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도 힘이 된다 - 개정판
양귀자 지음 / 쓰다 / 201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중에 하나의 여행이 온전하게 소설로 담겨져 나오는 수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것 또한 삶의 필요가 먼저였고 소설은 의외의 부산물인 경우에 불과했다. 성실하게 삶을 더듬다보면 운좋게 주어지는 그런 부산물. - P200

한 시인의 말처럼 어차피 고통은 이 세상을 사는 인간들이 지불하는 월세 같은 것일진대 견디어 누르고 있으면 제 압력으로 솟아나오는 뿌리 하나쯤은 있을지도 모르는데, 아니, 이제는 그런 것들까지 폐기 처분되는 시대라고 믿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 P202

기억에 대한 배신이 어디 이번 뿐이던가. 추억의 영상은 한 번 저장되었다고 해서 움직임을 멈추고 각인되어지지 않는다. 저장된 그 순간부터 기억은 혼자의 힘으로 운동을 시작한다. 그러하여 나중에는 처음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영상으로 바뀌어버리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 때로는 기억과 현실을 맞추려는 덧없는 노력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입기도 한다. 사람들은 가끔씩 지금 보고 있는 것보다 이전에 보았던 기억을 더 신뢰하고 그것에 더 많은 의미를 두고자 하는 고집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 P213

실마리만 풀어주면 다시 되찾을 수 있는 기억이 얼마나 많은가. 기억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헝클어지는 것이었다. - P229

...머릿속에 생각이 많으면 행동이 굼뜨고, 그러기 시작하면 인생은 망하는 겁니다. 그럼요, 자신할 수 있어요. 너무 많이 가지면 걸그적거린다, 이 말입니다. 따지기 시작하면 끝이 없어요. 죽을 수도 없다니까요. - P251

...머리는 즉시 즉시 청소를 해줘야 합니다. 그래야 진짜 알맹이를 발견했을 때 얼른 쓸어담지요. 곰팡이가 가득 차기 시작하면 정말 끝장이에요. - P251

"난 중학교 2학년 때 학교를 때려쳤어요. 도대체 뭘 배우라는 건지 답답하기만 하드라구요. 보세요. 그 따위 자잘한 셈본이나 배우고 현미경으로 눈에 뵈지도 않는 벌레나 쳐다본다고 세상 사는 이치를 터득할 수 있겠어요? 아주 꽉꽉 막혔어요. 어떻게 해볼 수도 없을 만큼. 이러다 영 바보되겠다 싶어서 그 당장 집어쳤지요. 그뒤로 충고하기 좋아하는 사람마다 그러는 거예요. 검정고시라나, 뭐 그런 것도 있다구요. 젠장, 새삼스럽게 허접쓰레기를 채워 죽도 밥도 안 되면 그 사람들이 내 인생 책임집니까. 지금 생각해도 아주 잘한 짓이에요. 넓은 세상 어디든 뛰어들어 북대기 치다보면 막힌 머리도 확 뚫리게 돼 있다구요. 그게 진짜예요. 살아 있는 거지요. 팔십을 산다해도 못 해보고 죽을 일이 수두룩한데 끝도 안 보이는 그짓을 왜 하겠어요. 그거, 중독되는 거 아닙니까?" - P252

"그거 중독되면 평생 돌다리 두들기다가 인생 재미 하나 못 누리고 황천가는 거예요. 거기 가면 염라대왕이 뭐랠 줄 아십니까. 너 이놈들, 한평생 기회를 주었는데도 고작 그것만 맛보고 들어와? 에이, 뜨거운 맛 좀 봐라! 이러면서 화탕지옥에 빠뜨리는 겁니다. 펄펄 끓는 물에 집어넣는다 이 말이지요." - P252

매표구에서의 찰나가 그렇게 매정한 선을 그어버렸음을 깨달은 뒤에도 나는 행운보다 기묘한 두려움을 느꼈었다. 언제 어느 순간 내앞에 선이 그어져버릴지 아무도 모른다. 우연히 행운이 왔다면 불행도 똑같은 모습으로 올 것이었다. 우리는 선택할 수 없고 마찬가지로 우리는 거부할 수도 없다. - P267

전에는 스물 두어살의 그 또래 처녀들을 보면 지나간 나의 젊음을 떠올리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내 딸이 자라면 저런 모습이 될지 그런 것을 생각한다. 나는 이제 나를 포기했다. 나는 과거의 사람이라는 것을 수궁했다. 그래도 미래가 이토록 중요한 것은 자식이 있기 때문이다. 자식은 희망의 담보물이다. 희망이 경매 처분되는 것을 한사코 막아야 하는 것은 자식을 맡겨놓은 인간의 업보다. - P27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