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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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상회담 김영하편에서 전현무가 감명(?)깊게 읽은 책으로 얘기하면서 너무 야해서 4시간만에 다 읽어버렸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에 출간된 게 2000년도, 외환위기이후 그나마 경제가 회복되는 시점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공황상태가 되어가는 시점, 그리고 내가 직장과 육아의 병행으로 육체적/정신적 피로가 극에 달해있었을 시점. 제목은 정말 온갖 매체에서 수도 없이 들었었으나 '상실'에 대해서 이야기하기엔 그조차 내겐 너무 일말의 여유로 느껴졌다. 그리고 '상실'이라니? 희망이 아닌 상실이라니? 난 아직 젊고 희망으로도 버티기 힘들지도 모르는데, 너무 힘빠지는 제목이었기에당시엔 아예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전현무가 너무 야해서 4시간만에 독파했다는 소릴 들으니 당연히(?) 호기심이 생겼다. 야한 걸 싫어하는 사람도 있겠는가? 일부로 비디오를 보고 로맨스 소설을 돈 주고 찾아보는 마당에. 그래서 책을 잡았다.

아, 그런데 이 책은 야한 책이 아니었다. 도대체 어디가 야하단 말인가?

물론, 18년이 지난 지금의 나는 이미 세상을 많이 알고 그 쪽(?) 세계에도 익숙해 있고 웬만큼 야하지 않고서야 야하다고 느끼지 않을 만큼의 내공도 축적된 것도 없지않아 있다-고 말해야만 한다.

 

하루키는 67~70년을 배경으로 87년에 소설을 완성하였다. 주인공 와타나베는 60년대 말, 70년에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니고 있는 인물이지만 소설 속에 보여지는 그의 생각과 생활은 작가의 당시 현재 시점, 80년대 말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와타나베를 중심으로 남자사람 고등학교 친구 기즈키, 기즈키의 여자친구이자 나오코, 나오코의 영적 친구 레이코, 와타나베의 대학 친구 미도리와의 생활, 교류, 대화, 각자의 생각, 경험, 일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와타나베의 잘 나가는 대학 선배로 나가사와와 그의 여자친구 하쓰미도 있다. 어떤 측면에서는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거치면서 다양한 인간 군상을 만나면서 다양해지는 주인공 와타나베의 성장 소설일수도 있다.

고교시절 유일한 친구였던 기즈키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두 사람 와타나베와 나오코는 삶을 사는 데 있어 많은 부분이 바뀌고 둘은 죽음의 경험을 공유한 사람으로 특별한 의지적 관계를 맺는다. 동시대를 살았던 같은 공간을 경험했던 같은 무언가를 공유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많은 연대감을 주는 것이 틀림없을 거다. 그것이 세대로 묶이든 지역정서로 묶이든 우리는 이미 많이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기즈키의 죽음을 제대로 견뎌내지 못한 나오코는 산속의 요양시설에서 중년의 비정상 여인 레이코를 만나게 된다. 레이코는 세상에서 비정상으로 분류되어 산속 시설로 옮겨왔지만 사실은 여러모로 정상이다. 과연 그녀를 비정상으로 분류한 세상이 과연 정상인 세상인지 모르겠다. 레이코는 여러모로 나오코와 와타나베에게 영항을 끼치고 또 와타나베 역시 레이코에게 편안함을 주는 대화 상대로 정서를 공유한다. 미도리, 보다 내적이지 않고 현실속에서 살아가는 인물인 그녀는 방황하는 와타나베를 지탱하는 요소이다. 그런데 미도리가 그 사실을 알았을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미도리는 와타나베는 자기를 좋아하지않고 자기만 그를 짝사랑한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르겠다. 내 생각은 그렇다.

나오코의 죽음이후 무엇을 상실했고 무엇을 얻었는가 방황을 하는 와타나베, 그는 아마도 결국 시간이 해결해주는 속에서 살아가고 어른이 되고 포기하고 결정을 하고 그러면서 자기 중심을 잡아갈 것이다. 비록 힘들긴 해도 그는 충분히 고민햇고 충분히 방황했고 충분히 남을 배려했다. 그랬기에 그는 충분히 자기 삶을 그런대로 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작가가 이 소설을 썼을 80년대 후반 일본이 아마 딱 와타나베의 방황하는 시절즈음과 비슷하지 않았나 싶은데, 지금 내가 생각하기엔, 일본은 와타나베와 같이 충분히 고민을 하지도 않은 것 가토 충분히 방황을 하지도 않은 것 같고 또 다 알다시피 충분히 남을 배려하지도 않았다. 그저 혹은 자기탓(아마도 국민들) 혹은 남탓(아마 일본 정부)을 하며 잃어버린 10년, 20년이라 하며 세월을 그냥 죽였다. 그러기에 일본은 지금도 아직도 와타나베의 60년대 말 당시와 별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즉, 성숙되지 않았다. 어른되기를 희망했던 작가가 지금 일본을 향해 쓴 소리를 하는 것이 너무도 이해가 된다.

그러면서 반추해 본다. 나는 과연 그처럼 고민하고 방황했던가. 고민과 방황없이 시간을 죽이고 그냥 살아왔지는 않은가. 결국은 살아가겠지만 고민과 방황을 했거나 끝낸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의 현재는 분명 차이가 있다. 내적으로 자신이 그것을 알고 있다. 지금에라도 이 점을 알고 생각하는 삶의 자세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감사를 느낀다.

모든 20~40대들이 꼭 한번 읽어보기를. 10대는 좀 자제를. 그들이 보면 야한 부분만 계속 싶힐 것 같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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