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 - 이윤기가 말하는 쓰고 옮긴다는 것
이윤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10월
평점 :
품절


나는 경험의 재해석도 삼가려고 하지요. 그 까닭은, 경험할 때의 세게 인식과 재해석할 때의 세계 인식은 그 층위가 다르게 마련인데, 이 양자를 화해시키는 과정에서 무리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열다섯 살 소년의 경험 해석에 쉰 살 먹은 사내의 인식이 개입하는 사태가 종종 벌어지는데, 이래가지고는 열다섯 살배기의 종잡을 수 없이 혼란스럽고 그래서 대책 없이 강력한 에너지의 형상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이지요. - P48

경험의 재해석으로부터 탈출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지요. 상상력이라는 날개가 있기는 합니다만 일상의 중력에 길들고 타성에 물든 이 상상력이라는 날개는 중력의 법칙을 벗어나는 데 너무나 무력하지요. 중력권 바깥은 어둠의 벽입니다. 상상력은 어둠의 벽 앞에서 번번히 격퇴당하고 말지요. 중력권을 탈출하자면 막강한 추진력 혹은 파괴적인 돌파력이 필요한데,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쉽게 보이지 않습니다. - P49

나는 숨은 그림과 나 사이에 거대한 어둠의 벽이 가로놓여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지요. 어둠의 벽입니다. 벽의 어둠입니다. 나는, 작가느 ㄴ숨은 그림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 그림을 숨기는 사람이 아닐까 싶어진 겁니다. 작가란 수수께끼를 푸는 오이디푸스가 아니라 수수께끼를 내는 스핑크스가 아닐까 싶어진 겁니다. - P55

미국의 대학에서 나에게 상처를 입힌 것이 또 그 책이었다. 내가 몸 붙인 대학의 도서관에서는, <신화 이미지>같은 책이 길이 50미터쯤 되는 서가에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저 많은 책을 다 읽을 것인가? 나의 책을 쓸 것인가? 학문을 할 것인가? 소설 쓰기로 돌아설 것인가? - P61

친구는 ‘유단자‘라는 이름에 갇히지 않은 유단자였다. 문학에 대한 친구의 이해는 실로 깊고도 넓었다. 나는 친구야말로 고수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얼굴에 모닥불이 묻은 듯했다. - P67

나는, 사람의 삶은 나남의 삶에 간섭하면서 끊임없이 그 삶을 변화시켜가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남의 삶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변화에는 세 단계가 있다고 나는 가정합니다.
첫 번째는 포도가 포도즙이 되는 것과 같은 물리적인 변화의 단계인데, 나는 이것을 변형,transformation이라고 한번 불러봅니다. 두 번째는 포도가 포도주가 되는 것과 같은 화학적, 연금술적 변화의 단계입니다. 나는 이것을 ‘변성,transmutation‘이라고 불러보기로 합니다. 세 번째는 포도주가 그것을 마신 사람 안에서 성체가 되기도 하고 술주정이 되기도 할 때 일어나는 제3의 초물질적인 변화의 단계인데, 나는 이것을 ‘변역,transubstantiation‘이라고 한번 불러봅니다 - P69

어느 시인의 말마따나 ‘나비가 바다를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는 것은 그 수심을 모르기 때문‘일지도모른다. 새는 제 몸무게를 모르기 때문에 어쩌면 하늘을 더 잘 나는지도 모른다. - P73

겨울이 오고 있다. 살아 있는 것들에게 겨울은 매우 혹독한 계절이다. 풀은 말라야 하고 나무는 자라기를 그만두어야 하는 계절이다. 새들은 배를 곯아야 하고 산짐승은 먹을 것이 없어서 동면에 들어가야 하는 계절이다. 하지만 봄이 오거든 보라. 자연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되살아난다.
겨울이 오고 있는데도 나는 화분 중 몇 개는 집 안으로 들여놓지 않고 있다. 겨울을 경험하지 않으면 다음 해 꽃을 피우지 못하는 식물도 있다. 대부분의 알뿌리 식물은 겨울을 경험해야 다음 해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그래서 식물원은 매장으로 나갈 알뿌리를 냉장고에다 보관하는 것이다. - P89

나는 개인의 힘은 자기를 바꾸어보려는 의지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 P93

나는 아들딸을 외국에서 공부시킨 것을 두고 ‘트란스플란테이션(옮겨심기)‘이라는 말 쓰기를 좋아한다. 풀이나 나무에게 이식당한다는 것은 아픔이다. 하지만 아픔을 경험하지 않고는 성숙해질 수 없다. 외국에 대한 적응, 우리 가족이 장착한 ‘베이식‘, 변화에 대한 대응, 우리 가족이 장착한 ‘풀 옵션‘이다. ‘미국‘대신 다른 나라 이름을 써도 좋다.
나는 외국을 향해 3,40대의 등 떠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물은 고여 있으면 썩는다. 흐르려면 바닥을 기어야 한다. 사람 또한 그렇다. 사람의 힘은 여기에서 나온다고 나는 믿는다. - P94

나에게 크레타는 온통 카잔차키스, 그리고 조르바였다. 쪽빛 바다 위에 웅크린 섬 크레타는 거대한 거북의 등짝 같았다. 나는 왕을 알현하러 들어가는 변방의 병사가 된 느낌으로 크레타로 들어갔다. - P146

‘메토이소노‘는 ‘거룩하게 되기‘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육체와 영혼, 물질과 정신의 임계 상태 저 너머에서 일어나는 변화, 이것이 ‘메토이소노‘다. 물리적.화확적 변화 너머에 존재하는 변화, ‘거룩하게 되기‘가 바로 이것이다. 포도가 포도주가 되는 것은 물리적인 변화다. 포도즙이 마침내 포도주가 되는 것은 화학적이 변화다. 포도주가 사랑이 되고, ‘성체‘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메토이소노다. - P155

"저렇게들 심고자 하는데, 너는 지금 무엇을 심고 있느냐?" - P164

"연극과 영화의 원자재 공급? 결국은 문학이 맡아야 하는 소임입니다. 앞으로 꽃필 영상 문화는 결국 문학의 자식들이기 때문입니다." - P183

사람들은 왜 어려운 말을 즐겨 쓰는가? 자기네들끼리만 아는 말을 씀으로써 바깥에서 들어온 사람들을 난처하게 하는가? 말이 곧 권력이기 때문이 아닐는지, 포기하기 싫은, 달콤한 권력에의 유혹이기 때문이 아닐는지. - P276

문제는 소통이다. 반평생 영어만 끼고 살아온 내가, TV토론자들이 쓰는 영어 앞에서 쩔쩔매는 것은 여전히 영어에 무식하기 때문이라고 치자. 반평생 글만 써온 내가 군청에만 가면 쩔쩔매는 것도 한국어에 무식해서 그런 것인가?
글 부리고 말 부릴 때마다 가슴에 손을 얹고 나는 묻는다.
소통을 우너하는가, 과시를 원하는가? - P277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지요, 라는 질문을 나는 자주 받는다. 내가 글을 잘 써서 이런 질문을 자주 받는 것이 아니고, 글 쓰는 일을 아주 직업으로 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질문을 받으면 나는,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싶은 대로 쓰면 초단은 되어요, 하고 대답한다. 그런데 이게 제대로 되지 않아 초보자의 입단은 번번이 좌절되고 만다. 되풀이해서 쓴다.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싶은 대로 쓰기만 하면 초단은 된다. 이렇게 쉬운 것을 왜 여느 살마들은 하지 못하는가? 유식해 보이고 싶어서 폼 나는 어휘를 고르고, 멋있게 보이고 싶어서 제 생각을 비틀다 제 글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생각을 놓쳐버리기 때문이다.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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