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대왕과 친인척 1 조선의 왕실 3
지두환 지음 / 역사문화 / 200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기 19주차, 또 21기 2주차 이렇게 두 번에 걸쳐 지두환 국민대 교수의 저작을 리뷰한 적 있습니다. "대왕"이라는 호칭은 예컨대 "대행"처럼, 전임 왕에게 그 당대에 의례적으로 붙이는 호칭으로 볼 수도 있으나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고 특히 다른 저작에서의 숙종처럼 지두환 교수 개인의 평가가 어느 정도 깃든 표현으로 보입니다. 


정몽주는 태조 이성계보다 세 살이 더 많은 나이였습니다. 포은이 끝내 새 왕조의 창업에 대해 비협조적인 태도를 유지하자 이방원은 그를 숙청할 것을 결심하는데, 이성계는 끝까지 그에 대한 일종의 존중, 외경감을 갖고 있던 터라 이런 극단적인 처리 방식에 대해 내심 불편히 여기지 않았을까 추측됩니다.


이방원은 생전에 과단성 있는 결단으로 여러 거물들, 혹은 정치적 비중이 큰 인물들을 제거했는데, 이를테면 이방번, 방석 형제와 정도전을 없앤 건 신덕왕후 강씨가 죽고 나서의 일입니다. 또 민무구, 무질 형제(자신의 처남)를 제거한 건 그 부친이자 자신의 장인이었던 거물급 신료 민제가 자연사한 후였습니다. 방원은 살아생전 자신의 친형인 방간을, 난까지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살려 두고 대접도 섭섭지 않게 헸으나, 방원의 아들 세종은 방간의 아들 맹종(자신에게는 사촌이 되는)을 방간의 사후에 처형했습니다. 이처럼 이 부자의 정적 제거 방식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권력은 본래 비정한 것이므로 이런 숙청은 안정된 국가 운영과 시스템 정착을 위해 불가피한 면이 있었고, 실제로도 효과가 좋았다고 냉정하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다소 놀라운 건 정몽주를 사후 추증한 이가 태종이라는 건데 이는 아직 고려의 잔재가 곳곳에 남아 있었음을 감안하면 대단히 관대한 조치였습니다. 더군다나 태종은 포은의 죽음에 직접 책임이 있었음을 감안하면.. 또 이것 말고도 이방원은 자신이 처단한 정도전에 대해서도 저런 추증까지는 아니어도 미안한 마음을 공개적으로 표방한 것으로 알려졌죠. 정도전이 공식적으로 복권된 건 고종 때에서나 가능했지만 말이죠. 


창업자 이성계의 가장 친한 벗이 무학대사였습니다. 이를 감안하면, 교과서에서 조선 3대 국가정책 중 하나로 "숭유억불"이 꼽히는 게 다소 의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태종, 또 그 아들 세종 모두 불교를 존중한 군주였으며 태종은 특히 아버지의 친우이자 스승처럼 무학을 대접했다고 전합니다. 이 책에서도 "무학대사가 입적한 후에야" 본격적인 억불 정책이 시행되었다는 취지입니다. 또 재상이자 방원의 최측근이었던 하륜 역시 불교 측과 친분이 두터운 인사였습니다. 


조사의는 드라마 <용의 눈물> 같은 걸 보면 이성계에게 찾아와 적극적으로 군사 정변을 같은 걸 꼬드긴 걸로 나오지만 역사가들은 오히려 이성계가 조사의를 적극 활용하여 일종의 쿠데타를 시도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드라마에서 묘사되는 각종 사정, 예를 들면 명 성조 영락제가 방원에게 개인적 호감을 뚜렷이 표시했다거나 여진이 깊숙이 개입했다가 마지막에 발을 뺀 동향 등은 재미를 위한 과장이 있으니 가려 가며 볼 일입니다. 또 드라마를 보면 명에서 책봉이 내려오자 "제놈들이 뭔데 조선의 왕을 건방지게...!" 운운하지만 실제로는 어림도 없지 않았겠습니까? 조사의는 드라마 등을 보면 막연하게 신덕왕후의 친족으로 가리켜지는데, 실제로는 조사의의 장인의 처제가 신덕왕후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