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였을 때
민카 켄트 지음, 공보경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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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나 내가 나이길 바라며, 그저 동물적인 욕구나 충족된다고 삶에 만족하지는 않습니다. 나라는 정체성은 오랜 세월 동안 나에 의해 형성되며, 비록 그 결과가 다소 마음에 들지 않는 면이 있더라도 내가 오랜 동안 소중히 가꿔 온 만큼 내가 사랑하고 또 내가 책임을 지는 대상인 것입니다.

브리엔은 몇 달 전 괴한에게 습격을 당했습니다. 이상한 건 그 일이 있은 후 주변의 모든 이들이 자신에게서 떠났으며, 머리를 다친 탓인지 몇몇 기억이 분명치 못하다는 점입니다. 그녀는 호화로운 저택에 살지만 사고 후 그 큰 집에 혼자 살기 힘들다는 이유로 젠틀한 의사인 나이얼을 세입자로 들입니다.

나이얼은 나무랄 데 없는 매너와 인성, 훌륭한 직업을 가진 남성인으로 브리엔 눈에 보이는데, 이해가 안 되는 건 그가 부인 케이트와 별거 중이라는 사실입니다(이렇게나 훌륭한 남자인데, 어떤 여자가 감히... 같은 생각이죠). 브리엔은 차츰 세입자인 그에 대해 깊이 알아가지만, 또 하나 이상한 점은 그가 처음에 알던 나이얼에 대한 이런저런 사항이 알고 보니 사실과 많이 다르다는 겁니다(p55에 "이 사람이 그 얘길 했던가"라며 고민하는 모습 나옵니다). 하긴 이 역시 브리엔 자신이 사고의 충격으로부터 채 회복을 못한 탓일 수 있습니다. 주변에서 모두 자신이 성치 못하다고 하니, 브리엔 자신이 매사 조심하여 판단하고 행동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p11에는 수혈을 통해 낯선 이의 피가 내게 흐르는 느낌이라는 브리엔의 말이 나옵니다(이게 1부 말미의 어떤 사건에 복선 구실을 하죠). 작품은 크게 3부로 나뉘었는데 1부는 브리엔, 2부는 나이얼, 3부는 두 사람의 시점이 교차 서술됩니다. 음.... 우리 독자들은 1부 내내 1인칭 시점에서 이어지는 브리엔의 말을 조심스레 따라갑니다만, 브리엔 본인도 뭔가 확신이 없고, 이 여성이 스스로 그리 지각(perceive)한다는 것일 뿐 진상은 전혀 다른 곳에 있지 않나 하는 의심을 조금씩 품게 됩니다.

브리엔은 그저 사고 후유증 때문에 고민하는 게 아닙니다. 우연히 그는 자신과 이름, 신분 사항, 심지어 외모까지도 똑같은 여성을 웹상에서 보았는데, 자신의 많은 지인, 친척들마저 그녀의 소셜 미디어 계정에 연결하고 있는 걸 보고 경악합니다. 도대체 누가 나를 사칭하고 다니는 걸까? 그것도 하필 자신이 사고를 당한 후 취약, 무기력한 상태에 놓인 후에 말입니다. 정신과는 아니고 종양학 전공이지만 의사인 세입자 나이얼에게 도움을 청할까 생각도 해 보지만 조심스럽습니다.

이런 힘든 상황일수록 누구에게건 친구가 필요합니다. 브리엔이 1인칭 시점에서 이야기하는 부분에선 유독 친구의 필요성을 강조하는데 예를 들면 p27의 "내가 괴한에게 습격당한 후 네 친구들은 내 인생에서 사라져 버렸다." 라든가, p66의 버려졌다 운운하는 대목, p81에서 (세입자이자 이제는 유일한 친구인) 나이얼마저 잃고 싶지 않다고 하는 부분 등이 있습니다. 나이얼과 식당에서 근사한 한 끼를 먹는 대목(p85)에서 전에 친했던 앰버를 만나는 대목도 그렇죠. 참고로 저는 여기서 이 앰버라는 친구가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을까 예상했는데 그렇지는 않고, 뒤에 가면 마리솔이라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여 그 몫을 대신(?) 하더군요. 조금 맥거핀 같아 보였습니다.

p105에서 그녀는 다시 "나이얼은 가장 친한 친구"라며 의존하는 마음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진상이 다 밝혀진 p282에서는 "내가 가장 힘든 순간에 왜 모든 친구들이 나를 버렸는지"를 알아내게 됩니다만 사실 독자들은 여기쯤에서는 별반 궁금함을 품지 않게 됩니다. 바로 그 몇십 페이지 앞에서 누가 진상을 다 이야기했기 때문이며, 눈치 빠른 독자라면 이미 더 앞에서 다 알아챌 만도 했습니다. p154에서 "나에게 친구는 있어요?"라고 그녀가 말하는데 이 대목도 마찬가지입니다.

힘들 때 꼭 남의 흉을 보며 뒷담화를 일삼는 이들이 있죠. 여기서도 브리엔은 이웃인(아마도) 두 아줌마를 의식하며 괴로워합니다(p32).
p19에선 "내가 괴물이 아님"을 분명히하고 싶다고도 하는데 독자가 보기에도 왜 일이 이 지경까지 왔을지가 의아하죠.

브리엔은 이 사고가 아니었더라도 가뜩이나 취약한 상태에 놓여 있었음이 p56에 나옵니다. 그녀의 생모가 어렸을 때 부모(즉 브리엔의 조부모)와 불화하고 집을 나간 후 완전히 떨어져 산 거죠. 조부모의 가정이 매우 윤택했으므로 브리엔은 별 불편을 겪지는 않았으나 생모가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이 큰 상처가 아닐 수는 없었을 텝니다. 뭐랄까, 다친 사람이 더 자주 다치는 경향처럼.

브리엔의 조부모가 했다는 말, "졸부는 요란하고 거부는 조용하다."에서 어느 정도 집안 분위기가 짐작됩니다. p96에서 "아직 외조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 헐지 않았다"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서 우리는 뭔가 이분이 자신만의 환각 속에 사는 게 아닌가 의심하게 됩니다. 일단은 말이죠.(대충 이런 말이 나오면, 이 장르의 관습상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이 소설에는 여러 번 레거시 미디어의 명칭이 등장해서 문화 코드를 환기합니다. p58의 "ESPN 하이라이트나 보며 곯아떨어지는...", p79의 "데이트라인을 마치 노부부처럼 시청하는..." p168의 "NPR 채널에서 클래식락을 들었다"는 부분 등이 그렇습니다. p58의 저 문장은 그래서 그런 남자하고는 엮이지 말아야 한다는 뜻인데 문득 엠스플 베이스볼 투나잇을 보며 잠드는 저하고 비슷하다 싶어서 뜨끔해지기도 했습니다. p161에는 "찌그러진 기아차Kia"라는 말이 나오는데 물론 우리 한국의 그 자동차 메이커가 만든 상품을 가리킵니다. 기아차라고 하면 한국 독자로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텐데 이런 대목에서조차 고유명사라고 영어를 병기한 출판사의 태도에 웃음이 나왔습니다. 물론 꼼꼼하고 일관된 편집 원칙이라는 점에서 말입니다.

브리엔은 점잖고 조신한 여성인데 작품 중에서는 거친 말이 자주 등장해서 약간은 당황스러웠습니다(물론 후반부로 갈수록 그녀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지만). 예를 들면 p67의 "싸가지 없는 것들에게는 사과 따윈 하지 않는다."라든가, p75의 "돼먹지않은 개새x" 같은 게 그렇습니다. 이 둘은 "인간의 탈을 쓴 악마(p290)"를 향한 게 아니라서 이상하죠(물론 놈한테라면 상관 없습니다만). p267에서는 회계사(진짜 고맙고 일 잘하는 사람ㅋ)와의 통화 후 비로소 모든 걸 알게 되어 "그 개자식이 내 재산을 털었다."고 합니다만 이건 뭐 당연한 반응이겠고요.

(이하 스포일러가 있으므로 아직 안 읽으신 분들은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스포일러라고는 했으나 2부 시작부터 벌써 나이얼이 자신의 정체와 의도를 모두 독자 앞에 밝히기 때문에, 이후에는 마치 "재능있는 리플리씨"가 어떻게 법의 추적을 피하는지 구경하는 느낌으로 이 스릴러를 읽게 됩니다. 3부 끝무렵에는 나이얼이 본인 입으로 "내가 되고 싶었던 모습처럼(p303)"이란 말을 하기도 하죠. 그는 거의 평생 좀도둑질과 사기, 자기 합리화로 점철된 삶을 살았는데 마지막에 만만히 봤던 브리엔에게 정신적으로 치명타를 맞습니다. 근본이 잘못된 인간이기는 하나 꽤나 치밀한 편이었던 그가 마지막에 실책을 연달아 저지르는 건 아마 이 타격이 큰 영향을 주지 않았나 싶습니다.

나이얼, 아니 소설 후반부에 셰인 넛센이라고 본명이 밝혀지는 범죄자는 여튼 본인 딴에는 꽤나 유능하다며 자부심을 갖고 살아왔습니다. 이 자가 어떻게 브리엔을 알게 되었는가. 그에게는 계모이자 인생의 사표였던 소냐라는 여인이 있었는데, 어렸을 때부터 이 계모는 고생고생하며 피 한 방울 안 섞인 셰인을 키웠습니다. 이 점에서 아 소냐라는 이름의 그녀나 그 아들 셰인이나 근본이 나쁘지는 않은 사람들이구나 하고 잠시 착각도 했습니다만, 나중에 브리엔이 "그 수많은 편지 중 너(셰인)에 대한 언급은 한 번도 없었다"며, 일종의 세뇌, 가스라이팅 대상으로 셰인을 갖고 놀았다는 것, 혹은 세상에 자신의 복제품 하나를 내놓는 걸로 보람을 삼았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사만다는 어렸을 때부터 셰인이 동료로 삼은 여성인데 셰인은 내내 그녀에 대해 애정이 아니라 "충성심"을 확인하며 만족합니다. 물론 사만다는 충성심과 애정을 동시에 품었겠습니다만 후자는 셰인에게 큰 의미가 없었을 텝니다. 그렇다고 셰인이 (나중에 사만다가 "깨달은" 대로) 그녀를 철저히 이용만 한 건 아니지 싶고, 적절한 보상이랄까 대접은 해 줄 생각이었던 듯합니다.

반면 무고한 피해자이기만 한 브리엔에게는 나중에 "죽일" 생각까지 품었는데, 이 역시 계모 소냐의 가스라이팅이 성공적으로 먹힌 결과입니다. p177에 "꿈을 이루는 녀석"이라는 평가가 나오는데 이것도 마찬가지죠. p186, p172에 "잘못된 일을 바로잡는다"며 셰인은 다짐을 거듭하거나 합리화를 시도 중인데 역시 계모에게 세뇌된 결과입니다. p153에서 셰인은 브리엔에게 "장모님은 교과서처럼 꼬장꼬장하며 자기도취 성향이 강하다"고 하는데 이걸 보아 그의 계모가 비정상이었음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던 듯합니다.

이런 장르는 독자들이 익숙한 분야인데 p128에선 대프니 듀모리에가 직접 언급(오마쥬)되며, 그 장편(<레베카>)의 배경인 만달레이 별장과 관계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p210에 랭곤크랩이 언급되기도 합니다. p338에서야 이 소설의 전체 주제이다시피한 "가스라이팅"이란 단어가 나옵니다. p373에는 윌리엄 윌키 코린스의 장편 제목이기도 한 "월장석"이 언급되네요.

p245에서 브리엔은 "수 개월 동안 살아 오다 왜 지금 정신병원에 나를 보낸" 나이얼이 이상하다며 의사를 설득하는데 이 점은 독자들도 이상하게 생각했던 대목이며, 작게 봐서는 나이엘의 계획이, 좀 크게 보면 소설의 구성이 다소 치밀하지 못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제게는 저 말이 작가의 솔직한 고백처럼도 들렸습니다.

p306을 보면 브리엔이 본명을 알아내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친구 마리솔에게 말하는데 미국 사법제도가 이처럼 허술한 면이 있나 싶기도 했습니다. 범죄자 특정이야 필요하지만 우리 같으면 경찰이 충분히 수사에 나설 만한 사안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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