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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가 사랑한 수식 ㅣ 오가와 요코 컬렉션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8월
평점 :
딸아이 친구가 자기 인생책이라며 딸아이 생일날 선물로 꼭 읽어보라면서 선물한 책이다.
무슨 논리학 책인줄 알았다. 일주일의 휴가기간동안 다 읽자는 각오를 다지며 첫 페이지를 넘겼다.
일주일은 커녕 첫 페이지를 넘긴 그 다음날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다. 하나의 막힘도 없이 자연스럽게 아주 개연성있게 이야기가 진행됐기 때문이며, 게다가 감동과 눈물까지 주었다.
또 다른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보는 것 같았다. 재미와 의미가 다 있었단 것이다.
수를 사항한 한 박사가 있었다. 이 소설에는 사람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정수, 소수, 음수, 0을 사랑한 50대 초반의 박사가 있고, 그 박사 집에 가사도우미인 나가 있다. 그리고 나의 아들, 머리 정수리가 편편해서 박사가 루트라고 별명을 지어준 아이가 있다. 이 세 명이 이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이다. 물론, 박사의 형수, 가사도우미 사무실 등 소소한 등장인물도 있긴하지만 주요 서사는 박사, 나, 루트 이 세사람의 대화와 생활로 이뤄져있다.
박사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메멘토처럼 교통사고로 인해 한정된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 기억력의 한계는 80분. 80분이 지나면 모든 것이 리셋된다. 그래서 박사는 기억을 뇌가 아닌 포스트잇에 기억한다. 매번 리셋이 되면 가장 눈에 띄기 쉬운 곳에 기억을 붙여두고(주로 옷깃, 소매) 스스로를 이해시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수많은 가사도우미들이 교체가 되었는데, '나는' '나'를 노동력의 제공자가 아닌 대화가 가능한 대등한 상대로 대하는 박사덕분에 오히려 박사에게 최적의 가사도우미가 되었다. 우연히 아들 루트까지(회사의 규칙에 어긋나느) 박사집에 출입을 하면서.
이 셋은 일년이 조금 넘는 기간동안 같이 저녁을 먹고 야구경기를 보고 병간호를 하고 루트의 숙제를 봐주며 박사는 기억하지도 못하고 추억하지도 못할 시간을 축적하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한계는 있는 법. 박사의 기억 시간이 80분에서 어느 새 점차 줄면서 70분, 60분 그리고 그 보다 더 작은 시간이 되면서 마침내 박사는 요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 그러나 같이 보낸 수많은 기억을 추억으로 간직한 '나'와 루트는 비록 박사는 기억하지 못할 지라도 한 달에 한번 박사를 찾아가면서 그의 끝모습까지 함께 해 주었다.
철부지 10살 루트는 수에서는 뛰어난 박사이지만 생활에서는 천진한 아이와 같은 박사에게서 아빠의 따뜻함, 든든함을 느끼게 되고 지적 영적 성장의 큰 영향을 받았다. '나' 또한 마찬가지.
이들은 친 가족은 아니지만 친가족보다 더 친밀한 교류를 하고 공감을 하고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긍정의 시너지를 발휘한 거다. 박사는 본인은 전혀 알 수는 없지만 그의 수식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발휘하면서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된 것이다. 그의 수에 대한 사랑은 마냥 수만 사랑한 것은 아니었다. 수는 상대를 사랑하는 도구에 불과했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신파처럼 감동을 자극하지도 않고 눈물을 뽑아내려 안간힘을 쓰지도 않지만, 책을 읽는 동안 나도 모르는 사이 얼굴을 따라 흐르는 한 줄기 잔잔한 눈물의 짠 맛을 느끼게 되는 책이다. 꼭 한번 읽기를 강추한다.
다만, 비중있는 소재지만 양념처럼 적소에서 등장하는 수, 수식, 수의 개념을 이해한다면 더 좋았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