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국내 젊은 여성 작가 소설책을 읽는다. 아니 일부러 읽는다. <애쓰지 않아도>를 읽고 이전에 나온 <내게 무해한 사람>을 모두 읽었다. 최은영작가는 어려운 단어를 하나도 안쓴다. 그런데 한 문장을 되면 카세트의 repeat 기능처럼 구간 반복하여 꼽씹어본다. 사람사이의 마음 관계를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그리지만, 소설이 끝나고나면 희망의 끈을 어디인가에 배치해 있다. <쇼쿄의 미소>와 <밝은 밤>도 조만간 읽을 듯하다.
21세기 초반 10년 동안 터키 정부는 성실한 나토 회원국이자 EU 가입의 염원을 버리지 않고 그 길을계속 걸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 나라의 지리적, 역사적, 이념적 뿌리가 이 전략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향후 벌어지는 일련의 사태들을 볼 때 이들의 상당히 다른 사고방식에 영향을 준 것은 결국 그 뿌리들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_ 터키 중 - P268
그리하여 이곳은 터키공화국에게는 새로운 요충지가 된 셈이다. 유럽과 아시아 간 가교로서의 역할을 여전히 하면서 동시에 점점 밀고나가 다시 한번 전초기지를 세우는 것이다. 이제 지난 세기와 단절하고 이전의 오스만 제국 시절을 부활시켜 터키공화국이 자신만의 미래를 소유하기 위한 일종의 전투 태세 명령이 내려진 셈이다. _ 터키 중 - P285
세속적 민주주의 기반을 해체하고 이슬람 색깔이 강한 권위주의 체제로 이행하기까지 20년이 걸렸다. 그 권력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 많은 언론인들을 투옥하고 학계와 시민사회의 반대 목소리를 퇴출시키는 것으로 강화되었다. 군과 사법부의 고위직은 새로운 기득권층을지지하는 인물들로 채워졌다. _ 터키 중 - P287
무엇보다 이란의 역사는 이 나라 산악지대에서 죽어간 숱한 외국인 병사들의 죽음으로 점철돼 있다. _ 이란 중 - P68
한마디로 이 나라의 지형은 미래의 침략자와 정복자에게는 엄청난장애물이라는 얘기다. 산맥이라는 장벽을 뚫기 위해 치러야 할 부담을깨달은 침략자는 차라리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페르시아, 곧 이란이 그 기나긴 역사에서 이 지리적 조건으로 모든적을 포기시켰던 것은 아니다. 이에 굴하지 않고 꿋꿋이 진격한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었다. _ 이란 중 - P70
이란에게 이 곳은 양날의 검이라 할 수 있다. 우선 대양으로 쉽게 진출하기가 어렵다는 그 하나의 이유 때문에 이 나라는 해양의 패권을 쥐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동시에 호르무즈 해협의 좁은 폭은 이란이 다른 모든 국가에게 그곳을 폐쇄하겠다고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 원유 공급량의 5분의 1이 이곳을 통과한다고 할 때 이 해협의 봉쇄는 전 세계를 고통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뜻이 된다. 물론 이란 자신에게도 피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전쟁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이란이 내놓을 수 있는 패이고, 이 나라 정권은 그것을 비장의 카드로 써볼 만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_ 이란 중 - P74
나는 사람이 사랑한다는 것을 알지 못해. 어쩌면 사랑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무서운 일이라고, 두려운 일이라고 생각해.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알리바이로 아무 짓이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_ 모래로 지은 집 중 - P156
물질은 사라지지 않는다. 변형될 뿐, 산화되어 재만 남는다고 하더라도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물질은 아주 작은 부분도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존재한다. 그 과학적 사실은 어린 나에게 세상 어떤 위로의 말보다도 다정하게 다가왔었다. _ 모래로 지은 집 중 - P162
그런 식으로 내가 나를 따돌렸던 것 같아. 너희에게 보여주지 못할 정도로 미워 보이고 창피했던 내 모습을 따돌렸어. 예전부터 그랬었어. 왜 내 모습이 그렇게 부끄러웠을까. 왜 나 스스로가 그렇게도 못나 보였을까. 저리 가. _ 모래로 지은 집 중 - P177
사람이란 신기하지. 서로를 쓰다듬을 수 있는 손과 키스할 수 있는 입술이 있는데도, 그 손으로 상대를 때리고 그 입술로 가슴을 무너뜨리는 말을 주고받아. 난 인간이라면 모든 걸 다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하는 어른이 되지 않을 거야. _ 모래로 지은 집 중 - P179
나는 무정하고 차갑고 방어적인 방법으로 모래를 사랑했고, 운이 좋게도 내 모습 그대로 사랑받았다. 사랑만큼 불공평한 감정은 없는 것같다고 나는 종종 생각한다. 아무리 둘이 서로를 사랑한다고 하더라도언제나 더 사랑하는 사람과 덜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한다고. 누군가가 비참해서도, 누군가가 배열해서도 아니라 사랑의 모양이 그래서. _ 모래로 지은 집 중 - P181
사람들은 내가 그저 운이 좋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세상 사람들은 철저히 계산적이며, 자기에게 득이 되지 않는 이상 낯선 사람을 결코 돕지 않는다고. 설사 도와준다 해도 그런 선의의 이면에는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돕는다는 오만한 기쁨이 어려 있다고. 그 말은 아마 많은 경우 사실일 것이다. 어쩌면 그도 나를 돕는 행동으로 자기 만족을 얻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의지의 결과였든지 내가 당시 그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_ 아디치에서 - P246
들리는 것이라고는 바람 소리, 바람이 나뭇잎에 부딪치는 소리, 새들 소리, 가끔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 노인들이 이야기하는 소리, 기침 소리, 웃음소리뿐이었다.이런 소리는 사람을 지치게 하지 않아. _ 아치디에서 중 - P264
근데 그 간호사는 그런 환자들에게 제대로 된 대우를 하지 않았어. 기계적으로 일은 했지. 손이 빠르고 실수도 거의 하지 않아서 업무 평가도 좋게 받았어. 그런데 그게 끝이었어. 환자들이 조금이라도 감정적인 요구를 하면 등을 돌려버렸으니까. 환자들 마음 같은 거, 그녀에겐 듣기 싫은 소음이었어. _ 아치디에서 중 - P271
저 사람과 다시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이렇게 우연히 길을 가다. 서울 한복판에서 다시 만나게 될 확률이. 그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 다시 만날 수 없어 후회하게 될 확률은 얼마나 될까. 그 질문에 혜인은 확답할 수 없었다. 혜인은 마음을 돌려 여자 쪽으로 되돌아갔다. 여자에게 명함을 건네고 혜인은 다시 시청역으로 걸어갔다. _ 손길 중 - P214
그때의 엄마는 언제나 혜인에게 미안해하는 사람이었고, 그런 엄마앞에서 혜인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어떤 나이까지 자식은 부모를 무조건 용서하니까. 용서해야 한다는 마음도 없이 자연스럽게. 어떤 이유도 없이 무조건 부모를 좋아하는 마음처럼, 아이들의 마음은 어른의 굳은 마음과 달라 자신의 부모를 판단하지도 비난하지도 못한다고 혜인은 생각했다. _ 손질 중 - P219
겪어보지 못한 일을 상상할 수 없는 무능력으로, 그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삶에 기대어 삼촌의 불행을 어림짐작했다. _ 손질 중 - P222
그애의 넉넉함은 물질이 아니라 표정과 태도에서 드러났다. 모래는 사람을 무턱대고 의심하거나 나쁘게 보려 하지 않았다. 무엇이든 전전긍긍하지않고 애쓰지 않았다. 관대했다. _ 모래로 지은 집 중 - P118
그 사람 때문에 상처를 받지는 않아. 이게 나에게 좋은 거겠지. 옳은 길이겠지. 공무말대로 늘 생각하고 걱정된다고 해서 사랑인 건 아니니까. _ 모래로 지은 집 중 - P141
효진이네와 우리는 이웃간의 흔한 다툼 한 번 없이 지냈다. 먹을거리를 주고받기도 하고, 복도에서 마주치면 웃으며 소소한 이야기를나누기도 하면서. 그러나 이웃끼리 응당 그 정도는 해야 한다는 당시의 분위기를 따른 것이지, 속으로도 서로를 좋아했던 건 아니었다. _ 601, 602 중 - P68
어른들은 사람을 해쳐서는 안 된다고 했고, 아무것도 훔치지 말라고 했으면서, 아들을 얻기 위해서라면 어떤 짓이든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모두 한통속이었다. "너희 할아버지는 네가 딸이라고 처음엔 쳐다보지도 않으셨단다." 이런 이야기를 하며 웃던 친척들의 웃음을 나는 곱씹어보았다. _ 601, 602 중 - P74
엄마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나를 바라보다 밖으로 나갔다. 엄마는거짓말을 했어. 엄마는 늘 친구를 도와야 한다고 했지. 옳은 일을 해야 한다고. 나는 슬픔 속에서도 엄마의 반응에 분노를 느꼈다. 외로움이 서린 분노였다. 나는 나중에 아줌마에게서 엄마가 로봇을 부순 것에 대한 보상을 했다는 말을 들었다. 보상금은 어린 내가 상상할 수없는 액수였고, 나는 깊은 죄책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_ 601, 602 중 - P76
학위를 받았지만 윤희는 어느 때보다도 허전했다. 무언가를 이룬게 아니라 잃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가장 큰 성취를 이루었을 때조차그 순간을 즐기지도, 자신을 격려하지도 못하는 자기 모습이 익숙하고 한심했다. 그렇다고 이런 감정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윤희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_ 지나가는 잠 중 - P85
윤희가 스물넷, 주희가 스물이던 그해 가을, 둘은 엄마와 같이 살던그 집을 나왔다. 그때는 몰랐지만 동거가 끝나자 윤희와 주희의 관계를 이어줄 마지막 명목조차 사라졌다. 형식적으로나마 남아 있던 일말의 유대가 끊어지자 둘은 더욱 데면데면한 사이가 됐다. 엄마 기일에 만나 밥을 먹고 서로의 생일에 짧은 문자를 보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_ 지나가는 밤 중 - P90
세상에는 그런 자매들이 있었다. 매일 연락을 주고받고,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핸드폰으로 영상통화를 하고, 같이 여행을 가기도 하고, 같이 살기도 하고, 싸웠다가도 금세 화해하는 자매들이 그렇게 평생을 친구처럼, 부부처럼, 헤어질 수 없는 사람들로 연결되어 있는 자매들이 서슴없이 그립다. 보고 싶다.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자매들이 _ 지나가는 밤 중 - P93
혼자를 견디지 못하고 사람을 찾게 될 때가 있잖아. 그게 잘못은 아니지. 외롭다는 게 죄는 아니지. 알면서도 왜 네가 그러고 지내는 모습을 견디기 힘들었을까. 너에게서 내 모습이 보여서였나봐. 그게 너무 지긋지긋해서 그랬나봐. 나도 그랬으니까. 나는 그저 그 마음을 억눌렀던 것뿐이었으니까. 너랑 그렇게 헤어지고 미국에서 지낼 때 사람이 외로움 때문에 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느꼈던 날이 있었어. 그때 처음 생각나는 사람이 주희 너였어. 윤희는 주희를 차마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침묵했다. _ 지나가는 밤 중 - P93
어린 시절은 다른 밀도의 시간 같다고 윤희는 생각했다. 같은 십 년이라고 해도 열 살이 되기까지의 시간은 그 이후 지나게 되는 시간과는 다른 몸을 가졌다고. 어린 시절에 함께 살고 사랑을 나눈 사람과는그 이후 아무리 오랜 시간을 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끝끝내 이어져있기 마련이었다. 현실적으로 서로 아무 관계 없는 사람들로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_ 지나가는 밤 중 - P97
어른이 된 이후의 삶이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들을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_ 지나가는 밤 중 - P99
"기도가 통하는 세상이면 그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니겠지. 정말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고? 그럼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은 간절히살기를 바란 게 아니란 말이야?" _ 지나가는 잠 중 - P100
미주는 볼 때마다 몸이 조금씩 불어나 있었다. 건강하게 살이찌는 게 아니라 어딘가 아픈 것처럼 부은 모습이었다. 나의 고향에서는 그런 살을 벌살이라 했다. 벌살이 붙은 얼굴에 다정한 눈빛만은 여전했는데, 그 여전함이 마음을 쓰리게 했다. _ 고백 중 - P188
넌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으려 하지. 그리고 그럴 수도 없을 거야. 진희와 함께할 때면 미주의 마음에는 그런 식의 안도가 천천히 퍼져나갔다. 넌 내게 무해한 사람이구나. _ 고백 중 - P195
시간이 상처를 무디게 해준다는 사람들의 말은 많은 경우 옳았다. 하지만 어떤 일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진상을 알아갈수록 더 깊은상처를 주기도 했다. 이미 세상에서 사라진 진희에 대해서, 진희가 겪었을 고통에 대해서 미주는 대학에 와서야 피하지 않고 마주할 수 있었다. 겉으론 의연한 척하면서도 여렸던 그애가 받았을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미주는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그애가 얼마나 용기를 내어 커밍아웃을 했을지, 그때 자신과 주나가 했던 행동이 얼마나 끔찍한 짓거리였는지도, 미주는 그 사건으로부터 일 년 반이 지나서야 솔직히 인정할 수 있었다. 진희가 자길 버린 게 아니라 자기가 진희를 버렸다는 사실을 미주는 그제야 참담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몰라서 그런 짓을 했다는 말은 변명이 될 수 없었다. 후회로 울어자기 마음을 위로하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쏟아지는자신의 눈물이 미주는 역겨웠다. _ 고백 중 - P202
우리는 때때로 타인의 얼굴 앞에서 거스를 수없는 슬픔을 느끼니까. 너의 이야기에 내가 슬픔을 느낀다는 사실이 너에게 또다른 수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은 채로. _ 고백 중 - P208
그런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기대고 싶은 밤. 나를 오해하고 조롱하고 비난하고 이용할지도 모를, 그리하여 나를 낙담하게 하고 상처 입힐 수 있는 사람이라는 피조물에게 나의 마음을 열어 보여주고 싶은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이야기해서만 구할 수 있는 마음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고 나의 신에게 조용히 털어놓았던 밤이 있었다. _ 고백 중 - P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