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3년, 미국 랠리에 올라타라
양연정 지음 / 쌤앤파커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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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경제 변수는 서로 긴밀히 얽혀 돌아가기 때문에 함께 관측하지 않으면 그 정확한 원인과 효과를 파악하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이 책은 주로 트럼프 시대 어떤 종목을 눈여겨 보고 투자 포트폴리오에 편입해 둘 지 대강의 지침을 제공하는 게 목적이지만, 어떤 프레이밍이랄까 선입견에 갇혀 빤한 사실, 팩트를 못 보고 지나치지 말라는 선의의 권유, 혹은 충고도 담습니다. 물론 저자의 제안이나 의견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일지는 독자의 몫입니다.

작년 세계인들을 충격 속에 몰아 넣은 두 가지 격변의 이벤트는 영국의 소위 브렉시트 레퍼렌덤과 미국 대통령 선거였습니다. 두 정치적 고비랄까 큼직한 절차는 첫째 주류 언론 기관의 예상을 빗나갔고, 둘째 결과가 확정된 후에도 (언론과 세계인 다수의 기대에 맞게) 반대자들의 격렬한 항의 표시가 있었으나(영국에서 재투표 청원, 미국에서 이른바 "Not my president") 큰 줄기가 변하지 않고 그 나름의 흐름을 찾아가는 것, 이 두 점에서 비슷합니다. 저자는 특히 두 사건 모두, 이른바 "조용한 상당수(다수까지는 아니라도)"가 묵묵히, 그러나 매우 강한 모멘텀을 줘 가며 대세를 이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게 일시적으로 경솔한, 무지한 일부 팩션이 사고를 친 게 아니라, 그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절실히 대변하는 추세라는 뜻에 가깝습니다. 일시적인 변동 사항이라면 교란이 걷어지고 다시 정상으로 회귀하길 기다리면 충분한데, 그게 아니라 이 자체가 하나의 뉴 노멀 트렌드라면 생각을 달리해 볼 필요가 있겠죠. 특히 투자는 개인의 소신이나 취향을 떠나 살벌한 돈 문제가 달린 이슈니만큼 더 냉정히 현실을 직시해야 하겠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자가 비교적 길게, "트럼프 측에서 파악한 상황" 내지는 "트럼프 쪽에 유리하긴 하나 어느 정도는 팩트에 가까운 사항"을 들려 주는 건 의미가 있습니다. 순전히 투자의 전망과 향방을 가늠하려는 독자라면, 객관적 현황을 이해하기 위해 두 쪽 모두에서 뭐라고 하는지 들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때로는 설레설레 고개를 젓다가도, 때로는 그건 미처 몰랐으나 들어 보니 그게 맞겠다 싶은 주장, 정보 전달이 제법 피곤할 만큼 책 지면을 가득 채웠습니다.

우선 제가 그 당시에 각각 관련 서평 쓸 때도 말했지만, "돈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속설의 힘이, 실제로 두 거대 이벤트가 종료한 후 주식시장에서 드러났습니다. 경제적 번영과 호황에 대한 기대감은, 두 시장의 대세가 모두 "이거 잘된 거임"으로 판정을 내렸고, 그런 반응이 당일 부근의 일시적 변덕으로 그치지도 않은 채 지금까지 거의 이어가는 중입니다. 유럽 통합이라는 대의명분, 소수자 포용과 관용의 미합중국이라는 모토가 아무리 소중해도, 그래서 저런 현상들을 아무리 개탄하는 관측자의 입장이라도, 적어도 왜 시장이 이런 반응을 대뜸 보이고 그 체질을 이어가는지는 좀 생각을 해 보고 뭔가 설명을 내놓아야 합니다. 이론이 현실을 귀납할 수 있어야지, 현실이 이론에 꿰어맞춰져 왜곡되어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영미 양국에서 불평불만이 일상인 비뚤어진 저소득층이 브렉시트 찬성, 트럼프 지지층의 주류를 이룬다는 분석에 대해서도 저자는 과장되었음을 지적합니다. 아무리 최근에 소득양극화 추세가 심해졌더라도 이런 선진국들에서 그만큼이나 특정 계층이 늘어났을 리 없고, 위에 쓴 것처럼 증시 참여자의 기대와 성향이 그만큼이나 호의적 반응을 보인 것과 앞뒤가 안 맞다는 뜻이죠. 고학력자와 고소득자 상당수는, 우호적이지 않은 미디어의 프레이밍과 독려에도 불구하고 트럼프를 찍었다는 얘기밖에 안 됩니다.

이 책은 또한 소수인종 상당수가 놀랍게도 트럼프를 지지했다는 점도 잘 요약해서 제시합니다. 이런 뉴스는 대선 캠페인 기간 중에도 시청자들에게 전달은 되었습니다만, "이런 별난 이들이 다 있다"는 기조와 함께 보도되었기에 역시 큰 인상을 주지 못했죠. 허나 이 역시 뉴스가 채 캐치 못한, 도도한 저류의 일종이었음이 결국 판명되었습니다. 트럼프나 그들의 말을 들어 보면, "법을 지킨 이민자, 소수 인종들, 따라서 합법적 체류권을 얻어 내고 미국에서 경제활동을 이어가는 이들은, 싸잡아 불법이민자로 몰리기 싫다"는 뜻에서 그런 성향을 표현했다고 합니다. 또, 추방대상이 된 이들도 영원히 미국 땅에 다시 발을 들이지 말라는 게 아니라, 일단 나간 후 다시 법절차를 밟아 들어오라는 정책의 선의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도 하네요.

물론 겉으로 표방한 말이 실제로 얼마나 당사자들의 편의를 배려하며 실천될지는 의문이긴 합니다. 저자는 "이런 정서는 우리가 조선족, 혹은 남아시아 출신 노동자에 대해 갖는 태도와 별반 다를바도 없다"고 하지만, 제노포비아는 그것이 우리 안의 것이건 바깥의 현상이건 대단히 우려스러운 경향입니다. 또한 저자는, 트럼프가 갓 취임한 현재 각종 경제지표는 대단히 양호하며, 트럼프는 호조건의 미국을 물려받은 만큼, 또 그가 지닌 각별한 사업상의 수완을 고려하면 앞으로 미국의 경제현황은 순풍에 돛 단 모습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이 논의의 단서로부터 본격 "트럼프 랠리에 올라타라"는 책의 본론이 전개됩니다만, 저 개인적으로는 그 역시 전임자 오바마가 8년 동안 국가를 잘 핸들링한 유산, 업적임이 반증되는 것 아닌가, 이런 생각도 해 봤습니다.

자본은 트럼프에 대해 호의적이고, 진보 좌파 성향의 각종 세력은 트럼프를 혐오하는 구도인가? 후자는 몰라도 전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월가만 해도 큰손 투자가 상당수는 트럼프의 노선에 대해 공개 반대를 표명했고, 시장 당국 역시 주로 트럼프 쪽에서 꺼내든 개혁방안을 대부분 거부하고 힐러리 클린턴 지지를 선언한 바 있습니다. 저자는 이를 두고 "타성에 젖은 월스트릿이 자기들에게 익숙한 클린턴식 처방만 옹호한 것"이라며 개혁 거부 세력으로 분류하는 쪽입니다. 이 논리라면 트럼프야말로 적폐를 청산하는(ㅋ) 개혁 주도 진영이죠. 또, 책 초반에 자세히 설명해 주듯, 팀 쿡이라든가, 베조스라든가, 그 외 실리콘 밸리의 첨단 산업 CEO들은 여러 이유에서 힐러리 클린턴 지지를 일찌감치 내세웠습니다. 이런 불리한 요소만 용케 맥락화하면, 도대체 지금 생각해도 사방이 지뢰밭이었던 트럼프가 선거에 이길 가망성은 전혀 없어 보입니다. 게다가, 지배적인 예측은 자기 실현력 효과 때문에라도 그대로 현실로 이어지기 일쑤인데도요.

오바마가 막 취임하고 나서 혼란을 수습하고 전국을 다독이던 무렵, 소위 "환율 전쟁" 현상이 양국 사이에 벌어졌음은 다들 기억할 겁니다. 이때 쑹홍빙의 그 유명한(?) 베스트셀러도 출간되어 큰 반향을 불렀고, 세계의 기축 통화 지위를 나꿔채어 일약 패권국으로 도약하려는 중국측의 움직임이 활발했습니다. 서로 돈 찍어내기 경쟁을 벌이는 통에 결국 세계 경제는 유동성 위기만큼은 벗어났던 셈인데, 저자는 지금은 이와는 반대 현상이 물꼬를 텄음을 지적합니다. 우선 미국 달러가 추세적 강세입니다. 미국의 패권이 흔들린다는 시각이 지배적일 때 다들 금 사 모은다고 야단이었던 것 기억하십니까? 아파트 단지나 시장 골목 같은 데서 좌판과 텐트를 세우고 금 매집하던 이들도 많았죠. 지금은 오간 데 없습니다. 그 와중에서도 세계적으로 인민폐에 대한 관심이 어떤 뚜렷한 흐름을 이루지는 않았다는 기억이네요.

달러는 우리가 지금 매일 뉴스를 보듯 연일 강세입니다. 트럼프는 중국에 대해 여전히 "환율을 조작해(자국 통화 가치를 떨어뜨려) 수출에 유리한 여건을 만들려 든다"며 반드시 위안화가치를 절상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습니다. 헌데 저자는 "위안화가치 절상이야말로 중국이 원하는 바"라면서, 이제는 싸구려 통화로 외연만 확장할 단계가 아니라 진정한 기축 통화의 위신을 얻어야 하기 때문에 (책에도 나오지만 이미 작년 9월에 SDR 편입이 이뤄졌습니다) 이제는 정책 방향을 그리 틀 시점이라는 겁니다. 트럼프가 이를 몰라서 헛발질을 하는 게 아니라, 자국 내 지지들을 겨냥해 "뭔가 하고 있음(어차피 그리될 것)"을 강조, 홍보하려는 정치적 제스처란 뜻이겠죠. 저자가 하고자 하는 말은, 이 사람이 결코 바보가 아니며, 충분히 주판알을 튀긴 후 가망 있는 쪽에 과감히 베팅하는 실리주의적 도박사라는 점에서 신뢰를 보낼 만하다, 뭐 이런 쪽이겠습니다. 이 책은 대체로 올해 2월까지의 최신 사정을 책에 잘 담고 있어서 편하게 읽힙니다만(업데이트가 안 된 책이라면 독자가 아는 최신 사정과 충돌이 잦아서 진도가 느릴 수 있습니다), 오바마케어를 대체한 소위 "트럼프케어"의 법안 철회(정치적 실패와 좌절)까지는 커버가 미흡하긴 합니다.

몇 년 전부터 "지금 중국 주식에 투자하면 십 년 후 강남아파트..." 같은 주장을 하는 책들이 여럿 나왔습니다. 이 말을 실천에 옮긴 이들도 꽤 되기에, 꼭 상관관계가 입증되었다고는 볼 수 없으나 코스피에서 빠져나간 개인 자금도 꽤 많습니다(이른바 개인 엑소더스). 이 책은 그에 일종의 카운터 아규먼트를 제기하며, "여튼 분산투자는 어느 경우에나 현명한 선택"임을 다시 환기, 꼭 중국에 투자한 이들이라고 해서 미국 증시에 눈을 감을 이유는 없다며, 트럼프에 대한 괜한 정서적 거부감을 떨치고 어차피 다시 랠리를 이룰 분위기인 판에 개운하게 올라타라는 조언을 합니다. 앞에서 "트럼프는 운이 좋다"라든가, 어차피 실리주의자들이기에 팀 쿡이건 베조스건 내내 트럼프와 대립각을 세울 이유는 없고, 옐런과 트럼프 역시 내심 계산하는 지점과 시선이 같을 뿐 아니라, (자기 당도 제대로 못 장악한다는 일각의 분석과 달리) 결국 공화당은 트럼프를 좇게 되어 있다는 예측도 내어놓습니다. 저자의 솔직함은 "어차피 특정 종목과 인덱스는 클린턴이 당선되었어도 상승세를 탈 기미였다"며, 대세가 호황으로 기운 미국 경기의 혜택을 과감히 맛보라는 결론으로 내닫습니다. 뭐 끝까지 트럼프가 싫은 투자자도, 오바마의 업적이 낳은 호황의 결실까지 거부할 이유는 없다는 쪽으로의 기분 전환까지 마다할 이유는 없어 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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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의 힘 - 미래의 최전선에서 보내온 대담한 통찰 10
고장원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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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어떤 사람이 어려서부터 정규 교육을 전혀 받지 않고, 도서분류상 SF(과학소설로만 일단 한정하자면)만 읽고 자랐다면, 그 사람은 커서 몽상적 비현실적 사고만 하는 부적응자가 될 가능성이 클까요? 이런 질문은 사실 무의미한 게, 사람의 미래를 결정하는 요소는 어떤 reading material을 읽고 자랐는가 하는 요인 외에, 타고난 감정상의 기질, 지능 등 무수히 많은 변수가 더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죠.

저자께서는 이 책 중에서 "과학기술의 발전은 선형적, 비례적으로(맥락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독자인 제가 표현을 변형했을 수 있습니다) 이뤄지는 게 아니라, (천재의 업적이든 우연의 개입에 의해서든) 단속적으로 벌어지는 게 보통이다."라고도 하십니다. 저자께서 특히 주목하는 디랙, 아인슈타인, 하이젠베르크 등의 업적이 봇물 터지듯 나온 20세기 초의 경이로운 진전이 가능했던 건, 어쩌면 그 앞선 시기, 전례 없던 추세로 창작된 SF의 음덕이 컸었는지도 모릅니다. 혹은, SF 작가들처럼 "논리와 이성에 바탕을 둔 사고의 실험, 상상의 극한"을 즐기는 철학자들(선후 관계로 따지면 이쪽의 출현이 먼저죠)이 탄탄한 길을 닦아 놓은 덕분이었든지 말입니다.

SF 문학(이 책에선 만화나 웹툰도 일부 다룹니다)에 나온 토픽, 주제만으로 이처럼 폭 넓고 풍성한 미래상, 아니 현재상을 논할 수 있다는 게 저로선 참 놀라웠습니다. 물론 명석한 두뇌와 빼어난 감각, 방대한 지적 자원을 보유하신 저자는 SF적 세계관과 그 파생 담론 외 다른 다양한 분야에서 보강 논거를 끌어들여 자신의 비전을 전개합니다만, 결국은 연세 지긋하신 저자가 유년, 청소년기부터 내내 읽어 온 SF 스피어의 갖가지 화제들만 엮어 이 두꺼운 볼륨을 다 채울 만큼 밀도 있는 담론을 펴시는 거죠. SF라고 해도 이제는 역사가 꽤 길 뿐 아니라 경향, 장르, 스타일, 주제의식, 정치관 등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이 한 영역 안의 뚜렷한 업적, 마스터피스만 독서 이력의 한 줄에 꿰는 것조차 개인의 일생 동안 다 이뤄질 목표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 책은 (개인적으로 물리, 화학 등 자연과학 본령의 공부를 더 좋아했던 독자에게조차) 하나의 놀라움으로 다가옵니다. 나무보다 숲을 한눈에 조망시켜 주는 그 시원한 내러티브가 지향과 스타일이 다른 정신에게도 큰 공명을 울려 주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죠.

첫째 토픽은 인공지능인데, 저자는 특히 "인공자의식"의 출현이 로봇에게도 일정 부분 인간처럼 권리를 인정해야 할 근거가 될 수 있고, 거의 반 세기 전부터 회자된 "기계가 거꾸로 인간을 지배하는 디스토피아"의 공포가 현실화될 수 있음을 지적합니다. 이는 학생 때 본격 전공을 마친 이들에게도 어떤 지적 확신이라기보다 개인적 판타지 성향에 더 크게 좌우되어 주장되는 경향이 있고, 소위 딥 러닝이다 신경망 학습이다 하는 첨단 이론에서도 아직 분명히 실체를 잡아내진 못한 현황입니다. SF는 비전의 확대 면에서 실제 자연과학의 여러 분야에 "영감, 상상력"을 제공한 기여는 있지만, 이 인공지능은 그저 당연한 전제로 삼고 넘어갔을 뿐 그 원리의 구체화엔 (다른 토픽에 비해) 아직 손댄 바가 미미한 편입니다.

지능은 그저 연산의 중첩, 확대 버전이 아니고, "의식"은 더군다나 더 복잡미묘한 영역이니만치, 인간이 정말 쓸 만한 인공지능을 갖고 부리는 단계에 들어서려면 "의식" 같은 모호한 개념을 폐기, 지금까지 가꿔 온 자연과학상의 명징한 다른 컨셉으로 모조리 대체할 지경이 되어야 가능할 겁니다. 제 생각에, "인공자의식"이란 기둥에 기대어야 인공지능 담론을 펼칠 수 있다면 이는 자기부정의 기반에서 성을 쌓아 올림이나 마찬가지이며, 최소한 아직 걸음마도 못 뗀 단계임을 자백함이나 다름 없다고 봅니다.

유전공학 역시 마찬가지인데, 바로 앞 장 인공지능 토픽의 일부인 "기억의 이식, 조작, 제거"도 그렇지만, 소설에서 자주 소재로 삼아지는 "성형수술과도 같은 맞춤형 DNA 시술"이 가능해지려면, 정보가 담긴 나노(혹은 그보다 훨씬 이하)단위의 최소 실체가 무엇인지에나 대해 정확한 파악이 이뤄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통계적 확률에 기대어 시술한다면, 이게 고대 주술사의 마법이나 요행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면 모르겠는데, 저자께서 책 중에 자주 강조하듯 "윤리적 문제(이 역시 모호해서 마뜩찮은 편의적 핑계죠)"의 개입을 걱정할 필요가 없게 하려면 이론적 해명이 말끔하게 이뤄져야만 합니다. 저자께서는 "부처를 유전공학으로 되살리면... " 같은 화제를 꺼내시는데, 유전공학과는 무관하지만 이 테마는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서 이반의 창작물인 (극중극) "대심문관"에서 이미 다뤄진 바 있죠. 부처가 아니라 예수였지만.

이 책이 진짜 재밌어지는 건 3장부터입니다. 저자의 이해와 통찰도 더 깊이 있을 뿐 아니라 냉정히 말해 지난 역사의 SF가 여태 깊이 있게 다뤄온 건 이들 주제였기 때문입니다. 우주인 선발은 지능도 뛰어나야 하고(돌발 위기에 순발력 있게 대처), 체력도 강해야 하는데 기본적으로 우주 공간이란 종으로서의 인간이 활동하거나 생명력을 유지하기에 아주 우호적이지 못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한번 개척되고 나면 누구나 왕래, 이동이 가능해야 개척의 보람이 있겠는데, 이게 바로 우주 엘리베이터입니다. 이는 현재까지 발전, 확립된 과학기술의 분명한 연장선상에 있으므로 얼마든지 낙관적 기대가 가능합니다(반면 인공지능이니 유전공학의 일부 특정 과제 같은 건 뭔가 패러다임적 도약이 이뤄진 후라야죠). 최근 발생한 고의의 우주 쓰레기 발생 사고에 대한 설명도 흥미로웠는데, "미국 등 백인들이 앞에서 했으니 우리도 해도 된다"란 변명은 사실 파렴치합니다. 테라포밍은 일본 망가에서나 즐겨 다루는 소재로 아는 이들도 많은데 저자께서 분명히 밝히시듯 이미 반 세기도 전에 다뤄진 바 있죠(조금 방향성이나 경로, "잔혹성 정도"가 다르긴 하지만).

저자는 이런 프로젝트가 정부 주도가 아닌 민간 차원에서 활발히 이뤄져야 진정한 혁신이 가능하다고 보는 듯합니다. 사실 영국의 산업 혁명도, 19세기 미국의 놀라운 폭발적 도약도 다 민간섹터가 이끈 흐름이죠. 우리 역시 1960년대 중후반 아폴로 프로젝트 때문에 우주 탐사나 개발은 으레 정부가 기획, 집행한다고 잘못된 선입견에 사로잡혔는지 모릅니다. 저자는 SF팬치고는 좀 뜻밖으로, 우주 개발 등 모든 거대 기획에 반드시 발생하는 거액의 비용을 일일이 사회적 대가로 명확히 인식하는 태도입니다. 사실 따져 보면 너무도 당연한 이치인데, 우리는 보통 대의를 위해선 돈이 얼마 들어도 상관없다는 듯 비현실적인 주장을 일삼죠. 미소 냉전이 끝난 후 입자가속기 프로젝트 등 굵직굵직한 과학 현안에 배정된 예산이 모두 감축되거나 철회되었는데, SF팬이라면 그저 개탄만 할 것 같지만 저자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다수의 동의를 얻지 못하면 어떤 사업도 추진될 수 없다"며 다소 의외의 견해를 피력하십니다. 물론 백번 천번 맞지만 이런 담론의 틀에서는 잘 접하기 어려운 목소리라서 말입니다(사실 그런 비현실적 분위기 때문에 SF를 즐겨도 그 애호가들과는 별로 이야기하기가 싫었더랬죠).

다이슨 스피어(球)는 이처럼 모든 현상의 경제(학)적 측면까지 함께 고려하는(그래서 전방위적, 통섭적 사고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한 분야에만 빠진 정신은 결국 맹목으로 치닫기 쉽고 결국 자기 분야도 제대로 모르는 겁니다) 저자께 특히 흥미로운 주제일 것 같습니다. 이 책은 이처럼 SF와 본격 과학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고, 저자 역시 SF 고전이나 현대의 역량 있는 작가(꼭 SF 장르에 한정하지도 않습니다)들만 거명하는 게 아니라, 권위 있는 과학 저널에 실린 여러 논문까지 정확히 출처를 짚으며 인용합니다. 우리에게 현재 불가능으로 남은 건, 기술적 불가능 사항이 있고 경제적으로 타산이 안 맞아 못 하는 게 있으며, 어떤 건 그 둘을 겸합니다. 마지막 사항의 대표적인 예가 대체 에너지 개발인데, 헬륨 3를 달에서 대량 채취한다거나, 우주공간에 무한정 뿌려지는 태양 복사 에너지의 100% 활용 등이 (SF 작가나 과학자뿐 아니라) 경제학자의 귀까지 솔깃하게 만들 토픽이 아닐 수 없죠.

전기차 개발이 중국에서 시작된 것도 아니고, 황사와 미세먼지, 그리고 방사능 전파의 문제는 셋이 별개이므로 이를 하나로 뭉뚱거리는 태도에는 반대합니다. 황사는 어찌어찌 버텨낼 수도 있는 재앙이지만, 후자 둘은 차원이 다른 해악일 뿐 아니라 사람의 과실로 초래된 문제 아닙니까? 전기차 때문에 일자리가 없어지고, 미세먼지나 귀족노조의 횡포를 탓하던 과거를 차라리 그리워할 수도 있다는 말씀은 좀 지나칠 뿐 아니라 이 책 다른 부분의 논리와 부합하지도 않는다고 봅니다. 저자 말씀대로, 인간의 욕망과 의지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다른 활로를 찾아내기 마련이고(따라서 자동차 산업 혹은 어떤 대량 생산 섹터의 파생 일자리 창출이 극적으로 감소해도, 여태 살피지 못한 다른 서비스의 창조적 제공에 그 잉여 인력들이 몰릴 것입니다. 이게 안 된다면 사회 단위로서의 인간 생존은 불가능해지겠고요), 다만 오염된 환경에선 (모르겠습니다. 저자께서 다른 파트 중에서 말씀하시듯 아가미 같은 기관의 이식을 통해 미세먼지나 방사능 필터링이 가능해질지도) 인간이 살 수가 없는 거죠. 또 오지에 애써 침투했다가 정체불명의 바이러스, 병원균을 옮아 왔으니 차라리 내버려두느니만 못했다는 말씀도, 문제와 도전, 현실의 직시를 회피한다는 점에서, 이 책의 취지와도 맞지 않다고 봅니다. 환경 보호는 물론 지상의 과제지만, 공포의 질병은 여튼 원인규명이 이뤄져야 마땅하지 이걸 판도라의 상자 속에 묵혀 둘 일이 아니죠.

5장과 6장은 책의 토픽을 떠나 독자가 공감할 수 있는 저자 개인의 세계관이 엿보여서 좋았습니다(사실 정치 문제입니다만). 우선 소위 세카이류 문예에 대해, 저자는 "마치 미국인들이 자신들이 원인을 제공한 타국의 침략은 까맣게 잊은 채 월남전 트라우마만 강조하듯, 일본인들이 이런 장르에서 피해자로서의 원한만 내내 떠드는 것(한마디로 피해자 코스프레)도 문제다."라고 하시는데, 아주 속이 시원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소위 덕후들이 쓴 책과는 결과 격이 달라 보이더군요. 6장에서도 참... 평소에 제가 느끼던 게... 일단 저자는 미국에서 반 세기 전에 왜 한창 매카시 선풍이 불 때, 혹은 그 이전부터, 공산주의자들을 "에일리언(국적이 박탈되어 체류 자격 상실, 즉시 추방 대상을 가리키는 법적 용어)"이라는 딱지를 붙이던 현상을 상기시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헐리웃 프랜차이즈물 때문에 "에일리언"을 괴물로만 인식하는데, 저자는 원어민이 아닌 한국인의 입장에서 보아 "사상이 다른 자=괴물"로 여겨 추방하려는 정치적 편협성을 신랄히 비판합니다. 전 이런 말을 하면 그게 언어의 역사적 의미 변천을 모르는 외국어 화자의 한계 같아서 좀 꺼려졌는데, 같은 말씀을 해 주시는 저자의 주장을 읽게 되어 무척 반가웠습니다. 제가 더 놀란 건 <인베이전 오브 바디 스내처>에서 우익 담론이 감지된다고 한 대목이었습니다.

슈퍼맨의 성생활 이야기는 예전부터 여러 "덕후"들이 해 오던 거지만 저자 버전으로 다소 돌려 말하듯 점잖게, 재미있게 읊어 주시는 게 좋았습니다. 다섯 개의 성 패턴을 가진 외계인이 우리 인류를 아메바 보듯 대하는 대목에서 저자는 "..이처럼 전혀 다른 시선에서 사물과 세상과 우리 자신을 통찰하고, 객관화하는 것이 SF 장르의 최대 최고 미덕이다. 이는 사고의 실험이고 훈련이다."라고 하시는데, 이 말 한 마디를 접한 것만으로도 책을 읽은 보람이 있을 정도로, 저는 열렬히 찬동을 보내고 싶습니다. 이 책 말미에, "과연 SF는 미래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를 두고 세 가지 전망을 소개하며 각각에 대해 비판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책을 재미있게, 유익하게 읽은 독자로서 제 결론을 내어 보자면, "SF가 없어지기 전에 인류가 더 빨리 수명을 다할 가능성이 높다" 입니다. 사람은 여태 숱한 한계에 직면하고, 그 제약으로부터 존재의 도약을 이뤄 온 존재이기에, 생존과 창조를 위한 모색을 멈추는 순간 종의 활력도 다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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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7-04-03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능은 그저 연산의 중첩, 확대 버전이 아니고, ˝의식˝은 더군다나 더 복잡미묘한 영역이니만치, 인간이 정말 쓸 만한 인공지능을 갖고 부리는 단계에 들어서려면 ˝의식˝ 같은 모호한 개념을 폐기, 지금까지 가꿔 온 자연과학상의 명징한 다른 컨셉으로 모조리 대체할 지경이 되어야 가능할 겁니다. 제 생각에, ˝인공자의식˝이란 기둥에 기대어야 인공지능 담론을 펼칠 수 있다면 이는 자기부정의 기반에서 성을 쌓아 올림이나 마찬가지이며, 최소한 아직 걸음마도 못 뗀 단계임을 자백함이나 다름 없다고 봅니다.

→ 의식과 관련된 위 주장은 무척이나 급진적인 것 같은데요. 어떤 근거에서 저런 주장을 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의식˝ 같은 모호한 개념》이란 언급은 그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 선뜻 와닿지 않아요. 의식에 대한 《자연과학상의 명징한 다른 컨셉》이 있다는 것인가요? 빙혈 님이 생각하는 그것이 뭔지 궁금합니다.

빙혈 2017-04-04 22:51   좋아요 0 | URL
qualia님, 늦게 이 덧글을 읽었습니다.

우선 질문 드리고 싶은 게, 이 책을 읽으셨거나, 혹은 ˝의식˝에 대한 여러 근거 있는(?) 주장을 담은 다른 책을 읽으시고, qualia님이 지지할 만한 견해를 따로 가지신 게 있는지요.

제 주장이 ˝급진적˝이라고 하신다면, 급진적이지 않고 보편적으로 수용될 만한 다른 이론 체계가 있고, 이를 qualia님이 지지하신다는 뜻 같습니다. 우선 그 점에 대해 간략하게라도 소개를 해 주시고, 그에 대해 제 생각을 밝히도록 하죠. 그렇지 않고 이 책에서 표방한 견해(랄 것도 딱히 없었는데)를 지지하시는 편이라면, 그렇다고 말씀해 주십시오. 그에 대해 제 생각을 어디 개진해 보겠습니다.

그 전에, 친절히 인용해 주신 제 서평의 해당 부분을 더 찬찬히 읽어 주시고, 정확한 의도가 뭔지 다시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얄라알라 2017-06-30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픅 빠져 읽었던 책이기에, 리뷰 다시 읽으니 공부가 됩니다. 고맙습니다.

빙혈 2017-10-02 09:50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합니다.
 

텍스터[603]번째 책이야기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 스미노 요루

내가 몰랐던 책 책이야기 텍스터(www.texter.co.kr)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 스미노 요루
2016년 일본 서점 대상 2위에 오른 스미노 요루의 첫 소설이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소녀와 함께한 어느 소년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요루노 야스미’라는 필명으로 소설 투고 웹사이트 <소설가가 되자>에 원고를 올리기 시작한 것이 이 작품의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파격적인 타이틀로 눈길을 끌었지만 결말이 정해진 이야기임에도 불구, 섬세한 문체와 이야기를 끌고 가는 작가의 필력이 대단하고 무엇보다 재미있다는 평가를 받으며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이후 출판사 편집자의 눈에 띄어 책으로 출간되었고, 작가는 어마어마한 주목을 받으며 일본 문단에 등장하게 되었다.

자의적인 은둔형 외톨이 남학생 ‘나’는 우연히 초긍정 인기 만점 동급생인 사쿠라의 <공병문고>를 발견하고 비밀을 공유하면서 그녀와 잠정적인 친구 계약을 맺는다. ‘네가 죽기 전까지’ 임시 친구 계약을 맺은 사이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왠지 점점 자신에게는 없는 그녀의 뭔가가 옮겨온다. 게다가 묘한 감정까지 쌓여가는 것 같다...

재미있다는 입소문을 타고 책이 독자들에게 높은 인기를 끌자, 2016년 일본 서점 대상 2위는 물론이고 일본의 각종 도서 관련 집계에서 1, 2위를 기록했다. 소설은 영화로도 제작되어 2017년 7월 28일, 개봉이 확정되었다.
◆ 참가방법
  1. 텍스터홈페이지에 회원가입을 먼저 해주세요.
  2. 서평단 가입 게시판에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서평단 신청합니다"라고 써주시고 간단한 서평단 가입의도를 적어주시면 됩니다.
  3. 자신의 블로그에 서평단 모집 이벤트(복사, 붙여넣기)로 본 모집글을 올려주세요.
  4. 자세한 사항은 텍스터 서평단 선정 가이드를 참고하십시오.
※ 문의 : 궁금하신 점은 lovebook@texter.co.kr 메일로 주시거나 텍스터에 북스토리와 대화하기에 문의사항을 적어주시면 빠르게 답변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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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로 읽는다 한눈에 꿰뚫는 전쟁사도감 지도로 읽는다
조 지무쇼 지음, 안정미 옮김 / 이다미디어 / 201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안타까운 일이지만 인류 역사의 가장 결정적인 고비는 지난 과거만 돌이켜볼 때 대부분 전쟁을 통해 맞이한 게 사실입니다. 평생을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명장들도 "가장 비싼 비즈니스가 전쟁이며, 전쟁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무익하고 무의미한 야만"이라며 입을 모읍니다. 앞으로 교육과 계몽을 통해 인간 정신이 더욱 순화되면 분명 시스템적으로 더 나은 해결책을 찾고, 또 그런 평화적인 수단에 의거해서 모든 문제를 풀어나가야 하겠고, 어쩌면 과거의 어리석음을 더 이상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전쟁사는 치열한 연구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쟁사는 꼭 사관학교나 기타 체계적 무력행사를 본분으로 삼는 군대, 교전단체에서만 연구하는 건 아니고, 글로벌 시장에서 한 치의 영역이라도 더 개척하려 드는 기업 경영자라든가 외교무대에서 총성없는 전쟁을 벌이는 외교관들도 즐겨 탐구하는 테마입니다. 물론 우리 평범한 독자들도, 생사를 건 결전에서 교전 당사자 어느 쪽이 어느 시점에서 묘수를 두었다거나, 혹은 반대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러 대국(大局)의 향방이 바뀌었는지 큰 관심을 갖고 파고드는 테마이기도 합니다. 이런 주제를 다룬 책은 무엇보다 깔끔한 지도, 그 중에서도 예리하고 날카로운 편집이 이뤄진 전황도의 수록이 필수 미덕입니다. 이 책에 실린 지도는 한 폭 한 폭이 다 참신하고 새로운 도구라곤 할 수 없어도, 특히 초심자들에게 광범위한 시야를 제공하는, 요령 있는 디자인이 돋보입니다.



책 제목이 "도감"이긴 해도 텍스트의 비중이 적지 않습니다. 인류 역사의 거대 방향을 가른 굵직굵직한 전쟁 33건을 선정하여, 대체로 중립적이긴 하나 저자의 관점이 어느 정도는 반영된 설명이 베풀어진 후, 관련 지도 네다섯 컷(모두 천연색도입니다)과 삽화, 자료 등의 컬러 사진 몇 점이 함께 실려 있습니다. 관점은 대개 중립적이고 건조하며, 분위기를 경쾌하게 이끌어가려는 듯 약간의 장난스런 표현이 가미되었지만 초보자들이 접하기에는 무난한 편입니다.

칸나에의 전투, 이후의 자마의 결전 등은 고대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도시국가 vs 해양 세력의 결전에서 전자가 승리한 역사적 분기점입니다. 사실 저는 읽으면서 저자 특유의 "경쾌한 편집 태도(그래픽 도안 포함)" 이면에, 어떤... 뭐랄까 컴퓨터 게임 애호가들의 시선을 다소 의식한 듯한, 전황의 "포인트", 양 진영의 장점과 단점, 승리의 비결 분석 등등의 나열이 눈에 띄었습니다. 물론 전쟁사 지식을 요점만 추려 머리 속에 정리한다면 다양한 게임에 요긴히 응용할 수 있겠지만, 용도가 그런 쪽에만 한정되지는 않을 겁니다. 여태 깐깐하고 기품 있는 고급 텍스트 위주로 독서해 온 이들에게 이런 "실용적인" 편집이 큰 호감을 못 부를 수도 있지만, 반대로 한니발과 스키피오 두 명장의 역사적 대회전에 대해 전혀 선지식을 못 쌓은 독자들에게는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지식을 섭취할 수 있는 매력적인 통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십자군 전쟁에 대해선 "겉으로 내건 명분과 실제 목표가 따로 논 추악한 전쟁"이라는 현대적 관점을 대부분 수용한 서술입니다. 그러면서도 이슬람 진영 내부에 종족, 민족을 우선시한 불협화음이 존재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이는 라틴 인 위주의 십자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흔한 관점대로 "두 유일신교의 항쟁"이란 프레임으로만 분석하기엔 어려움이 따른다며 제법 날카로운 정리도 시도합니다. 이슬람과 기독교가 같은 아브라함 신조 계열임은 사실이지만, 두 종교가 "유대교"로부터 분리되어 나왔다는 서술은 자칫 오해를 부를 수도 있겠습니다.



몽골의 진출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세계사적 사건이고, 특히 그 대대적인 향방이 주로 군사적 팩터에 의존한 패턴이었으므로 당연히 이런 류의 책에서 비중 있게 다뤄져야 하고, 이 책도 그런 스탠스입니다. 명장, 명전술가가 여럿 등장한 국면이지만 특히 이 책은 수부타이 장군에 초점을 맞춰 부각합니다. 발슈타트(직전 명칭은 레그니차) 전투 서술에서 저자(들)은 이 이름이 "시체의 땅"이란 어원을 가짐을 특히 지도 중에서 언급합니다. 발슈타트 전투(뿐 아니라 몽골이 대승을 거둔 어느 전역에서라도) 그 참상을 떠올릴 때 그런 이름이 붙고도 남을 이유가 물론 있겠습니다만, 독일어를 좀 하시는 분들은 도대체 Wahl과 Statt 어느 부분에 "시체"와 "땅"이란 뜻이 깃들었는지 의아해할 수 있습니다. 혹시 일본 호사가들 사이에 떠도는 오래된 틀린 속설이 아닐지 의심하는 분도 봤는데요.

결론적으로 이 정보는 틀린 게 아닙니다. 게르만 고어(古語) Wa(a)l에는 "전쟁, 시체" 등의 뜻이 담겨 있고, 저 Wahl은 현대어처럼 "선거" 같은 뜻이 아니라 모습과 뜻이 변한 과거의 잔재입니다. Statt를 놓고 국내 인터넷 어느 정보는 "도시"라고 써 놓았던데,
Staat: 국가
Stadt: 도시
Statt: (명사로 쓰일 때) 지역(문어투)
이렇게 다 쓰임이 다릅니다. 발슈타트라고 할 때는 위 중 세번째에 해당함은 더 강조할 필요도 없겠습니다.

하나 덧붙일 건, 최근의 독어학자들 사이에선 고어근 Wal에 대해 과연 저런 뜻을 지녔었는지 더 이상 완전한 합의가 이뤄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한때 "프로이센" 국명을 놓고도 v(러시아어에서 "~로" 등 방향을 지시하는 전치사. "브나로드" 등의 예처럼)+러시아 라는 설이 유력했는데("러시아 쪽에 있는 나라", 이게 사실이라면 참 맥빠지는 어원이죠) 요즘은 이 설이 완전히 폐기되고 고 부족 "프루사"의 이름에서 왔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벨지움, 벨기에의 어원인 "벨기카"라든가, 네덜란드의 옛 명칭 "바타비아" 등도 다 그 땅에 살던 선주민 부족명에서 온 것처럼 말입니다.



그냥 저 개인적으로 요즘 미국 독립전쟁사에 관심이 좀 있는 편인데요, 이 책은 식민지 초기 13주의 형세를 잘 잡아낸 지도를 싣고 있어서 보기에 반가웠습니다. 바로 뒤의 챕터에 실린 남북 전쟁 관련 지도도, 어느 대목에서 전쟁의 성패가 갈렸는지 인포그래픽 테크닉으로 깔끔히 잡아낸 설명이 돋보였습니다.



일본인들로서도 별로 자랑스럽지 않을, 뤼순 일대에서 육군을 지휘한 노기 마레스케의 엄청난 삽질이 특히 유명한 러일 전쟁의 요약 설명이 잘 담겨진 편입니다.

책은 전체 5부로 이뤄져 있는데, 제5부는 2차대전 종전 후의 사건들(총 8건)로만 따로 엮었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이 중 한 꼭지는 911테러, 한 꼭지는 (비판적 의도에서) 이라크 전쟁에 할애했습니다. 4부와 5부에 실린 유럽지도 대부분이 (아주 희미하게) 오데르-나이세 선 등 현대 국경도 표시하는데, 이는 메인 라인이 당대 국경, 은선이 현대 국경, 이런 식으로 과거와 현재를 대조시키려는 편집 의도로 보이므로 저는 오히려 평가를 해 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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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이기적in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고급 (무료 동영상 & 포켓북 제공) 2017 이기적in 한국사 능력 검정시험
이종학.윤슬 지음 / 영진.com(영진닷컴) / 2016년 12월
평점 :
품절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은 현재 일종의 공인자격처럼 통용되는 것 같습니다. 공무원 시험, 교원임용고시 응시에 이 시험의 취득 급수가 요구되며, 그 외에도 역사에 대해 관심 높은 분들이 실력의 객관적 증명이나 자기 만족 등을 위해 많이들 응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처음 제가 이 책을 받아들었을 때 깨끗한 백상지 인쇄라든가 풍부한 도판, 수험생(?)의 편의를 최대한 고려한 예쁜 편집 때문에 깜짝 놀랐습니다. 이런 책으로 공부하면 머리에 안 들어올 지식이 없을 것도 같네요.

이 시험은 난이도별로 고급, 중급, 초급으로 구분되어 출제, 시행되는데 응시료가 시험마다 다릅니다. 이 책은 그 중 "고급" 레벨 대비 수험서입니다. 고급형에 출제될 만한 세부 암기 사항이 깔끔하게 잘 정리되어 있고, 본문 학습 후에는 기출 문제를 통해 자기 실력을 체크할 수 있는 구성입니다.

본책(1권)은 기본 사항 정리 + 기출문제 로 채워져 있습니다. 1권의 기출문제 해설과 정답은 문제 바로 밑에 제시되었습니다. 2권은 문제집인데 3회분 실전 모의고사(저자분들이 작성, 출제) + 기출문제 중 1권에서 못 다룬 문제들 엄선한 1회분, 이런 구성입니다(인터넷 서점의 책 소개가 자세하지 않아서 여기 써 두겠습니다). 3권은 휴대하면서 수시로 참고할 수 있는 포켓북인데 사이즈는 문고판 정도입니다. 1, 2권 본책은 A4 사이즈입니다.



06번 문제를 보면 지문에 손병희 선생이 나오는데 이분은 3. 1운동 연관하여 투옥되고 출옥 후 서거(고문 후유증)하셨으므로 이후의 큰 규모 만세운동에 관여될 수는 없습니다. 지문 중의 "4월 2일" 부분은 단서가 될 수도 있고 3. 1운동이 장기간 지속되었음을 모르는 학습자라면 오히려 함정에 빠지게 할 수도 있습니다. 선택지 중 ③은 1910년대 내내 언론기관이 어용화되었고, 조선, 동아 등 민족지는 1920년에 창간되었으므로 사실이 아닙니다. 3. 1 운동의 성과 중 하나로 총독부의 소위 문화정책을 들기도 하고(기만술이지만),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이들 양대 신문(외 여러 매체)이 창간되었으므로 이는 원인이 아니라 결과입니다. ⑤는 모르는 분이 없을 테고, ④는 일부 강사 해설을 통해 "광주 학생 운동" 관련으로 널리 알려진 것 같으나 1920년대 전반에 전개된 "민립 대학 설립 운동"과도 연계가 있다는 점을 잊지 않아야겠습니다.



07번 문제에서 ④와 ②는 1930년대에 시행된 총독부의 민족 말살 정책과 관련 있습니다. ⑤ 역시 1930년대에 대대적으로 전개된 관제 농촌 운동인데, 이로 인해 계급 모순과 봉건적 착취, 차별이 더욱 심화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③은 1910년대에 시행되었고 아주 고난도 문제에서는 정확한 연대까지 다 외워야 순서나열이 정확하게 가능한데, 고급을 처음 푸시는 분들에게는 이게 부담이 되므로, 처음에는 10년대, 20년대, 30년대 하는 식으로 맵만 머리 속에 찍어 놓고 차차 구체화해 나가는 게 좋겠습니다.



08번 보시면 웬만큼 공부한 분들은 저게 연해주라는 정도는 감이 오겠습니다. 연해주에서 沿(연)자는 물가 연 자 입니다. 바다 해(海)는 물론 동해를 가리킵니다. 비록 인접해 있어도 국가 간의 경계가 엄존하는 지역은 통치 구조와 정치적 분위기가 엄연히 다르므로, 지도에서 ②가 답임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계속 문제를 풀면서 이 서평을 채워 나가겠습니다. 저는 생전 처음으로 이번 5월달에 이 시험 고급 레벨에 응시한 후, 6월에 성적표가 나오면 블로그와 카페에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책이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검증하려면 저처럼 다른 참고서를 전혀 공부한 적 없는 독자라야 확실히 그 순 효과를 가늠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간만에 공인 시험 친다고 생각하니 좀 설레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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