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길도 꼬박꼬박 오름을 올랐다 내려왔다. 제주올레 1코스 말미오름 정상에서 내다본 풍경은 아직도 생생하다. 우도가 눈앞에서 소처럼 누워 있었고 멀리서 아침햇살 받은 성산일출봉이 번뜩이고 있었다. 김영갑이 섬 동쪽 중산간의 오름밭을 일러주었다면 올레는 바다를마주 보고 선 오름을 가르쳐주었다. 하나 오름에 기대어 사는 제주 사람의 삶은 해안이나 내륙이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들 가난했고 막막했다. 꼬닥꼬닥 제주올레를 걸으면서 오름에 얹힌 인연이 또 이렇게이어지는구나 생각했다. _ 들어가며 - P12

오름은 사람의 얼굴을 한 산이다. 잘나고 번듯한 저들이 아니라 못나고 후줄근한 우리가 비벼대고 사는 산이다. 한라산이 오롯이 우러러야 하는 신의 산이면, 한라산 자락을 따라 얼기설기 얹힌 오름은 우리네와 부대껴 땀내 흥건한 사람의 산이다. 오름은 지지리도 못난 우리네 산이다. 낮고 작아 보잘것없는 우리네 꼴이다. 산을 닮은 어느 늙은시인의 노래처럼, "산이라 해서 다 크고 높은 것은 아니다" (신경림, 「산에대하여 부분). _ 들어가며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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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은 우주의 암흑물질이었다. 너무나 친밀하고 익숙한 나머지 공개적으로는 이야기조차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공포를 낳았고 그 뒤에는 체념이 따랐다. 종교가 위안의 주요 원천이었다. 부모는 자신의 자녀 중 적어도 몇몇을 먼저 떠나보내는 데 익숙했다. 사람들은 죽음을지금과 아주 다르게 여겼다. 죽음은 주기적인 방문객이었다. 따라서 두려움도 덜했다. _ 2장 라이프니츠의 단자 중 - P73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의 유행병은 여러 지역에서 각각 발생한 것이 아니라 모두 지구 차원에서 하나가 확산된 것임이 분명해졌고, 이에 따라 단일 명칭에 합의해야할 필요가 생겼다. 이때 채택된 이름은 이미 당시 지구상의 최고 강대국 (세계대전의 승전국)이 사용하고 있던 것이었다. 이제 그 범유행병은 스페인독감 (이스판카, 에스파뇰라, 라 그리프 에스파뇰, 디 스파니셰 그리페)*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역사적 오류는 영구불변으로 남게 되었다. _ 5장 11번 병 중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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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따라 세계보건기구는 1946년 독립 기관으로 출범했다. 그때에는 이미 우생학의 위신이 추락한 상태였고, 세계보건기구는 헌장에 보건에 관한 철저히 평등주의적인 관점을 새겨 넣었다. 헌장은 그때나 지금이나 이렇게 선언한다. "도달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건강을 향유하는 것은 인종, 종교, 정치적 신념과, 경제적 또는 사회적 조건의 구별 없이 만인이 가지는기본적 권리의 하나이다." _ 19장 모두를 위한 의료 중 - P435

어떤 이는 1890년대 러시아독감이라는 범유행병이냉소주의와 권태감이라는 세기말 느낌에 일조했다고 주장했다. 그때 사망자가 100만 명이었는데 스페인독감은 적어도 그 5배 이상이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생존자가 바이러스 감염 후 증후군에 시달렸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아주 많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들은 독감이 닥쳤을 때 겪었던, 마치 목숨을 건 복권놀이 같았던 그 곤혹스러운 무작위성을 그 뒤로도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닥치는 대로 일어난 폭력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의식 구조를 학습된 무기력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이것이 우울증으로 이어졌다고 그들은 설명한다. _ 21장 말랑콜리 뮤즈 중 - P466

기원전 3세기에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이런 기록을 남겼다. "다른 것으로부터 안전을 얻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죽음에 관한 한 우리 인간은 모두가 방벽이 없는 도시에 산다. 2 독감은 인간의 질병이 된 순간부터 인류의 역사를 빚기 시작했다. _ 1장 기침과 재치기 중 - P51

1781년 두 번째 독감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하루에 3만 명이 앓아누웠다. 그 무렵 대다수 사람이 그 병을‘인플루엔자‘influenza라 부르고 있었다. 이런 이름을 처음만든 사람은 병의 원인을 별의 인력 혹은 기운‘influence 탓으로 돌린 14세기 이탈리아인이었는데, 이 단어는 여러 세기가 지나서야 유행어가 됐다. 물론 지금도 우리는 이 단어를 사용하지만 말의 개념적 정박지는 어디론가 쓸려 가 버렸다. 마치 ‘멜랑콜리‘melancholy 나 ‘냉담한‘ phlegmatic이라는 단어가 그렇듯이. _ 1장 기침과 재치기 중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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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청기사 - 1918년의 ‘코로나19’, 스페인독감의 세계문화사
로라 스피니 지음, 전병근 옮김 / 유유 / 2021년 4월
평점 :
절판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인류가 스페인독감의 결과로더 건강해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아주 개략적으로는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사람들의 생물학적인 출산 능력은 더 커졌고 더 많은 자녀를 낳았다. 개략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생물학 이외의 다른 요인도 태어나는 자녀의 수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가령 종교적 경제적 고려 사항도 여기에 포함된다. _ 16장 회복의 조짐 중 - P382

"고통스러운 재조정, 풍속의 문란, 무법 상태. 이런 것이 역병의 충격에서 회복 중인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익숙한 증상이다." 역사가 필립 지글러가 이렇게 썼을 때 이 글은 흑사병 이후의 나쁜 결과를 묘사한 것이었지만, 스페인독감에도 그대로 해당되었다. _ 17장 대체역사 중 - P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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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청기사 - 1918년의 ‘코로나19’, 스페인독감의 세계문화사
로라 스피니 지음, 전병근 옮김 / 유유 / 2021년 4월
평점 :
절판


미래를 위한 세계 건강 위험 체계 창설위원회 GHRF는2016년 보고서에서 다음 100년 사이에 범유행병이 4회 이상 일어날 확률을 20퍼센트로 추산했다. 그중에서도 최소한 하나는 독감일 확률이 대단히 크다고 예상했다.2 대다수전문가는 앞으로 또 다른 범유행병이 일어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본다. 남은 질문은 언제 얼마나 큰 범유행병이 일어날 것이며, 그에 대비해 우리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것인가 하는 것뿐이다. 스페인독감에서 얻은 교훈이 이 세가지 질문 모두에 대한 답을 찾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_ 8부 로스코의 유산중 - P484

온갖 불확실성 속에서도 우리가 대비할 수 있는 것이있다. 2016년 GHRF 보고서는 각 정부와 민간, 자선 단체에서 범유행병에 대비하기 위한 기금을 연간 약 40억 달러정도 모아 네 가지 주요 영역에 투자할 것을 권고했다. 네가지 영역이란 전문성과 의욕을 겸비한 공중보건 인력, 강력한 질병 감시 체계, 효과적인 연구실 네트워크, 공동체와의 협력 사업을 말한다. _ 8장 로스코의 유산 중 - P490

신뢰는 빠른시간에 쌓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범유행병이 출현했을 때 신뢰가 없다면 아무리 좋은 정보가 유통된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것에 유의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 P497

전쟁과 역병은 기억되는 방식도 다르다. 전쟁에 관한집단 기억은 곧바로, 그럼에도 완전한 형태를 갖춘 주제로탄생하는 듯 보인다. 물론 그것은 끝없는 윤색과 가공을 거치고, 그런 다음에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희미해져 간다. 반면, 전염병은 그것이 재앙적인 것이어도 그 기억이 더 느리게 쌓여 가는데, 어떤 종류의 평형점에 이르러 안정되고나면 (아마도 사망자 규모에 의해 결정되는 것 같다) 대체로 침식에 대한 저항성이 전쟁보다 더 크다. _ 후기. 기억에 관하여 중 - P503

기억은 능동적인 과정이다. 세부 내용은 반복해서 복기해야 남는다. 하지만 범유행병의 세세한 것을 누가 반복해서 복기하고 싶어 할까? 전쟁에는 승자가 있다. 그리고승자에게는 후대에 전해지는 무용담이라는 전리품도 있다. 그렇지만 범유행병에는 오직 완파된 자만 있을 뿐이다. 19세기까지 범유행병은 신의 행위로 간주되었다. 사람들은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세균 이론의 등장과 함께과학자들은 원칙적으로 예방될 수 있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 P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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