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그리고 이후 500년 - 16세기 유럽부터 21세기 한국까지
라은성 외 지음 / 을유문화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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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살려 주시면 수도사가 되겠습니다!"

사람이 그 생명의 위기를 맞았을 때, 성인, 절대자, 조상님, 혹은 의지하고 싶은 그 누구에게라도, 간절히 이름을 외치며 "이 고비만 넘게 해 주시면" 뭐라도 하겠다며 존재를 건 소망을 부르짖는 건 과연 인간의 통성일까요? 안 그런 사람들도 많을 겁니다. 자신의 무력함을 통감하며 에고를 송두리째 버리고 무엇의 발밑에 매달리는 건, 어떻게 보면 평정심을 잃었다는 뜻입니다. 일단 평정심을 잃은 이라면, 자신이 처한 위기를 냉정하게, 현명하게 빠져나올 가능성은 더욱 낮아질 수 있습니다. (참고로, 해당 종교에서는 불완전한 피조물의 오만, 교만을 버린다는 뜻에서, 절대자의 권위를 오롯이 의지하고 겸허해지는 저런 심적 상태를 오히려 권장합니다만 저는 일단 종교를 떠나 평범한 상식인의 관점에서 하는 말입니다. 이 점 관련, 신앙을 가진 분들의 양해를 일단 구하겠습니다)

이런 무력감과는 반대로,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며 행여 무지와 소양부족이 들통날까 신경질적인, 거의 광기 직전의 작위적 분노 상태로 자신을 몰아가며 과잉방어를 일삼다 코믹하게도 자기 발등을 찍는 것도, 저런 철저한 무기력과는 설혹 그 방향이 서로 반대일지는 모르나 어리석음의 극치를 폭로하는 행태라는 점에서는 하등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사람, 혹은 조직 개성의 됨됨이란, 그래서 엄혹한 잣대를 들이대어 본 후에야 그 진가가 드러나기 마련이기도 합니다. 이 잣대는 또한 세월의 검증까지도 포함합니다.

마르틴 루터가 자신이 근무하던 대학의 한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내 건 것이 1517년입니다. 역사는 이 사건을 두고, "종교 개혁(Reformation)"의 시초점으로 삼습니다. 올해를 두고 종교 개혁 500년 기념의 해로 삼는 건, 바로 이 위대하고도 역사적인 "선언, 고발, 혁명의 단초"를 염두에 둔 것입니다. 그로부터 무려 500년이 흘렀습니다. 개혁교회(개신교)는 당시 자신이 개혁의 대상으로 삼았던 로마 가톨릭과 그간 얼마나 다른 길을 걸었을까요? 혹시 500년 전 자신이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던 대적(archenemy)과 서서히 닮아가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않았을까요? 타락하고 부도덕한 "대상"이 굳건히 버티고 있더라도, 그를 비판, 타매하는 것만으로 자신의 도덕성이 절로, 또 지속적으로 담보되는 건 아닙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성찰과 거듭남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초창기 여리고 약한 씨앗이 대지로부터 갓 솟아날 때 자신의 약함을 채 돌볼 여유가 없었다면, 이제 오백 년의 세월을 버텨낸 거목으로서 자신의 나이테가 동그라니 올바르게 형성되는지, 거울에 비추어 스스로를 반성할 때입니다. 이 책 p185에도 헤겔의 변증법이 잠시 언급되어 있습니다만, 자체 개혁을 멈추고 자기 만족에 빠지는 그 순간, 정신이든 육체든 건강한 생리 작용, 대사가 멈추고 "부패"하기 마련입니다.

제가 이 서평 맨처음에 인용한 저 외침은, 마르틴 루터가 그의 나이 열 아홉 살 때 어느 한적한 숲 속을 지나다 느닷 험악한 폭풍우에 직면하고는, 그 생명에의 위협을 느끼며 한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황제와 교황, 둘은 정치적으로 대립하면서도 이 일개 시골 사제인 마르틴 루터가 일으킨 정풍 운동에 대해서는, 더 파장이 커지기 전에 조기 진압해야 한다면서 서둘러 손을 잡았습니다. 그 험난한 과정에서 지혜롭고 정의로울 뿐 아니라 용감무쌍하기까지 했던지라 어떤 위험에도 굴하지 않고 맞선 이 개혁가였건만, 어린 시절 어느 외진 곳에서 맞은 일개 자연 현상의 격변 앞에서는 저만큼이나 약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정말로 성 안나의 가호라도 있어 그 순간(과연 위험한 상황이었는지의 여부조차 불확실합니다만 - 주관적으로 과장된 공포였겠지요)을 계기로 큰 각성을 이룬 후, 진실되고 튼튼한 확신으로 자신의 정신을 재무장, 이후 보다 "큰 인물"로 거듭나는 계기로 삼지 않았을까도 생각해 봅니다. 진실로, 마르틴 루터 만큼이나 소신과 진리, 신앙에 대한 열망 하나로, 오직 신만을 바라보며 한길을 걸은 신념의 인간이, 인류 역사상 몇 명이나 있었을지, 그 지난 행적을 돌이켜보면 그저 아찔해질 뿐입니다. 그의 신조와 사상에 동의를 하건 않건 무관하게, 이런 굽힘 없는 지조와 절개의 순일성에 대해서는 그저 고개가 숙여지는 게 당연합니다. 동양에서는 신체가 찢기는 아픔, 구족(을 넘어 십족)이 멸해지는 극한 상황에서도 "의견을 철회하지 않았던" 호유용 같은 이가 이에 비길 수 있겠습니다(그런 이의 분투가 있었기에, 권력의 탄압 앞에서도 유학의 정맥이 끊이지 않고 이어질 수 있었죠. 여러 모로 루터에 견줄 만합니다).

"루터는 로마 감독들이 결코 베드로의 계승자들이 아닐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그 어떤 다스리는 권한도 부여하지 않았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p39. 단, 몇 개 조사와 관형어는 리뷰어인 제가 임의대로 첨가했습니다[두 개밖에 안 되고 아주 사소한 변형입니다^^]. 책 원 인용문 중 "감독"이란 단어는 이 책에서 가톨릭 측의 "주교"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입니다. 특히 이 대목에서는 그냥 주교도 아니고 "교황"을 가리키는데, 로마 대주교의 수위권을 인정하지 않는 입장에서는 저런 용어례가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이 대목은 1519년 라이프치히에서 열린, 로마 가톨릭측 대변자 격인 에크(라틴어명 에키우스)와, 마르틴 루터 사이에 열린 그 유명한 논쟁 직전의 상황을 요약한 구절입니다. 교황 자신이 신성 불가침의 권위를 내세우기도 하고, 어리석은 민중에게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절 저런 대담한 주장을, 다른 동기가 아닌 양심과 내적 확신에 의해 도도히 펼칠 수 있었다는 자체가 경이롭고도 경이롭습니다. 이 챕터의 서술은 일일이, "가톨릭"이 아닌 "로마가톨릭"으로 필자께서 용어 채택을 하시는데, 아무것도 아닌 듯 보여도 표기 하나에조차 심각한 신학상의 "입장 표명"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 챕터 말고 다른 저자들께서 담당하신 대목에는, 그런 원칙이 완화되어 있습니다^^. 저자마다의 다른 성향이 단어 하나의 사용에서도 다 짐작되죠)

종교개혁사에서 루터가 가장 중요한 인물임에는 틀림 없습니다만, 이 책은 종교개혁의 시원뿐 아니라 이후 전개된 500년사를 개관하는 성격이므로, 분량은 매우 잘 균형 잡혀 각 토픽에 적절히 할애되었습니다. 칼뱅에 대해서는 그간 그의 강경하고 타협 없는 태도만 부각되었습니다만, 저자는 시야와 논의의 밸런스를 잘 조정하여, 이를테면 "병을 달고 살았던 허약한 체질", "제네바에서 줄곧 불체자로 살았던, 알고보면 취약하기 짝이 없었던 정치적 지위" 등을 거론합니다. 세르베투스를 활활 타오르는 형주에 묶어 이단자의 최후를 쏘아본다든가 하는 공포 독재자의 이미지는 사실과 거리가 멀다는 취지이겠습니다. <기독교 강요(綱要)>는 (이 책에서 친절히 설명하는 대로) 생의 후반부에 그가 심혈을 기울여, 개인(위대한 개인, 지도자로서)의 관점과 신앙의 바른 태도와 교의 등을 한 권, 단 한 권에 압축해 넣은 저서인데, 책 한 권에 자신의 원대한 입장을 모두 담은 이는 앞으로도 나오기 힘들 것이라라는 게 필자의 평가입니다.

저는 특히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의 생애와 사상을 다룬 대목이 흥미로웠습니다. (서평 앞부분에서도 적었습니다만) 사람은 그가 입으로 무슨 주장과 긍지를 내세우건 간에, 죽음에 이르는 위기 앞에서도 초연히 그 스탠스를 견지할 수 있느냐를 놓고 참된 인격적 가치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존 웨슬리는 북미를 주유하며 풍랑이 몰아치는 중 여러 차례 항해의 위험을 겪으면서도 태연한 모라바 교도들을 보고 그는 이렇게 묻습니다.

"무섭지 않으십니까?"
"주님이 우리를 지켜 주시기에 무섭지 않습니다."

남자들뿐 아니라 여성, 어린이들까지 이런 태도를 가진 걸 보고, 웨슬리는 "자신에게는 없고, 그들에게는 있는 무엇인가에 대해(p162)" 깊이 성찰하게 됩니다. "선행적 은혜, 믿음을 통한 개인적 구원" 등은 그때까지의 정통파 개혁교회의 입장과는 거리가 꽤 먼 것들이었습니다. 이 챕터 저~ 앞부분에 보면 저자께서 중세 교회의 위기를 거론하며 "스콜라 학파의 보편 아닌 개체 경도"를 언급하신 대목이 있는데, 이 "개인적"이란 말뜻을 그 맥락과도 연결시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전에도 한번 말했습니다만 특히 종교학 서적의 어휘들은 추상적이면서도 일상, 상식의 범주를 벗어나는 usage가 많아, 정확한 독해는 맥락을 떠나서는 전혀 이뤄질 수가 없습니다. 아무튼 제가 이 대목에 특히 흥미를 가진 건, 어떤 회심의 계기가 꼭 이런 자연 앞(그들에게는 "신"을 연상하기 충분한)의 작은 존재감 앞에서 이뤄진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p165에 보면 조지 화이트필드 이야기가 나오는데, 전설적인 대 부흥사로서 2마일 밖에서도 그의 설교를 듣는 이들이 있었다는 대목이 있죠. 3.2km면 조깅이나 걷기 운동 코스로도 무난한 거리인데, 아무리 우렁찬 목소리를 가진 특별한 개인이라고는 하나 과연 그만한 범위까지 자신의 음성을 식별력 유지하며 전달할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이 책에 전혀 언급이 없지만, 우리가 잘 아는 고전 <프랭클린 자서전>에 벤자민 프랭클린 자신(그와 비슷한 시대에 살았죠)이 실험을 통해, 특별한 지형적 조건 등 여러 제약 하에서 재현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 적 있습니다. 그런 문제에 대해서까지 손수 실험 장비를 갖추고 뭘 증명하려 든 성의와 열정에 미소가 지어지기도 하죠.

1부의 비중이 나머지 2, 3부를 합친 분량보다 더 많습니다만 이는 이 책의 성격, 주제, 목표가 "종교개혁사 500년의 개관"인 만큼 당연하고 타당한 태도입니다. 개혁교회 각 계파의 입장은 실로 구절양장입니다. 로마 가톨릭이 그 안에 해방신학(이단시됩니다만), 참여 노선, 고루한 정통 교리 고수 등 다양한 생각이 혼재하는 현실을 봉합하고 여튼 단일 교단, 공식 도그마를 유지하는 것과는 달리, "구절양장"이란 고사성어가 무색하지 않게, 개신교단의 각 입장은 너무도 세분화하고 각자의 고유한 교의를 표방하므로, 과연 "개혁교회"란 한 타이틀 안에 묶일 수 있는지조차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이런 교파마다의 세밀한 입장 차이를, 이 책 1부는 매우 요령껏 준별하여 서술했으며, 또 읽어나가다 보면 (비록 필자분의 선명한 주관이 간혹 두드러지긴 해도) 재미가 납니다. 레퍼런스로 활용해도 좋고, 이야기처럼 읽어가며 사항 정리를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2부와 3부는 한국 개신교회를 다룹니다. 2부는 한국 개신교회의 지난 이력과 발전사이며, 3부는 현 시점 교회의 위상과 성취, 문제점과 과제 등을 집중적으로 분석합니다. "근대적 선교 운동"의 의의에 비로소 눈 뜨며, 그 이전 시대가 주로 구교측 예수회 선교사들이 세계를 누린 것과 대조적으로, 19세기부터는 선교사 하면 대뜸 "개신교 선교사"를 연상케 될 만큼 해외 신앙의 불모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2부 처음에 윌리엄 캐리가 논의되는 건 이러한 배경 때문이며, 다만 로버트 토머스 등은 조선 선교와도 직접 연관이 있습니다. 책의 설명은 정확하게도 "중국 내지(inland) 선교의 일환으로 조선에도 그 영향이 미쳤다"고 하는데, 개신교 용어와 인명 음차 상당수가 아주 낯선 한자어들인 건 이런 사정에서 연원합니다.

2부는 이어서 일제 강점 하의 조선 민중, 아동, 여성을 계몽하고, 신사 참배 등을 거부하며 민족 해방과 신앙 노선을 용감하게 수렴시킨 교계 지도자들과 신도들의 노력에 대해서도 조명합니다. 이 역사는 한국 개신교가 어디다 내놓아도 자랑스러울, 말과 신념과 행동이 일치가 된 긍지와 보람으로 가득찬 궤적입니다. 남한은 아니고 저 북한 일대에 국한된 사실이긴 하나 1907년에 있었던 평양 대부흥도 세계 교회사(史) 전체를 놓고도 매우 특기(特記)할 만한 이정표라 할 수 있죠.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군인 출신 위정자들이 연이어 등장하며 권위주의 개발독재를 이끌 때 이에 민주주의 정신을 내세우며 항거한 역정에 개신교가 빠지면 또 될 말이 아닙니다. 개혁교회의 역사는 이처럼, 종교개혁의 발흥지로부터 지구 반 바퀴를 돌 만큼 멀리 떨어진 극동에서도 여전히 자랑스럽고 거룩합니다.

3부는 현황의 점검과 반성입니다. 매우 진솔되고도 정확한 진단이 정제된 문장 속에 독자의 문제의식을 자극하니 꼭 한번 읽어 본 후 숙고할 만합니다. 그러지않아도 종교인 과세 이슈가 현재 입법 단계에서 여러 논쟁을 부르는 현실입니다. 이 책에서는 이른바 "메가교회"와 "기가교회"를 거론하며, 신도 수와 세력과 재산이 1: 99(못 가진 교회와 가진 교회의 격차)의 분포를 이루는 충격적인 현상도 지적하며, 왜 "교회론"이 아닌 "교회 성장론"만이 화제가 되어야 하는지, 신실한 회개와 영성이 메인이 못 되고 숫자와 위세가 관심사의 복판에 놓이는 안타까운 현실을 지적합니다. 필자는 ("이웃 종교의 지도자")프란치스코 교황을 예로 들며, 소탈하고 격의 없는 자세로 세계인의 존경을 받는 그들과 달리, 왜 개신교(한국, 세계를 두루 염두에 둔 듯합니다)에는 이만한 인사가 최근 배출되지 않느냐는 불안감을 표시합니다.

독자로서 제 생각은, 그 답은 "마르틴 루터"에게서 찾을 수 있다고 보는 쪽입니다. 개혁은 땜질 처방이나 시늉이 아닌 본질을 향한 것이어야 하며, "restorative"스러운 게 아닌 초심으로의 회복(ad fontes)이라야 합니다. 개혁은 멈추면 그게 이미 개혁이 아닙니다. 중단 없는 회개와 개혁이야말로 신에 가까워지는 가장 바른 길임을 이미 루터는 오백 년 전에 우리에게 가르친 바 있습니다. 답은 바로 루터가 이미 가르쳐 주고 있었습니다.

"안나! (절) 살려 주시면 수도사가 되겠습니다!"

자신이 죽고사는 갈림길에 놓였음을, 정확하고 겸허하게 꿰뚫고 수용했다면, 이미 그 사람은 절반쯤은 답을 찾아 놓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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