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 - 내 삶의 주인이 되는 문화심리학
김정운 글.그림 / 21세기북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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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권력은 공간으로 확인된다. 모든 상호작용에는 지켜야 하는 물리적 거리가 있다. .... 친밀한 거리, 개인적 거리, 사회적 거리, 공적 거리. 각 거리는 문화마다 다르다.
모든 인간에게는 자신의 프라이버시를 보장받을 수 있는 사적공간, 즉 배후공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인간의 존엄은 이 회소한의 배후 공간이 있어야 유지된다. 교도소는 범죄에 대한 징벌로 이 배후 공간을 박탈한다. 여러 명이 좁은 방에서 함께 생활하며 화장실까지도 공유해야 한다.
한국 남자들이 ‘건들기만 해봐라‘하고 이빨 꽉 깨물고 사는 이유는 바로 이 배후 공간의 부재 때문이다.

39~40쪽

가장 정리하기 힘든 것은 ‘시간‘과 ‘공간‘이다. 문화는 도무지 어쩔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을 정돈하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시간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인간은 달력을 만들었다. 하루를 24시간으로 쪼개고, 일주일은 7일로 나누고, 한 달은 4주로 분리하고, 일 년은 열두 달로 분해했다. 그렇게 시간을 각 단위로 나누면 하루, 일주일, 한달, 한해는 매번 반복된다. 반복되는 것은 하나도 안 무섭다.

시간을 ‘반복‘으로 극복하려 했다면, 도무지 정리할 수 없이 무한히 필쳐진 공간에서 느끼는 공포를 인류는 어떻게 극복하려 했을까? ‘원근법‘이다......3차원 공간을 2차원 평면에 정확히 재현하는 원근법이 발명된 후, 인류는 무한한 공간에 대한 근원적 공포로부터 드디어 풀려났다. 2차원에 구현된 공간은 통제 가능하다.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공간을 두려워할 이유는 전혀 없다.

44~46쪽

고령화 사회의 근본 문제는 ‘연금‘이 아니다. 은퇴한 이들의 ‘아이덴티티‘다. 자신의 사회적 존재를 확인할 방법을 상실한 이들에게 남겨진 30여 년의 시간은 불안 그 자체다. 불안은 원래 미래가 불확실한 젊은이들의 정서다. 경험과 경륜의 노인들이 불안해하는 젊은이들을 위로할 때 한 사회는 균형을 잡으며 건강하게 버틸 수 있는 거다. 그러나 오늘날 아무런 대책 없이 수십 년을 견뎌야하는 ‘젊은 노인들‘이 갈수록 늘어난다.

65쪽

좋은 것에 가까이 가려는 ‘접근동기‘와 대상을 피하려는 ‘회피동기‘다.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고 다가가려는 접근 동기는 ‘전체지각‘을 활발하게 한다. 반면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고 도망치려는 회피동기는 부분을 뜯어보는 ‘부분지각‘을 더 촉진시킨다. 히긴스와 그의 동료는 불안하면 부분지각이 강해지고, 행복하면 전체지각이 강해진다는 것을 확인했다.

원래 노인의 지헤는 숲, 그러니까 전체를 보는 데 있다. 시력이 떨어지고 기억력이 떨어질수록 전체 맥락을 볼 수 있는 지헤가 더 확대된다는 것이 노인학의 일관된 연구 결과다. 그러나 평균수명이 길어지고 자아 정체성의 위기에 시달리는 ‘젊은 노인‘들이 많아질수록 전체를 보고 사회의 발전 방행을 제시할 수 있는 혜안이 사라진다. 불안한 젊은이들은 나무를 보고, 불안한 젊은 노인들도 나무를 본다. 큰 틀에서 미래를 바라보는 이는 없다.

67쪽

접근동기는 자신이 원하는 목적에 접근하기 위해, 즉 무언가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것을 말하며, 반대로 회피동기는 자신이 싫어하는 대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애쓰는 것을 뜻한다......세상일에는 접근동기로 접근해야 하는 일과 회피동기로 접근해야 하는 일이 따로 있다. 일의 결과가 바로 나타나는 일은 회피동기(그렇게 하면 손해를 본다)로 설명해야 유리하고, 결과가 나중에 나오는 것일수록 접근동기(그렇게 해야 성공한다)로 설명해야 유리하다고 히긴스는 주장한다.......접근동기는 상상력을 자극하고, 회피동기는 일을 치밀하게 한다. 창조적 능력이 발휘되려면 긍정적 정서를 동반하는 접근동기를 자극해야 한다. 놀듯이 일해야 창의성이 발휘된다는 이야기다. 반대로 치밀함과 정학성을 요구하는 일은 회피동기를 자극해야 한다. 한국에서는 왜 애플 같은 회사가 나오지 않는가를 접근동기-회피동기로 설명하면 아주 잘 이해된다.

69-70쪽

문제는 전경과 배경의 전환이 매끄럽지 않을 때다. 배경으로 물러나야 할 전경이 계속 버티고, 전경으로 올라와야 할 배경이 애매할 때다. 내 삶의 이야기가 매끄럽지 않다는 거다. 맥락에 따라 달라져야 하느 게슈탈트 형성이 뒤엉켜 있는 상태가 지속되면 참 힘들다. 자신만 힘든 것이 아니다. 주위 사람 모두를 힘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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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게슈탈트를 바꾸는 방법은 대충 세 가지다. 첫째, ‘사람‘을 바꾸는 거다. 항상 같은 사람들을 만나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지 말아야한다. 동창회, 산악회같은 것은 아주 ‘쥐약‘이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헐 수 있어야 삶의 게슈탈트가 건강해진다.
둘째, ‘장소‘를 바꿔야 한다. 장소가 바뀌면 생각과 태도도도 바뀐다. 마지막으로 ‘관심‘을 바꾸는 것이다. 전혀 몰랐던 세상에 대히 흥미가 생기면 공부하게 된다. 새로운 사실을 깨치고 경험하게 되는 것처럼 기쁜 일은 없다. 긍정적인 게슈탈트 전환이다.

아무튼 나 스스로 게슈탈트 전환이 가능해야 한다. 스스로 안 되면 남에의해 억지로 바뀌게 된다. 아, 세상에 그것처럼 괴로운 일은 없다.

105-106쪽

공부라는 구체적 경험을 다시 배우는 요즘이다. 스스로의 간절한 필요가 있어야 공부의 방향이 명확해지고, 그래야만 공부가 재미있어진다. 30여년 죽어라 공부하고, 또 10여 년 교수생활을 하고도 제대로 못 느껴봤던 진짜 공부를 나이 오십 넘어 뒤늦게 하고 있다. 삶도 마찬가지다. 내가 원하는 것이 구체적이지 않으면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

112쪽

젊은 날의 성공이 자랑스러울수록 어린아이처럼 겸손하게 남 흉내를 열심히 내야한다. 그래야 소외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나와 다른 삶의 방식에 대한 존중과 호기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삶이 지속적으로 창조적이 된다. 삶은 나이 들수록 재미있어야 한다.

157쪽

인간의 모든 상호작용에는 언제나 해석의 여지가 있어야 한다. 모든 정보가 정확하고 완벽한 상호작용은 재미없다. 상대방의 역할이 없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이 ‘꼰대‘라고 할 때는 해석의 여지가 없다는 뜻이다. 전하는 정보의 내용은 명확하다. 그러나 일방적이다. 상호작용이 불가능하다.

241쪽

월급쟁이 생활을 때려치우기만 하면 바로 내 삶의 주인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면 정말 큰 착각이다. 평생 추구해야 할 공부의 목표가 없음을 돈의 문제로 환원시키며 자신의 쫓기는 삶을 정당화하는 것 또한 참으로 비겁하다. 삶의 마지막까지 놓치지 않을 관심의 대상과 목표가 있어야 주체적 삶이다. 우리가 젊어서 했던 ‘남의 돈 따먹기 위한 공부‘는 진짜 공부가 아니다.

318쪽

자유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으로부터의 자요free from‘와 ‘~을 향한 자유 from to‘. 무엇으로부터 벗어난다는 의미의 소극적 자유free from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도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질그릇을 만들기 위해 물레를 돌리는 데 방해가 된다며 자기의 새끼손가락을 잘라버리는 조르바식 자유가 진정한 자유free to다. 추구하는 바가 분명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 아름다운 가치를 위해 자신의 손가락 정도는 자를 수 있어야 한다는 거다.

333쪽

서울에 있으면 밤다마 사람들 만나고 놀러 다닐 확률이 높습니다. 어차피 직업도 없고 외로워서 나도 모르게 사람들 모이는 자리에 나갈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나이에 자꾸 사람들 만나봐야 상처주고, 상처 받는 일만 생깁니다. 외롭다고 관계로 도피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모든 문제는 외로움을 피해 생겨난 어설픈 인간관계에서 시작됩니다.

3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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