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1 - 1부 1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마로니에북스) 1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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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리석은 삼수. 그가 아무리 악독하다 한들 악의 생리를 몰랐다면 어리석었다 할밖에 없다. 악은 악을 기피하는 법이다. 악의 생리를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시 궁극에 가서 악은 삼수가 지닌 그와 같은 어리석음을 반드시 지니고 있다. 왜냐, 악이란 정신적 욕망에서든 물질적 욕망에서든 간에 그릇된 정열이어서 우둔할밖에 없고 찢어발길 수 있는 허의의 의상을 걸치고 있기 때문이다.

-토지 4 - P365

"뭐니뭐니 혀도 배고픈 정 아는 그게 사람으로서는 제일로 가는 정인디, 혀서 나도 니 아부지를 믿고 정이 들어서 따라가는 거 아니겄어? 부모 자석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주린 배 채우주는 거로 시작된다 그거여. 저기 보더라고. 저기 물새도 모이 찾아서 지 새끼 먼저 먹이는 거. 어디 사람뿐이간디?"

-토지 6 - P33

"학문을 잘못하면 병이 들 수도 있을 거요. 자기 자신을 찾다 찾다 보면 좁쌀이 되니까요."

-토지 7 - P100

"민족의식이란 가지가지 낯판대기를 지닌 요물이야. 악도 되고 선도 되고 야심의 간판도 되고 약자를 희생시키는 찬송가도 되고......피정복자에게 있어서 민족의식이란 항쟁을 촉구하는 것이 될 테지만 정복자에게 있어서의 민족의식이란 정복욕을 고무하는 것이 되니 말씀이야. 민족의식, 동포애, 애국심, 혹은 충성심, 따지고 보면 그것들은 인간 최고의 도덕이면서 참으로 진실이 아닌 괴물이거든. 집단의 생존본능이요 집단의 탄욕을 아름답게 꾸며대는 허위, 어디 민족이나 집단뿐일까? 일가에서 개인은 어떻고? 결국 뺏고 빼앗기지 않으려는 투쟁아니겠나?"

_토지 12 - P87

어두운 현실과 찬란한 삶을 마주하여 저 혼자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저 투쟁의 차비를 차리는 윤국이도 서희에게 외로움을 재촉했다. 남편의 존재, 봄이 가고 여름이 오면 출옥하게 될 김길상은 실감할 수 없게 멀기만 하였고, 얻는 과정에서 잃어가는 과정을, 아니 얻었기 때문에 잃어야 하는 과정을 서희는 시시각각 느낀다. 팽창에서 위축의 과정으로 들어선 육체적 자각과 더불어. 그 무섭고 끈질겼던 집념은 다 어디로 갔는가. 이를 악물며 열 손톱이 닳아빠져도 기필코 탈환하리라 맹서하였던 평사리의 옛집, 추억은 살아서 구석구석에, 능소화가 피던 울타리며 버들잎이 떨어지던 연당이며 흔적은 도처에 산재해 있건만 거궁한 집은 때때로 낡은 상여 틀같이 느껴진다. 황량하고 공허하게 넋이 떠난 시체와도 같이, 햇빛이 눈부신 들판도 그렇했다.

-토지 13 - P131

‘잘해주면 얕보고 못하면 원망한다. 내 눈의 누물은 며칠 동안 버릇없는 웃음이 될 것이며 불만의 얼굴, 거역의 몸짓이 될 것이다.

-토지 13 - P133

"실상 사람 사는 이치가 그리 어렵운 것도 아닐 긴데, 많은 것도 아닐 긴데 걸으면 되는 거 아니까? 저승문이 열릴 때까지. 그런데 와들 앉아서 그리 숨들이 가쁠고? 죽은 성님은 좀체 말을 안 했다. 안 했지마는 성님은 몸으로 늘 말해주었제. 그라고 말귀가 어둡고 못 알아들어도, 그러려니. 나는 갑갑하지 않았인께."
언덕을 하나 넘는다.
"초목이나 꽃 같은 거는 항상 거기 있었인께...... 흙도 항상 내 발밑에 있었인께. 내 것도 남의 것도 아니었던 기라. 흥!"

-토지 13 - P323

무거운 잿빛 구름이 정수리를 내리누르는데 영팔노인은 근심스레 하늘을 올려다보며 걸었다. 찬란한 명리의 정상에서도 인생은 후외스러운 것, 그러나 영팔노인에겐 후회가 없을 것만 같다. 나 먼저 가려고 남을 떠밀며 가는 숱한 사람들 속에, 와 이라노, 와 이리 떠미노 하며 걸어왔을 바보 같은 생애에서 얻은 것은 삼간두옥, 잃지 않았던 것은 자식들과 어리석은 노처뿐이지만 술수와 음모와 기만과 간지로 쌓아올린 허울 같은 곳에 간신히 몸 붙인 외로운 사람에 비하면 또박또박 연륜을 새긴 한 그루 실한 나무. 생명을 짓이기지는 아니하였으되, 후회가 없을 것 같은 그 청정함 때문이겠다.

-토지 13 - P325

"악을 두고 강자라 하신다면 역사가 그들 편에 선 게 아니지요. 상부상조의 묵약 내지 질서에 대해 인간이 반역한 거지요. 그러나 강약이 선악과 늘 일치했던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뺏고 빼앗기는 상태에서 본다면 강자는 악이요 약자는 선이겠으나 이룩하고 다스리는 상태에서 본다면 강자가 선일 수 있고 이룩하고 다스리는 것을 저해하는 기생충 같은 약자는 분명 악일 것입니다.

-토지 13 - P387

"그러나 네놈보다 열 배 백배 언변 좋은 유식쟁이들, 고릿적부터 우리는 그것들 종밖에 될 수 없었인께. 나라든 백성이든 팔고 사는 것은 그놈들 소관이었인께. 왜놈을 몰아내자는 마당에서 모도 협심해야 한다는 거를 모르지는 않지만 휘둘리지는 말아야, 약은 쥐가 밤눈 어둡다는 말도 안 있더나. 약은 놈 둔한 놈, 유식한 놈 무식한 놈 다 있어야, 양념을 쳐야 국도 되고 김치도 된다."

-토지 14 - P37

"... 주의 주장은 행동의 규범이다. 행동 없이 일본을 극복할 수는 없다. 선의의 사람들, 선의의 사람들이 도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선의의 사람이란 꿈꾸는 사람이다. 실길만 찾는 사람, 상대는 강자요 나는 약자이니 체념하자는 사람, 왜놈한테 빌붙어 이득을 얻고자 하는 놈, 그들과 꿈꾸는, 깨어 있는 선의의 사람들과의 차이점은 실제 아무것도 없다."

-토지 14 - P148

사람들이 미친 듯 달려가는 건 당연하겠지요. 노예의 낙인보다 확실하고 종의 문서보다 무서운 것이 그 임금이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토지 14 - P242

환국이 송영광에 관한 말을 했을 때, 신분에 대한 절망도 극복하지 못하고 어떻게 자유로워지느냐고 길상은 말했었다. 그러나 길상은 영광의 말을 들은 적도, 만나본 적도 없었지만 환국이보다 휠씬 진하게 그의 갈등을 느꼈었다. 말로는 그랬지만 영광이 혼자 극복한다고 될 일 아니며 끝내 혼자서 극복이 되는 일도 아니다. 사람 모두가, 역사가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다. 김개주도 김환도, 역사의 산물이며 그 오랜 역사를 극복하려다 간 사람이다. 자신도 그 길을 가고 있다. 강자는 극복되어야 한다. 약자의 누물을 거두기 위하여 평등하기 위하여. 강국도 극복되어야 한다. 약소국의 참상을 씻기 위하여, 국각와 국가가 평등하기 위하여. 일본은 마땅히 극복되어야 한다. 길상에게 서회와 두 아들은 끝없는 사랑의 대상이다. 그럼에도 도랑이 있고 장벽이 있는 대상이다. 그것은 극복되지 않는 대상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목마름이요 적요함이지만 그가 가는 길에 그들은 길상의 약점이기도 하다.

-토지 15 - P297

세월이 비정한가 망각이 비정한가. 어느 쪽일까? 사람은 누구나 조금씩 잃어가며 살아간다. 자기 자신도 잃어가며 살아간다. 잃은 것의 시체가 추억이다. 그리고 마지막 잃는 것이 죽음일 것이다.

-토지 17 - P194

세 늙은이는 신명을 내가며, 정성을 다하여 음식을 만든다. 모처럼 그들에게 생활이 살아나 꽃이 되는 것 같았다. 한 곁에 밀려나서 마치 방 안에 놓인 장롱과도 같이, 언제부터 그리 되었는지, 눈치볼 며느리 딸도 없고마치 자유천지에서 벗과 노니는 것처럼, 우물가에서 지저귀던 옛날이 돌아온 것같이 이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부엌 안에서 맴돈다.

-토지 17 - P386

밖에서 무기를 생산하고 있는 한, 자본주의나 공산주의나 내용으로 보면 다 같이 생산고 위주의 유물론 아니겠어? 다만 어떻게 관리하고 분배하느냐의 차이지. 나는 언젠가 그것이 벽에 부닥칠 것이란 생각이다. 만 가지가 다 이자를 먹고 살아야지 원금을 찢어먹는다면 결국 파탄할밖에 없지. 가령 땅이 원금이라면 그해 나는 농작물은 이자다 그 말일세. 더 비근한 예를 들자면 머릿속에 든 지식은 원금이요 취직하여 받아먹는 월급은 이자다 그 말이야. 만사 이치를 그 자로 재면 모든 게 합리적이지.

-토지 18 - P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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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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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조부는 그녀에게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공기에 매운 기운이 퍼져 있었다. 그녀가 앞으로도 밥먹듯이 경험할 순간이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가 화를 내고, 그 의중을 살펴야 하는 순간. - P60

허영의 힘이 얼마나 센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는 순교자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사람이었다. 가진 모든 것을, 목숨까지도 버려 천주에 대한 사랑을 지키려 했던 그들의 이야기에 감화를 받았다. 그는 증조모를 알게 되면서, 그녀가 사는 모습을 보고서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준비를 했다. 너를 구하기 위해 내 인생을 희생하겠다는 마음이었다.
그 결과로 그는 평생을 억울함과 울화와 죄책감을 안고 살아야 했다. 자기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부모를 떠날 때만 해도 몰랐던 것이다. - P60

울면서 한참을 타박타박 걷다보니 달이 나를 앞서 걷는 것 같지 않갔어. 마치 내게 할 말이 있는 것처럼. - P128

엄마는 나를 보며 무안한 듯 웃어 보였다. 그런 엄마가 예전처럼 가깝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를 보는 엄마의 표정에서 엄마 또한 내게 거리감을 느끼고 있다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예전처럼 며칠씩 서로 말도 붙이지 않을 정도로 신경전을 벌일 만한 일이 우리에게는 더이상 없었다. 큰불이 나기 전에 꺼버렸고, 상대에게 작은 불씨를 던졌다는 것에 문득 무안해지기도 하는 사이가 된 것이었다. 그건 우리가 그만큼 친밀한 사이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서로에게 큰 상처를 입혔다가 돌이킬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우리는 눈빛으로 공유하고 있었다. 우리는 더이상 끝까지 싸울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정말 끝이 날까봐 끝까지 싸울 수 없는 사이가. 우리는 싱거운 이야기를 나누면서 산을 내려왔다. - P137

고통 안에서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지 않았다. 나는 자꾸만 뒷걸음질쳤고 익숙한 구덩이로 굴러떨어졌다. 다시는 회복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조바심 서린 두려움이 나를 장악했다. - P156

인내심 강한 성격이 내 장점이라고 생각했었다. 인내심 덕분에 내 능력보다도 더 많이 성취할 수 있었으니까. 왜 내 한계를 넘어서면서까지 인내하려고 했을까. 나의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언제부터였을까. 삶이 누려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 수행해야 할 일더미처럼 느껴진 것은. 삶이 천장까지 쌓인 어렵고 재미없는 문제집을 하나하나 풀어나가고, 오답 노트를 만들고, 시험을 치고, 점수를 받고, 다음 단계로 가는 서바이벌 게임으로 느껴진 것은. 나는 내 존재를 증명하지 않고 사는 법을 몰랐다. 어떤 성취로 증명되지 않는 나는 무가치한 쓰레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 믿음은 나를 절망하게 했고 그래서 과도하게 노력하게 만들었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가치가 있는 사람들은 자기 존재를 증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애초에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 P156

엄마는 평범하게 사는 것이 제일 좋은 삶이라고 말했었다. 아빠와의 결혼으로 자신도 평범한 가족을 꾸리게 되어서 좋았다고 이야기했었다. 그런 말을 습관적으로 하던 엄마를 예전에는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머릿속에 동그라미 하나를 그리고 그 안에 평범이라는 단어를 적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삶. 두드러지지 않은 삶. 눈에 띄지 않는 삶. 그래서 어떤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고, 평가나 단죄를 받지 않고 따돌림을 당하지 않아도 되는 삶. 그 동그라미가 어무리 좁고 괴롭더라도 그곳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 엄마의 믿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잠든 엄마의 숨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 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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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
칼릴 지브란 지음, 류시화 옮김 / 무소의뿔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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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주로 도서관에서 빌려 보는 내가 ‘이 책을 사야겠다‘고 마음 먹게 한 몇 안 되는 책. 몇 개 동의하지 못하는 내용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 두고 두고 보면서 되새김하고 싶은 인생 조언들이다. 시덥잖은 자기계발서나 심리와 위안을 가장한 조언 책들보다 휠씬 낫다고 생각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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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
칼릴 지브란 지음, 류시화 옮김 / 무소의뿔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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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서로는 혼자 있게 하라.
마치 현악기의 줄들이 하나의 음악을 울리지만 줄은 서로 따로이듯이.
......
함께 서 있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도 서로의 그늘 속에서는 자랄 수 없으니.

-결혼에 대하여 - P27

그대는 아이들에게 육신의 집은 줄 수 있으나, 영혼의 집까지 주려고 하지 말라.
아이들의 혼은 내일의 집에 살고 있으므로. 그대는 결코 찾아갈 수 없는, 꿈속에서조차 갈 수 없는 내일의 집에.
......
그대는 활이며, 그대의 아이들은 살아 있는 화살처럼 그대로부터 쏘아져 앞으로 나아간다.
그대서 활 쏘는 자인 신은 무한의 길에 과녁을 겨누고, 자신의 화살이 더 빨리, 더 멀리 날아가도록 온 힘을 다해 그대를 당겨 구부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활 쏘는 이의 손에 구부러짐을 기뻐하라.
그는 날아가는 화살을 사랑하듯이 흔들리지 않는 활 또한 사랑하기에.

-아이들에 대하여 - P30

그리고 그대들 받는 이들이여, 물론 그대들 모두는 받는 이들이지만, 얼마나 감사해야 할지를 생각하지 말라. 그것이야말로 그대들 자신에게나, 주는 이에게나 굴레를 쒸우는 일이므로.
그보다는 주는 이와 함께 그의 선물을 날개 삼아 날아오르라.
자신이 진 빚을 지나치게 염려함은, 아낌없이 주는 대지를 어머니로 삼고 신을 아버지로 삼은 그의 너그러운 마음을 의심하는 일이기에.

-주는 것에 대하여 - P34

일은 사랑이 눈으로 볼 수 있게 나타난 것이다.

-일에 대하여 - P44

그러나 나는 말한다. 그 둘은 결코 서로 나뉠 수 없다.
그들은 언제나 함께 온다. 기억하라. 하나가 그대와 함께 식탁에 앉아 있을 때 또 다른 하나는 그대의 침대에 누워 있음을.

-기쁨과 슬픔에 대하여 - P47

그대의 집을 닻이 아니라 돛이게 하라.

-집에 대하여 - P52

또한 아무리 악인이고 약한 자일지라도 그대들 각자의 내면에 있는 가장 낮은 것보다 더 떨어질 수는 없다.
나무 전체의 묵인 없이 나뭇잎 하나가 갈색으로 변하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죄와 벌에 대하여 - P59

낮에 근심이 없고 밤에 욕망과 슬픔이 없을 때 그대가 진정으로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 모든 것이 그대의 삶에 휘감겨도 그것들을 벗어던지고 얽매임 없이 일어설 때 그대는 진정으로 자유롭다.

-자유에 대하여 - P69

고통이란 그대의 깨달음을 가두고 있는 껍질이 깨어지는 것이다.

-고통에 대하여 - P77

그러므로 그대가 가진 최고의 것을 친구에게 주라.
그가 그대의 썰물일 때를 알아야 한다면 밀물일 때도 알게 하라.
시간을 죽이기 위해 친구를 찾는다면 무엇이 친구인가?
언제나 시간을 살리기 위해 그를 찾으라.
그대의 필요를 채워 주는 것이 곧 그의 필요이므로, 그는 결코 그대의 공허를 채우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므로.
그러므로 거기 웃음이 있게 하고, 기쁨의 나뭉이 있게 하라. 우정의 다정함 속에.
왜냐하면 작은 이슬방울 속에서 가슴은 아침을 발견하고 다시 새로워지기에.

-우정에 대하여 - P86

그러나 그대는 가슴속에서 묻는다. ‘쾌락 속에서 어느 것이 좋고 어느 것이 나쁜지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그대의 들판으로, 그대의 정원으로 가 보라. 그러면 알게 되라라. 꽃으로부터 꿀을 따모으는 일이 꿀벌의 쾌락임을.
하지만 벌에게 꿀을 내주는 것 역시 꽃의 쾌락이다.
왜냐하면 벌에게 꽃은 생명의 샘이고,
또한 꽃에게 벌은 사랑의 심부름꾼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벌과 꽃 모두에게 쾌락을 주고받는 것은 하나의 필요, 또한 하나의 환희이다.

-쾌락에 대하여 - P105

밤에만 보이는 눈을 가진 올빼미는 낮에는 눈이 멀어 빛의 신비를 벗길 수 없다.
그대 진실로 죽음의 혼을 보고 싶다면, 삶의 육체를 향해 그대의 가슴을 활짝 열라.
왜냐하면 삶과 죽음은 한 몸이기에. 강과 바다가 하나이듯이.

-죽음에 대하여
- P114

가장 사소한 행위로 그대를 재려는 것은 덧없는 물거품으로 바다의 힘을 평가하려는 것과 같다.
그대의 실패로 그대를 판단하는 것은 끝없이 변화한다고 해서 계절을 비난하는 것과 같다.

-작별에 대하여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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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땅의 야수들 - 2024 톨스토이 문학상 수상작
김주혜 지음, 박소현 옮김 / 다산책방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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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떠밀려 온 얇은 구름층이 산꼭대기의 목주변에 걸려 갈기갈기 찢긴 비단처럼 너울거렸다. - P19

가장 놀라운 사건들은 아무도 눈치챌 수 없이 작은 바늘 하나가 툭 떨어지듯 시작하여 꼬리를 물고 연쇄한다. ...(중략)...이른 6월의 생동감으로 가득한 날이었다. 나무들은 각자의 녹색 음향을 노래했으니, 그 신선함이 눈으로도 들을 수 있는 음악처럼 펼쳐졌다. - P78

별들이 잠자리에 들 무렵, 소년은 서서히 땅을 덥히는 태양의 냄새를 맡으며 잠에서 깼다. 그는 눈을 비비고 도랑에서 기어 나와 흐르는 듯한 감귤 빛깔에 흠뻑 물든 도시의 모습을 처음으로 상세히 둘러보았다. 경성의 여름 새벽은 짜릿함을 안겨주었지만 거의 감지하지 못할 만큼 찰나에 지나갔다. 타오르는 태양이 지평선 위로 냅다 뛰어오르자 축축하던 밤이슬은 몇 초 만에 말라버리고, 도시는 태양의 명령에 복종하듯이 잠에서 깨어났다. - P104

모든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신이 고유한 의미를 지닌 존재라고 믿는다. 그러지 않으면 각자의 인생을 버텨내기 어려울 것이다. - P119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집에 가는 동안 눈 덮인 거리는 그늘진 곳은 청회색으로, 그리고 오후 햇살을 받은 뒤에는 밝은 황금빛으로 반짝였다. 단이는 그 모든 풍경이 평소보다 더 아름답고 생생하다고 느꼈다. 정말 오랜만에 자신이 실제 나이보다 젊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몇 년의 세월이 한꺼번에 거꾸로 돌아간 것처럼. - P173

고요한 침묵이 폭발 후의 화산재처럼 내려앉았다. - P203

시간은 겨울 안개처럼 흘러갔다. 흐릿하고, 형태도 없으며, 명보의 존재에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승객 없이 항해하는 배처럼 홀로 지나갔다. 아니면 명보만 빼고 다른 모두를 태우고 가는 배였는지도 모른다. 시간의 세계 밖에 남겨진다는 것은 ‘넌 아무 의미도 없어‘라는말을 몸에 새겨놓는 듯한 특별한 종류의 고문이었다. - P219

사랑이란 다른 이를 위해 자신이 어느 정도의 고통을 견딜 수 있느냐에 따라 정의된다. 상대를 보호하기 위해 무엇까지 할 수 있는지가 결국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말하는 셈이다. 이는 인생의 마지막 기차에 오를 때 과연 누구와 손을 잡고 있고 싶은지를 고르는 문제이기도 했다. 이제 명보는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사랑하는 내 아들 현우에게." 그는 이렇게 쓰기 시작했다. - P220

그렇게 나는 난생처음으로 초조한 행복이라는 걸 느끼고 있다. 평소의 나는 초조해하지도 행복해하지도 않는데, 그건 그 무엇도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간절히 원하는 게 생기고 보니, 갑자기 내가 내리는 모든 결정이 굉장히 중요하고 돌이킬 수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 P249

나이를 조금 더 먹고 나니, 인생이란 무엇이 나를 지켜주느냐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지켜내느냐의 문제이며 그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알겠다. - P250

거의 예외 없이, 다들 너무 당연하다는 듯 제 스스로를 정직한 인물로 여긴다는 점은 오랫동안 명보를 놀라게 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할 필요가 있을 때면 깜짝 놀랄 만큼 영리하고 교활해졌으며, 너무도 약삭빠르게 머리를 굴리느라 심지어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다. - P288

쌀쌀한 11월, 가을의 선명한 푸른색과 노란색이 이제 막 눈앞에 다가온 겨울의 회색과 은색, 분홍색에 자리를 내어주기 시작하는 시기였다. - P305

연화와 옥희가 스무살이 되던 해 봄, 그들의 집 안 공기는 늘 예민하고 섬세한 떨림으로 가득 차 있었다. 부엌일을 돕는 하인은 두 아씨에게 수시로 날아드는 은밀한 연서를 전달하느라 바빴고, 아씨들은 종종 꿈꾸는 듯한 얼굴로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거나 아무 이유 없이 갑작스럽게 미소를 짓곤 했다. - P308

고독은 그를 감싸는 아름다운 외투 같았다. - P375

이 세상의 모든 세람은 두 종류로 나뉘며, 대다수는 그중 첫 번째 범주에 속한다.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자신이 현재의 상태에서 성공을 향해 더 나아갈 수 없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불가능하리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들. 그러고 나면 자신의 삶에 주어진 운명을 합리화하고 그 자리에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이것을 깨닫는 시점은 놀랍도록 일러서, 대체로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도달한다. 교육의 혜택을 받은 사람들 또한 서른에서 마흔 살 사이에는 같은 결론에 이른다. 일부 사람들은 출생 환경이나 그 자신의 야망, 그리고 재능에 힘입어 대략 쉰 전후에 비슷한 깨달음을 얻는데, 그 정도 나이에 이르면 이러한 소강도 그렇게 끔찍해 보이지 않는 법이다.
- P387

그들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오랫동안 그렇게 서로를 안고 있었다. 지난 세월 동안 서로가 얼마나 사뿐하고 연약해졌는지, 햇볕 아래 오래 놓아둔 책등의 색이 바래듯 중년의 나이를 넘어선 여자의 몸이 얼마나 흐릿하고 채도가 낮아지는지를 두 사람은 실감했다. - P397

모두가 꿈을 꾸지만, 그중 몽상가는 일부에 불과하다. 몽상가가 아닌 다수의 사람들은 그냥 보이는 대로 세상을 본다. 소수의 몽상가들은 그들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달, 강, 기차역, 빗소리, 따스한 죽 한 그릇처럼 평범하고 소박한 것들도, 몽상가들은 여러 겹의 의미를 지닌 신비로운 무엇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에게 세상은 사진이라기보단 유화여서,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가장 바깥쪽에 있는 색깔만을 바라볼 때 이들은 영원히 그 아래 감춰진 색깔을 바라본다. 몽상가가 아닌 사람이 유리를 통해 보는 풍경을, 몽상가들은 프리즘을 통해 바라보는 셈이다. - P415

체포라는 충격적인 경험과 실연의 상처에도 불구하고, 단이는 패배하는 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그에게 실패란 마치 올이 나간 스타킹과 같았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그걸 남들에게 눈치채이는 건 당사자의 잘못이라는 식이었다. 실패를 감추고 처음부터 없었던 일인 양 폐기하려는 노력은 단이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원칙인 동시에 예의의 문제였다. 이는 일종의 멋지고 귀족적인 감성이었으나, 단이의 역할을 다정하고 친밀한 친구보다는 존경하고 본받아야 할 대상으로 한정 짓는 것이기도 했다. - P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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