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을 스치는 바람 1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삶에는 이유가 없어도 좋다.그러나 죽음엔 명확한 근거가 필요하다. 죽음, 그 자체를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남은 자들의 삶을 위해서. - P9

"속속들이 모르는 건 아무것도 모르는 것보다 위험하오." - P163

그는 결코 알지 못했다. 읽는다는 것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는 것을 넘어서는 또 하나의 감각이라는 사실을. 한 줄의 문장을, 한 편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한 인간을, 혹은 그의 세계를 읽는 행위라는 것을. - P169

주먹질로 점철된 세월 속에서 소실기관처럼 퇴화해 버린 감정. 배우지 못했지만 천성적으로 지닌 심미안. 그는 허공을 가로지른 음의 거미줄을 건너갔다. - P184

하지만 행복은 유리에 맺힌 물방울처럼 불안했다. - P185

"이름은 한 존재의 모든 것을 담은 상징이에요. 한 사람의 얼굴과 눈빛과 몸집과 행동뿐만 아니라 그의 기억과 꿈과 그리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모두 담겨 있죠. 하나의 단어가 수많은 느낌을 담고 한 줄의 문장이 헤아릴 수 없는 의미를 담은 것처럼요."
한 줄의 문장이 수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고? 그렇다면 놈은 셰익스피어의 문장에 정반대의 두 의미를 숨긴 것이다. 장미는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여전히 향기를 풍기지만 장미말고 불리지 않으면 더 이상 장미가 아니다. 아무리 향기로운 장미도 시간이 지나면 향기를 잃고 시들지만 그 이름은 살아남는다. ‘장미‘라는 이름을 부르면 아름다운 자태와 향기가 떠오르는 것처럼. 장미는 사라지지만 장미라는 이름은 사라지지 않고, 장미는 유한하지만 장리마는 이름은 영원하다. - P218

어떤 책을 읽은 사람은 그 책을 읽기 전의 사람이 아니다. 문장은 한 인간을 송두리째 변화시키는 불치의 병이다. 단어와 구두점들은 몸 여기저기에 세균과 바이러스처럼 스멀스멀 기어 다닌다. 문장들은 뼈에 새겨지고 세포 속에 스며들고 자음과 모음은 혈관을 타고 흐른다. 수많은 상징과 비유는 뇌세포를 물들이고 영혼을 재구성한다. 그는 다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으며 돌아가서도 안 된다. - P220

스기야마는 위험한 촉수를 가진 물건을 만지듯 조심스레 펜을 쥐었다. 펜촉은 검은 잉크를 듬뿍 머금었지만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고, 심지어 종이 위에 내려앉지도 못했다. 눈앞의 백지는 형무소의 뜰처럼 활량했다. - P267

결핍은, 고통스럽지만 때로 인간의 영혼을 정화하고 고양시키는 법이다. 감옥은 살기엔 고통스러웠지만 꿈꾸기에는 좋은 곳이었다. 그곳엔 자유가 없었기에 자유를 꿈꿀 수 있었고, 희망이 사라졌기에 희망을 꿈꿀 수 있었다. - P278

모든 일은 일어날 어떤 일의 전조다. 시간은 그 자체로 완결되지 않고 사건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없다. 모든 행위는 다가올 운명을 위해 복무한다. 그것이 기막힌 행운이든 우리 모두를 죽음으로 몰아갈 불운이든, 문제는 그 전조를 예감할 수 없다는 것이다. - P20

운명은 어딩에 있느냐에 의해 결정되었다. 이디에 있을 수 있느냐는 권력에 의해 결정되었다.

달콤함을 참는 것은 고통을 참는 것보다 더욱 고통스러웠다. - P184

철학자들과 주인공들의 이름이 그를 떠나갔다. 나는 그의 영혼의 올이 하나씩 풀리는 것을 보았다. - P192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무, 심지어는 거짓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과거의 잘못을 다시 곱씹을 것이 아니라 미래를 행해 새 출발 하자고 말하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잊지 않아야 돌이켜 볼 수 있고, 돌이켜 보아야 과오를 찾을 수 있고, 과오를 찾아야 잘못을 인정할 수 있고, 잘못을 인정해야 용서를 빌 수 있으며, 용서를 빌어야 용서받을 수 있고, 용서받아야 새롭게 출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P288

진실은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하는 것이죠. 기록이 불태워지고 감추어졌다 해도 진실은 여전히 그곳에 있습니다. 나의 기록이 소실되고 나의 진술이 사라져도 제가 본 진실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 P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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