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 떠밀려 온 얇은 구름층이 산꼭대기의 목주변에 걸려 갈기갈기 찢긴 비단처럼 너울거렸다. - P19
가장 놀라운 사건들은 아무도 눈치챌 수 없이 작은 바늘 하나가 툭 떨어지듯 시작하여 꼬리를 물고 연쇄한다. ...(중략)...이른 6월의 생동감으로 가득한 날이었다. 나무들은 각자의 녹색 음향을 노래했으니, 그 신선함이 눈으로도 들을 수 있는 음악처럼 펼쳐졌다. - P78
별들이 잠자리에 들 무렵, 소년은 서서히 땅을 덥히는 태양의 냄새를 맡으며 잠에서 깼다. 그는 눈을 비비고 도랑에서 기어 나와 흐르는 듯한 감귤 빛깔에 흠뻑 물든 도시의 모습을 처음으로 상세히 둘러보았다. 경성의 여름 새벽은 짜릿함을 안겨주었지만 거의 감지하지 못할 만큼 찰나에 지나갔다. 타오르는 태양이 지평선 위로 냅다 뛰어오르자 축축하던 밤이슬은 몇 초 만에 말라버리고, 도시는 태양의 명령에 복종하듯이 잠에서 깨어났다. - P104
모든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신이 고유한 의미를 지닌 존재라고 믿는다. 그러지 않으면 각자의 인생을 버텨내기 어려울 것이다. - P119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집에 가는 동안 눈 덮인 거리는 그늘진 곳은 청회색으로, 그리고 오후 햇살을 받은 뒤에는 밝은 황금빛으로 반짝였다. 단이는 그 모든 풍경이 평소보다 더 아름답고 생생하다고 느꼈다. 정말 오랜만에 자신이 실제 나이보다 젊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몇 년의 세월이 한꺼번에 거꾸로 돌아간 것처럼. - P173
고요한 침묵이 폭발 후의 화산재처럼 내려앉았다. - P203
시간은 겨울 안개처럼 흘러갔다. 흐릿하고, 형태도 없으며, 명보의 존재에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승객 없이 항해하는 배처럼 홀로 지나갔다. 아니면 명보만 빼고 다른 모두를 태우고 가는 배였는지도 모른다. 시간의 세계 밖에 남겨진다는 것은 ‘넌 아무 의미도 없어‘라는말을 몸에 새겨놓는 듯한 특별한 종류의 고문이었다. - P219
사랑이란 다른 이를 위해 자신이 어느 정도의 고통을 견딜 수 있느냐에 따라 정의된다. 상대를 보호하기 위해 무엇까지 할 수 있는지가 결국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말하는 셈이다. 이는 인생의 마지막 기차에 오를 때 과연 누구와 손을 잡고 있고 싶은지를 고르는 문제이기도 했다. 이제 명보는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사랑하는 내 아들 현우에게." 그는 이렇게 쓰기 시작했다. - P220
그렇게 나는 난생처음으로 초조한 행복이라는 걸 느끼고 있다. 평소의 나는 초조해하지도 행복해하지도 않는데, 그건 그 무엇도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간절히 원하는 게 생기고 보니, 갑자기 내가 내리는 모든 결정이 굉장히 중요하고 돌이킬 수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 P249
나이를 조금 더 먹고 나니, 인생이란 무엇이 나를 지켜주느냐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지켜내느냐의 문제이며 그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알겠다. - P250
거의 예외 없이, 다들 너무 당연하다는 듯 제 스스로를 정직한 인물로 여긴다는 점은 오랫동안 명보를 놀라게 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할 필요가 있을 때면 깜짝 놀랄 만큼 영리하고 교활해졌으며, 너무도 약삭빠르게 머리를 굴리느라 심지어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다. - P288
쌀쌀한 11월, 가을의 선명한 푸른색과 노란색이 이제 막 눈앞에 다가온 겨울의 회색과 은색, 분홍색에 자리를 내어주기 시작하는 시기였다. - P305
연화와 옥희가 스무살이 되던 해 봄, 그들의 집 안 공기는 늘 예민하고 섬세한 떨림으로 가득 차 있었다. 부엌일을 돕는 하인은 두 아씨에게 수시로 날아드는 은밀한 연서를 전달하느라 바빴고, 아씨들은 종종 꿈꾸는 듯한 얼굴로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거나 아무 이유 없이 갑작스럽게 미소를 짓곤 했다. - P308
고독은 그를 감싸는 아름다운 외투 같았다. - P375
이 세상의 모든 세람은 두 종류로 나뉘며, 대다수는 그중 첫 번째 범주에 속한다.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자신이 현재의 상태에서 성공을 향해 더 나아갈 수 없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불가능하리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들. 그러고 나면 자신의 삶에 주어진 운명을 합리화하고 그 자리에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이것을 깨닫는 시점은 놀랍도록 일러서, 대체로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도달한다. 교육의 혜택을 받은 사람들 또한 서른에서 마흔 살 사이에는 같은 결론에 이른다. 일부 사람들은 출생 환경이나 그 자신의 야망, 그리고 재능에 힘입어 대략 쉰 전후에 비슷한 깨달음을 얻는데, 그 정도 나이에 이르면 이러한 소강도 그렇게 끔찍해 보이지 않는 법이다. - P387
그들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오랫동안 그렇게 서로를 안고 있었다. 지난 세월 동안 서로가 얼마나 사뿐하고 연약해졌는지, 햇볕 아래 오래 놓아둔 책등의 색이 바래듯 중년의 나이를 넘어선 여자의 몸이 얼마나 흐릿하고 채도가 낮아지는지를 두 사람은 실감했다. - P397
모두가 꿈을 꾸지만, 그중 몽상가는 일부에 불과하다. 몽상가가 아닌 다수의 사람들은 그냥 보이는 대로 세상을 본다. 소수의 몽상가들은 그들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달, 강, 기차역, 빗소리, 따스한 죽 한 그릇처럼 평범하고 소박한 것들도, 몽상가들은 여러 겹의 의미를 지닌 신비로운 무엇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에게 세상은 사진이라기보단 유화여서,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가장 바깥쪽에 있는 색깔만을 바라볼 때 이들은 영원히 그 아래 감춰진 색깔을 바라본다. 몽상가가 아닌 사람이 유리를 통해 보는 풍경을, 몽상가들은 프리즘을 통해 바라보는 셈이다. - P415
체포라는 충격적인 경험과 실연의 상처에도 불구하고, 단이는 패배하는 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그에게 실패란 마치 올이 나간 스타킹과 같았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그걸 남들에게 눈치채이는 건 당사자의 잘못이라는 식이었다. 실패를 감추고 처음부터 없었던 일인 양 폐기하려는 노력은 단이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원칙인 동시에 예의의 문제였다. 이는 일종의 멋지고 귀족적인 감성이었으나, 단이의 역할을 다정하고 친밀한 친구보다는 존경하고 본받아야 할 대상으로 한정 짓는 것이기도 했다. - P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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