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의 힘 - 미래의 최전선에서 보내온 대담한 통찰 10
고장원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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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어떤 사람이 어려서부터 정규 교육을 전혀 받지 않고, 도서분류상 SF(과학소설로만 일단 한정하자면)만 읽고 자랐다면, 그 사람은 커서 몽상적 비현실적 사고만 하는 부적응자가 될 가능성이 클까요? 이런 질문은 사실 무의미한 게, 사람의 미래를 결정하는 요소는 어떤 reading material을 읽고 자랐는가 하는 요인 외에, 타고난 감정상의 기질, 지능 등 무수히 많은 변수가 더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죠.

저자께서는 이 책 중에서 "과학기술의 발전은 선형적, 비례적으로(맥락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독자인 제가 표현을 변형했을 수 있습니다) 이뤄지는 게 아니라, (천재의 업적이든 우연의 개입에 의해서든) 단속적으로 벌어지는 게 보통이다."라고도 하십니다. 저자께서 특히 주목하는 디랙, 아인슈타인, 하이젠베르크 등의 업적이 봇물 터지듯 나온 20세기 초의 경이로운 진전이 가능했던 건, 어쩌면 그 앞선 시기, 전례 없던 추세로 창작된 SF의 음덕이 컸었는지도 모릅니다. 혹은, SF 작가들처럼 "논리와 이성에 바탕을 둔 사고의 실험, 상상의 극한"을 즐기는 철학자들(선후 관계로 따지면 이쪽의 출현이 먼저죠)이 탄탄한 길을 닦아 놓은 덕분이었든지 말입니다.

SF 문학(이 책에선 만화나 웹툰도 일부 다룹니다)에 나온 토픽, 주제만으로 이처럼 폭 넓고 풍성한 미래상, 아니 현재상을 논할 수 있다는 게 저로선 참 놀라웠습니다. 물론 명석한 두뇌와 빼어난 감각, 방대한 지적 자원을 보유하신 저자는 SF적 세계관과 그 파생 담론 외 다른 다양한 분야에서 보강 논거를 끌어들여 자신의 비전을 전개합니다만, 결국은 연세 지긋하신 저자가 유년, 청소년기부터 내내 읽어 온 SF 스피어의 갖가지 화제들만 엮어 이 두꺼운 볼륨을 다 채울 만큼 밀도 있는 담론을 펴시는 거죠. SF라고 해도 이제는 역사가 꽤 길 뿐 아니라 경향, 장르, 스타일, 주제의식, 정치관 등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이 한 영역 안의 뚜렷한 업적, 마스터피스만 독서 이력의 한 줄에 꿰는 것조차 개인의 일생 동안 다 이뤄질 목표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 책은 (개인적으로 물리, 화학 등 자연과학 본령의 공부를 더 좋아했던 독자에게조차) 하나의 놀라움으로 다가옵니다. 나무보다 숲을 한눈에 조망시켜 주는 그 시원한 내러티브가 지향과 스타일이 다른 정신에게도 큰 공명을 울려 주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죠.

첫째 토픽은 인공지능인데, 저자는 특히 "인공자의식"의 출현이 로봇에게도 일정 부분 인간처럼 권리를 인정해야 할 근거가 될 수 있고, 거의 반 세기 전부터 회자된 "기계가 거꾸로 인간을 지배하는 디스토피아"의 공포가 현실화될 수 있음을 지적합니다. 이는 학생 때 본격 전공을 마친 이들에게도 어떤 지적 확신이라기보다 개인적 판타지 성향에 더 크게 좌우되어 주장되는 경향이 있고, 소위 딥 러닝이다 신경망 학습이다 하는 첨단 이론에서도 아직 분명히 실체를 잡아내진 못한 현황입니다. SF는 비전의 확대 면에서 실제 자연과학의 여러 분야에 "영감, 상상력"을 제공한 기여는 있지만, 이 인공지능은 그저 당연한 전제로 삼고 넘어갔을 뿐 그 원리의 구체화엔 (다른 토픽에 비해) 아직 손댄 바가 미미한 편입니다.

지능은 그저 연산의 중첩, 확대 버전이 아니고, "의식"은 더군다나 더 복잡미묘한 영역이니만치, 인간이 정말 쓸 만한 인공지능을 갖고 부리는 단계에 들어서려면 "의식" 같은 모호한 개념을 폐기, 지금까지 가꿔 온 자연과학상의 명징한 다른 컨셉으로 모조리 대체할 지경이 되어야 가능할 겁니다. 제 생각에, "인공자의식"이란 기둥에 기대어야 인공지능 담론을 펼칠 수 있다면 이는 자기부정의 기반에서 성을 쌓아 올림이나 마찬가지이며, 최소한 아직 걸음마도 못 뗀 단계임을 자백함이나 다름 없다고 봅니다.

유전공학 역시 마찬가지인데, 바로 앞 장 인공지능 토픽의 일부인 "기억의 이식, 조작, 제거"도 그렇지만, 소설에서 자주 소재로 삼아지는 "성형수술과도 같은 맞춤형 DNA 시술"이 가능해지려면, 정보가 담긴 나노(혹은 그보다 훨씬 이하)단위의 최소 실체가 무엇인지에나 대해 정확한 파악이 이뤄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통계적 확률에 기대어 시술한다면, 이게 고대 주술사의 마법이나 요행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면 모르겠는데, 저자께서 책 중에 자주 강조하듯 "윤리적 문제(이 역시 모호해서 마뜩찮은 편의적 핑계죠)"의 개입을 걱정할 필요가 없게 하려면 이론적 해명이 말끔하게 이뤄져야만 합니다. 저자께서는 "부처를 유전공학으로 되살리면... " 같은 화제를 꺼내시는데, 유전공학과는 무관하지만 이 테마는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서 이반의 창작물인 (극중극) "대심문관"에서 이미 다뤄진 바 있죠. 부처가 아니라 예수였지만.

이 책이 진짜 재밌어지는 건 3장부터입니다. 저자의 이해와 통찰도 더 깊이 있을 뿐 아니라 냉정히 말해 지난 역사의 SF가 여태 깊이 있게 다뤄온 건 이들 주제였기 때문입니다. 우주인 선발은 지능도 뛰어나야 하고(돌발 위기에 순발력 있게 대처), 체력도 강해야 하는데 기본적으로 우주 공간이란 종으로서의 인간이 활동하거나 생명력을 유지하기에 아주 우호적이지 못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한번 개척되고 나면 누구나 왕래, 이동이 가능해야 개척의 보람이 있겠는데, 이게 바로 우주 엘리베이터입니다. 이는 현재까지 발전, 확립된 과학기술의 분명한 연장선상에 있으므로 얼마든지 낙관적 기대가 가능합니다(반면 인공지능이니 유전공학의 일부 특정 과제 같은 건 뭔가 패러다임적 도약이 이뤄진 후라야죠). 최근 발생한 고의의 우주 쓰레기 발생 사고에 대한 설명도 흥미로웠는데, "미국 등 백인들이 앞에서 했으니 우리도 해도 된다"란 변명은 사실 파렴치합니다. 테라포밍은 일본 망가에서나 즐겨 다루는 소재로 아는 이들도 많은데 저자께서 분명히 밝히시듯 이미 반 세기도 전에 다뤄진 바 있죠(조금 방향성이나 경로, "잔혹성 정도"가 다르긴 하지만).

저자는 이런 프로젝트가 정부 주도가 아닌 민간 차원에서 활발히 이뤄져야 진정한 혁신이 가능하다고 보는 듯합니다. 사실 영국의 산업 혁명도, 19세기 미국의 놀라운 폭발적 도약도 다 민간섹터가 이끈 흐름이죠. 우리 역시 1960년대 중후반 아폴로 프로젝트 때문에 우주 탐사나 개발은 으레 정부가 기획, 집행한다고 잘못된 선입견에 사로잡혔는지 모릅니다. 저자는 SF팬치고는 좀 뜻밖으로, 우주 개발 등 모든 거대 기획에 반드시 발생하는 거액의 비용을 일일이 사회적 대가로 명확히 인식하는 태도입니다. 사실 따져 보면 너무도 당연한 이치인데, 우리는 보통 대의를 위해선 돈이 얼마 들어도 상관없다는 듯 비현실적인 주장을 일삼죠. 미소 냉전이 끝난 후 입자가속기 프로젝트 등 굵직굵직한 과학 현안에 배정된 예산이 모두 감축되거나 철회되었는데, SF팬이라면 그저 개탄만 할 것 같지만 저자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다수의 동의를 얻지 못하면 어떤 사업도 추진될 수 없다"며 다소 의외의 견해를 피력하십니다. 물론 백번 천번 맞지만 이런 담론의 틀에서는 잘 접하기 어려운 목소리라서 말입니다(사실 그런 비현실적 분위기 때문에 SF를 즐겨도 그 애호가들과는 별로 이야기하기가 싫었더랬죠).

다이슨 스피어(球)는 이처럼 모든 현상의 경제(학)적 측면까지 함께 고려하는(그래서 전방위적, 통섭적 사고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한 분야에만 빠진 정신은 결국 맹목으로 치닫기 쉽고 결국 자기 분야도 제대로 모르는 겁니다) 저자께 특히 흥미로운 주제일 것 같습니다. 이 책은 이처럼 SF와 본격 과학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고, 저자 역시 SF 고전이나 현대의 역량 있는 작가(꼭 SF 장르에 한정하지도 않습니다)들만 거명하는 게 아니라, 권위 있는 과학 저널에 실린 여러 논문까지 정확히 출처를 짚으며 인용합니다. 우리에게 현재 불가능으로 남은 건, 기술적 불가능 사항이 있고 경제적으로 타산이 안 맞아 못 하는 게 있으며, 어떤 건 그 둘을 겸합니다. 마지막 사항의 대표적인 예가 대체 에너지 개발인데, 헬륨 3를 달에서 대량 채취한다거나, 우주공간에 무한정 뿌려지는 태양 복사 에너지의 100% 활용 등이 (SF 작가나 과학자뿐 아니라) 경제학자의 귀까지 솔깃하게 만들 토픽이 아닐 수 없죠.

전기차 개발이 중국에서 시작된 것도 아니고, 황사와 미세먼지, 그리고 방사능 전파의 문제는 셋이 별개이므로 이를 하나로 뭉뚱거리는 태도에는 반대합니다. 황사는 어찌어찌 버텨낼 수도 있는 재앙이지만, 후자 둘은 차원이 다른 해악일 뿐 아니라 사람의 과실로 초래된 문제 아닙니까? 전기차 때문에 일자리가 없어지고, 미세먼지나 귀족노조의 횡포를 탓하던 과거를 차라리 그리워할 수도 있다는 말씀은 좀 지나칠 뿐 아니라 이 책 다른 부분의 논리와 부합하지도 않는다고 봅니다. 저자 말씀대로, 인간의 욕망과 의지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다른 활로를 찾아내기 마련이고(따라서 자동차 산업 혹은 어떤 대량 생산 섹터의 파생 일자리 창출이 극적으로 감소해도, 여태 살피지 못한 다른 서비스의 창조적 제공에 그 잉여 인력들이 몰릴 것입니다. 이게 안 된다면 사회 단위로서의 인간 생존은 불가능해지겠고요), 다만 오염된 환경에선 (모르겠습니다. 저자께서 다른 파트 중에서 말씀하시듯 아가미 같은 기관의 이식을 통해 미세먼지나 방사능 필터링이 가능해질지도) 인간이 살 수가 없는 거죠. 또 오지에 애써 침투했다가 정체불명의 바이러스, 병원균을 옮아 왔으니 차라리 내버려두느니만 못했다는 말씀도, 문제와 도전, 현실의 직시를 회피한다는 점에서, 이 책의 취지와도 맞지 않다고 봅니다. 환경 보호는 물론 지상의 과제지만, 공포의 질병은 여튼 원인규명이 이뤄져야 마땅하지 이걸 판도라의 상자 속에 묵혀 둘 일이 아니죠.

5장과 6장은 책의 토픽을 떠나 독자가 공감할 수 있는 저자 개인의 세계관이 엿보여서 좋았습니다(사실 정치 문제입니다만). 우선 소위 세카이류 문예에 대해, 저자는 "마치 미국인들이 자신들이 원인을 제공한 타국의 침략은 까맣게 잊은 채 월남전 트라우마만 강조하듯, 일본인들이 이런 장르에서 피해자로서의 원한만 내내 떠드는 것(한마디로 피해자 코스프레)도 문제다."라고 하시는데, 아주 속이 시원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소위 덕후들이 쓴 책과는 결과 격이 달라 보이더군요. 6장에서도 참... 평소에 제가 느끼던 게... 일단 저자는 미국에서 반 세기 전에 왜 한창 매카시 선풍이 불 때, 혹은 그 이전부터, 공산주의자들을 "에일리언(국적이 박탈되어 체류 자격 상실, 즉시 추방 대상을 가리키는 법적 용어)"이라는 딱지를 붙이던 현상을 상기시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헐리웃 프랜차이즈물 때문에 "에일리언"을 괴물로만 인식하는데, 저자는 원어민이 아닌 한국인의 입장에서 보아 "사상이 다른 자=괴물"로 여겨 추방하려는 정치적 편협성을 신랄히 비판합니다. 전 이런 말을 하면 그게 언어의 역사적 의미 변천을 모르는 외국어 화자의 한계 같아서 좀 꺼려졌는데, 같은 말씀을 해 주시는 저자의 주장을 읽게 되어 무척 반가웠습니다. 제가 더 놀란 건 <인베이전 오브 바디 스내처>에서 우익 담론이 감지된다고 한 대목이었습니다.

슈퍼맨의 성생활 이야기는 예전부터 여러 "덕후"들이 해 오던 거지만 저자 버전으로 다소 돌려 말하듯 점잖게, 재미있게 읊어 주시는 게 좋았습니다. 다섯 개의 성 패턴을 가진 외계인이 우리 인류를 아메바 보듯 대하는 대목에서 저자는 "..이처럼 전혀 다른 시선에서 사물과 세상과 우리 자신을 통찰하고, 객관화하는 것이 SF 장르의 최대 최고 미덕이다. 이는 사고의 실험이고 훈련이다."라고 하시는데, 이 말 한 마디를 접한 것만으로도 책을 읽은 보람이 있을 정도로, 저는 열렬히 찬동을 보내고 싶습니다. 이 책 말미에, "과연 SF는 미래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를 두고 세 가지 전망을 소개하며 각각에 대해 비판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책을 재미있게, 유익하게 읽은 독자로서 제 결론을 내어 보자면, "SF가 없어지기 전에 인류가 더 빨리 수명을 다할 가능성이 높다" 입니다. 사람은 여태 숱한 한계에 직면하고, 그 제약으로부터 존재의 도약을 이뤄 온 존재이기에, 생존과 창조를 위한 모색을 멈추는 순간 종의 활력도 다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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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7-04-03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능은 그저 연산의 중첩, 확대 버전이 아니고, ˝의식˝은 더군다나 더 복잡미묘한 영역이니만치, 인간이 정말 쓸 만한 인공지능을 갖고 부리는 단계에 들어서려면 ˝의식˝ 같은 모호한 개념을 폐기, 지금까지 가꿔 온 자연과학상의 명징한 다른 컨셉으로 모조리 대체할 지경이 되어야 가능할 겁니다. 제 생각에, ˝인공자의식˝이란 기둥에 기대어야 인공지능 담론을 펼칠 수 있다면 이는 자기부정의 기반에서 성을 쌓아 올림이나 마찬가지이며, 최소한 아직 걸음마도 못 뗀 단계임을 자백함이나 다름 없다고 봅니다.

→ 의식과 관련된 위 주장은 무척이나 급진적인 것 같은데요. 어떤 근거에서 저런 주장을 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의식˝ 같은 모호한 개념》이란 언급은 그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 선뜻 와닿지 않아요. 의식에 대한 《자연과학상의 명징한 다른 컨셉》이 있다는 것인가요? 빙혈 님이 생각하는 그것이 뭔지 궁금합니다.

빙혈 2017-04-04 22:51   좋아요 0 | URL
qualia님, 늦게 이 덧글을 읽었습니다.

우선 질문 드리고 싶은 게, 이 책을 읽으셨거나, 혹은 ˝의식˝에 대한 여러 근거 있는(?) 주장을 담은 다른 책을 읽으시고, qualia님이 지지할 만한 견해를 따로 가지신 게 있는지요.

제 주장이 ˝급진적˝이라고 하신다면, 급진적이지 않고 보편적으로 수용될 만한 다른 이론 체계가 있고, 이를 qualia님이 지지하신다는 뜻 같습니다. 우선 그 점에 대해 간략하게라도 소개를 해 주시고, 그에 대해 제 생각을 밝히도록 하죠. 그렇지 않고 이 책에서 표방한 견해(랄 것도 딱히 없었는데)를 지지하시는 편이라면, 그렇다고 말씀해 주십시오. 그에 대해 제 생각을 어디 개진해 보겠습니다.

그 전에, 친절히 인용해 주신 제 서평의 해당 부분을 더 찬찬히 읽어 주시고, 정확한 의도가 뭔지 다시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얄라알라 2017-06-30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픅 빠져 읽었던 책이기에, 리뷰 다시 읽으니 공부가 됩니다. 고맙습니다.

빙혈 2017-10-02 09:50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