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 신화, 재밌고도 멋진 이야기
H. A. 거버 지음, 김혜연 옮김 / 책읽는귀족 / 201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신화"에 대한 총체적 조명, 개별 신화에 대한 인문적 추적은 19세기 여러 저자들에 의해 활발히 이뤄졌습니다. 이 책이 쓰여진 연도는 1908년이긴 하나, 이런 체제로 신화, 전설, 혹은 반(半) 신화화한 역사에 대해서는 이보다 앞선 시기 어떤 스타일이 이미 잡혀 있었지요. 저자가 엄연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문체와 구성이 서로 닮아 보이는 듯, 각 저작들이 이상하게도 기시감을 부르는 건 이 때문입니다.

H A 거버 여사는 이 책으로 큰 문명(文名)을 얻었고, 쓰여진지 근 백여년이 지났음에도 이 책은 북유럽 신화의 입문서로서 고전처럼 애독됩니다. 여사가 본문 중에서 인용하는 여러 문화인류학 이론은 오늘날의 관점에선 다소 생경하거나, 그 유효성이 퇴색한 대목(이를테면 "아리안 족"의 기원과 이동 과정에 대한 언급)도 두어 군데 발견됩니다. 허나 여사의 성장 배경, 일생을 두고 취득한 탄탄한 인문적 교양이라는 자산의 막강한 위력 덕분에, 어느 책에서 만나건 불문하고 그녀의 문장은 유려하고 관점은 세련되었습니다. 근본 없는 비천한 밑바닥 망상 허풍쟁이, 뇌신경망이 총체적으로 부패한 쓰레기가 속성으로 흉내낼 수 있는 미덕이 결코 아니죠.

H A 거버 여사는 이 책 외에도 게르만 신화에 대해 자신만의 연구 성과를 잘 집약시킨 여러 저술을 써 내었으며,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한 아름다운 앤솔로지도 훌륭한 문학적 기틀 안에서 완성한 바 있습니다. 이처럼 튜튼 족, 나아가 코카서스 인종 일반이 유산으로 공유하다 오랜 세월을 거쳐 각양각색으로 분기한 "신화"는, 다른 민족의 신화와는 달리 서로 매우 닮은 점이 많고, 특히 개별 신들의 개성이라든가, 화소들이 모여 이룬 전(全)체계에서, 놀랄 만큼의 유사성을 공유합니다. 책 마지막 29장은 그리스 신화와 이 노스맨 미스의 공통 구조를 집중 분석하는데, 마치 로마 시대에 활약한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을 읽는 듯한 느낌입니다.

븍유럽 신화는 계몽주의와 근대성, 합리주의, 개인의 자유를 특히 이상화한 낭만주의가 유럽을 휩쓴 이후에는 그리 낯선 화제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벌써 이 책에도, 월터 스콧 경이라든가, 매슈 아놀드라든가, 윌리엄 모리스, 롱펠로 등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는 대 문장가들의 작품이 부분 인용되어, 해당 장, 절의 테마가 된 신, 사건, 장소의 의의를 밝히고 문학적 감흥을 불어넣는 데에 요긴히 한몫을 거들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책은 이런 다양한 저자들, 문인들의 아름다운 문학적 자취를 그윽히 짚고, 책 한 권에서 집약 감상하는 맛으로도 더욱 가치를 높이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낯선 고장에 전하는 옛날 이야기의 기괴한 분위기에 젖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아동용 편집본에 만족하거나, 싸구려 막장 드라마의 흉포한 감정 격동 장난에 몸을 맡기는 편이 훨씬 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신경망과 해마와 윤리감정과 꼬리뼈가 모두 파괴된, 구제 불능의 썩은 거짓말쟁이로 타락하는 것이겠고 말입니다.

책은 표기 원칙을 서두에서 밝힙니다. 예컨대 "토르", "티르" 등은 노르드 문자 þ로 시작하는데, 이는 철자상 th(발음기호 θ)이므로 외래어 표기 원칙상 "소르", "시르" 등이 맞긴 하나, 이미 저 표기가 굳었으므로 그대로 쓴다고 말합니다(이 책 p4 중간 부분). 저 역시 헐리웃 블록버스터의 제목이 그대로 "토르" 등으로 쓰이는 모습이 당혹스러웠는데, 영어는 물론 북유럽 현지인들의 관습에도 맞지 않는 이런 관행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겠습니다. 참고로, þ라는 문자는 무려 영국에서도, 중근세까지 일반 텍스트, 출판물에서 널리 쓰이던 것입니다. 영어에 이런 음소가 남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아득한 북유럽 문화가 얼마나 깊고 폭 넓은 영향을 영국인들에게 남겼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여튼 이 한국어 번역본은, 이런 문제에까지 세심히 원칙을 정한 후 텍스트의 정확한 옮김을 꾀했다는 점에서도, 우리 독자들에게 여러 유익한 정보와 교훈을 전달하는 셈입니다.

그리스 신화도 그렇지만, 이 북유럽의 흥미진진한 체계 역시, 인격신들의 갈등과 사랑, 집착과 좌절 등을 역동적 사연 속에 풍성히 표현함으로써 청자(독자)에게 정서적 고양과 윤리적 교훈을 전달함은 물론, 사연의 구조랄까 moral을 한 마디로 요약하는 여러 숙어(idiom), 관용구의 파생까지 유발했습니다.

이를테면 이 책  p150:14, p533:3 두 군데에 걸쳐 나오는(이 두 군데 말고는 안 나옵니다) "레딩에서 벗어나기, 도르마 끊어내기" 같은 노르딕 숙어는, 신화적 배경을 모르고서는 도저히 연원을 짐작할 수 없죠. 또 저자께서는, 이 숙어가 예컨대 그리스 신화에서 비롯한 "스킬라와 카륍디스 사이" 같은 표현과도 매우 유사하다고 지적합니다. 영어에는 "between a rock and a hard place" 같은 말이 있겠죠. 단 이 책에는 매번(두 번이지만) "도르마"라고 표기되나, 원어는 "Droma(드로마)"입니다. 또한, 여사는 곳곳에서 해당 신화가 각 지역의 풍습과 언어 습관에 남긴 영향을 짚는데, 이를테면 p165:5에서 "자랑하다, 뻐기다"의 뜻을 담은 동사 brag의 기원을 짚는다든가, p207:5에서 아예 여신 Freya의 이름이 "구애하다(woo)"라는 뜻을 지닌 동사로 쓰인다든가 하는 사례를 짚는 대목이 특히 좋았습니다. 요일 이름이 티르, 오딘(보덴), 토르 등에서 유래했음은 물론 당연히도 언급하고 넘어가죠.

엘프는 톨킨 경의 고전 <반지의 제왕> 때문에 국내에서 유명해졌는지 모르나, 알고보면 이처럼이나 기원이 오래된 "캐릭터'입니다. 책(p377)에서는 달빛을 타고 지상에 내려와 풀밭에서 춤을 추는 엘프들의 정경에 대해 아름답게 묘사합니다. 바로 이처럼, 독자의 눈 앞에 신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가장 아름다운 심상을 생생히 묘파하는 게 일류 저자만의 능력이며, 우리 독자는 그 문장의 힘을 입어 우리의 상상을 한층 높은 단계로 끌어올릴 수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역자는, "실제 이 고리는 버섯 때문에 생긴다"며 친절한 텍스트 안 주를 달고 있는데, 역시 우리 독자에게는 유익한 정보입니다.

이 책에는 B E(버나드 에반스) 워드의 유명한 그림 <훌드라의 님프들>을 비롯, 여러 폭의 명화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모두 H A 거버 여사의 책 초판에 수록된 자료들이며, 이 한국어 번역본에서 일일이 재수록하는 수고를 베푼 건 독자들에게 큰 봉사를 해 준 셈입니다. 뿐 아니라 권말에는 각 작품의 제목까지 따로 인덱스화했고, 아울러 이름 소사전을 겸할 수 있게 주요 신, 정령, 괴물 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두었더군요. 좋은 책은 그저 읽을거리로도 재미있고, 정보가 필요해서 찾아볼 때에는 그것대로 따로 유익한 출전 노릇을 해 주는데, 이 책이 정확히 그런 유익한 양서에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