 드러낸다. 그 과정에서 보이는 공통점은 엄마, 아기다. 클라우디아의 유산과 사산은 아기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얼마나 큰 위험을 안고 있는지 보게 한다. 그래서 만삭인 그녀의 민감함을 공감한다. 이번에는 제발, 내 아기가 무사히 세상을 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알 것 같아서다. 미혼이지만 조가 아이들을 대하는 마음 역시 평범하지 않다. 어떤 목적으로 클라우디아의 집에 들어갔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집의 쌍둥이를 대하는 태도나 그 목적이라 추측되는 클라우디아의 출산일을 기다리는 마음 역시 짐작된다. 아이를 원하는 마음을 그렇게 확인하게 된다. 거기에 예상 밖의 인물이 드러내는 엄마의 길은 세상 어디에서건 엄마일 수밖에 없는 여자를 떠올리게 한다. 수사관 로레인은 살인사건 해결을 위해 열심히 뛰지만, 그녀에게도 사생활이 있다. 십 대의 딸이 집을 나가겠다고, 결혼하겠다는 말에 혼란스럽다. 달래도 보고 협박 비슷한 것도 해보지만, 딸은 집을 나간다. 그녀 역시 수사관이기 전에 엄마였다. 사건을 추적할수록 그녀와 딸 사이의 문제도 점점 고조된다. 미혼의 만삭 임산부의 배를 가르고 아이를 꺼내려다 실패한 사건들은 클라우디아와 조, 로레인까지, 전혀 다른 입장의 사람들(여자, 엄마)을 한 지점으로 모은다. 이 사건이 단순한 살인사건으로 머물지 못하는 이유가 된다. 전혀 다른 엄마의 모습을, 동시에 엄마일 수밖에 없는 모습을 보여주는 매개가 된다.

 

그냥, 추리소설일 거로 생각했다. 맞다. 이 소설은 추리소설이다. 잔혹한 장면에 섬뜩해지고, 피가 난무하고 상상하기 어려운 살인이 그려진다. 그 잔인함에 속이 울렁거리기도 여러 번이다. 범인이 누굴까, 왜 미혼의 임산부만 골라 잔인하게 살해했을까, 아기에게 어떤 목적이기에 이런 잔인한 범죄를 저지르는 건가, 하는 추리의 맛도 있다. 무엇보다 여러 명의 등장인물을 서술하면서 이들이 한데 모이게 하는 지점과 그 이유가 무엇이 될까, 여러 가지가 궁금했다. 그 궁금증에 가독성은 배가 되고 한번 손에 들고 끝까지 읽었다. 그런데, 추리소설의 많은 부분을 흥미롭게 읽게 하면서도 저마다 자기 자리의 엄마를 떠올리게 하는 캐릭터들을 보고 있자니, 소설로만 대하기에는 감정이 조금 앞서게 되더라. 엄마가 되고 싶다고 해서 무조건 엄마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며, 엄마로 살아가는 고충이 로레인을 통해 현실적으로 그려지는 걸 보면서,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추리소설에서 이런 기분 맛보는 건 오랜만이다. 아기와 여자와 엄마의 모습을 한 자리에서 마주하기가 낯설면서도 경건해지는 기분이다. 여전히 이 소설이 내게 선사한 잔인함은 머릿속에 남아있지만, 그 잔인함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그 이면에 어떤 생각들이 있는지 읽어갈 수 있다.

 

화자인 ‘나’로 서술되는 이 소설은 한 챕터가 넘어갈 때마다 ‘나’가 누구인지 확인하면서 읽어야 한다. ‘나’는 클라우디아일 수도, 조일 수도 있다. 혹은 그 이상의 누구이거나... 소설의 제목처럼 ‘내 것’이 될 때까지 기다리는 뭔가를 유추하면서 읽게 된다. 그게 무엇이 될지 모르겠지만, 그걸 확인하기 위해 계속 페이지를 넘기게 되는 가독성을 선사한다. 끝까지 읽고 나서야 알 수 있는 결말에 조금 놀랍기도 하지만, 범인을 유추할 수 있는 단서는 곳곳에 있었다는 걸 간과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앞부분으로 잠깐 되감기를 해보기도 했다. ‘아, 여기서, 이 지점에서 좀 더 잘 봐두어야 했던 것을...’하는 아쉬움을 찾아낸다. 읽는 재미와 여운을 같이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시리즈의 시작을 이렇게 알렸으니, 아담과 로레인 부부의 다음 사건 해결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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