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연애는 우정 같고, 어떤 우정은 연애 같다. 쇼코를 생각하면 그애가 나를 더이상 좋아하지 않을까봐 두려웠었다. 사실 쇼코는 아무 사람도 아니었다. 당장 쇼코를 잃어버린다고 해도 내 일상이 달라질 수는 없었다. 쇼코는 내 고용인도 아니었고, 나와 일상을 공유하는 대학 동기도 아니었고, 가까운 동네 친구도 아니었다. 일상이라는 기계를 돌리는 단순한 톱니바퀴들 속에 쇼코는 끼지 못했다. 진심으로. 쇼코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쇼코에게 내가 어떤 의미이기를 바랐다. 쇼코가 내게 편지를 하지 않을 무렵부터 느꼈던 이상한 공허감. 쇼코에게 잊히지 않기를 바라는 정신적인 허영심.
-쇼쿄의 미소 - P27
그래서 꿈은 죄였다. 아니, 그건 꿈도 아니었다. 영화 일이 꿈이었다면, 그래서 내가 꿈을 쫓았다면 나는 적어도 어느 부분에서는 보람을 느끼고 행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단지 감독이 되겠다는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마음에도 없는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들었다. 나 자신도 설득할 수 없는 영화에 타인의 마음이 움직이기를 바라는 건 착각이었다.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이미 죽어버린 지 오래였다. 나는 그저 영화판에서 비중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시나리오를 썼지만, 이야기는 내 안에서부터 흐르지 않았고 그래서 작위적이었다. 쓰고 싶은 글이 있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써야 하기에 억지로 썼다. 꿈. 그것은 허영심, 공명심, 인정욕구, 복수심 같은 더러운 마음들을 뒤집어쓴 얼룩덜룩한 허울에 불과했다. 꼬인 혀로 영화 없이는 살 수 없어, 영화는 정말 절실해, 같은 말들을 하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제대로 풀리지 않는 욕망의 비린내를 맡았다.
-쇼코의 미소 - P37
직장에 나간 엄마 대신 나를 업어 키운 그였다. 그의 돌봄으로 뼈와 살이 여물었고 피가 돌았다. 효도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사람들 속에서도 나는 할아버지에 대한 부채감을 느꼈었다.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나는 그에게 해준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에게 더 등을 돌리려고 했는지도 몰랐다. - P40
자신이 상상할 수조차 없는 큰 고통을 겪은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가 왜 그리도 어려웠는지 엄마는 생각한다. 크게 싸우고 헤어지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주 조금씩 멀어져서 더 이상 볼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 더 오래 기억에 남는 사람들은 후자다.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 P128
이십대 초반에 엄마는 삶의 어느 지점에서든 소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에 만난 인연들처럼 솔직하고 정직하게 대할 수 있는 얼굴들이 아직도 엄마의 인생에 많이 남아 있으리라고 막연하게 기대했다. 하지만 어떤 인연도 잃어버린 인연을 대체해줄 수 없었다.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의외로 생의 초반에 나타났다. 어느 시점이 되니 어린 시절에는 비교적 쉽게 진입할 수 있었던 관계의 첫 장조차도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생의 한 시점에서 마음의 빗장을 닫아걸었다. 그리고 그 빗장 바깥에서 서로에게 절대로 상처를 입히지 않을 사람들을 만나 같이 계를 하고 부부 동반 여행을 가고 등산을 했다. 스무 살 때로는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말을 주고받으면서. 그때는 뭘 모르지 않았느냐고 이야기하면서.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 P128
나는 언니의 말에 동의했다. 언니의 목소리에 실린 분노에 가까운 두려움은 나의 오래된 주인이었으니까. 그 두려움은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나를 추동했고 겉보기에는 그다지 위태로워 보이지 않는 어른으로 키워냈다. 두려움은 내게 생긴 대로 살아서는 안 되며 보다 나은 인간으로 변모하기를 멈춰서는 안 된다고 말해왔었다. 달라지지 않는다면, 더 나아지지 않는다면 나는 이 세계에서 소거되어버릴 것이었다.
-한지와 영주 - P143
세상에는 여러 사람이 필요하다고 여자는 생각했다. 헤어롤을 마는 살마도 필요하지만, 그와 같은 사람도 필요하다.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는 남편이 있는가 하면 집안일을 하며 아이를 돌보는 남편도 있다. 여자는 세상을 살며 그처럼 다정하고 섬세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깨끗한 샘물같은 그에게 더러운 욕탕이 되라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세상에 소용없는 사람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자는 세상의 그 많은 소용 있는 사람들이 행한 일을 모두가 진실로 세상에 소용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미카엘라 - P254
여자는 옆에 앉아서 꾸벅꾸벅 조는 노인을 바라봤다. 이 노인은 얼마나 여러 번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버렸을까. 여자는 노인들을 볼 때마다 그런 존경심을 느꼈다. 오래 살아가는 일이란, 사랑하는 사람들을 먼저 보내고 오래도록 남겨지는 일이니까. 그런 일들을 겪고도 다시 일어나 밥을 먹고 홀로 길을 걸어나가야 하는 일이니까.
-미카엘라 - P266
아이는 저만의 숨으로, 빛으로 여자를 지켰다. 이 세상의 어둠이 그녀에게 속삭이지 못하도록 그녀를 지켜주었다. 아이들은 누구나 저들 보무의 삶을 지키는 천사라고 여자는 생각했다. 누구도 그 천사들을 부모의 품으로부터 가로채갈 수는 없다. 누구도.
-미카엘라 - P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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