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세기 - 서양 천 년을 바꾼 결정적 사건들
이언 모티머 지음, 김부민 옮김 / 현암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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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경지가 될 수도 있는 땅이 소 떼나 양 떼를 위한 목초지로 유지되었다. 필연적인 결과로 농촌 지역에서 늘어날 수 있는 인구의 최대치는 줄어들었으며, 땅이 없는 소작농들은 생계를 꾸리고자 시장도시로 이주했다.

_ 13세기 중 - P106

13세기는 잉글랜드가 영구적으로 시장 기반 경제로 전환된 시기였다. 비슷한 도시화 과정이 유럽 전역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_ 13세기 중 - P106

새로운 시장은 부유한 영주들을 더욱 부유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회적 혜택을 가져다주었다.

_ 13세기 중 - P107

북유럽에서 국제 무역을 주도한 주요 상품은 양모였다. 엄청난 양의 양모가 잉글랜드에서 브뤼허와 겐트 같은 플랑드르 도시로 들어갔다. 유럽 북부에 양모 무역망이 있었다면 남부에는 제노바와 베네치아, 피렌체 같은 이탈리아 북부의 무역 도시들이 있었다. 이탈리아 무역 도시들의 주요 상품은 실크와 향신료였다.

_ 13세기 중 - P109

기록물의 급증은 마땅한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글을 읽고 쓸줄 아는 사람들이 갑자기 어디서 나왔을까? 만약 1300년까지 모든수도사와 성직자가 글을 배웠다고 가정한다면, 그리고 장원마다서기가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아마도 잉글랜드에서만 4만 명가량의 남성이 읽고 쓰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수도원에서 글을 익혔을 테고 다른 사람들, 특히 귀족들은 개인 교사를 두었을 것이다. 귀족 계급에서는 귀족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 문해력을 기르는 전통이 있었다. 피에르 아벨라르와 그 형제들이 이 전통을 보여주는 예다. 1179년, 제3차 라테란 공의회는 모든 대성당에 학교를 운영하라고 명령했으며, 1215년 인노첸시오 3세가 주재한제4차 라테란 공의회는 더 강화된 명령을 내렸다. 제4차 라테란 공의회는 여전히 학교가 없는 대성당에 학교를 세우고 마을 아이들에게 라틴어로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라고 명령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세계의 모든 성당에 여유 자금이 있으면 학교를 세우라고 명령했다. 사실상 모든 마을에 학교가 있어야 한다고 규정한 셈이었다.

_ 13세기 중 - P11

한마디로 기록을 남기는 주된 이유는 주의와 불신, 확실성에 대한 욕구였다. 사람들이 기록을 남긴 이유는 서로에게 법적 책임을 묻고자 함이었다.

_ 13세기 중 - P120

왕들은 대개 군사 행동을 벌이려 할 때특별세를 부과하려 했는데, 이때 이들 ‘평민common‘들의 대표가 왕과 직접 대면해 특별세의 조건을 협상했다. 의회는 흔히 특별세를승인하는 대가로 왕에게 새로운 법령에 동의해달라고 요청했다.
1297 년 에드워드 1세가 이후로는 ‘반드시‘ 의회의 동의가 있어야만 이러한 특별세를 부과할 수 있다는 데 동의한 것은 입헌 분야에서 이루어진 엄청나게 중요한 발전이었다. 이는 의회가 전쟁에 필요한 재정 승인을 거부함으로써 사실상 국왕이 전쟁을 벌이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_ 13세기 중 - P125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로마를 방문해 인노첸시오 3세에게 자신이 환영으로 본 형제회frere에관해 설명했는데, 이 형제회라는 말에서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채로 살아가는 수도사를 뜻하는 탁발 수도사(혹은 형제 수도사, friar)라는 말이 나왔다. 큰 감명을 받은 교황은 프란치스코를 축복했다. 그렇게 프란치스코회가 탄생했다. 프란치스코회 혹은 작은 형제회Order of Friars Minor는 회색 수도사회라고도 불렸는데, 탁발 수도사들이 회색 수도복을 입었기 때문이다.

_ 13세기 중 - P127

인노첸시오 3세가 이를 승인하기 전에 선종했으므로, 후임 교황 호노리오 3세가 도미니코회를 공식적으로 축복했다. 도미니코회는 설교자회나 검은 수도사회라고도 불렸다.

_ 13세기 중 - P128

이전 세기의수도회들이 지식을 만들고, 보관하고, 전파하는 연결망을 구축했다면, 탁발 수도회는 이 연결망을 예전보다 더 깊고 빠르게 사회에스며들게 했다. 탁발 수도사들은 세속적인 통치자들과 교회의 지도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외교관이 되었다. 잘 교육받은 하느님의사자로서 떠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탁발 수도사들은 훌륭한 행정관이자 협상가였다. 또한 이들은 훌륭한 이단심문관이기도 했다. 교황과 주교들은 점차 도미니코회에 의존하여 이단자들을 심문했으며, 심지어 1252년 이후에는 이단자들을 고문하기까지 했다.

_ 13세기 중 - P130

13세기는 여행이 대다수 사람들에게 보편화한 세기일 뿐만아니라, 기독교 여행자들이 여태껏 고대의 전설로만 전해지던 장소에 실제로 도달한 시대였다. 1300년경 기독교 세계의 최외곽 전초 기지들은, 서쪽으로는 그린란드의 가르다르에서 동쪽으로는 중국의 베이킹까지 8,700킬로미터 가까이 떨어져 있았다.

_ 13세기 중 - P136

인노첸시오 3세는 기독교 세계 전체에서 지위 고하를 막론한 모든 통치자와 결정권자에게 영향을 미친 마지막 교황들 가운데 한 명이다. 인노첸시오 3세는 위로는 잉글랜드의 존 왕에게 강경한 태도를 취했을 뿐만 아니라, 유럽의 여러 왕실 결혼을 강제로무효화하고, 교령 ‘존경스러움 Venerabilem‘을 내려 마침내 교황과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관계를 확립했다. 그리고 아래로는 자신이 영적으로 다스리는 대중의 성향을 이해했다.

_ 13세기 중 - P140

변화에 저항하려는 굳은 결의가 결과적으로는 변화를 일으킬 수도 있다. 인노첸시오 3세가 카타리파 사태에서 수행한 역할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인노첸시오 3세는 카타리파로 대표되는 이단자들에게 강경하게 대응함으로써 가톨릭교회의 패권을 유지했으나, 이는 결국 종교재판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이 모든이유를 근거로, 인노첸시오 3세는 대적할 자가 없는 13세기의 변화의 주체다.

_ 13세기 중 - P141

유럽 인구는 1315년에서 1319년까지 심각한 기근이 발생하기 전에도 이미 감소하고있었다. 인구의 10퍼센트가 자연이 준 시련 때문에 사망한 것으로추정되는데, 이는 기독교 세계 전역에서 1,000만 명 이상의 사람이굶어 죽었거나 영양 결핍으로 인한 질병으로 죽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3세기 동안 거의 중단되지 않고 이어진 인구 성장과 상업성장이 끝났음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_ 14세기 중 - P146

1347년 말에는 가장 위험한 폐 페스트의 형태로, 기독교 세계의 상업 중심지인 무역 도시 베네치아와 피사, 제노바에 당도했다. 페스트가 퍼진 도시에서는 순식간에 시체 더미가 쌓여갔다. 사망률은 보통 40퍼센트를 넘었다.

_ 14세기 중 - P149

14세기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페스트가 맹위를 떨친 것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사회가 무너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_ 14세기 중 - P152

또한 흑사병은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었다. 어쩌면 여러분은 죽음이 인간의 삶에서 몇 안 되는 변치 않는 것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죽음은 실제로는 매우 급격한변화의 대상이다. 죽음은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은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죽음은 오직 살아 있는 자들의마음속에서만 의미를 지닌다. 사람들은 죽음이 생명의 부재라 믿었으며, 죽음 뒤에도 다른 형태의 삶이 있다고 믿었다. 사후 세계에 관한 믿음에 변화가 일어났다. 14세기 유럽 전역은 죽음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

_ 14세기 중 - P155

그러나 1332년에 농노제가 여전히 사람들의 삶과 행복을 좌우했던 반면, 1400년경에는 서유럽 거의 모든 곳에서 농노제가 무너졌다.

_ 14세기 중 - P156

헨리 보몬트가 그날 사용한 전략은 현대전의 기본 원칙이 되었다. "적군과 백병전이 벌어질 때까지 가만히 있지 말라. 적이 당신 머리를 부수거나 배를 찌르기 전에 먼저 쏘아라." 이 전략의 핵심은 투사 무기를 ‘대량’으로 사용함으로써 기관총과 같은 효과를내는 것이다. 실트론 진형을 깨뜨리는 데는 궁수 수십 명만 있으면 충분할지 모르지만, 중무장한 기병대의 돌격을 막아내려면 반드시 수천 명의 제대로 편성한 궁병대가 필요했다.

_ 14세기 중 - P161

그러나 군대를 운영할 때 근접해서 백병전을 벌이기보다는 멀리서 조직적으로 공격한다는 기본 원칙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백병전보다 원거리전을 중시하는 것은 고대 세계와 현대 세계를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차이 가운데 하나다.

_ 14세기 중 - P165

비록 민족주의의 음영과 정도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14세기에는 민족적 이익이 기독교 세계의 단결이나 교황의 권한보다 명백히 더 중요해졌다. 1300년에는 부유한 사람들이 세속적으로는자신들의 영주에게 충성을 바쳤고, 종교적으로는 주교에게, 나아가 교황에게 충성을 바쳤다. 1400년에는 상황이 더는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충성심이 지역과 민족을 따르게 되었던 것이다. 종교, 과세 제도, 의회 제도, 언어, 법, 관습이 모두 민족이라는 개념에 녹아들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신의 왕에게 맞서는 동시에 자기민족에 충성을 다할 수 있었다. 실제로 14세기 잉글랜드에서는 민족적 우선순위에 따라 의회에 의해 두 왕이 폐위되었다.

_ 14세기 중 - P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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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 지음, 이한음 옮김 / 까치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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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l)가 수거하여 지라로 보낸다. 지라는 매일 약 1,000억 개의 적혈구를 폐기한다. 분해된 적혈구는 대변을 갈색으로 만드는 주된 요소이다. (같은 과정의 부산물인 빌리루빈[bilirubin]은 소변을 노랗게 만들며, 명이 사라질 때 노랗게 변하는 것도 빌리루빈 때문이다.)

_ 심장과 피 중 - P178

데이비드 우튼은 의학의 진실(Bad Medicine: Doctors Doing Harm Since Hippocrates)에서 이렇게 썼다. "1865년까지 의학은 거의 완전히 무용지물이었고, 해를 끼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_ 심장과 피 중 - P182

그런 한편으로 피에서 특정한 항원을 선택함으로써, 우리는 특정한 질병에 대한 내성을 증진시킬 수 있다. 물론 때로는 대가를 치러야 하지만말이다. 예를 들면, O형인 사람은 말라리아에 더 내성을 띠지만, 콜레라에는 더 취약하다.

_ 심장과 피 중 - P187

당뇨병은 두 가지 유형이다. 사실은 합병증과 관리 차원에서는 비슷하지만, 병리학적으로는 전혀 다른 두 질병이다. 제1형 당뇨병은 몸이 인슐린을 아예 만들지 않아서 생긴다. 제2형 당뇨병은 인슐린이 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해서 생긴다. 대개 생산량도 줄어들고 세포가 인슐린에 정상적인 수준보다 반응을 덜하면서 나타난다. 이를 인슐린 내성이라고 한다. 제1형은 유전되는 경향이 있는 반면, 제2형은 대개 생활습관의 산물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제2형이 건강하지 못한 생활과 명백히 관련이 있기는 하지만, 집안에서 대물림되는 경향도 보인다.

_ 몸의 화학 중 -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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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혈장 판매는 모든 수출품의 1.6퍼센트까지도 차지한다. 미국이 항공기를 판매하여 버는 돈보다 많다.

_ 심장과 피 중 - 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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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세기 - 서양 천 년을 바꾼 결정적 사건들
이언 모티머 지음, 김부민 옮김 / 현암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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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하지 않은 것들이란, 우리가 살면서 발견한 수많은 귀중한 것들이었다. 사랑, 아름다움, 자녀들, 친구들이 주는 편안함, 농담 따먹기, 함께 먹고 마시는 즐거움, 이야기하기, 재치, 웃음소리, 음악, 바닷소리, 따스한 햇볕, 달과 별 바라보기, 노래하고 춤추기 같은 것들 말이다.
변하지 않을 것들이란? 우리가 한순간 넋을 잃고 빠져드는 모든 것들.
꿈꿀 만한 가치가 있는 모든 것들.
그리고 값을 매길 수 없는 모든 것들이다.

_ 이것이 왜 중요할까? 중 - P542

역사란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한 종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모조리 드러낸다.

_ 들어가는 말 중 - P14

다빈치는 놀라운 천재였지만, 그의 기술적 고찰은 동시대 사람들에게 사실상 전혀 영향을 주지 못했다. 오직 극소수의 사람만이 다빈치의 수첩을 읽었을 뿐이며, 그의 발명품은 실제로 제작되지도 않았다.

_ 들어가는 말 중 - P17

십자군 전쟁에 관한 책으로 가득 찬 벽과 마주했을 때, 나는 마치 1099년에 예루살렘 거리에서 무의미하게 살해당한 이름 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리고 18세기 프랑스에 관한 책으로 가득 찬 방에 들어갔을 때는절망 직전까지 내몰렸다.

_ 들어가는 말 중 - P20

자국을 안정화하거나 새로운 땅을 정복하려면 동맹이 필요했는데, 가톨릭교회는 기독교 국가들끼리 상호신뢰 관계를 형성하게 하는 도덕 체계를 제공했다. 더 많은 군주가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자 눈덩이 효과 snowball effect가 일어났고, 교회는 점점 더 강력하고 매력적인 존재가 되었다.

_ 11세기 중 - P33

이 얼마나 커다란 반전인가! 11세기 초만 하더라도콘스탄티노폴리스는 로마가 미개하다고 여겼고, 1054년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교황의 특사를 파문했다. 그런데 1095년,
비잔티움 제국은 교황을 잠재적 구원자로 여기고 있었다. 우르바노2세는 그리스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교회의 분열이 치유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그리고 마침내 기독교 세계 전체에서 교황 수위권을 확고히 하기를 열망하며 기꺼이 도우려 했다. 11월 27일, 우르바노 2세는 수많은 군중 앞에서 설교했다. 기독교인들이 서로 싸우는것을 중단하고 예루살렘으로 향해, 파티마 왕조 칼리프의 손아귀에서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성좌holy seat를 탈환하라는 내용이었다. 교황의 호소는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고, 제1차 십자군 원정으로 대표되는, 성지를 향한 여러 차례의 무장 순례로 이어졌다. 프랑크족과 노르만족 귀족들로 이루어진 제1차 십자군 원정대는 예루살렘으로 향하면서 아나톨리아와 시리아를 휩쓸었으며, 거대 도시인 안티오키아를 정복했고, 1099년 7월 15일 마침내 예루살렘을 함락했다. 이것은 그 자체로 놀라운 사건이었다.

_ 11세기 중 - P39

11세기는 가톨릭교회에 믿기 힘든 세기였다. 11세기가 시작될 때, 교황은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마음대로 뽑고 내쫓는 처지였다. 교황은 전쟁에 휘말린 기독교 왕과 공작들에게 거의 의지할 수없었다. 필수적인 행정 기구와 정보 전달 체계가 부실하거나 마련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권한을 행사할 수 없었다. 성직자들은 라틴어가 아닌 자신들의 언어를 사용하고, 성직을 사고팔고, 결혼하고, 마치 세속적인 사람처럼 행동함으로써 종교적 기대를 저버렸다. 그러나 11세기가 끝날 무렵 가톨릭교회는 통합되고, 중앙집권화되고, 조직화되고, 강해지고, 확대되었다. 가톨릭교회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맨발로 알프스산맥을 건너게 할 수 있었고, 심지어 성지정복이 일어나게 할 수 있었다. 가톨릭교회는 유럽 대륙 전역에서문해율을 높이고 저작 활동을 비롯한 지적 활동을 촉진했다. 그러나 가톨릭교회의 진정한 승리는 일반 대중에게 권위를 행사하게되었다는 점이다. 11세기는, 가톨릭이 단순히 아이가 태어날 때 세례를 해주는 신앙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지 좌우하는 거대한 조직체로 변화한 시기다.

_ 11세기 중

‘봉건’이라는 말은 현대 세계에서는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1100년의 유럽 기독교 세계에서는 유럽이 전보다 더 잘 지켜지고 있음을 뜻했다.

_ 11세기 중 - P42

노예에 관한 법은 다양했지만 봉건 제도 아래의 농노나 부자유소작농들과 노예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하나 있었다. 장원의 영주는 농노들이 무엇을 하고, 누구와 결혼하고, 어디에 가고, 어느 땅에서 일할지 제약할 수 있었는데, 이는 농노들이 장원에 매여 있었기에 가능했다. 농노는 토지에 매여 있었으며, 농노의 노동과 의무는 상속되거나 이전되거나 판매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농노제는 간접적인 형태의 예속 제도였다. 이 사실은 몇 가지 중요한 차이점을 시사한다. 영주의 권력은 관습에 따라 제한되었기 때문에 장원의 농노들은 특정한 권리를 누렸다.

_ 11세기 중 - P47

노예화의 주요 원인 두 가지를 문화 갈등과 극심한 빈곤이라고 한다면, 유럽에서는 둘 모두가 줄어들었으므로 논리적으로 노예가 줄어들 가능성이 컸다. 또한 경제 번영의 결과로 11세기 후반 독일과 프랑스, 이탈리아에서는 도시가 성장했다. 이제 노예들은 큰 도시로 도망쳐 자신의 노동력을 팔 수 있었다.

_ 11세기 중 - P50

11세기 내내, 구조 공학 분야의 발전은 더 높고더 튼튼한 성채로 이어졌으며, 그에 따라 영주들은 영지를 봉건적으로 더 강하게 구속할 수 있었다.

_ 11세기 중 - P55

우리는 교황 수위권이나 교구 조직, 수도회, 성과 대성당 같은 중세 시대의 주요 특징 몇몇이 1001년에는 거의 드러나지 않다가 1100년에는 완전히 자리잡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구세계는 다른 방식으로도 종말을 맞이했다. 11세기는 전쟁과 폭력의 성격이나 규모가 크게 변하고 노예제 폐지가 시작된 세기였다. 가장 놀라운 점은 교회가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데 대단히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바이킹의 침략이 멈춘 것도 궁극적으로는 교회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기독교가 스칸디나비아반도 너머까지 퍼져나갔기 때문이다.

_ 11세기 중 - P57

커다란 사회적 변화가 한 사람의 머리 덕분에 이루어지는 경우는거의 없으며, 한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지는 일도 절대 없다. 과거의 위대한 발전 대부분은 한 사람의 천재가 아니라 비슷한 생각을하고 비슷한 기회를 맞은 수많은 사람에 의해 이루어졌다.

_ 11세기 중 - P58

심지어 교황이 되기 전에도 로마 가톨릭교회의 부주교로서힐데브란트는 교황 수위권을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권위 위에 올려 놓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다. 힐데브란트는 가톨릭 사제직을규정한 그레고리오 개혁의 지지자였다. 사제를 세속 세계와 분리된 사람으로 보는 시각, 교황이 세속 통치자와 신민들에게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하려는 노력은 기독교 세계를 바꿔놓았다. 여러분은 교황위가 그저 황제가 지명하는 자리에 불과하고, 가톨릭교회에 아무런 정치적 영향력이 없는 중세 유럽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_ 11세기 중 - P60

12세기가 피와 용기, 자신감, 의지와 열정의 세기였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12세기의가장 심오한 변화와는 별다른 관련이 없다. 12세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비천한 농민과 변호사, 학자들이었다.

_ 12세기 중 - P64

인구 증가의 더 중요한 원인은 역사학자들이 중세 온난기라부르는 현상 때문이다. 10세기와 11세기에 평균 기온이 아주 천천히 상승하면서, 12세기에는 900년대 이전보다 거의 1도 가까이 따뜻했다.

_ 12세기 중 - P66

그러나 12세기 사회 변화의 진정한 중심지는 토지였으며, 변화의 주역은이름을 알 수 없는 근면 성실한 농부들이었다. 이들을 위한 기념비는 오직 이들이 남기고 간 새로이 개척하고 경작한 들판뿐이다.

_ 12세기 중 - P70

어째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왜 사람들은 엄청난 재산을 기부해가며 새로운 수도원을 지원하게 되었을까? 이들의 동기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연옥에 대한 교리의 등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즉죽은 자의 영혼이 곧바로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머무는 영적 보금자리인 연옥에서 한동안 머물다가 천국이나 지옥 한쪽으로 간다는 로마 가톨릭의 믿음이 그것이다.

_ 12세기 중 - P72

그런데 수도회가 이와 비슷한 연결망을 제공했다. 수도회 연결망은 수도회가 속한 은둔 세계와 교구 사제들과 법원 서기들, 정치 주교들이 속한 세속 세계가 거미줄처럼 얽힌, 기독교 세계의 상호 연결망이었다.

_ 12세기 중 - P73

우리 연구에서는 두 가지가 특히 중요하다. 첫째, 피에르 아벨라르의선구적 사고방식이 등장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을 재해석하면서 변증법이 탄생한 것이다. 둘째는 풍부한 아랍어 번역본이 들어오면서 고대 세계의 지식을 상당 부분 회복했다는 점이다.

_ 12세기 중 - P75

"의심은 탐구로 이어지고, 탐구는 진리로 이어진다"는 금언을 남긴 이가 바로 아벨라르였다. 그리고 아벨라르는 논리를 종교에 적용하는 것에 ‘신학theology‘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_ 12세기 중 - P77

더 중요한 사실은, 아랍어 논문을 번역하기 전에는 숫자 0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0은 후대에 끝도 없이 많은 수학적 사고를 쏟아낸 거대한 구멍이다. 새로운 지식에 대한 탐구는 들판에서 일하는 소작농에게는 머나먼 일이었을지도 모르고, 거리의 행인에게는 서서히 스며들었을지도 모르지만, 이것이 없었더라면 유럽의 미래는 분명 크게 달랐을 것이다.

_ 12세기 중 - P83

그럼에도 12세기는 육체적 구원을 찾는 사람들이 신보다 인간을 더 신뢰하기 시작한 때이며, 기도나 주문에 의존하는 대신 체계적인 의학 전략을 수립한 시기이다. 종합해볼 때, 의학 분야에서 나타난 변화들은 이 책에서 고려하는 가장 심오한 변화 가운데 하나로 간주해야 마땅하다.

_ 12세기 중 - P89

이르네리우스의 유산은 볼로냐를 법연구의 중심지로 확립했을 뿐만 아니라 지중해 전역과 신성로마제국 남부에서 법학의 부흥을 불러왔다. 12세기가 끝날 무렵에는 로마법이 유럽 대륙의 국제법이 되기 시작했다.


_ 12세기 중 - P91

클레르보의 베르나르가 ‘멍텅구리학 stultilogia‘라고 불렀던 아벨라르의 신학이 진정한 영향력을 발휘한 것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합리주의를 더 발전시킨 다음 세기지만, 12세기에도 아벨라르의 영향력은 강력했다. 그라티아누스는 『교령집』을 쓰면서 아벨라르의 변증술을 채택했다.

_ 12세기 중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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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 지음, 이한음 옮김 / 까치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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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은 경이로운 기관이며 우리의 찬사와 감사를 받아 마땅하지만, 우리의 감정과는 조금도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_ 심장과 피 중 - P160

우리는 대개 혼동하여 사용하지만, 심근경색(heart attack)과 심장정지(cardiac arrest)는 사실 다른 것이다. 심근경색은 심장 동맥이 막히는 바람에 산소를 지닌 혈액이 심장 근육으로 갈 수 없을 때에 일어난다. 심근경색은 갑작스럽게 일어날 때가 많은 반면ㅡ그래서 발작(attack)이라는 단어가 붙었다(영어의 attack은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발작을 가리키며, heart attack은 엄밀히 말하면 급성 심근경색을 뜻한다/역주)ㅡ다른 유형의 심장 기능 이상들은 (반드시 그렇지는 않지만 더 천천히 일어날 때가 많다. 혈관이 막혀서 산소를 공급받지 못하면, 심장 근육은 죽어가기 시작한다. 대개는 약 60분 이내에 죽는다.

_ 심장과 피 중 - P164

프래밍엄 연구 덕분에 당뇨병, 흡연, 비만, 불균형적인 식단, 만성 운동 부족 등 심장병의 주요 위험 요인들이 대부분 파악되거나 확인되었다. 사실 "위험 요인(risk factor)"이라는 용어 자체가 프래밍엄 연구로부터 나온 것이다.

_ 심장과 피 중 - P167

놀라운 점은 이 모든 발전이 이루어져왔음에도 불구하고, 1900년보다 지금이 심장병으로 사망할 확률이 70퍼센트 더 높다는 것이다. 한 세기전에 사람들을 먼저 죽음으로 내몰았던 요인들이 많이 사라진 탓이기도 하고, 당시에는 커다란 숟가락으로 아이스크림을 퍼먹으면서 텔레비전 앞에서 대여섯 시간씩 보내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심장병은 서양에서 월등한 첫 번째 사망 원인이다. 면역학자인 마이클 킨치는 이렇게 썼다. "심장병은 해마다 암, 독감, 폐렴, 사고에 따른 사망자들을 더한 것만큼의 목숨을 앗아간다. 미국인 3명 중 1명은 심장병으로사망하며, 해마다 150만 명 이상이 심근경색이나 뇌졸중에 걸린다."

_ 심장과 피 중 -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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