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과의사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6-1 리졸리 & 아일스 시리즈 1
테스 게리첸 지음, 박아람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7월
평점 :
품절



말복도, 입추도 지났는데, 너무 덥다. 늘 그렇듯, 읽고 싶은 책 쌓아두어도 선뜻 손이 가지 않는 계절이다. 게다가 깜냥도 안 되면서 몇 가지 일을 한꺼번에 벌여놓으니, 멀티가 안 되는 나라는 인간은 숨이 막힌다. 그래도 야금야금 책을 한 권씩 사고, 참새방앗간 들르듯 도서관에 가서 책도 좀 빌려오고, 그러다 다 못 읽고 반납하는 건 습관이 되어버렸고.


이 책을 읽게 된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해야 할 일을 쌓아두고 미적거리면서 시간만 보내던 중, 어차피 할 일도 안 하고 이렇게 시간 보내야 한다면 읽고 싶은 책이라도 읽자는 해야 할 일 현명하게 미루기(?)’를 떠올렸다. 그럼 지금 어떤 책을 읽고 싶은지 생각하다가, 역시 더운 여름에는 이야기 속에 빠져들게 하면서 심장 쫄깃하게 만드는 추리소설이 최고라는 생각은 당연했다. 구관이 명관이라고, 최근작보다 오래전에 보관함에 담아두었던 목록을 뒤지고 또 뒤지다가, 그 유명한 테스 게리첸의 외과의사를 고민 없이 선택했다. 책값은 저렴한데, 절판이네. 도서관에 비치된 책이기에 쓰레빠 끌고 어슬렁거리며 또 도서관에 입성하여 이 책을 찾았는데. 오마낫! 이 책 상태가 영 거시기하다. 그래도 일단 왔으니 빌려오긴 했지만, 며칠째 쌓아둔 책 사이에서 또 잊혀가고 반납일이 다 되어간다. 안 되겠구나 싶어서 그냥 반납하려는 마음을 먹는 순간, 물감 님의 페이퍼에서 다시 언급된 것을 보고 발걸음을 돌렸다. 지금이 아니면, 나라는 인간은 이 책을 다시 읽게 되지 않겠구나 싶은 생각에 기어코 읽고야 말았다.




여성 연쇄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한밤중에 여자 혼자 사는 집에 침입한 범인, 앤드루 캐프라는 피해자를 강간하고 배를 갈라 자궁을 꺼내 간다. 4명의 여성을 잔혹하게 살해하고 다섯 번째 희생자가 될뻔했던 캐서린 코델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한다. 연쇄살인은 끝났지만, 이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인 캐서린의 공포는 끝나지 않았다. 2년의 세월 동안 세상에 벽을 세우고, 집안에 갇혀 살다시피 한 그녀가 이제 좀 숨을 쉬려나 싶은 순간, 3년 만에 다시 앤드루 캐프라가 저질렀던 연쇄살인이 시작된다. 분명 앤드루 캐프라는 죽었다. 그럼 그때의 사건을 똑같이 재현하는 이 살인마는 누구인가? 이번에도 똑같다. 피해자들은 목에 깊은 상처로 피를 흘리고, 배가 갈라있으며 자궁이 사라졌다. 날카로운 수술 솜씨, 해부학적 지식이 풍부해 보이는 이 살인마는 어느 순간 외과의사라고 불린다.


뭐 단순한 살인마는 아니라는 게 피해자들의 처참한 모습으로 이미 밝혀졌다. 보스톤 경찰청의 강력반 형사 토마스 무어와 제인 리즐리 형사가 이 사건의 추적을 시작하는데,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지난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 캐서린 코델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고 막막할 때 원점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는 건은 당연지사. 게다가 그때의 사건을 재현하는 이 살인마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것 역시 앤드루 캐프라는 파악하는 것이겠지. 그렇게 추적하다가 보니, 어느 순간 범인의 근처에 다다르게 되고 오래전 사건부터의 또 다른 진실이 펼쳐지게 된다.


전직 의사인 작가가 어련히 알아서 잘 썼겠느냐 마는, 의학적인 지식 없이도 의학적인 장면들을 흥미롭게 읽게 된다. 추리소설을 읽는 재미도 놓치지 않는다. 아마 많은 독자가 읽으면서 저절로 상상하고 범인을 추리하게 될 거다. 캐서린 코델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많은 사건과 그녀 주변의 사람들을 의심하는 것부터, 범인이 다음 행보로 어떤 짓을 저지를지 예측하는 긴장감까지. 나 역시 많은 사람을 의심했다. 세상에는 안 그럴 것처럼 평범하게 생겨서 또라이 짓을 하는 인간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니 사람의 외모가 풍기는 이미지에 갇히면 안 된다고 스스로 세뇌하면서 살고 있지만(이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 그러면서도 선뜻 이미지가 주는 호감에 빠져들기도 한다.


, 정신 차려. 섬세하게, 날카롭게, 모든 것을 의심하면서 보란 말이야. 그래서 집중하고 의심했다. 캐서린 옆의 가장 친한 동료이자 그녀에게 끊임없이 호감을 보이던 피터 팰코. 그 정도면 호감이 아니라 집착에 가까워 보이던데? 아내를 잃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던 토마스 무어도 의심된다. 점잖아 보이고, 동료 여자 형사를 무시하는 다른 형사들과 다르게 그녀를 존중하는 모습조차 그대로 볼 수만은 없었다. 토마스 무어와 파트너가 된 제인 리즐리 형사 역시 매의 눈으로 봤다. 그녀는 살면서 쌓아온 성차별의 역사를 가진 인물이기에, 세상에 대한 증오나 뭐 예쁜 여자에 대한 혐오 같은 뭐 이상한 개념이 머릿속에 쌓여 혹시 이런 살인을 저지른 건 아닐까 싶은? (상상이 너무 나갔나?)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을 범인으로 의심할 때마다, 중간에 한 번씩 등장하는 범인의 독백은 이런 의심을 더욱 짙게 했다. 화자인 로 시작하는 범인의 이야기는 도대체 가 누구인지 알 수 없어서 더 답답하기도 했다. 너무 쉽게 의심되는 인물은 아닐 것 같은데, 상황이 흘러갈 때마다 너무 쉽게 의심되는 인물을 다시 소환하게 되고. 그러다가 소설의 중반 이후로 넘어가면서 이 독백의 는 누구인지 점점 범위가 좁혀온다. 특히 캐서린이 죽어가는 환자를 살리며 위급한 순간에 완벽하게 해내는 수술 실력은, 범인이 수술 도구로 잔인하게 여자를 모습과 대조적이다. 같은 도구로 누구는 사람을 살리고 누구는 사람을 죽이네? 작가의 전문성이 발휘되는 장면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전직 의사인 작가가 표현할 수 있는 최대의 장점이면서, 그 안에서 생활하지 않으면 모를 분위기를 일반 독자에게 전달하기도 하고, 사람을 살리는 일과 사람을 죽이는 일이 같을 수도 있다는 묘한 대비를 뿜어낸다.


잔인한 살인 사건과 그 범인 추격하는 과정이 추리소설을 읽는 긴장감을 놓치지 않게 하면서, 성폭행당한 여성이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감당하고 있는지 그 감정을 섬세하게 녹여낸다. (성폭행당하고 신고하지 못하는 그 어려운 마음 같은 거, 사건 이후로 무서워서 문밖에 나가는 일을 포기하는 거 등등) 보이지 않는 인간의 잔인성 역시 줄곧 의심하게 될 것 같다. 착하고 성실하고 모범적인 학생이면서 조용하고 얌전했다고 말하는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로, 누구도 범인을 함부로 예측할 수 없는 게, 어디 살인 사건에서만 알 수 있는 일일까.


 


그나저나 진짜 많은 사람이 읽긴 했나 보다. 도서관에서 책을 찾는데, 나는 설마 이 책일 줄 몰랐다. 여기저기 테이프가 붙어 있고, 테두리는 누렇고 어둡게 때가 껴있다. 정말 오랫동안 인기 있는 인기도서였겠구나 싶었다. 사람들의 손때로 누런 종이가 부풀어 올라 있고, 쩍벌이는 기본이다. 그래, 인기 있는 책의 운명이겠지. 근데 정말 이해가 안 되는 건, 책 읽는데 왜 틈새마다 뭐가 그리 묻어 있고 숨어 있냐? 페이지 중간중간에 이물질이 떡이 되어 있고, 갑자기 틈새에서 뭐가 막 떨어진다. , 진짜. 너무 더러워서 빌려올까 말까 몇 초쯤 고민하긴 했다만, 읽고 싶은 유혹이 이기고야 말았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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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추천 #리졸리아일스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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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3-08-18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용은 다 잊어버렸지만 킹왕짱 재밌었다는 강한 인상은 남아있습니다 ㅋㅋㅋ
무더위에 아주 그만인 작품이지요!

구단씨 2023-08-20 22:58   좋아요 1 | URL
몰입도는 좋더라고요.
같은 도구로 대조적인 행동을 하는 캐서린과 범인의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