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수잔 이펙트
페터 회 지음, 김진아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4월
평점 :
북유럽 스릴러는 알고보면 한가지 컬러로 묶이기도 힘든, 자신들만의 개성이 물씬 풍기는 개별작품들인데도, 전체로서 스칸디나비아 누아르라는 한 범주에 자연스럽게 응집되어 별 어색하지도 않다는 게 신기합니다. 사실 저는 페터 회의 작품 세계가 어느 장르, 영역, 트렌드에 협소하게 편입, 분류된다면 꽤 부당하다고 여기는 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그림으로 보면 "북유럽 스릴러의 매력적인 한 섹터"라는 데에는 또 반대하고 싶지가 않더군요. 이건 누가 봐도 특이하다 싶은 소재, 소재에서 예상되었던 전개가 매번 독자의 짐작을 비껴가는 활기 넘치는 구성, 그리고 매 장면에서 톡톡 튀는 인물들의 선명한 컬러, 이런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읽는 이들을 한껏 매혹하는, 실로 남다른 성취가 그의 작품에는 녹아 있습니다. 살짝 심령물스러운 이 스릴러도 그저 소재나 분위기가 지닌 마력에 안이하게 묻어가지 않고, 여전한 장르(어폐가 없진 않습니다만 일단)의 박력과 그만의 스타일이 이끄는 힘이 역연합니다. 그의 이름을 보고 고른 팬들은 이번에도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겁니다.
제목이 "수잔 이펙트"인데, 이런 말이 물론 학술 용어로 정립된 건 전혀 아닙니다(다만 일부 호기심 많고 별난 스타일의 물리학자들이, 한 범주로 포섭하기는 어딘가 난감해지는 그런 현상, 초자연적 신드롬에 그전부터 주목해 오기는 했고 그 역사가 그리 짧지도 않습니다). 만약 어떤 개인이 특별한 자질, 개성을 가졌다면 그게 순수 개체의 돌연변이 결과이기란 확률적으로 기대하기 힘듭니다. 아마도 그(그녀)를 둘러싼 가족 전체, 혹은 상하 직계 존비속이 그런 모종의 특질을 공유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남의 감정을 기묘하게 잘 알아채는 능력도 있고, 남으로 하여금 제 본심을 술술 털어놓게 하는, 그저 우연으로 돌리거나 다른 외부 팩터에 귀인하기 힘든 이상한 현상도 종종 목도됩니다. 철저히 몸을 숨겨 온 그 인과관계가 명확히 포착되어 일반화가 언젠가는 가능할지도 모르는데, 소설 속에서 물리학세계(확립된 법칙들과 거대한 업적을 남긴 이들의 이름들)의 언급이 이처럼 자주 이뤄지는 건 다분히 작가가 그를 노려서입니다. 만약 그런 놀라운 업적이 진짜 현실화라도 한다면, 발견자 본인의 이름이 아닌 이 소설의 "영감"을 기리는 의미에서 진짜 "수잔 이펙트"라는 명명이 이뤄질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소설 속 주인공들, 즉, 정말로 이상하고 별나고 평범한 이들의 눈에 이해 불가인, 너무도 튀는 개성의 "수잔 네 가족들"은, 지극히 개인주의적이고 심지어 가족들 서로간에도 화합과 포용이 잘 안 이뤄지는 판입니다. 차라리 생판 모르는 남과 남 사이에서도 이처럼 갈등이 빚어지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헌데, 개체의 변이란 어쩌면 내면의 개성부터가 이처럼 단절적인 환경에서 그 발생이 용이할 지도 모릅니다(반대로, 환경이 이렇기에 내면의 개성이 그리 형성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절망적인 무지를 위장하기 위해 어설픈 과학 타령을 늘어놓는 모습이 아니라, 이 가족은 정말로 지적이고 예리한 품성을 타고난 이들입니다(인성에는 문제가 적지 않지만ㅋ). 개인의 재능을 DNA의 무작위 장난으로 호도한다고 없던 식견과 재능과 경력이 생기는 게 아니듯, 이 별난 사람들이 그래도 뭔가 남다르고 유익한 면모가 있기에, "정체불명의 정부 기관"에서 특별 대우를 약속하며 모종의 미션을 맡기는 결정이 (극중 설정에서뿐 아니라) 읽어가는 독자들 사이에서도 폭 넓은 정당화 근거를 마련하는 듯합니다.
다만 제가 독자로서 한 마디 하자면, 현실에서 덴마크란 나라는 그리 큰 힘을 갖지 못한 정치 단위임에도 불구하고, 덴마크 작가[나아가 북유럽 전체]들의 픽션 속에서는 지나치게 신비화하여 무슨 미국쯤이나 되는 듯한 무게를 싣는 게 좀 어색하긴 합니다. 페터 회 뿐 아니라 다른 작가들도 마찬가지인데, 이는 사실 움직일 수 없다시피한 신분제 사회(다만 복지가 잘 갖춰졌을 뿐)인 그들 체제의 개성을, 작가들(더군다나 장르 작가들)이 메타적으로 직시하지 못하는 한계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살인 미수로 고소당했어요(법적으로 정확한 표현이 아닌 듯하지만 일단 원문 그대로)."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지 후회되는구나." 여기까지는 정상이죠. 근데 그 다음 말이 이겁니다. "그런 놈은 (미수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 죽여 버렸어야지." 아 물론, 화자가 여성이고 소설을 읽어 보면 (전적으로는 아니라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되는 상황입니다(성폭력 상황까지 간 판에서 정당방위. 과잉방위에 가깝긴 하나). 이 가족이 어떤 가족인지는 이 대화(뿐 아니라, 정말 골때린다 싶은 정신없는 대화가 홍수처럼 쏟아집니다)만 봐도 알 수 있고, 이 정도로 튀는 개성을 가진 이들이 과연 어느 체제, 어느 무지한 대중으로부터 수용, 포용될 수 있을지 독자는 난감한 게 당연합니다.
뭐 성격 특이하다고 단죄, 파문되는 건 현대 문명 사회의 온당한 태도가 아니지만, 이들은 현재 법적으로도 여러 가지 이유로, 여러 정부 당국으로부터 "추적"되는 처지입니다. 레니게이드들에 대해 특별 사면을 대가로, 권위 있는 당국에서 그에 걸맞은 특별한 미션을 위임하는 건, 사실 일찍부터 서유럽 장르에서 채용해 오던 관행이고 우리도 외국 드라마나 상업 영화에서 너무도 자주 봐 온 설정인데, 페터 회는 천연덕스럽게, 그러나 매우 자연스럽게, 이 장치를 자신의 이 개성 넘치는 작품에서 재연, 채용합니다.
이상한 가족은 이제 이 가망 없어 보이는 미션을 수행함으로써 "위대한 가족"이 되어가는데, 최근 제가 본 영국 드라마 <셜록> 시즌4에서 레스트라데 경감님 대사처럼, 알고 보면 "그레이트 투 굿", 즉 특출하긴 하나 정이 안 가는 개성 강한 이들이, 이제 무엇보다 가족 서로를 이해하고, 나아가 평범한 이들의 고단한 현실에도 서서히 눈을 뜨게 되는 과정이 꽤 감동적입니다. 물론 그들이 행하는 미션은 "고작 한 가족"이 떠맡기에는 너무도 규모와 비중이 크며, 사실 이런 중차대한 임무를 고작 덴마크 정부가 누구한테 베풀고 평가하고 거둬들일 위상이 되는지도 의문이지만, 소설은 독자를 시원시원 자신의 세계에 포섭시켜 가며 전적인 판타지를 마치 엄정한 현실이라도 되는 양, 초청장에 적힌 문구가 무색하거나 민망하지 않게 근사한 파티, 규모 큰 기쁨과 희열을 선사합니다. 장르물에서 익히 보던 여러 전통과 기법인데, 유독 그의 세계에서는 전혀 다른 빛깔과 효과로 조합된다는 게 작가 페터 회만의 기량이고 매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