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야욕 아베신조를 말하다 - 제2 메이지유신 꿈꾸는 아베 신조 책략 심층 분석
이춘규 지음 / 서교출판사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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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간의 야욕은 그 사람 본인을 파멸에 이르게 할 수도 있고, 반대로 소속 집단과 개인을 질적으로 비약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보통 "야욕"이라고 하면 후자를 가리켜 쓰는 결과론적 용어이긴 한데, 전자의 경우에도 냉정한 현실주의 입장에서 무언가 교훈을 추출할 때 우리는 이런 "야욕"으로부터도 어떤 역사의 유익한 공식 비슷한 걸 끌어내려 애쓰기도 합니다.

아베 신조는 이미 젊은 시절 한 차례 총리직을 지내고 물러난 경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능력과 경륜을 겸비하여 무난히 중책을 수행하고, 국가를 이끈 실적이 있었다면 대개 연임에 연임을 거듭하여 자신의 치세로 상당 기간을 장식하는 게 보통이죠. 길지도 않은 임기가 한 번 끊어지고 정치 인생을 이어갔다면 (여튼 한 번 거치기도 힘든 총리대신직에 올랐다는 자체가 영광이긴 하겠어도) 첫 수행이 그리 성공적이지는 않았다는 뜻도 됩니다. 보통은 일본 역사(혹은 내각제를 채택한 여느 다른 나라에서도)에서 이런 정치인이 아주 높은 평가를 받는다고는 못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한 번 실각한 후에 다시 총리직에 올라, 두번째의 집권기를 꽤나 길게도 이어가는 매우 특이한 케이스입니다. 작년 말에 한국도 그랬지만 일본 역시 각종 정치 추문이 터지는 통에 드디어 이 장기집권자가 권력 기반을 잃는 줄 알았던 관측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반 년 가까이 지난 지금, 이 사람은 여전히 권좌에 머물러 있습니다. 삼십 년 전 테플론 대통령이라 불렸던 로널드 레이건의 경우와도 비슷한데, 레이건 역시 국민들에게 워낙 인기가 좋아 웬만한 스캔들로는 기반이 흔들리지 않던 매우 특이한 케이스였죠.

이 책은 경위야 어찌되었든 간에, 두 번에 걸쳐 총리대신직이라는 중책을 맡아 이른바 "스트롱맨"의 한 사람으로 불리며 국제정치 무대에 주역으로 그 생명을 오래도 이어가는 정치인의 비결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정치는 누가 뭐래도 현실이기 때문에, 일본 정치판의 어떤 후진적 특성 같은 것을 아무리 감안하더라도, 자신보다 훨씬 노회하고 다양한 수완을 가친 고참 정치인들이 즐비한 일본(자민당 내부뿐 아니라, 야당에도 선배들이 많습니다)에서, 어떻게 이 사람이 갖가지 고비를 넘기고 생존했는지 그 숨은 사연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흔히 명문가의 자제, 세습 정치인의 일원이라는 이유를 들지만, 그런 사람은 일본 정가에 너무도 많아 딱히 장점이 될 수도 없습니다. 극우성향을 내세운 대중 영합이라면 이 사람보다 몇 술 더 뜨는 정치꾼들도 부지기수입니다. 이 사람만이 장기로 보유한 어떤 노하우가 있기에 지금 우리 눈 앞에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거죠.

요시다 쇼인 등 일본 근대화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굵직굵직한 생애를 산, 여튼 그들 입장에서는 거인이라 불려 마땅한 이름들이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께서는 다소 뜻밖에도, 거의 백 오십 년도 넘은 역사의 먼 뿌리까지 더듬어 간 후, 이 현실정치인의 정신적 연원을 캐려 들더군요. 우리도 다양한 소스를 통해 지식을 갖춰 알듯, 동군에 패배한 후 근 삼백 년에 가까운 세월을 절치부심, 와신상담해 온 조슈, 사쓰마 등지의 오랜 정치 전통과 고유한 정서가 있었고, 그들이 일종의 캠페인과 정변을 통해 명치유신을 이끌었긴 했습니다. 이 사건은 일본역사뿐 아니라 세계사에 유례가 없을 만큼 단기간에 제도의 혁신과 교체가 이뤄진 성공사례라서, 그 이름의 근원이 된 주 문왕의 개혁이나 선정(삼경에 나오는 대로라면)보다 이 명치유신의 존재가 더 유명할 정도입니다.

저자는 저 명치유신이라는 지나간 역사의 토대 위에서 이 "야심"찬 정치인의 행태와 철학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저자의 관점에 동의할 수도, 반대로 거부감을 드러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일본 근현대사에 대해 흥미로운 지식 여러 줄기를 배울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정도의 단단한 개인적 기반을 여튼 갖춘 정치를 해 나가는 정치인이기 때문에, 웬만해선 그 전도가 쉽사리 방해 받기 어렵겠다는 점은 확실히 캐치할 수 있더군요. 관점이나 가치지향보다는, 객관적 분석과 냉철한 현실 파악의 방법론이 돋보이는 독서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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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의 비밀 - 숨겨진 숫자의 비밀을 찾아서
마리안 프라이베르거.레이첼 토머스 지음, 이경희 외 옮김 / 한솔아카데미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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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우리의 손으로 만들어 놓고도 그 실체가 무엇인지, 어떻게 이런 고안과 발명이 가능했는지 궁금하거나 의아한 분야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숫자, 수학" 같은 건데요. 외계의 우월한 관찰자나 더 나은 문명의 담지자가 아닌, 바로 우리 인류의 조상들이 생존을 위한 노력 끝에 얻어낸 기술과 지혜의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신비와 경이의 눈으로 이를 지켜 봅니다. 저자들은 이를 "무에서 유를 만들어낸" 놀라운 업적 정도로까지 격상하는데, 물론 순수한 창조의 레벨이 아닌 줄이야 모두가 알고 있지만, 나날의 생존에 급급한 다른 피조물들과 인간의 지위를 결정적으로 차별짓는, 놀라운 징표와 기호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숫자라는 기호는 그 속에 특별한 비의가 숨어 있는 게 아니지만(그렇다고 믿은 학파가 아주 먼 과거 이를 가장 잘 다뤘던 이들 중심으로 실제 형성되었었고, 아직도 일부 종족은 자신들의 기호체계 전체에 이를 확산시켜 밀교 비슷한 신앙을 유지합니다), 중등교육이 세계적으로 보편화한 현대에 들어서도 이 기호는 여전히 많은 이들의 손쉬운 접근을 거부합니다. 물론 기호의 초급 단계에서야 그 이해가 어렵지 않지만, 기호가 모이고 모여 고차원의 지식을 표현하고부터는 더 이상 지사(指事)의 기능에 그치지 않기 때문에, 세계(추상적일망정)에 대한 정밀한 이해를 깨치지 못한 두뇌로서는 기호 자체가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숫자나 수학은 일상의 사소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탄생했습니다. 예를 들어 이 책의 제5과 "타일 붙이기"를 보면, 똑같은 형태로 평면을 덮어 나가기를 원하는(실용적 욕구일수도 있고 미적 동기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의 여러 차례 시도 끝에, 왜 어떤 도형(정다면체)로는 이것이 가능하고, 어떤 도형으로는 불가능한지 분명히 알 수 없는 일이 잦았죠. 본인이 못 하면 다른 누구도 할 수 없는 건지, 더 똑똑한(혹은 경험이 많은) 이들의 손에 의해 해결이 가능한 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해결가능성"과 "증명"의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실제로 우리 나라의 수리 논술 평가에서, 이처럼 일상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상황을 두고(대략의 답도 대개 가르쳐 주면서) 학생들에게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지 자신의 의견을 써 보라는 문제를 내곤 합니다. 이 책은 그런 문제만 받아들면 막막해지는 이들에게, 문제의 해결을 어디서부터 잡고 시작해야 할지 중요한 시사점을 가르쳐 줍니다. 즉, "내 집에 내가 타일을 붙인다고 생각하고, 내 집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최대한 지혜를 짜 내어 보라"는 거죠. 그것이 어떻게 보면 수학적 사고의 첫걸음입니다. 숫자나 수학은 거칠고 마구잡이인 세상에 최소한의 질서를 부여하기 위한, 인간들의 필사적인 노력인지도 모릅니다. 질서가 혹 없다면, 질서를 만들어 내어야 직성이 풀리는, 선하고 지혜로운 인간 본성의 일부가 작동하는 증거이지요. 이 덕분에 우리는 인류 문명의 밝은 장래를 확신할 수 있습니다.

e는 2.7182... 로 전개되는, 분수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실숫값입니다. 이 책에도 잘 나와 있듯, 이 수는 베르누이의 표현에 따르면 "자기 자신을 닮아 가는" 아름다운 나선을 그리며 회전하는 도형의 기본 구조를 알려주기까지 하죠. 하지만 e의 근원을 알고 보면, 적당한 이율로 기간을 무한히 잡아 빌려 준 돈이, 나중(무한이니까 나중이란 말이 꽤 모호해집니다만)에 얼마가 되어 돌아올지 계산하는 과정에서 나온 숫자에 불과합니다. "자신을 무한히 닮는" 다른 모든 도형이나 구조의 원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는 이 e의 신비함에 대해, 사실 우리 모두는 충분히 매혹될 만합니다. 우리는 매혹될 자유가 있고, e에게는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심지어 이 매혹은 유익하기까지 한 게, 전혀 숫자나 수학에 대해 흥미와 관심을 못 갖던 이들(특히 학생들)에게 여튼 최초 접근 단계의 흥미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죠.

"이 안에는 아무 신비도 없다. 다만 쓸모가 많고 오류가 없을 뿐이다." 하지만 고작 그런 이유만으로는 아무도 수학에 달려 들지 않고, 뛰어난 지성이 모여들어 불후의 업적을 남기지도 않았을 겁니다. 수학은 그저 그 모습 그대로인데 괜히 어리석은, 감정에 사로잡힌 인간들이 과대 의미를 부여하는지, 아니면 정말 기술적 지식 외에 모든 번민과 고뇌를 한 큐에 해결해 줄 궁극의 진리가 숨어 있는지, 아직은 그 여부조차 알 수 없습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몰라서 괴로운 게 아니라, 그런 게 과연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는 게 사람을 답답하게 만드는 거죠.

이 책 저자들도, 숫자(혹은 수학)에 숫자 이상의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아니면 그저 정밀한 체계의 일환으로 파악해야 하는지는 딱부러진 답을 내어 놓지 않습니다. 물론 인간인 이상 저자들도 몰라서 말 못한다는 점은 우리 독자들도 다 알지만, "그래도 독자 여러분이 작은 지혜라도 보태어, 이 오래된 탐구의 과정에 마침내 끝을 보려는 노력에 동참하면 어떨지?" 라며 은근히 유혹하는 중임은 눈치챌 수 있습니다. 이런 건전한 의문과 동기가 사람의 마음 속에 자연히 생겨, 나도 행복하고 이웃도 풍요로이 만드는 쪽으로 작용했으면 참으로 바람직하겠습니다. 공학과 실용과는 아무 관계 없어 보이는 "아름다움"이, 알고 보면 모든 발전의 근본 이유가 되었다는 사실은 역설이자 경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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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켈하임 로마사 - 한 권으로 읽는 디테일 로마사
프리츠 하이켈하임 지음, 김덕수 옮김 / 현대지성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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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사 주제라면 사실 멀게는 수백 년 전의 저술부터 해서 권위 있게 의존할 만한 것들이 많고, 최근까지도 통사로서 유익하게 읽을 만한 업적이 여러 권 나왔습니다. 에드워드 기번의 고전이 너무 까다롭고 엄격한 모범을 세워 놓았기에, 이 시대를 다룬 역사로서의 서술은 내용의 완성도도 완성도지만 그 문장력 수준이 기번처럼 신이(神異)의 경지에 올라야 그게 로마사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양 통할 정도라고나 할까요. 물론 역사학은 다른 사회과학과 달라서, 성립 당시부터 문학과 철학 부문과 거의 일체를 이뤄 왔고, 이 때문에 내용을 떠받들 문장(이라는 형식)도 그 모양새부터가 아름다워야 제 대접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문학은 물론 심지어 철학도, 완성도 있는 내용을 서술하는 그 문장까지가 아름다워야 자격을 갖췄다고 인정). 이 때문에 여간한 내공과 재능과 수련 기간을 갖추지 않고서는, 후대의 학자(라기보다 거의 문필가 수준의 인력)들이 도전할 엄두를 못 내어 왔죠.

이 책이 출간된 지, 그리고 심지어 저자께서 사거한 지도 어언 반 세기가 훌쩍 넘어가니, 책은 더 이상 야심찬 신저가 아니라 거진 고전의 반열에 들어야 할 판입니다만, 여튼 이 책은 기번의 고전과 대조하며 읽을 때 특히 그 진가가 드러납니다. 물론 기번의 고전은 일단 양적인 조건에서 이 번역본과 나란히 놓일 볼륨이 아닙니다만, 서술의 압축성(전체가 몇 권으로 되어 있든, 로마사는 어떻게 쓰여도 압축과 절제의 미를 갖춰야 합니다)과 체계성 면에서 이 두 고전은 나란히 놓였을 때 각각의 자격과 만만찮은 존재 이유를 더 부각한다고 평할 수 있습니다.

기번의 고전은 물론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 두 밀레니엄에 다리를 걸친 비잔티움 제국사까지 커버하는, 사실 말도 안 될 만큼 담대한 의도와 엄청난 집념의 산물이죠. 반면 이 책은 (의외로?) 제목이 내용을 일정 부분 암시한다고 할까(기번의 고전도 따지고 보면 마찬가지지만), 기번의 무지막지한 성과와 의욕에 질려 버린 후대의 반성이 다분히 깃든, 비교적 절제되고 아담한(?) 범위만을 집중 조명하는 서술입니다. 헌데 이처럼 저자의 기획 스케일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공화정 이전(심지어) 어렴풋한 안개에 휩싸인 시기마저 다루기 때문에(또, 기번의 책이 제목 그대로 "제국"의 기초가 놓여 가던 시기부터 시작을 잡기 때문에), 앞으로 당겨지고 뒤로 밀리는 효과가 서로 상쇄되어 두 책이 얼추 커버하는 시대 길이가 1200년 가량으로 비슷합니다. 자료를 정리하고 분석하는 과업은 기번의 것이 난이도가 높았겠고, 부족한 자료를 취합하여 온전한 체계를 구축하는(비록 후대에 축적된 성과의 도움을 받았다쳐도) 수고는 이 하이켈하임의 땀방울이 더 농도 짙게 맺혔을 만합니다.

사실 우리가 비잔티움 제국사는 "로마사"와는 별개로 고찰, 파악해야, 대상의 정확한 이해나 대접이건, 우리 현대인 자신의 요긴한 활용에건 더 적절한 결과이겠기에,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로마사"를 개관하기엔 기번의 고전보다 이 책이 더 유용한 도구입니다(그것도 한 권으로). 김덕수 박사님의 이 번역본은 이미 십여 년 전에 하드커버판으로 출간된 바 있습니다만, 읽기 깔끔하게, 또 휴대하기 편하게 나온 이 신간도 참 마음에 듭니다. 도정제 실시 전에 그 구간은 큰 폭의 할인(아니었나? 기억이 확실치 않군요) 행사가 있었기에 제가 당시 냉큼 구입해서 책장에 꽂아 두었는데, 이제 이 책도 옆에 나란히 소장하니 정말 훈훈해집니다. 지금 막 귀가한 터라 사진은 나중에 업로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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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로 떠나는 월가의 영웅 - 13년간 주식으로 단 한 해도 손실을 본 적이 없는 피터린치 투자, 2017 최신개정판
피터 린치.존 로스차일드 지음, 이건 옮김 / 국일증권경제연구소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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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주 중심의 가치 투자"란 모든 투자자가 유념해야 할 교과서 같은 원칙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한국 증시에서 이 원칙을 금과옥조처럼 준수하며 실행에 옮기는 분들은 극히 찾아보기 힘든데요. 여러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아마도 시장이 원칙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든가(혹은 그렇다고 믿는 분들이 많다든가), 혹은 많은 이들이 그렇게 느긋한 분석을 한 후 투자하는 게 특히 한국의 실정에 잘 안 맞는 부분이 많다든가(급한 민족성), 정작 가치 투자를 하려니 해당 주식이 너무 고가로 형성되었다든가, "흙 속에 숨은 진주" 같은 가치주를 알아 보기가 너무 힘들다든가, 여러 이유가 있을 겁니다.

한국의 현실이 이런 데에는 애널리스트, 투자 전문가들의 잘못도 적지 않습니다. 분석과 예측 능력이 떨어진다든가, 정확한 정보를 알면서도 어떤 세력의 의도대로 움직이다든가, 시장을 면밀히 성실히 분석해서 유용한 틈새 정보를 생산, 제공하는 본분에 충실 못하고 남들(일반 투자자들) 다 하는 이야기만 내놓는다든가 말이죠. 반면 외국의 전문 방송을 보면 원칙에 어긋나지 않으면서도 꽤 정확히 시황을 내다보는 진단이 많습니다. 물론 아무리 정밀하고 건전한 예측이라 해도 일단 발설이 된 후엔 시황 형성의 작은 요인으로라도 작용하기 때문에 역시 엇나갈 수 있습니다만, 여튼 이런 작은 노력이 모이고 모여 시장이 원칙대로 나아가는 데 기여를 합니다. 반면 한국의 경우 불건전한 정보에 따라 개미들이 움직이고, 또 매번 "상투를 잡"다 보니 점점 더 불신 풍조가 확산되고, 잘못된 원칙에의 의존도가 높아지는 거죠.

이런 의미에서 이런 고전이 갖는 의의는 큽니다. 그새 런던 증시의 룰이 근원적으로 바뀌었다든가, 저축은행과 투자은행의 장벽이 사라지고 (그 부작용인지) 큰 파동의 시장 폭락이 발생했다든가, 중국 증시가 시장의 덩치 큰 멤버로 자리를 잡아 간다든가 하는, 상전벽해격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만, 이상하게도(이상한 거죠) 투자의 근본 원칙, 룰은 변함이 없는 듯합니다. "크게 바뀐 바는 없다"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정석에 더욱 충실할 필요가 있다든지, 정석을 고지식하게 지킨 이들이 더 큰 재미를 보았다든지 하는 말들이 더 설득력을 가집니다. "단타 해서 그래도 꽤 재미를 봤어요!" 도박과도 같습니다. 도박도 그럴 때가 있어서, 초짜들에게 야 나는 알고 봤더니 재능과 감이 있었어! 같은 쾌감을 줄 때가 있습니다. 이런 이들이 그나마 푼돈만 따서 더 이상의 모험을 못 한 채(기분 내느라 다 써 버림) 판에서 물러났다면 그나마 다행인데, 그게 아니라서 결국은 탈탈 털린 후에야 하우스를 떠나게 됩니다.

잘나가던 펀드 매니저가 하루아침에 가진 돈을 다 날리고 고객들에게 쫓겨다니는 예는 픽션보다 차라리 현실에서 더 비일비재합니다. 말 안 듣는(혹은 더 이상 줄 대어 봐야 가망이 안 보이는) 고객을 현실에서 (고의로) 혼 내 준 후, 다시 이용 가치가 생기면 재미를 보게 해 주는 자유자재의 수완을 가진 천재 매니저는 말하자면 더글라스 케네디의 싸구려 펄프 픽션에나 나오는 존재입니다. 현실에서는 그런 마법사가 존재하지 않고, (워런 버핏의 책을 읽은 분들은 알겠지만) 회사를 현장에서 꼼꼼히 실사하고 자신이 세워 둔 원칙에만 곧이곧대로 충실한, 고지식한(통념과는 정반대인) 투자가가 결국 승리자입니다. 물론 시황의 급변에 따라 주도면밀하게 움직일 필요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큰 변수도 한국 같은불건전한 시장에서나 자주 발생하는 거고, 미국처럼 (그나마) 건전한 십장에선 뜨내기들이 마구 설레어할 만한 난리통이 잘 벌어지지 않습니다.

피터 린치는 "상위 3~10% 정도의 투자자들이 성공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본인 자신(무려, 인류 역사상 최고의 투자자로 평가받는 인물)도, 그리 지능이 남달리 빼어나다든가 하는 유형은 아님을 스스로 말하는 셈입니다. 마치 낚시와도 비슷한 면이 있어서, 예측(똑똑한 이들의 확신에 한해서)대로 안 된다고 혼자 급해져서 마구 지르는 식으로 나서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린치의 말을 책에서 인용하면, "너무 똑똑한 이들은, 자신이 세워 놓은 완성도 높은 모형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실물 시장의 뜬금없는 흐름에 대해 무시하고 넘어가기 쉽다."라는 겁니다.

사실, 솔직히 말하면 진짜 똑똑한 이들은 자신의 실수도 "소름끼치는 냉혹함"으로 냉정히 분석하고, 같은 실수를 두 번 되풀이하지 않습니다. 이거는 제 생각에 타고난 머리보다는 성격 요인이라든가, 그리 급하게 나대어야 할 조급함이 없는 품성(여유 있게 자라난 이들이 이렇습니다)이고, IQ 인자와는 직접 관계가 없습니다. 다만, 머리가 빼어난 이들이 자기 도취에 빠지기 쉽고(기분이 좋아지거든요), 철석같이 믿었던 tool이 무너지면 (어차피 가진 게 없이 남의 말에 부화뇌동하는 이들과 달리) 회복하기가 더 힘듭니다. 똑똑하고 잘나가는 사람들이 (잃을 게 많기 때문에) 회복 탄력성이 더 떨어집니다.

한창 핫한 종목에 몰려드는 행태야말로 (저자 린치의 표현을 빌리면) 쪽박 차기 딱 좋은 바보짓입니다. 이거는 "남들 말에 솔깃하면 무조건 망한다" 같은, 어차피 투자에 들일 돈도 없는 처지라서 "모든 포도가 신포도"라고 우기는 빈털털이의 태도와는 틀립니다. 저자의 말은, 가치에 집중하여 남들이 채 못 보고 넘어간 가치주에 투자하라는 소리지, 이미 한물 간 종목이고 단지 요란한 입소문만 남은 곳에 아깝게 돈을 쏟아붓지 말라는 소리입니다. 바꿔 말하면, 소문은 안 났어도 (예컨대 이런 책에서 가르치는) 원칙에 딱 들어맞는, 교과서적인 종목이 눈에 띄면 주저없이 "사라"는 뜻입니다.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먹는다고, 이런 챈스가 나타나도 생전 뭘 해 본 구력이 없으면 손이 안 나갑니다. 남들이 우우 거려야 비로소 따라 나서는 사람은, 예컨대 이 책에서 말하는 "싸구려 카펫" 생산 업체에다 몰빵하다 망하게 마련입니다.

사실 너무 투자 자체에만 몰입(주식가격의 등락)하는 분들은, 정작 이 회사가 얼마나 알찬 배당을, 신의 있게 행하는지에 대해 눈을 감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주가 주식을 갖는 이유는, 회사의 주인으로서 마땅히 받아야 할 투자의 대가를 받아내는 데에 있습니다. 주주는, 객(客)에 불과한 채권자가 아니니만치, 당연히 회사의 수익을 정당히 챙길 권리가 있습니다(물론 채권자는 여러 경우에 우선변제권을 가집니다). 이 책의 한 챕터에도 잘 진술되었듯, 심지어 록펠러(라키펠러) 같은 이도 "가장 행복한 순간은 배당 받는 순간"이라고 고백했던 적 있습니다. 배당은 대개는 고액이고, 채권자가 아무리 고리로 돈을 빌려줬어도 못 받아낼 짭짤한 수익입니다. 문제는 이 책에서 누누이 강조하는 가치주, 성장주의 경우, 주주들이 너무 잦은 배당을 요구하면 회사가 크지를 못한다는 거죠. 이 문제는 투자자의 성향에 따라 다 달리 볼 일입니다. 린치 본인도, "어떤 상황에서도 배당을 충직히 실시할 회사를 따로 찾아 둘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단타 매매에만 몰두하는 뜨내기들에게는 이게 다 꿈같은 주문입니다.

비록 개정판이지만 이 책이 오래된 고전이다 보니 "파생상품, 공매도" 등 비교적 현대적 패턴과 추세에 대해서는 깊이 다루지 않습니다. 그런데, derivative에 몰입해서 그저 최신현황만 좇아대는 투자자들 중, 아무리 팁과 요령에 빠삭해도 꼭 망하는 분들에게 부족한 게, 바로 이런 (고리타분해 보이는) 책에서 가르치는 원칙의 숙지, 납득, 내면화입니다. 그런 이들도 스킬은 남 못지 않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그들에게 부족한 바 2%가 바로, 이런 "기본에의 충실"입니다. 투자는 머리가 아니라, 어찌 보면 모럴과 끈기가 비결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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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잔 이펙트
페터 회 지음, 김진아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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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스릴러는 알고보면 한가지 컬러로 묶이기도 힘든, 자신들만의 개성이 물씬 풍기는 개별작품들인데도, 전체로서 스칸디나비아 누아르라는 한 범주에 자연스럽게 응집되어 별 어색하지도 않다는 게 신기합니다. 사실 저는 페터 회의 작품 세계가 어느 장르, 영역, 트렌드에 협소하게 편입, 분류된다면 꽤 부당하다고 여기는 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그림으로 보면 "북유럽 스릴러의 매력적인 한 섹터"라는 데에는 또 반대하고 싶지가 않더군요. 이건 누가 봐도 특이하다 싶은 소재, 소재에서 예상되었던 전개가 매번 독자의 짐작을 비껴가는 활기 넘치는 구성, 그리고 매 장면에서 톡톡 튀는 인물들의 선명한 컬러, 이런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읽는 이들을 한껏 매혹하는, 실로 남다른 성취가 그의 작품에는 녹아 있습니다. 살짝 심령물스러운 이 스릴러도 그저 소재나 분위기가 지닌 마력에 안이하게 묻어가지 않고, 여전한 장르(어폐가 없진 않습니다만 일단)의 박력과 그만의 스타일이 이끄는 힘이 역연합니다. 그의 이름을 보고 고른 팬들은 이번에도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겁니다.

제목이 "수잔 이펙트"인데, 이런 말이 물론 학술 용어로 정립된 건 전혀 아닙니다(다만 일부 호기심 많고 별난 스타일의 물리학자들이, 한 범주로 포섭하기는 어딘가 난감해지는 그런 현상, 초자연적 신드롬에 그전부터 주목해 오기는 했고 그 역사가 그리 짧지도 않습니다). 만약 어떤 개인이 특별한 자질, 개성을 가졌다면 그게 순수 개체의 돌연변이 결과이기란 확률적으로 기대하기 힘듭니다. 아마도 그(그녀)를 둘러싼 가족 전체, 혹은 상하 직계 존비속이 그런 모종의 특질을 공유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남의 감정을 기묘하게 잘 알아채는 능력도 있고, 남으로 하여금 제 본심을 술술 털어놓게 하는, 그저 우연으로 돌리거나 다른 외부 팩터에 귀인하기 힘든 이상한 현상도 종종 목도됩니다. 철저히 몸을 숨겨 온 그 인과관계가 명확히 포착되어 일반화가 언젠가는 가능할지도 모르는데, 소설 속에서 물리학세계(확립된 법칙들과 거대한 업적을 남긴 이들의 이름들)의 언급이 이처럼 자주 이뤄지는 건 다분히 작가가 그를 노려서입니다. 만약 그런 놀라운 업적이 진짜 현실화라도 한다면, 발견자 본인의 이름이 아닌 이 소설의 "영감"을 기리는 의미에서 진짜 "수잔 이펙트"라는 명명이 이뤄질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소설 속 주인공들, 즉, 정말로 이상하고 별나고 평범한 이들의 눈에 이해 불가인, 너무도 튀는 개성의 "수잔 네 가족들"은, 지극히 개인주의적이고 심지어 가족들 서로간에도 화합과 포용이 잘 안 이뤄지는 판입니다. 차라리 생판 모르는 남과 남 사이에서도 이처럼 갈등이 빚어지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헌데, 개체의 변이란 어쩌면 내면의 개성부터가 이처럼 단절적인 환경에서 그 발생이 용이할 지도 모릅니다(반대로, 환경이 이렇기에 내면의 개성이 그리 형성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절망적인 무지를 위장하기 위해 어설픈 과학 타령을 늘어놓는 모습이 아니라, 이 가족은 정말로 지적이고 예리한 품성을 타고난 이들입니다(인성에는 문제가 적지 않지만ㅋ). 개인의 재능을 DNA의 무작위 장난으로 호도한다고 없던 식견과 재능과 경력이 생기는 게 아니듯, 이 별난 사람들이 그래도 뭔가 남다르고 유익한 면모가 있기에, "정체불명의 정부 기관"에서 특별 대우를 약속하며 모종의 미션을 맡기는 결정이 (극중 설정에서뿐 아니라) 읽어가는 독자들 사이에서도 폭 넓은 정당화 근거를 마련하는 듯합니다.

다만 제가 독자로서 한 마디 하자면, 현실에서 덴마크란 나라는 그리 큰 힘을 갖지 못한 정치 단위임에도 불구하고, 덴마크 작가[나아가 북유럽 전체]들의 픽션 속에서는 지나치게 신비화하여 무슨 미국쯤이나 되는 듯한 무게를 싣는 게 좀 어색하긴 합니다. 페터 회 뿐 아니라 다른 작가들도 마찬가지인데, 이는 사실 움직일 수 없다시피한 신분제 사회(다만 복지가 잘 갖춰졌을 뿐)인 그들 체제의 개성을, 작가들(더군다나 장르 작가들)이 메타적으로 직시하지 못하는 한계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살인 미수로 고소당했어요(법적으로 정확한 표현이 아닌 듯하지만 일단 원문 그대로)."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지 후회되는구나." 여기까지는 정상이죠. 근데 그 다음 말이 이겁니다. "그런 놈은 (미수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 죽여 버렸어야지." 아 물론, 화자가 여성이고 소설을 읽어 보면 (전적으로는 아니라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되는 상황입니다(성폭력 상황까지 간 판에서 정당방위. 과잉방위에 가깝긴 하나). 이 가족이 어떤 가족인지는 이 대화(뿐 아니라, 정말 골때린다 싶은 정신없는 대화가 홍수처럼 쏟아집니다)만 봐도 알 수 있고, 이 정도로 튀는 개성을 가진 이들이 과연 어느 체제, 어느 무지한 대중으로부터 수용, 포용될 수 있을지 독자는 난감한 게 당연합니다.

뭐 성격 특이하다고 단죄, 파문되는 건 현대 문명 사회의 온당한 태도가 아니지만, 이들은 현재 법적으로도 여러 가지 이유로, 여러 정부 당국으로부터 "추적"되는 처지입니다. 레니게이드들에 대해 특별 사면을 대가로, 권위 있는 당국에서 그에 걸맞은 특별한 미션을 위임하는 건, 사실 일찍부터 서유럽 장르에서 채용해 오던 관행이고 우리도 외국 드라마나 상업 영화에서 너무도 자주 봐 온 설정인데, 페터 회는 천연덕스럽게, 그러나 매우 자연스럽게, 이 장치를 자신의 이 개성 넘치는 작품에서 재연, 채용합니다.

이상한 가족은 이제 이 가망 없어 보이는 미션을 수행함으로써 "위대한 가족"이 되어가는데, 최근 제가 본 영국 드라마 <셜록> 시즌4에서 레스트라데 경감님 대사처럼, 알고 보면 "그레이트 투 굿", 즉 특출하긴 하나 정이 안 가는 개성 강한 이들이, 이제 무엇보다 가족 서로를 이해하고, 나아가 평범한 이들의 고단한 현실에도 서서히 눈을 뜨게 되는 과정이 꽤 감동적입니다. 물론 그들이 행하는 미션은 "고작 한 가족"이 떠맡기에는 너무도 규모와 비중이 크며, 사실 이런 중차대한 임무를 고작 덴마크 정부가 누구한테 베풀고 평가하고 거둬들일 위상이 되는지도 의문이지만, 소설은 독자를 시원시원 자신의 세계에 포섭시켜 가며 전적인 판타지를 마치 엄정한 현실이라도 되는 양, 초청장에 적힌 문구가 무색하거나 민망하지 않게 근사한 파티, 규모 큰 기쁨과 희열을 선사합니다. 장르물에서 익히 보던 여러 전통과 기법인데, 유독 그의 세계에서는 전혀 다른 빛깔과 효과로 조합된다는 게 작가 페터 회만의 기량이고 매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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