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틸유아마인 언틸유아마인 시리즈
사만다 헤이즈 지음, 박미경 옮김 / 북플라자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가지지 못한 것에 더 마음 두기 마련이다. 번번이 실패할 때마다 내 몫이 아닌 건 아닐까 포기하고 싶다가도, ‘아직은’이라는 미련을 버리지 못해 계속 손을 뻗는다. 내 것이다, (언젠가는) 내 것이 될 거다, 간절히 바라는 게 이루어지지 않을 리 없다, 는 마음으로. 그게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 간다. 그러다 보면 인간으로 지녀야 할 이성이 점점 그 자리를 잃는 경우도 생긴다. 이성보다 내 안의 욕심이 감정을 휘두르며 판단을 잃는다. 이 소설 속의 범인처럼, 스스로 의사라도 되는 양 수술도 불사할지 모른다. 인간이 그런 마음과 자세를 갖는 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쉬울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이 여전히 남아 있다.

 

만삭의 임산부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범인은 잔인하게도 배를 가르고 아이를 꺼내려 했다. 무엇 때문에? 누가? 한 번, 두 번. 연쇄살인은 아닐 거로 생각하지만 알 수 없다. 수사관 로레인과 아담은 이 사건을 하나씩 파헤치기 시작한다.

쌍둥이 아들과 곧 태어날 딸을 돌봐줄 유모 구인광고를 낸 클라우디아. 그에 딱 맞는 유모 조가 고용된다. 클리우디아의 남편 제임스는 몇 달씩 바다에 나가 있는 해군이다. 곧 태어날 아기와 쌍둥이를 돌봐줄 이가 필요했다. 조는 그 일에 아주 적합했다. 아이들을 잘 돌봐주고 음식도 맛있게 한다. 거슬릴 게 없다. 하지만 낯선 이를 집안에 들인 클라우디아의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여러 번 실패를 거듭하고 이제야 품에 안게 될 아기다. 이번에는 꼭 이 아기를 만나볼 수 있기를 고대했다. 모든 건 곧 이루어질 거라 간절히 믿는 클라우디아는 불안하지만 조와 잘 지내며 아기가 태어날 날을 기다린다.

 

아이를 키우는 것 자체가 아니라, 내가 직접 낳은 아이를 통해 엄마가 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아니, 그보다 먼저, 아기를 갖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공식이 성립될 수 있나? 마트에서 물건 고르듯 손만 뻗으면 내 손에 들어오는 물건이 아니지 않나. 소설 속 누군가의 아이가 갖고 싶었다는 독백에, 반드시 아이를 갖게 될 거라는 믿음에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내가 아직 경험하지 못했지만,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된다는 게 얼마나 신성한 영역인지는 안다. 그런데도, 아이를 낳아보지 않은 나도 아는 걸 그 누군가는 자기의 욕심에 망각한 듯하다. 이런 끔찍한 범죄가 일어나고 마지막까지도 그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하는 걸 보고 있자니 분노가 인다. (마지막 에필로그의 심문 부분이 감정을 격하게 한다) 그릇된 판단이 가져온 건 누군가의 죽음뿐만 아니라, 엄마의 고귀한 영역까지 함부로 여기는 건 아닐까 싶은 안타까움까지 불러왔다.

 

이 소설은 범죄로 사건의 시작을 알리고, 여러 명의 주인공을 등장시키면서 각자의 숨겨진 사연을 조금씩 드러낸다. 그 과정에서 보이는 공통점은 엄마, 아기다. 클라우디아의 유산과 사산은 아기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얼마나 큰 위험을 안고 있는지 보게 한다. 그래서 만삭인 그녀의 민감함을 공감한다. 이번에는 제발, 내 아기가 무사히 세상을 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알 것 같아서다. 미혼이지만 조가 아이들을 대하는 마음 역시 평범하지 않다. 어떤 목적으로 클라우디아의 집에 들어갔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집의 쌍둥이를 대하는 태도나 그 목적이라 추측되는 클라우디아의 출산일을 기다리는 마음 역시 짐작된다. 아이를 원하는 마음을 그렇게 확인하게 된다. 거기에 예상 밖의 인물이 드러내는 엄마의 길은 세상 어디에서건 엄마일 수밖에 없는 여자를 떠올리게 한다. 수사관 로레인은 살인사건 해결을 위해 열심히 뛰지만, 그녀에게도 사생활이 있다. 십 대의 딸이 집을 나가겠다고, 결혼하겠다는 말에 혼란스럽다. 달래도 보고 협박 비슷한 것도 해보지만, 딸은 집을 나간다. 그녀 역시 수사관이기 전에 엄마였다. 사건을 추적할수록 그녀와 딸 사이의 문제도 점점 고조된다. 미혼의 만삭 임산부의 배를 가르고 아이를 꺼내려다 실패한 사건들은 클라우디아와 조, 로레인까지, 전혀 다른 입장의 사람들(여자, 엄마)을 한 지점으로 모은다. 이 사건이 단순한 살인사건으로 머물지 못하는 이유가 된다. 전혀 다른 엄마의 모습을, 동시에 엄마일 수밖에 없는 모습을 보여주는 매개가 된다.

 

그냥, 추리소설일 거로 생각했다. 맞다. 이 소설은 추리소설이다. 잔혹한 장면에 섬뜩해지고, 피가 난무하고 상상하기 어려운 살인이 그려진다. 그 잔인함에 속이 울렁거리기도 여러 번이다. 범인이 누굴까, 왜 미혼의 임산부만 골라 잔인하게 살해했을까, 아기에게 어떤 목적이기에 이런 잔인한 범죄를 저지르는 건가, 하는 추리의 맛도 있다. 무엇보다 여러 명의 등장인물을 서술하면서 이들이 한데 모이게 하는 지점과 그 이유가 무엇이 될까, 여러 가지가 궁금했다. 그 궁금증에 가독성은 배가 되고 한번 손에 들고 끝까지 읽었다. 그런데, 추리소설의 많은 부분을 흥미롭게 읽게 하면서도 저마다 자기 자리의 엄마를 떠올리게 하는 캐릭터들을 보고 있자니, 소설로만 대하기에는 감정이 조금 앞서게 되더라. 엄마가 되고 싶다고 해서 무조건 엄마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며, 엄마로 살아가는 고충이 로레인을 통해 현실적으로 그려지는 걸 보면서,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추리소설에서 이런 기분 맛보는 건 오랜만이다. 아기와 여자와 엄마의 모습을 한 자리에서 마주하기가 낯설면서도 경건해지는 기분이다. 여전히 이 소설이 내게 선사한 잔인함은 머릿속에 남아있지만, 그 잔인함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그 이면에 어떤 생각들이 있는지 읽어갈 수 있다.

 

화자인 ‘나’로 서술되는 이 소설은 한 챕터가 넘어갈 때마다 ‘나’가 누구인지 확인하면서 읽어야 한다. ‘나’는 클라우디아일 수도, 조일 수도 있다. 혹은 그 이상의 누구이거나... 소설의 제목처럼 ‘내 것’이 될 때까지 기다리는 뭔가를 유추하면서 읽게 된다. 그게 무엇이 될지 모르겠지만, 그걸 확인하기 위해 계속 페이지를 넘기게 되는 가독성을 선사한다. 끝까지 읽고 나서야 알 수 있는 결말에 조금 놀랍기도 하지만, 범인을 유추할 수 있는 단서는 곳곳에 있었다는 걸 간과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앞부분으로 잠깐 되감기를 해보기도 했다. ‘아, 여기서, 이 지점에서 좀 더 잘 봐두어야 했던 것을...’하는 아쉬움을 찾아낸다. 읽는 재미와 여운을 같이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시리즈의 시작을 이렇게 알렸으니, 아담과 로레인 부부의 다음 사건 해결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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