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인간다운 죽음을 꿈꾼다 - 마지막 순간, 놓아 주는 용기
황성젠 지음, 허유영 옮김 / 유노북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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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상에서 가장 가슴 아픈 일은, 사랑하는 이가 내 곁을 떠났을 때입니다. 서양에서 결혼 서약을 할 때 보통 "죽음이 우리들을 갈라놓을 때까지...." 란 어구를 관습처럼 되뇌곤 하죠. 죽음이 아니라 성격 차, 경멸 - 혐오감, 불화 따위가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건 제3자 입장에서 안타깝고 딱하긴 해도, 당사자들 사이에선 가슴을 찢어놓는다 같은 슬픔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을 해로(偕老)하고 도 여전히 설레는 감정이 살아 있는데 노환, 중병 등으로 상대방이 유명을 달리한다든가 하는 건 참 못 견딜 일입니다. 혹은, 꼭 각별한 효자가 아니라도 해도, 세상에서 유일하게 내 편이 되어 주시고 낳아 주고 길러 주신 부모님을 떠나보내는 것도, 그냥 떨어져 산다거나 장기 출타 같은 사정이 아닌, 앞으로 영영 뵐 수 없는 성격의 이별이라면, 웬만한 사람에겐 굉장한 충격이며, 그 상실의 극복에 꽤나 오랜 시간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내내 꿈에 등장하시며 "평생에 고쳐 못 할 일"을 후회하게 만드실 수도 있죠.

하물며, 난치병이라든가, 교통사고라든가의 후유증으로, 감내할 수 없는 고통을 참아 가며 생명을 연장하시는 경우라면 사정이 더욱 심각합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 알았는데, 심폐 소생 등을 위해 인체에 삽관(관을 집어 넣음)하여 임시방편으로 치료받는 게 (말을 못 해서 그렇지) 환자 당사자에게는 엄청난 고통이라는군요. 환자 입장에서는 너무도 고통스러워서 차라리 품위 있게 목숨을 끊고 싶은데, 가족 입장에서야 어디 그렇겠습니까. 아직 0.00001%의 가능성이라도 생존에의 희망이 있다면 무슨 수라도 쓰고 싶어하죠. 가족이 손을 안 쓰거나 조치를 덜 해서 아픈 분이 돌아가셨다면, 그 죄책감을 무슨 수로 달래려고 말입니다.

어쩌면 이기심의 발로일 수도 있습니다만 상식이 있는 이상 그렇게는 또 생각이 안 될 겁니다. "아프신데 그만 떠나게 해 드리자." 당치도 않죠. 할 수 있는 건 다해봐야죠. 이 사이에 끼어 진퇴양난의 고초를 겪는 건 응급실의 닥터들입니다. 그들은 한두 번 이런 일을 겪은 게 아니기에, 무엇이 합리적인 처사인지 이미 알면서도 직업인의 양심, 가족의 독촉 때문에 결과가 뻔한 무의미한 행위(100이면 100 그런 건 아니고, 대단히 신중할 필요가 있겠습니다만 이 책 저자의 취지를 고려하여 일단 이 표현을 씁니다)를 반복합니다.

이 책은 이런 인간적인 고뇌를 치열하게 겪은, 대만의 어느 의사분이 진솔한 고백을 털어놓은 내용을 담았습니다. 문장을 읽다 보면 내내 벅찬 휴머니즘으로만 일관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이기에 때로는 지쳐서 내뱉는 솔직한 푸념도 있습니다. 다만 그런 푸념을 털어 놓으실 때도, 어디까지나 의사로서 직업인으로서의 소명은 투영되어 있습니다. 광의의 연명치료는 물론, 중상을 입고 응급실에 실려 온 상태에서 이뤄지는 응급처치 역시, 고통만 증강시킬 뿐 환자의 소생, 당장의 안식에 아무 도움도 안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이런 경우 사전의 DNR(Do Not Resuscitate) 동의서는, 무의미한 연명 치료에 드는 노력의 낭비를 막는 효과가 있겠으나, 이 DNR 동의서를 놓고도 별의별 소동이 다 빚어지는 게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대만이나 우리나 동아시아에서 사람 사는 모습은 비슷한 게 많아서, 일부러 작정을 하고 발전시키는 오해, 음모, 혹은 정반대로 애틋한 정 때문에 벌어지는 가슴 아픈 갈등, 하소연 등이, 대만이 아니라 우리 나라에서 벌어질 법한 사연들의 집약, 회고처럼 느껴졌습니다. 

DNR에 서명할 자격은 꼭 직계비속 장남일 필요는 없고, 배우자나 그 외 혈족이면 충분한 듯합니다. 그런데 일생을 속 썩이다 마지막에 그 부친(뇌간출혈로 넘어져 이미 소생 가능성이 없는 분) 가시는 길을 히 보내 드리는 일에 작은 도움을 준 아들의 사례가 나오더군요. 의사야 구체적인 사정을 모르니 왜 이렇게 아들을 기다려가며 서명을 미루는지는 그 여동생(딸)의 설명을 듣고서야 알게 됩니다. ".... 외아들이라 어려서 엄격하게 기르느라고 매를 많이 맞았어요. 이걸 참지 못해 가출도 하고,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결국 감옥에도 가게 되었지요.. " 사실 아들만 나무랄 게 아니라, 아이에게 맞지 않은 방법으로 훈육한 부모의 잘못도 적다 할 수 없습니다. 아이가 전혀 재능과 적성을 갖추지 못했는데 기대만 터무니없이 부풀려, 자라서는 과대망상 허언증 환자가 되어 나이 육십이 되고서도 정신 못 차리는 한심한 예도 보지 않습니까. 그런 훈육도, 이 책에 나오는 폭력 부모의 방식과 크게 다르다 할 수 없습니다.

"오빠랑 사이가 안 좋았다는 것 알아요! 하지만 어떻게 이런 잔인하고 비열한 방법으로 복수할 수 있죠?" 손아래 시누이는 폭언을 퍼붓고, 손위 시누이는 따귀를 때립니다. DNR에 서명하고 연명치료를 중단하자 시월드(....)에서 찾아와 퍼붓는 언행들입니다. 물론 망상의 투영으로 남편을 도구처럼 활용하려다 뜻대로 안 되자 발악과 원한만 남은 졸혼 부부도 세상에는 있겠으나, 보편적인 부부의 삶이 또한 어찌 그렇겠습니까. 미운 정 고운 정 다 쌓이면서 그렇게 비슷한 시기에 한 생을 마쳐 가는 거죠. 결국 저자(의사)는 망자의 딸에게 전화를 걸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용기 있는 결단이기까지 했다며 차분한 설득을 벌입니다. 이후 노부인은 의사에게 전화를 걸어 왔다는군요. "평생 쌓인 억울함이 다 씻긴 것 같아요!" 이런 경우, 비록 배우자라고는 하나 자신만의 결정으로 진행할 게 아닌, 시댁 인사들과 충분히 협의를 거쳤더라면, 적어도 사전 통고는 하고 의사의 의견도 듣게 했다면 이런 험한 풍경이 벌어지지 않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때로는 같은 의료진 간에도 의견 차이가 생깁니다. 항암 치료임상 실험 중인 환자가 갑자기 뇌출혈이 생겼는데, 경험 없는 레지던트는 수술을 권하나, 이 저자분은 혈소판 수치가 너무 낮다는 사실을 들어, 수술 성공 가능성이 매우 낮고 성공한다 한들 중증 장애가 남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말합니다. 암병동 레지던트와 그를 지도하는 주치의는 자신들을 무시한다며 불쾌감을 표시하지만, 환자의 복지와 행복이 최우선이라고 판단한 저자는 자신의 결정에 후회가 없습니다. 병원 안에서도 "정치"가 필요한 엄연한 현실을 감안할 때, 이 저자의 행동은 환자 입장에서라면 참으로 고마운 처신이 아닐 수 없습니다.

"DNR 동의서를 작성하는 것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치한다는 뜻은 아니다.... 환자와 공감대를 형성하고, 죽음이라는 고요한 골짜기까지 환자를 배웅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이다." (p89)

대만 최고의 호스피스 전문의께서 들려 주시는, 인생의 마지막 무대에서 각양각색의 슬픈 제스처와 소통을 연출하는 모습들을 보고, 언젠가는 우리 모두가 겪게 될, 치러 내어야 할 아픔임을 공감하며 마음이 무척 숙연해졌습니다. "아름답게 죽음을 맞을 권리를 누리고 싶다면, 우리 모두는 준비해야 할 게 무척 많다." 언제나 알기 쉬운 언어로 소통해야 환자와 그 가족들의 아픔이 그나마 덜어질 수 있다고 믿는 저자의 말씀입니다. 또한 저자는, 이런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아 자신과 가족의 아픔을 최소화하려면, 평소의 식생활 습관이 철저히 절제된 것이라야 한다고도 조언합니다. 아무리 현대 의학이 발전해도, cure가 불가능하고 오로지 care만이 가능한 경우가 아직은 훨씬 많습니다. 이런 호스피스 전문의가 최상의 식견과 인도주의를 발휘하시는 한, 우리 사회는 아직 살만한 곳임이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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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신화, 재밌고도 멋진 이야기
H. A. 거버 지음, 김혜연 옮김 / 책읽는귀족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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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에 대한 총체적 조명, 개별 신화에 대한 인문적 추적은 19세기 여러 저자들에 의해 활발히 이뤄졌습니다. 이 책이 쓰여진 연도는 1908년이긴 하나, 이런 체제로 신화, 전설, 혹은 반(半) 신화화한 역사에 대해서는 이보다 앞선 시기 어떤 스타일이 이미 잡혀 있었지요. 저자가 엄연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문체와 구성이 서로 닮아 보이는 듯, 각 저작들이 이상하게도 기시감을 부르는 건 이 때문입니다.

H A 거버 여사는 이 책으로 큰 문명(文名)을 얻었고, 쓰여진지 근 백여년이 지났음에도 이 책은 북유럽 신화의 입문서로서 고전처럼 애독됩니다. 여사가 본문 중에서 인용하는 여러 문화인류학 이론은 오늘날의 관점에선 다소 생경하거나, 그 유효성이 퇴색한 대목(이를테면 "아리안 족"의 기원과 이동 과정에 대한 언급)도 두어 군데 발견됩니다. 허나 여사의 성장 배경, 일생을 두고 취득한 탄탄한 인문적 교양이라는 자산의 막강한 위력 덕분에, 어느 책에서 만나건 불문하고 그녀의 문장은 유려하고 관점은 세련되었습니다. 근본 없는 비천한 밑바닥 망상 허풍쟁이, 뇌신경망이 총체적으로 부패한 쓰레기가 속성으로 흉내낼 수 있는 미덕이 결코 아니죠.

H A 거버 여사는 이 책 외에도 게르만 신화에 대해 자신만의 연구 성과를 잘 집약시킨 여러 저술을 써 내었으며,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한 아름다운 앤솔로지도 훌륭한 문학적 기틀 안에서 완성한 바 있습니다. 이처럼 튜튼 족, 나아가 코카서스 인종 일반이 유산으로 공유하다 오랜 세월을 거쳐 각양각색으로 분기한 "신화"는, 다른 민족의 신화와는 달리 서로 매우 닮은 점이 많고, 특히 개별 신들의 개성이라든가, 화소들이 모여 이룬 전(全)체계에서, 놀랄 만큼의 유사성을 공유합니다. 책 마지막 29장은 그리스 신화와 이 노스맨 미스의 공통 구조를 집중 분석하는데, 마치 로마 시대에 활약한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을 읽는 듯한 느낌입니다.

븍유럽 신화는 계몽주의와 근대성, 합리주의, 개인의 자유를 특히 이상화한 낭만주의가 유럽을 휩쓴 이후에는 그리 낯선 화제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벌써 이 책에도, 월터 스콧 경이라든가, 매슈 아놀드라든가, 윌리엄 모리스, 롱펠로 등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는 대 문장가들의 작품이 부분 인용되어, 해당 장, 절의 테마가 된 신, 사건, 장소의 의의를 밝히고 문학적 감흥을 불어넣는 데에 요긴히 한몫을 거들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책은 이런 다양한 저자들, 문인들의 아름다운 문학적 자취를 그윽히 짚고, 책 한 권에서 집약 감상하는 맛으로도 더욱 가치를 높이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낯선 고장에 전하는 옛날 이야기의 기괴한 분위기에 젖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아동용 편집본에 만족하거나, 싸구려 막장 드라마의 흉포한 감정 격동 장난에 몸을 맡기는 편이 훨씬 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신경망과 해마와 윤리감정과 꼬리뼈가 모두 파괴된, 구제 불능의 썩은 거짓말쟁이로 타락하는 것이겠고 말입니다.

책은 표기 원칙을 서두에서 밝힙니다. 예컨대 "토르", "티르" 등은 노르드 문자 þ로 시작하는데, 이는 철자상 th(발음기호 θ)이므로 외래어 표기 원칙상 "소르", "시르" 등이 맞긴 하나, 이미 저 표기가 굳었으므로 그대로 쓴다고 말합니다(이 책 p4 중간 부분). 저 역시 헐리웃 블록버스터의 제목이 그대로 "토르" 등으로 쓰이는 모습이 당혹스러웠는데, 영어는 물론 북유럽 현지인들의 관습에도 맞지 않는 이런 관행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겠습니다. 참고로, þ라는 문자는 무려 영국에서도, 중근세까지 일반 텍스트, 출판물에서 널리 쓰이던 것입니다. 영어에 이런 음소가 남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아득한 북유럽 문화가 얼마나 깊고 폭 넓은 영향을 영국인들에게 남겼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여튼 이 한국어 번역본은, 이런 문제에까지 세심히 원칙을 정한 후 텍스트의 정확한 옮김을 꾀했다는 점에서도, 우리 독자들에게 여러 유익한 정보와 교훈을 전달하는 셈입니다.

그리스 신화도 그렇지만, 이 북유럽의 흥미진진한 체계 역시, 인격신들의 갈등과 사랑, 집착과 좌절 등을 역동적 사연 속에 풍성히 표현함으로써 청자(독자)에게 정서적 고양과 윤리적 교훈을 전달함은 물론, 사연의 구조랄까 moral을 한 마디로 요약하는 여러 숙어(idiom), 관용구의 파생까지 유발했습니다.

이를테면 이 책  p150:14, p533:3 두 군데에 걸쳐 나오는(이 두 군데 말고는 안 나옵니다) "레딩에서 벗어나기, 도르마 끊어내기" 같은 노르딕 숙어는, 신화적 배경을 모르고서는 도저히 연원을 짐작할 수 없죠. 또 저자께서는, 이 숙어가 예컨대 그리스 신화에서 비롯한 "스킬라와 카륍디스 사이" 같은 표현과도 매우 유사하다고 지적합니다. 영어에는 "between a rock and a hard place" 같은 말이 있겠죠. 단 이 책에는 매번(두 번이지만) "도르마"라고 표기되나, 원어는 "Droma(드로마)"입니다. 또한, 여사는 곳곳에서 해당 신화가 각 지역의 풍습과 언어 습관에 남긴 영향을 짚는데, 이를테면 p165:5에서 "자랑하다, 뻐기다"의 뜻을 담은 동사 brag의 기원을 짚는다든가, p207:5에서 아예 여신 Freya의 이름이 "구애하다(woo)"라는 뜻을 지닌 동사로 쓰인다든가 하는 사례를 짚는 대목이 특히 좋았습니다. 요일 이름이 티르, 오딘(보덴), 토르 등에서 유래했음은 물론 당연히도 언급하고 넘어가죠.

엘프는 톨킨 경의 고전 <반지의 제왕> 때문에 국내에서 유명해졌는지 모르나, 알고보면 이처럼이나 기원이 오래된 "캐릭터'입니다. 책(p377)에서는 달빛을 타고 지상에 내려와 풀밭에서 춤을 추는 엘프들의 정경에 대해 아름답게 묘사합니다. 바로 이처럼, 독자의 눈 앞에 신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가장 아름다운 심상을 생생히 묘파하는 게 일류 저자만의 능력이며, 우리 독자는 그 문장의 힘을 입어 우리의 상상을 한층 높은 단계로 끌어올릴 수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역자는, "실제 이 고리는 버섯 때문에 생긴다"며 친절한 텍스트 안 주를 달고 있는데, 역시 우리 독자에게는 유익한 정보입니다.

이 책에는 B E(버나드 에반스) 워드의 유명한 그림 <훌드라의 님프들>을 비롯, 여러 폭의 명화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모두 H A 거버 여사의 책 초판에 수록된 자료들이며, 이 한국어 번역본에서 일일이 재수록하는 수고를 베푼 건 독자들에게 큰 봉사를 해 준 셈입니다. 뿐 아니라 권말에는 각 작품의 제목까지 따로 인덱스화했고, 아울러 이름 소사전을 겸할 수 있게 주요 신, 정령, 괴물 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두었더군요. 좋은 책은 그저 읽을거리로도 재미있고, 정보가 필요해서 찾아볼 때에는 그것대로 따로 유익한 출전 노릇을 해 주는데, 이 책이 정확히 그런 유익한 양서에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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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기억하라 - 징비록
정종숙 지음 / 북스타(Bookstar)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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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이건 집단이건, 과거의 치명적인 실수를 자각하고 그로부터 소중한 교훈을 얻어, 다시는 같은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내면화된 후라야, 그 개인(혹은 집단)에 비극적인 운명이 거듭 닥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허나, 우리 주변의 많은 이들은 이런 가르침에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back in the habit, 인간 좀 되라고 베푸는 충고와 훈육에, 못난 에고는 "이대로가 뭐 어때서?"라고 발끈해하며 오히려 종전보다 더 어리석고 자멸적인 오류로 깊이 빠져듭니다. 사람이건 집단이건 배배 꼬인 못난 심사가 거의 예술의 경지에 달한 모습입니다. 못나게 살아온 과거, 엉망진창으로 뒤섞인 현재를 모두 왜곡하고, 그도 부족해서 손상된 두뇌, 형해화한 기억(이미 썩어 문드러져 기억이라고 부를 수도 없습니다)으로부터 말도안되는 거짓을 지어내어 사실인 양 고래고래 떠들기까지 합니다(현실이 아닌 망상 속에서만 사는 인간이죠). 개인의 경우라면 명예훼손과 무고죄를 걸어 감옥에 보내 교화를 이룬다고나 하겠습니다만, 집단의 경우는 대체 어떻게 해야 정신을 버쩍 들게 하여 짐승이 아닌 인간으로 거듭나게 도울까요?

서애 유성룡은 미증유의 전란을 맞아 민족 전체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놓인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우선순위를 매겨 가며 난제를 해결했고, 저마다 제각각의 목소리를 내는 대소신료들간의 불협화음을 조울했으며, 점령군보다 까다롭게 구는 명 측의 장수들을 일일이 달래고 어르느라 자신이 모시는 나라님보다 더 노심초사하던 7년을 지새웠습니다. 국망의 순간을 넘겼으나, 현명한 그의 시선으론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해 또다시 구태(舊態)로 회구하는 주변을 보고, 가슴에 사무치는 기록을 남겨 당대와 후손 그 마음가짐을 단단히 추스리게 해야겠다는 결의를 가졌습니다. 그 징표가 바로, 국보 132호로 지정된 <징비록>이며, 지금 리뷰하는 이 책은 방송작가 정종숙님이 쓰신 그에 대한 친절한 해설서입니다. 정종숙 저자님은 한솔교육 등에서 출간된 여러 어린이용 도서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분입니다.

유성룡의 <징비록>은 우리 조선에서뿐 아니라, 명과 일본에서도 널리 읽힌 "당대의 화제작"이었습니다. 정종숙 저자님은 책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 노량에서 이순신이 적의 흉탄에 맞아 유명을 달리할 무렵, 서애 역시 탄핵을 당해 직을 내려놓아야 했다..." 구체적으로는 이후 북인의 영수로서 정국을 전횡하다 인조반정(일단 "반정"이라고 하죠)때 대숙청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정인홍이 직무태만을 이유로 그의 태도와 능력을 걸고넘어졌기 때문입니다. 정인홍 역시 공과 과가 뚜렷한 인물이긴 하나, 이 대목에서의 국력 소모, 국론 분열은 참으로 부적절한 처신이었다고 여겨집니다. 억울한 죽음을 맞긴 했으나, 어찌 그 쌓인 죄과가 적었다고 하겠습니까?

여튼 이 때문에 서애는 영영 벼슬을 잃었고, 뉘우치기도 잘하는 선조가 그를 다시 조정에 불렀으나, 사양하고 내내 자택에 칩거하여 깨끗한 이름을 지켰습니다. 심기가 불편해서가 아니라, 간곡한 언사를 통해, 이미 병을 얻은 노구의 처신이 자유로울 수 없다는 진정어린 사의(辭意)를 임금께 전달한 과정이 따로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일종의 흥정이나 "몽니"를 부리는 소이라면, 이는 중대한 불충이자 뼈대 있는 사대부 출신 원상으로서 오히려 부끄럽고 격 떨어지는 처신에 해당합니다(밑바닥에게는 아예 이런 개념이 없죠). 그가 노년에 칩거한 고장은 오늘날 "하회마을"로 유명한 안동이며, 본관은 풍산이고 출생지는 인접 의성이지만 외가가 안동입니다. 그의 직계 후손인 탤런트 류시원 가족이 소유한 고택(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이십여 년 전 방한했을 때 신을 벗고 마루에 올랐죠)이 안동에 자리한 이유도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처럼 한 발짝만 걸어도 자랑스러운 조상들의 흔적이 곳곳에 스민 경상도 해당 지역민의 높은 긍지는 번거롭게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실패한 과거, 부끄럽고 부족한 자신,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오, 현재까지도 관리에 실패하여 파탄이 난 환경, 이런 것들을 왜곡하고 윤색하고 제 편할 대로 꾸며댄다면, 그런 영혼은 구제불능으로 타락하여 영원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원문 그대로는 아니고 독자인 제 기억에 의존했습니다) 이런 저주받은 나쁜 습성은 대개 타인에 대한 얼토당토 않은 중상모략, 뻔한 거짓 망상으로까지 이어지는 게 보통이라, 경솔하고 천박한 처신이 얼마나 중대한 결과(전과자가 된다거나)로 이어질 수 있는지 우리는 가까운(혹은, 이제 곧 가까워질) 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전시 내각을 이끈 최고위직 관리의 반성문이자 국난 극복의 역사 철학서". 바로 이 구절에서, 우리는 저자의 역사 인식이 얼마나 정확히 현실을 꿰뚫고 민족의 올바른 각성을 정당히 촉구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당대 관념으로 왕이 수도를 비우는 그 자체가 이미 망국의 신호탄이요, 몽진의 행렬이 국경을 넘는 그 순간 국권이 포기되었음을 선언함이나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때로부터 800년 전 당 현종이 안사의 난을 맞아 서방으로 피신했을 때도, 아들 중종에게 보위를 물려준 후에야(완전한 자의는 아니었지만) 비로소 발길을 떼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무능하고 우유부단하며 때로는 대책 없는 독선에 빠져 자신과 주위를 모두 위기에 몰아넣었던 부족한 군주였다고는 하나, 귀한 신분으로 태어나 거물 왕족의 사저에서 금지옥엽처럼 자란 분이 이처럼이나 모진 고초를 겪은 것도 안타깝기는 한 일입니다.

명이 이여송, 조승훈 등을 앞세워 참전했다고는 하나, 왜의 강력한 역공을 겪은 후에는 전의를 상실하고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동병을 회피했습니다. 서애는 이런 이여송에게 간청도 하고, 국토 수복을 조선 조정이 이룸이 바로 명 제국의 안보에도 직접 기여하는 전략적 선택임을 정연한 논리와 빈틈없는 근거를 대며 설득에 나섭니다. 허나 탐욕과 비겁함으로 점철된 그의 인격은 이런 탁월한 통찰에 눈과 귀를 막았으며, 충무공은 이 와중에도 해전에서 왜를 연전 격퇴하는 전공을 올려, 침략군이 보급을 받고 원기를 회복하는 길을 원천 차단했습니다. 만약 이때 해상이 무방비로 뚫렸다면, 무능한 장수 이여송은 세 길로 진군하는 왜의 협공을 받아 평양성에서 궤멸했을 수도 있고, 재정이 부족하고 내정이 불안했던 명은 군사를 물려 한반도를 포기했을 지도 모릅니다. 이 경우, 풍신수길이가 전 중원을 먹는 오타쿠 만화에서나 볼 법한 사연이 현실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남에서 군사력으로 왜의 혼을 빼 놓았던 분이 충무공이었다면, 북방에서 내정과 외교를 통해 왜가 망상을 못 품게 동분서주한 분이 바로 서애입니다. 이 책은 이처럼, 남과 북의 두 영웅이 조국을 피땀흘려 구한 간절한 사연을 텍스트로 곱게 수놓고 있습니다. 왜와 명이 서로 눈치를 보며, 힘 안들이고 반도를 반분할 흉계까지 꾸미던 와중, 서애께서는 피눈물을 흘리며 명의 한심한 장군들을 설득하고, 이 강토가 비참하게 열강의 손에 분할되지 않게 만전의 노력을 기했습니다. 이때로부터 200여년 후, 호언촐러른, 합스부르크, 로마노프 세 제실(帝室)의 농간에 의해 폴란드가 과분된 역사를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번 휴지기를 맞은 전쟁은 풍신수길의 진노(심유경이가 중간에서 농간을 부린 게 폭로된 탓입니다)로 인해 다시 재연되기에 이릅니다. 서애의 비통함은 이 시점에서 극에 달합니다. 그러나 한심한 소인배들이 국정에 참섭하여 나라를 망쳐간다 쳐도, 자신까지 의욕을 잃고 손을 놓아 나라를 파탄지경에 방치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서애의 위대한 인격은 이 지점부터 그 본연의 빛을 발합니다.

책의 문장이 참 빼어납니다. 본래 작가님이 문장력이 좋은 덕분이겠습니다만, 이 임진란과, 사건을 다룬 소재인 <징비록> 원문, 그리고 집필자 서애의 철학과 인품에 일일이 저자가 공명 공감하며 글을 쓴 이유가 더 크지 않았을까 짐작합니다.

"나의 조선과 당신의 대한민국이 대체 다른 게 무엇인가?"
서애는 지면을 통해 우리 후손들에게 이처럼 준엄한 가르침을 내리고 있었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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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그리고 이후 500년 - 16세기 유럽부터 21세기 한국까지
라은성 외 지음 / 을유문화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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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살려 주시면 수도사가 되겠습니다!"

사람이 그 생명의 위기를 맞았을 때, 성인, 절대자, 조상님, 혹은 의지하고 싶은 그 누구에게라도, 간절히 이름을 외치며 "이 고비만 넘게 해 주시면" 뭐라도 하겠다며 존재를 건 소망을 부르짖는 건 과연 인간의 통성일까요? 안 그런 사람들도 많을 겁니다. 자신의 무력함을 통감하며 에고를 송두리째 버리고 무엇의 발밑에 매달리는 건, 어떻게 보면 평정심을 잃었다는 뜻입니다. 일단 평정심을 잃은 이라면, 자신이 처한 위기를 냉정하게, 현명하게 빠져나올 가능성은 더욱 낮아질 수 있습니다. (참고로, 해당 종교에서는 불완전한 피조물의 오만, 교만을 버린다는 뜻에서, 절대자의 권위를 오롯이 의지하고 겸허해지는 저런 심적 상태를 오히려 권장합니다만 저는 일단 종교를 떠나 평범한 상식인의 관점에서 하는 말입니다. 이 점 관련, 신앙을 가진 분들의 양해를 일단 구하겠습니다)

이런 무력감과는 반대로,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며 행여 무지와 소양부족이 들통날까 신경질적인, 거의 광기 직전의 작위적 분노 상태로 자신을 몰아가며 과잉방어를 일삼다 코믹하게도 자기 발등을 찍는 것도, 저런 철저한 무기력과는 설혹 그 방향이 서로 반대일지는 모르나 어리석음의 극치를 폭로하는 행태라는 점에서는 하등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사람, 혹은 조직 개성의 됨됨이란, 그래서 엄혹한 잣대를 들이대어 본 후에야 그 진가가 드러나기 마련이기도 합니다. 이 잣대는 또한 세월의 검증까지도 포함합니다.

마르틴 루터가 자신이 근무하던 대학의 한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내 건 것이 1517년입니다. 역사는 이 사건을 두고, "종교 개혁(Reformation)"의 시초점으로 삼습니다. 올해를 두고 종교 개혁 500년 기념의 해로 삼는 건, 바로 이 위대하고도 역사적인 "선언, 고발, 혁명의 단초"를 염두에 둔 것입니다. 그로부터 무려 500년이 흘렀습니다. 개혁교회(개신교)는 당시 자신이 개혁의 대상으로 삼았던 로마 가톨릭과 그간 얼마나 다른 길을 걸었을까요? 혹시 500년 전 자신이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던 대적(archenemy)과 서서히 닮아가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않았을까요? 타락하고 부도덕한 "대상"이 굳건히 버티고 있더라도, 그를 비판, 타매하는 것만으로 자신의 도덕성이 절로, 또 지속적으로 담보되는 건 아닙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성찰과 거듭남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초창기 여리고 약한 씨앗이 대지로부터 갓 솟아날 때 자신의 약함을 채 돌볼 여유가 없었다면, 이제 오백 년의 세월을 버텨낸 거목으로서 자신의 나이테가 동그라니 올바르게 형성되는지, 거울에 비추어 스스로를 반성할 때입니다. 이 책 p185에도 헤겔의 변증법이 잠시 언급되어 있습니다만, 자체 개혁을 멈추고 자기 만족에 빠지는 그 순간, 정신이든 육체든 건강한 생리 작용, 대사가 멈추고 "부패"하기 마련입니다.

제가 이 서평 맨처음에 인용한 저 외침은, 마르틴 루터가 그의 나이 열 아홉 살 때 어느 한적한 숲 속을 지나다 느닷 험악한 폭풍우에 직면하고는, 그 생명에의 위협을 느끼며 한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황제와 교황, 둘은 정치적으로 대립하면서도 이 일개 시골 사제인 마르틴 루터가 일으킨 정풍 운동에 대해서는, 더 파장이 커지기 전에 조기 진압해야 한다면서 서둘러 손을 잡았습니다. 그 험난한 과정에서 지혜롭고 정의로울 뿐 아니라 용감무쌍하기까지 했던지라 어떤 위험에도 굴하지 않고 맞선 이 개혁가였건만, 어린 시절 어느 외진 곳에서 맞은 일개 자연 현상의 격변 앞에서는 저만큼이나 약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정말로 성 안나의 가호라도 있어 그 순간(과연 위험한 상황이었는지의 여부조차 불확실합니다만 - 주관적으로 과장된 공포였겠지요)을 계기로 큰 각성을 이룬 후, 진실되고 튼튼한 확신으로 자신의 정신을 재무장, 이후 보다 "큰 인물"로 거듭나는 계기로 삼지 않았을까도 생각해 봅니다. 진실로, 마르틴 루터 만큼이나 소신과 진리, 신앙에 대한 열망 하나로, 오직 신만을 바라보며 한길을 걸은 신념의 인간이, 인류 역사상 몇 명이나 있었을지, 그 지난 행적을 돌이켜보면 그저 아찔해질 뿐입니다. 그의 신조와 사상에 동의를 하건 않건 무관하게, 이런 굽힘 없는 지조와 절개의 순일성에 대해서는 그저 고개가 숙여지는 게 당연합니다. 동양에서는 신체가 찢기는 아픔, 구족(을 넘어 십족)이 멸해지는 극한 상황에서도 "의견을 철회하지 않았던" 호유용 같은 이가 이에 비길 수 있겠습니다(그런 이의 분투가 있었기에, 권력의 탄압 앞에서도 유학의 정맥이 끊이지 않고 이어질 수 있었죠. 여러 모로 루터에 견줄 만합니다).

"루터는 로마 감독들이 결코 베드로의 계승자들이 아닐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그 어떤 다스리는 권한도 부여하지 않았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p39. 단, 몇 개 조사와 관형어는 리뷰어인 제가 임의대로 첨가했습니다[두 개밖에 안 되고 아주 사소한 변형입니다^^]. 책 원 인용문 중 "감독"이란 단어는 이 책에서 가톨릭 측의 "주교"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입니다. 특히 이 대목에서는 그냥 주교도 아니고 "교황"을 가리키는데, 로마 대주교의 수위권을 인정하지 않는 입장에서는 저런 용어례가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이 대목은 1519년 라이프치히에서 열린, 로마 가톨릭측 대변자 격인 에크(라틴어명 에키우스)와, 마르틴 루터 사이에 열린 그 유명한 논쟁 직전의 상황을 요약한 구절입니다. 교황 자신이 신성 불가침의 권위를 내세우기도 하고, 어리석은 민중에게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절 저런 대담한 주장을, 다른 동기가 아닌 양심과 내적 확신에 의해 도도히 펼칠 수 있었다는 자체가 경이롭고도 경이롭습니다. 이 챕터의 서술은 일일이, "가톨릭"이 아닌 "로마가톨릭"으로 필자께서 용어 채택을 하시는데, 아무것도 아닌 듯 보여도 표기 하나에조차 심각한 신학상의 "입장 표명"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 챕터 말고 다른 저자들께서 담당하신 대목에는, 그런 원칙이 완화되어 있습니다^^. 저자마다의 다른 성향이 단어 하나의 사용에서도 다 짐작되죠)

종교개혁사에서 루터가 가장 중요한 인물임에는 틀림 없습니다만, 이 책은 종교개혁의 시원뿐 아니라 이후 전개된 500년사를 개관하는 성격이므로, 분량은 매우 잘 균형 잡혀 각 토픽에 적절히 할애되었습니다. 칼뱅에 대해서는 그간 그의 강경하고 타협 없는 태도만 부각되었습니다만, 저자는 시야와 논의의 밸런스를 잘 조정하여, 이를테면 "병을 달고 살았던 허약한 체질", "제네바에서 줄곧 불체자로 살았던, 알고보면 취약하기 짝이 없었던 정치적 지위" 등을 거론합니다. 세르베투스를 활활 타오르는 형주에 묶어 이단자의 최후를 쏘아본다든가 하는 공포 독재자의 이미지는 사실과 거리가 멀다는 취지이겠습니다. <기독교 강요(綱要)>는 (이 책에서 친절히 설명하는 대로) 생의 후반부에 그가 심혈을 기울여, 개인(위대한 개인, 지도자로서)의 관점과 신앙의 바른 태도와 교의 등을 한 권, 단 한 권에 압축해 넣은 저서인데, 책 한 권에 자신의 원대한 입장을 모두 담은 이는 앞으로도 나오기 힘들 것이라라는 게 필자의 평가입니다.

저는 특히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의 생애와 사상을 다룬 대목이 흥미로웠습니다. (서평 앞부분에서도 적었습니다만) 사람은 그가 입으로 무슨 주장과 긍지를 내세우건 간에, 죽음에 이르는 위기 앞에서도 초연히 그 스탠스를 견지할 수 있느냐를 놓고 참된 인격적 가치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존 웨슬리는 북미를 주유하며 풍랑이 몰아치는 중 여러 차례 항해의 위험을 겪으면서도 태연한 모라바 교도들을 보고 그는 이렇게 묻습니다.

"무섭지 않으십니까?"
"주님이 우리를 지켜 주시기에 무섭지 않습니다."

남자들뿐 아니라 여성, 어린이들까지 이런 태도를 가진 걸 보고, 웨슬리는 "자신에게는 없고, 그들에게는 있는 무엇인가에 대해(p162)" 깊이 성찰하게 됩니다. "선행적 은혜, 믿음을 통한 개인적 구원" 등은 그때까지의 정통파 개혁교회의 입장과는 거리가 꽤 먼 것들이었습니다. 이 챕터 저~ 앞부분에 보면 저자께서 중세 교회의 위기를 거론하며 "스콜라 학파의 보편 아닌 개체 경도"를 언급하신 대목이 있는데, 이 "개인적"이란 말뜻을 그 맥락과도 연결시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전에도 한번 말했습니다만 특히 종교학 서적의 어휘들은 추상적이면서도 일상, 상식의 범주를 벗어나는 usage가 많아, 정확한 독해는 맥락을 떠나서는 전혀 이뤄질 수가 없습니다. 아무튼 제가 이 대목에 특히 흥미를 가진 건, 어떤 회심의 계기가 꼭 이런 자연 앞(그들에게는 "신"을 연상하기 충분한)의 작은 존재감 앞에서 이뤄진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p165에 보면 조지 화이트필드 이야기가 나오는데, 전설적인 대 부흥사로서 2마일 밖에서도 그의 설교를 듣는 이들이 있었다는 대목이 있죠. 3.2km면 조깅이나 걷기 운동 코스로도 무난한 거리인데, 아무리 우렁찬 목소리를 가진 특별한 개인이라고는 하나 과연 그만한 범위까지 자신의 음성을 식별력 유지하며 전달할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이 책에 전혀 언급이 없지만, 우리가 잘 아는 고전 <프랭클린 자서전>에 벤자민 프랭클린 자신(그와 비슷한 시대에 살았죠)이 실험을 통해, 특별한 지형적 조건 등 여러 제약 하에서 재현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 적 있습니다. 그런 문제에 대해서까지 손수 실험 장비를 갖추고 뭘 증명하려 든 성의와 열정에 미소가 지어지기도 하죠.

1부의 비중이 나머지 2, 3부를 합친 분량보다 더 많습니다만 이는 이 책의 성격, 주제, 목표가 "종교개혁사 500년의 개관"인 만큼 당연하고 타당한 태도입니다. 개혁교회 각 계파의 입장은 실로 구절양장입니다. 로마 가톨릭이 그 안에 해방신학(이단시됩니다만), 참여 노선, 고루한 정통 교리 고수 등 다양한 생각이 혼재하는 현실을 봉합하고 여튼 단일 교단, 공식 도그마를 유지하는 것과는 달리, "구절양장"이란 고사성어가 무색하지 않게, 개신교단의 각 입장은 너무도 세분화하고 각자의 고유한 교의를 표방하므로, 과연 "개혁교회"란 한 타이틀 안에 묶일 수 있는지조차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이런 교파마다의 세밀한 입장 차이를, 이 책 1부는 매우 요령껏 준별하여 서술했으며, 또 읽어나가다 보면 (비록 필자분의 선명한 주관이 간혹 두드러지긴 해도) 재미가 납니다. 레퍼런스로 활용해도 좋고, 이야기처럼 읽어가며 사항 정리를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2부와 3부는 한국 개신교회를 다룹니다. 2부는 한국 개신교회의 지난 이력과 발전사이며, 3부는 현 시점 교회의 위상과 성취, 문제점과 과제 등을 집중적으로 분석합니다. "근대적 선교 운동"의 의의에 비로소 눈 뜨며, 그 이전 시대가 주로 구교측 예수회 선교사들이 세계를 누린 것과 대조적으로, 19세기부터는 선교사 하면 대뜸 "개신교 선교사"를 연상케 될 만큼 해외 신앙의 불모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2부 처음에 윌리엄 캐리가 논의되는 건 이러한 배경 때문이며, 다만 로버트 토머스 등은 조선 선교와도 직접 연관이 있습니다. 책의 설명은 정확하게도 "중국 내지(inland) 선교의 일환으로 조선에도 그 영향이 미쳤다"고 하는데, 개신교 용어와 인명 음차 상당수가 아주 낯선 한자어들인 건 이런 사정에서 연원합니다.

2부는 이어서 일제 강점 하의 조선 민중, 아동, 여성을 계몽하고, 신사 참배 등을 거부하며 민족 해방과 신앙 노선을 용감하게 수렴시킨 교계 지도자들과 신도들의 노력에 대해서도 조명합니다. 이 역사는 한국 개신교가 어디다 내놓아도 자랑스러울, 말과 신념과 행동이 일치가 된 긍지와 보람으로 가득찬 궤적입니다. 남한은 아니고 저 북한 일대에 국한된 사실이긴 하나 1907년에 있었던 평양 대부흥도 세계 교회사(史) 전체를 놓고도 매우 특기(特記)할 만한 이정표라 할 수 있죠.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군인 출신 위정자들이 연이어 등장하며 권위주의 개발독재를 이끌 때 이에 민주주의 정신을 내세우며 항거한 역정에 개신교가 빠지면 또 될 말이 아닙니다. 개혁교회의 역사는 이처럼, 종교개혁의 발흥지로부터 지구 반 바퀴를 돌 만큼 멀리 떨어진 극동에서도 여전히 자랑스럽고 거룩합니다.

3부는 현황의 점검과 반성입니다. 매우 진솔되고도 정확한 진단이 정제된 문장 속에 독자의 문제의식을 자극하니 꼭 한번 읽어 본 후 숙고할 만합니다. 그러지않아도 종교인 과세 이슈가 현재 입법 단계에서 여러 논쟁을 부르는 현실입니다. 이 책에서는 이른바 "메가교회"와 "기가교회"를 거론하며, 신도 수와 세력과 재산이 1: 99(못 가진 교회와 가진 교회의 격차)의 분포를 이루는 충격적인 현상도 지적하며, 왜 "교회론"이 아닌 "교회 성장론"만이 화제가 되어야 하는지, 신실한 회개와 영성이 메인이 못 되고 숫자와 위세가 관심사의 복판에 놓이는 안타까운 현실을 지적합니다. 필자는 ("이웃 종교의 지도자")프란치스코 교황을 예로 들며, 소탈하고 격의 없는 자세로 세계인의 존경을 받는 그들과 달리, 왜 개신교(한국, 세계를 두루 염두에 둔 듯합니다)에는 이만한 인사가 최근 배출되지 않느냐는 불안감을 표시합니다.

독자로서 제 생각은, 그 답은 "마르틴 루터"에게서 찾을 수 있다고 보는 쪽입니다. 개혁은 땜질 처방이나 시늉이 아닌 본질을 향한 것이어야 하며, "restorative"스러운 게 아닌 초심으로의 회복(ad fontes)이라야 합니다. 개혁은 멈추면 그게 이미 개혁이 아닙니다. 중단 없는 회개와 개혁이야말로 신에 가까워지는 가장 바른 길임을 이미 루터는 오백 년 전에 우리에게 가르친 바 있습니다. 답은 바로 루터가 이미 가르쳐 주고 있었습니다.

"안나! (절) 살려 주시면 수도사가 되겠습니다!"

자신이 죽고사는 갈림길에 놓였음을, 정확하고 겸허하게 꿰뚫고 수용했다면, 이미 그 사람은 절반쯤은 답을 찾아 놓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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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MD : 브랜드 편 - 대한민국 최고의 슈퍼 MD가 알려주는 브랜드 큐레이션의 모든 것! 패션 MD 시리즈 2
김정아 지음 / 21세기북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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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에 편집숍("멀티샵, 셀렉샵"이라고도 국내에서 부릅니다) 브랜드 체인(일본의 "빔즈")에 근무하는 여러 직원들의 "집 이야기"를 묶은 책(제목은 <136명의 집>)을 읽고 서평을 남긴 적 있습니다. 현재 한국형 편집숍을 직접 운영하고 업계 원톱으로 일컬어지는 저자님의 책 1권(당시 1권이라고 제목이 붙진 않았으나 이렇게 2권이 나왔으니 이제 1권이 된 셈입니다)을 몇 년 전에 읽었는데, 길에서 별 생각없이 보고 지나쳤던 부띠끄의 경영과 활황 뒤에 그런 숨가쁜 노고와 고도의 센스가 녹아 들었다는 걸 알고 많은 생각이 들기도 했었지요. 당시 그 책을 읽으면서 "바잉(buying) 실력" 같은 낯선 용어를 접하고, 업계마다 천양지차인 논리와 법칙, 수완이 지배한다는 점 실감했습니다.

브랜드는 명품 마켓에서만 위력을 발휘하고 관련 종사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는 건 당연히 아닙니다. 그렇기는커녕 심지어 떡볶이가게, 보쌈집도 그 나름의 브랜드를 설득력있게 구축해야 매뉴팩처들의 실력,연구의 보람이 살아나는 법이지요. 브랜드는 현대 마케팅에서 고객, 대중과 접촉하는 유일한 채널이요 메시지를 전달하는 가장 강력한 미디어이자, 제품의 기능과 효용을 한몸에 압축하는 화체 이상의 실체이며, 차라리 "모든 것(everything)"입니다. 그래서 현재 가장 잘나가는, 최상의 감으로 업계를 쥐락펴락하는 슈퍼MD가 자신의 비결, 노하우를 털어놓는 책은, 어느 대목에서건 자기 일에 활용할 수 있는 영감을 얻을 수 있게 마련입니다. 저는 적어도 그런 기대를 갖고 책을 펼쳤네요.

이 2권의 주제는 "브랜드"인데,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트렌드를 만드는 브랜드, 브랜드를 만드는 트렌드"가 보다 세부화한 캐치프레이징이겠습니다. 브랜드 안에 집약되어 있는 시장의 모든 법칙을, 이성뿐 아니라 세련된 감성으로 탐구하되, 무모한 일반화보다는 신중한 귀납으로 결론과 미래를 도출, 예측해 보자는 의도겠습니다. 말이 이렇다뿐 일상에서 그래도 친숙히 접하는 브랜드의 흥망성쇠를 통해 마케팅과 경영의 이치를 더듬자는 것이니 꽤 재미있고, 좀 심하게 말한다면 보기만 해도 설레는 패션 브랜드(따라서 상당수는 크레이에터인 디자이너의 이름 그대로인)를 컬러사진과 함께 페이지 쇼핑하는 과정이니, 그냥 지면으로 눈호강한다 여기고 일단은 책장만 넘겨도 될 것 같습니다. 물론 저자(이자 MD)가 어떤 의미심장한 표현과 어구로 가이딩을 해 주건, 그로부터 뭘 얻는지는 독자의 능력이겠지만 말입니다.

p74에 보면 베라 왕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녀가 <보그>에서 그 어린 나이에 편집자로도 명성을 떨쳤다는 건 처음 알았고, 그녀의 컬렉션에 3만원짜리 드레스도 있긴 하다는 것도 몰랐던 사실입니다. 저자는 그 약점으로 "지나치게 갈래를 친 라인업이 전체 아이덴티티를 흐뜨린다"고 지적하는데, 동양인 특유의 야무지게 시장 전(全) 셰어를 갈무리하려는 습성의 표현이라고 저는 봅니다. 패션 관점에서는 못마땅하겠으나, 혹 패션 자체의 논리와 시장의 생리가 분기하는 대목이 있다면 좀 더 지켜봐야겠습니다.

저자분 개인의 회고와 여담도 재미있는데, 로즈로코 뉴욕(책에는 해당 백화점에서 철수했다고 나오지만 다른 곳에는 [사세가 많이 위축되었는지는 모르나] 여전히 영업 중입니다)이, 한국 전체가 외환 위기로 망국의 고통에 접근해 갈 때 쌩쌩히 잘나간(명품 바람이 분 건 이때부터입니다. 중산층이 날린 재산의 흐름이 고스란히 극소수에 유입될 무렵이죠) 과거를 잠시 언급하시네요. 베라 왕 이브닝드레스의 성급한 국내 론칭으로 이 샵이 치명타를 입었다는 분석이신데, 확실히 시장보다 반 발짝만 앞서가라는 조언이 여기서도 타당한 듯합니다. 여기서, "아름답고 세련된 용모의 대표"님은, E대를 나오신 그 U님을 말씀하시는 거겠죠? 승자의 여유가 느껴지는 서술이라 흥미롭기도 했습니다.(헉)

편집숍은 그냥 명품 부띠끄인가 보다 하고 넘어갔습니다만, 그 "편집"에는 엄청난 내공과 센스가 녹아있어야 하며, 앞의 베라 왕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 지면이든 웹이든, 매체이든 샵이든 간에 그 의미가 다르지도 않다는 점 새삼 배울 수 있었네요. 앞으론 그저 무심히 지나치지 말고, 저래서 저 랙에 저 브랜드가 놓여졌나 보다 하고 꼼꼼히 그 배후의 센스, 심리, 세계관을 관찰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긴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게 돈의 흐름과 수입, 승부에 관련된 문제인데 그저 최종의 과시 소비 욕구를 푸는 장소로 안이하게 생각한 자체가 큰 어리석음이죠.

너무 고가의 명품에는 눈이 잘 못 가고, 아무래도 본문 텍스트 중 "가성비"란 단어에 유의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당연히 전 남자지만 이런 건 여친한테 뭘 사줄 때에도 필히 유념해야 할 사항 아니겠습니까?) 이브닝드레스의 또 하나 심연(돈 없는 소비자에게)은, 그 화려한 의상의 구조 때문에, 다른 기회와 장소에서 두 번을 착용할 수 없다는 점이라고 저자는 지적합니다(글켔죠). 그래서 가성비의 미덕이 다시 강조되는 거겠지만요. p79에 보면 타다시 쇼지(의 브랜드)가 소개되는데(책에는 "다카[하]시 쇼지"라고 오식이 나오는데 그분은 가수죠),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레이스(의 디자인)은 물론 패브릭조차 돌체앤가바나 라인의 500~600만원선 작품(아이템)에 못지 않다고 하십니다. 제 막눈으로는 모르겠는데, 탁월하신 대표님께서 그렇다고 하시니 아주 잘 명심해 뒀다가 요긴하게 써먹겠습니다.

저자는 책 곳곳에서 "스트리트웨어 정신"을 강조하는데, 저는 이야말로 창의력과 기묘한 저항 정신이 결합해 "아큐파이 더 스트리트"로 사업적 성공을 거두기까지 한 놀라운 혁신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락&펑크가 샤넬 라인 한 모서리를 점유하기까지 하는 현실(이건 아이덴티티의 희석이 아니라고 저자는 판단하시나 보죠?ㅎ)은, 비유를 하자면 현재 KB가 부동산 앱에까지 진출해, 좋게 말해 고객을 속속들이 만족시키는 스트로잉 브랜칭 아웃, 나쁘게 말해 문어ㅂ.... 여튼 뭐 고객 입장에서야 걸치기 예쁘고 가격 착하면 된 거죠 뭐. 30년 전 쓰레기 취급이나 받던, 소외된 독자층 상대로 코 묻은 돈이나 빨아들인다고 비난의 대상이 되던 B급 문화는 이제 어엿이 주류로 편입하여 당당한 독자적 장르를 개척하기에 이르기도 했는데, 이런 패션 트렌드와도 결코 무관치 않습니다. B급 코믹스 폭력 문화 일부가 북유럽 신화 일부를 싸구려로 차용하여, 도시 하류층에 단단한 팬덤을 구축하기도 했는데(따라서 그런 컨텐츠는 원전이 아니라 2차 가공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현재 족보를 세탁하고 블록버스터로 둔갑한 영상물은 대단한 신분 상승을 이룬 거죠. 이런 게 무작정 끌린다며 얼토당토않게도 신화 원전과 연결하는 네티즌이 있다면, 그 취향의 근원이 가히 짐작되고도 남는다 하겠습니다.

과거에는 유니섹스라고 했습니다만 젠더리스 컨셉은 여전히 현대에도 두루 무난하면서도 젊고 도회적인 분위기를 창출할 수 있는 유효한 외양이라 생각합니다. 저자는 자신의 샵에 어울리지는 않아 바잉은 염두에 안 두지만(역시 저의 감각으론 속속 납득이 안 되는 평가이십니다), 다른 편집숍(더 젊은 층을 염두에 둔- 아 그런 뜻이였군요 이제 겨우 접수)에는 코너에 따라 훌륭한 서브 밸런스를 구현할 수 있으리라는(요 대목은 그냥 저의 표현입니다) 조언을 베푸시는군요.

저자는 스테판슈나이더(브랜드)를 소개하며 "전형적인 유러피안 감성의 파스텔 컬러 팔레트로 똑떨어지는 스타일을 보여준다"고 하십니다. 잘은 몰라도 왠지 그럴 것 같습니다. 저자는 앤 드뮐미스터(우리나라에선 이렇게들 쓰는데 정확히는 "드묄러메스터"입니다. ee는 "이"가 아니라 "에"의 장음이라서요)와 이분이 학교 동기라는 점까지 거론하시는데, 이 책에서는 드뮐미스터를 독립 항목으론 안 다룹니다.

"트래디셔널 미니멀룩이야말로 트렌드나 유행에 관계없이 오래 입을 수 있는 옷이다." 저자가 이 책 곳곳에서 펴는 지론 중 하나입니다. 결론은 "(그렇기 때문에) 좋은 브랜드의 고급스러운 룩을 구매하라"는 겁니다. 이런 좋은 충고가, 돈도 없는 주제에 잔돈푼 월급 모아 지가 걸칠 명품만 자나깨나 생각하는 정신 빠진 인간 좋으라고 하는 말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빅토리아 베컴을 두고 "코스의 의상은 예쁘다. 그러나 진정한 럭셔리 라인의 미니멀리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2% 부족하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다고 저자는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착한 가격이 거의 모든 사소한 불만족을 용서할 수 있다는 말씀도 좀 씁쓸하게 공감되는군요.

책에서는 역시 대세를 충실히 반영하여 스칸디나비안 룩을 따로 한 챕터 분량의 분석, 소재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 중 앤 소피 백(안 조피 바크)은 꽤 긴 역사를 자랑하는 브랜드입니다만 저자께서 지적하시는 대로 "지적이고 스타일에 신경 쓰면서도 혁명적인 이미지를 좋아하는" 여성들에 의해 (여전히) 선호, 지지되는 디자이너의 작품들입니다. 책의 바로 직전 편 "아방가르드"에 분류되었어도 잘 어울릴 성격이었죠. 필리파케이, 타이거 오브 스웨덴 등 유서 깊은 명품이 있는가 하면, 세실 코펜하겐 등 "어린(저자의 표현)", 그리고 패기넘치는 컬렉션도 있습니다. 바이킹의 시대가 저문 지 천 년이 지났어도 유럽 게르만의 아득한 원류, 순혈이라는 고유의 혼과 자부심이 있기에 이토록 긴 역사를 면면히 이어 오며, 1차 산업과 가공업 외에도 이런 고부가가치 산업의 한 핵심을 영위해 나가는 거죠.

저자는 영어 이름을 Anya로 쓰신다고 하는데, 이름이 같은 가방 브랜드 중 안야 힌드마치라는 곳이 있는가 봅니다. 전세계에 여섯 곳만 운영되는 매우 희귀한 스토어인데, "고객이 자사 제품과 함께 자신이 그린 그림 혹은 손글씨를 가져 오면 장인이 그 자리에서 수를 놓아 주거나 새겨 준다(p391)"고 하는군요. 이 브랜드가 특히 인기 높은 곳이 일본인데, 저자는 그 이유를 "장인과 고객을 이어주고자 하는 브랜드의 노력을 알아주는" 분위기 덕분이라고 합니다. 그러고보니 우리 소비자들은, 브랜드나 디자이너만 떠올리지 만드는 장인의 수고는 그리 염두에 안 두는데, 소비자뿐 아니라 브랜드에서도 다들 장인을 그리 각별히 대접하는 풍토인 것만도 아니라고 봅니다. 책에서는 그 점을 환기시켜 주어 유익했습니다.

에필로그에는 역시 멋진 말씀이 많이 나오네요. "패션은 살아 있는 생물이다." 이 말은 한국에서는 어느 정치인이 자신의 종사 분야인 정치를 주어 삼아 코인한 구절인데, 직업인 모두가 명심해야 할 사항 아닌가 생각합니다. 정해진, 아주 제한된 범위만 딱 설정해 놓고, "조거 이상 일하면 내가 손해"라며 딴짓이나 하다간 반드시 퇴출됩니다. 목표는 언제나 살아 숨쉬며 종사자를 리드하고, 마치 헬라 신화의 프로테우스처럼 모습을 수시로 바꾸며 관찰자의 눈을 어지럽히기 마련입니다. 고착되어 과거만 주시하는 자는 반드시 낙오합니다. 저자께서 지적하듯 현재 유통 빅 3(현대, 롯데, 신세계)가 주도하는 업계의 재편 전망도 이런 맥락에서 관찰될 필요가 있겠고, 역시 저자도 시사하듯 단 한 순간도 시장의 동향으로부터 주의를 놓지 않고 연구하다, 골든 타임에 혁신의 결단을 내린 과정이 쌓이고 쌓여 이 지점에 이른 겁니다. 단, 현재 중국 시장에서 롯데와 신세계는 철수하기로 결정을 내린 상태인데, 유통과 패션이 결국은 (저자의 지적대로) 한 몸의 지체와 본체처럼 돌아가는 구조를 생각하면, 과연 결과가 어떠할지 주시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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