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길의 초록은 비를 맞으면 더욱 푸르다. 비바람에 흔들리는 초록 세상을 조우한 적 있으신가. 초록이 번지고 스미어 더 큰 초록을 이루는 장관을 목격한 적 있으신가. 비가 내리면, 만사 젖혀두고 사려니숲길을 걸을 일이다. _ 사려니오름, 물찻오름 중 - P209

쉽게 풀이하면 곶자왈은 화산암이 깔린 숲이다. 딱딱한 용암지대 위에 오랜 세월 흙이 쌓이고 그흙에 풀과 나무가 뿌리를 내려 숲을 이룬 지형이다. 제주 특유의 화산용암 식생지대라 정의할 수 있겠다. 자갈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_ 저지오름 중 - P251

곶자왈의 나무는 대부분이 뿌리를 드러내놓고 산다. 하여 곶자왈에 들면 나무뿌리를 먼저 봐야 한다. 척박한 땅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생명의 도저한 몸부림을 지켜봐야 한다. 곶자왈에 자생하는 나무는 머리카락처럼 엉켜 있다. 제 형편에 따라 옆 나무에 기대기도 하고, 제 깜냥에 따라 옆나무를 받치기도 하면서 살아간다. 흙이 튼튼하지 못하니 나무끼리라도 의지하며 연명하는 것이다. 차라리 감격적인 장면이다. _ 저지오름 중 - P253

여기서 잠깐. 걷기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도 잘 모르는 이야기가 있다. 길에도 경계가 있다. 길이란 본래 이어져야 하는 법인데 우리나라의 길은, 그러니까 걷기여행을 위해 정부가 조성한 트레일은 넘어서는 안 되는 금이 있다. 정부사업은 예산을 집행하는 주체에 따라 성격과 대상이 달라진다. 쉽게 말해 북한산 둘레길과 지리산 둘레길은 전혀 다른 성격의 트레일이다. 북한산 둘레길은 코스 대부분이 북한산국립공원 안에 있다. 반면에 지리산 둘레길은 지리산국립공원 안으로한 발짝도 못 들어간다. 북한산 둘레길은 국립공원 관리공단이 조성한 트레일이므로 국립공원 안에 있고, 지리산 둘레길은 국립공원 바깥의 산림지대를 보유한 산림청이 조성한 트레일이어서 국립공원 바깥에 있다. 자치단체가 조성한 트레일도 사정이 같다. 강릉바우길은 강릉을벗어나지 못하고, 부산갈맷길은 부산 안에서만 맴돈다. 시오름 중 - P262

백주또가 남편을 쫓아낸 이유를 다시 생각한다. 농경사회에서 소만한 재산도 없었다. 송당 본향당 당제에서 소와 돼지를 올리지 않는 전통은 한 번의 예외 없이 지켜졌다. 설문대할망 신화가 제주 사람이 제주도라는 자연환경을 이해하는 방식이라면, 백주또 설화는 제주 사람의 고단한 일상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설문대할망이 한라산에 어울리는 신이면 백주또는 오름을 닮은 신이다. _ 당오름, 높음 오름 중 - P112

제주 유배형은 사형 다음으로 무거운 처벌이었다. 제주로 유배를 내려오는 죄목은 대부분 역모였다. 하여 제주 유배인은 대부분 정치범이었다. 한때 제주에서는 성공이라는 단어가 금기어였다고 한다. 유배지에서 성공은 역모를 뜻할 수 있어서였다. 제주에서 성공을 대체한 단어는 작산이었다. 지금 작산은 다 큰 어른을 가리킨다. _ 바굼지오름 중 -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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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을 걷다 - 모든 것을 내려놓고 홀로 떠나는 섬 여행
강제윤 지음 / 홍익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우리는 모두가 슬픔의 후예다. 우리는 모두가 고난의 후예다. 슬픔과 고난을 견디고살아남은 자들의 후예다. 그 모진 세월을 견디고 살아남기란 진실로 희귀한 일이다. 살아남은 자들의 후예로 살아 있다는 것은 마침내 기적 같은 일이다. 살아 있는 것이기적인 삶이여! 기적 아닌 삶이란 세상 어디에도 없다. _ 강화 볼음도/아차도/주문도/말도 중 - P199

할머니는 섬으로 시집와서 60년 넘는 세월 동안 친정에는 가보지도 못했다. 옛날 섬에서는 다들 그렇게 살았다. 이제 할머니도 남은 날이 많지 않다. 할머니마저 떠나고나면 이 집은 폐허가 되고 할머니의 삶을 지탱시켜 준 물건들은 모두 불태워지고 말것이다. 삶의 흔적들이 아주 사라지고 나면 삶을 증거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한때 삶이 것들었던 물질들, 죽은 육신과 함께 아주 사라지고 나면 삶은 또 어디로 가서머물게 될까. - P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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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세보 효과는 긍정적 사고의 힘이 발현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약이나 다른 개입이 자신을 낫게 해 줄 거라는 기대감에서 나오는데, 그 자체만으로 대단한 효과를발휘할 수 있다. 어떤 추산에 따르면 오늘날에도 모든 의료처방의 35~40퍼센트가 플라세보 효과를 크게 넘지 못한다. 플라세보에 관한 흥미로운 사실은 그것이 환자와 의사 간에 확립된 신뢰에 대단히 민감하다는 것이다. 환자가의사에 대한 신뢰를 잃으면 혹은 의사가 환자에 대한 존중심이 없다고 느끼면 플라세보의 긍정적 효과는 줄어든다. 물론 줄어든다고 해서 반드시 효과가 전무하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그럼으로써 부정적인 단계로 돌입해 오히려 해로운 ‘노시보 효과를 일으킬 수도 있다. _ 9장 플라세보 효과 중 - P229

집단회복력은 사람들이 생명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자신을 인지하는 방식에서 나온다. 이럴 때 사람들은 자신을 더이상 개인으로 보지 않고 집단의 일원으로 본다. 이때 귀속집단은 그 재난의 희생자가 된다는 사실에 의해 정의된다. 이 이론에 따르면, 그 집단에 속한 타인을 돕는 것은 여전히 일종의 이기심이다. 보다 넓게 정의된 자기인식에서 나온 이기심일 뿐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이 재난 속에 함께 처해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한다. 이때 재난은 지진이든 범유행성 독감이든 차이가 없다. 하지만 그와 같은 반응은 지진인 경우에만 합리적일 뿐 범유행병 상황에서는 아니다. _ 10장 착한 사마리아인 중 - P252

따라서 2017년 현재, 그나마 비교적 확실히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다. 스페인독감이 스페인에서 시작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_ 11장. 0번 환자 찾기 중 - P297

그런 점에서 스페인독감은 범유행성 독감의 연대기에서도 독보적이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과학자는 당시 세계가 전쟁 중에 있었거나 말거나 독감을 유발한 사건은 일어났을 것이며, 그렇더라도 전쟁이 독감의 예외적인 독성에 일조했을 뿐 아니라, 동시에 세계 전역으로 바이러스가 전파되는 데도 기여했다는 데에 의견을 같이한다. 극심한 유행병의 가을 파도 속에 수많은 병사를 동원하고, 이들을 지구 곳곳으로 이동시키고, 그 후 열광적인 귀향 잔치로 환영 인사를 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유행병의 확산 기제를 생각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요컨대 스페인독감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은 또 다른 범유행성 독감이 불가피하게 찾아오리라는 것, 다만 그로 인해 1000만 명이 죽느냐 1억명이 죽느냐는 그것을 마주한 세계가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_ 12장 사망자 집계 중 - P308

바이러스가 범유행병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과학자들이 그토록 믿기 어려워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중 하나는 많은 박테리아가 이미 독감에 감염된 환자의 폐를 공격하는 기회주의적 모습을 보인 것과 달리, 바이러스는 어떤 자양분의 젤을 주어도 실험실 샬레에서 배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배양‘이란 자기복제품을 더 많이 생산하도록 이끈다는 뜻이다. _ 13장 수수께끼 독감 중 - P328

사람 몸 안의 DNA가 이중 가닥인 것과 달리, 독감의유전 물질은 외가닥의 RNA로 이뤄져 있고, 이 RNA는 여덟 꾸러미로 분할 포장된다 (편의상 각 꾸러미를 유전자라고 부르자). 이 유전자 중 둘은 앞에서 말한 표면 단백질인 H와 N으로 바뀌고, 나머지 여섯 개, 이른바 내부 유전자는바이러스가 자기복제를 하거나 숙주의 면역 대응을 물리치거나 할 때 그 기능을 조절하는 단백질의 정보를 입력한다. 이 유전자들은 독감 바이러스가 증식을 할 때 복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RNA는 DNA보다 화학적으로 안정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복제 메커니즘이 엉성하고, 그러다 보니 오류가 끼어든다. 이런 엉성함이 독감의 악명 높은 불안정성(끝없이 자신의 새로운 변이를 일으키기 위해 지니고 있는- 능력)의 핵심 요인이다. _ 13장 수수께끼 독감 중 - P331

그렇지만 1990년대에 와서도 조류 독감 바이러스가사람을 감염시키거나 범유행병을 일으킬 수 있을 거라고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의 폐 내벽 세포의 수용기가 오리의 장 내벽 세포의 수용기와 다르게 생겼기 때문에, 조류 바이러스가 사람에게 옮겨 가려면 수용기 유형을 바꿔 가며 적응하는 과정에서 중간 숙주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 중간 숙주로 추정된 동물이 돼지였다. 돼지의 기도 내벽 세포에는 조류와 사람의 독감 바이러스 둘 다와 결합할 수 있는 수용기가 있다. 이 말은 돼지가 사람을 감염시키는 신종 바이러스를 조합하는 데 필요한 이상적인 도가니를 제공한다는 뜻이다. _ 14장 농가의 마당을 조심하라 중 - P338

인터페론이 우리 몸의 제1 방어선으로, 몸에 가해진공격을 막는 일반적인 신속 대응 기제라면, 면역계는 문제의 침입자에 보다 맞춤한 거부 기제를 동원한다. 인터페론이 가동되면 공격은 일단 중단되고 아픔은 거의 느껴지지않는다. 만약 실패하면 바이러스가 복제에 성공했다는 뜻이 된다. 이때 몸의 두 번째 방어선이 가동된다. 항체와 면역 세포가 감염 부위로 모여든다. 면역 세포는 무엇보다 사이토카인이라 불리는 화학물질을 분비해, 상처 입은 조직에 혈액량을 증가시켜 보다 많은 면역 세포가 그곳에 이를수 있게 하고, 이때 감염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필요하다면 숙주의 다른 세포까지 죽인다. 그 결과가 붉은 기운,
체열, 부기, 통증이다. 이것을 합쳐서 염증이라 부른다. _ 14장 농가의 마당을 조심하라 중 - P344

현재 모두가 동의하는 점은 야생 조류가 수백만 년까지는 아니더라도 수십만 년 동안 독감 바이러스로 가득한일종의 원시 수프를 몸 안에 품고 살아 왔다는 사실이다. 이 바이러스 중에는 간혹 사람을 감염시키는 것도 있다. 한가지 가설은 HIV가 아프리카 숲속에서 살던 원숭이로부터 나온 것처럼, 우리는 우리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병원소를 교란시켰고, 그 와중에 바이러스가 사람의 몸속으로 들어왔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그와 다르게 상황이 전개되었을 수도 있다. 우리는 지금 독감 생태계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심적인 주역인지도 모른다. _ 14장 농가의 마당을 조심하라 중

1918년 이후 돼지 사이에 유행하고 있었던 아형 바이러스 HIN1이 2009년 사람들 사이에서 변형된 형태로 재발했고, 그것이 21세기의 첫 범유행성독감을 일으킨 것이었다. 그것의 별명이 ‘돼지독감‘이었다. 그렇게 부른 이유는 뻔했다. 하지만 더 긴 기간으로 봤을때 독감을 사람에게 전파한 것은 바로 사람이었다. _ 14장 농가의 마당을 조심하라 중

과학자들조차 이환율과 사망률을 비교하기 시작하고서야 비로소 거기서 어떤 패턴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런 노력 끝에 과학자들은 범유행병을 형성한 것이 바로 인간 자신이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즉 불평등한 사회적 지위, 집을 지은 장소, 식습관, 의례, 심지어 DNA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서 사람이 변수였다. _ 15장 사람이라는 요인중 - P360

어느 프랑스 역사가가 지적했듯이, 독감은 민주적이었을지 몰라도 일격을 당한 사회의 상처는 그렇지 않았다. - P363

이와 같은 독감에 관한 사고방식의 수정이 급진적인것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그렇게까지 급진적인 것은 아닐수 있다. 19세기에 루이 파스퇴르는 병든 누에를 관찰하면서 두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첫째, 그 벌레가 앓고 있던 무름병은 감염성이었다. 둘째, 그 병은 새끼가 어미로부터 물려받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첫 번째 발견에만 열광하느라 두 번째 발견은 간과했다. 파스퇴르의 두 번째 통찰의 시간은 이제야 도래한 것인지도 모른다. _ 15장 인간이라는 요인 중 - P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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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었던 그림을 다시 시작하게 될 줄은 몰랐다. 까까머리시절 지도 보며 상상하던 도시들을 화판 위로 불러내는 일을하게 될 줄은 더 몰랐다. 그림과 지리와 역사와 사람이 만나『비행산수가 됐다. 우연과 우연이 겹쳐 필연이 된 셈이다. 내가 살아온 이력이기도 하다. _ 들어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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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이 다랑쉬오름보다 아끈다랑쉬오름을 더 아꼈다고, 거대하고 반듯한 옆 오름의 직선보다 낮고 여린 이 오름의 곡선을 더 사랑했다고. _ 다랑쉬오름, 아끈다랑쉬오름 중 - P391

제주에서는 쌀밥을 ‘곤밥‘이라고 한다. 곱다에서 ‘곤‘이 나왔다. 제주 사람은 음식을 두고, 그것도 그저 허연 쌀밥을 보고 곱다고 표현했다. 곤밥은 형용사 곱다에 관한 가장 서러운 용례다. _ 따라비오름 중 - P400

여행에서 음식은 맛보다 공간으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_ 따라비오름 중 - P402

용눈이오름의 관능적인 곡선이 연상되는데, 구릉 모양인 용눈이오름과 달리 따라비오름은 풍만하다. _ 따라비오름 중 - P406

오름밭에서는 오름들이 서로의 풍경이되어주고 서로의 전망이 되어주고 서로의 배경이 되어준다. 그렇게 고만고만한 것들이, 그렇게 서로 어우러지고 섞이며 서로의 곁을 내어준다. 못난 놈은 못난 놈을 알아본다고, 나는 이 오름밭이 그렇게 좋았다. 내 제주 여행의 팔 할은 이 오름밭에서 뒹구는 일이었다. _ 손자봉, 모자봉 중 - P411

지금 당신 눈앞의 메밀밭은 처음부터 메밀밭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제주에서는 이것저것 심어봐서 안 되면 메밀이나 심는다. 그 덕분에 중산간 오름밭은 초여름마다 소금을 뿌린 것 같은 메밀꽃 피는 풍경을 연출한다. 메밀 하면 「메밀꽃 필 무렵의 고장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이 먼저 떠오르지만 제주가 메밀 생산량 전국 1위를 놓친 적은 없다. 스토리텔링이 있고 없고의 차이다. 손자봉, 모자봉 중 - P416

나는 인연을 믿는다.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과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의 차이를 나는 믿는다. 우연이 겹치면 필연이라고 했나. _ 손자봉, 모자봉 중 - P417

해발고도 300미터 언저리 중산간에도 숲이 좋은 오름이 있다. 하나 오름의 원형은 민둥산에 가깝다. 붉은 흙 드러낸 벌거숭이산이 아니라 풀이 덮인 언덕초원오름의 원래 모습이다. _ 동검은이오름 중 - P423

돌아보니 내 오름 여행은 산도 아니고 들도 아닌 땅을 떠도는 일이었다. 산은 신의 땅이고 들은 사람의 땅이므로, 나의 오름 여행은 그중간 어딘가에서 헤매는 일이었다. 그 애매하고 모호한 공간이 나는좋았다. 처음에는 사람이 없어서 좋았고, 시간이 흐른 뒤에는 사람이 너무 없는 것은 아니어서 좋았다. _ 동검은이오름 중 - P430

작고 낮은 화산이지만 오름에도 저마다 이름이 있다. 이 책에도 오름 마흔 개의 이름이 있다. 한라산처럼 세상을 호령하는 산이 되지는못하지만, 제주에는 368개나 되는 이름의 오름이 있다. 도시의 삶이자꾸 겉도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이름으로 불리지 못해서다. 하나같이 미스터 김이고 이 과장이어서다. 한라산처럼 거대한 세상을 만들지는 못하지만, 비록 누추하나 나만의 세상 하나씩은 우리도 만들면서 산다. 하여 우리의 오름 여행은 정겹고 또 눈물겹다. 고만고만한 삶이 고만고만한 또 다른 삶을 찾아가는 여정이니 편안하고 또 서러울 뿐이다. 김영갑은 사진을 찍는 건 기다리는 일이라고 했다. 당신 곁에 서서 하염없이 기다리다 보면 삽시간의 황홀을 경험할 수 있다고 했다. 기다리는 것은 결국 남을 품는 일이다. _ 동검은이오름 중 - P434

"밀실에서 광장으로 확장되는 변곡점, 소우주인 자기 집에서 우주로나아가는 최초의 통로." _ 말미오름 중 - P271

마을을 가로지르는 큰 길과 길 안쪽의 집을 연결하는 공간이올레다. 그런데 올레는 곡선이다. 구불구불한 돌담 사이로 구불구불한 골목길이 놓여 있다. 단순한 통로라면 직선이 효율적이다. 그러나올레는 굳이 휘어지고 구부러졌다. 훨씬 불편한데도 곡선을 선택한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올레의 본래 역할은 길에서 집을 감추는 것이었다. 올레는 밀실과 광장을 잇는 길이자, 밀실을 숨기는 문이었다. _ 말미오름 중 - P272

지미봉에 올라서면 발아래로 에메랄드빛 바다가 보인다. 그 바다에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노랗고 빨간 테왁이 점점이 떠 있다. 테왁을 발견하면 잠깐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일 일이다. 호오익호오익, 바닷바람을 타고 숨비소리가 먼 나라의 소식처럼 들려올 터다. 그래, 우리도살다 보니 살고 있다. 세상의 모든 땅끝은 서러운 사연을 품고 있다. _ 지미봉 중 - P296

제사를 드릴 때도 옥돔은 꼭 있어야 한다. 호남 제사상에는 덕자(병어 큰놈)가 오르고, 영남 제사상에는 돔베기(상어)가 오르는 것처럼 제주 제사상에는 옥돔이 오른다. 노릿하게 구워서 올린다. 제주에서는생선국도 옥돔국이고, ‘고깃국도 옥돔국이다. 제사상에 올리는 옥돔국은 보통 미역을 풀고, 식당에서 파는 옥돔국은 대체로 무를 깐다. 소금간만 해서 국물이 맑은데 찌릿할 정도로 맛이 개운하다. 해장에도 탁월하다. 옥돔을 회로도 먹는다는데, 아직 그런 호사는 누리지 못했다. _ 제지기오름 중 - P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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