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시인 알퐁스 드 라마르틴(Alphonse de Lamartine)은 1847년에 이렇게 물었다.

누가 루이 16세를 구할 수 있었을까? 없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그를구할 수는 없었다. 그는 과거의 조정과 왕들이 저지른 온갖 잘못과 패악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왕과 그 왕으로 대변되는 왕정의 죄를 씻기 위해도살되어야 했던 희생양이었다.

토크빌은 1856년에 이런 결론을 내렸다.

프랑스에서 혁명 이후의 어떤 시기도 혁명 이전의 20년만큼 삶의 수준이 빠르게 나아진 적은 없었다. (p.166) _ 루이16세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병자호란 2 - 역사평설 병자호란 2
한명기 지음 / 푸른역사 / 201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병자호란을 계기로 조선의 ‘주적主敵은 일본에서 청으로 바뀌었다. 일본은 이제 조선의 ‘원수‘가 아닌 ‘우방‘으로 변신한다. 그 근본적인배경은 무엇일까? 임진왜란 당시 선조는 일본군을 피해 의주까지 파천했지만, 그들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하는 치욕은 겪지 않았다. 하지만 병자호란 당시 인조는 달랐다. 삼전도에서 청의 홍타이지에게 세번 큰절을 올리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을 겪었다. 바로 거기에 적개심이 역전되는 비밀이 숨어 있었다. 요컨대 대청인식과 대일 인식은 각기 개별적이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연관 속에서 시대와 상황에 따라, 특히 두 나라의 조선에 대한 압박 강도에 따라 서로 길항하면서 변화해왔던 셈이다. (p.331-3)

요컨대 병자호란 이후 조선이 청에 대한 복수를 내세워 북벌을 추진하고, 대보단 등을 건립하여 명에 대한 보은을 표방했던 시간들은동시에 날로 자신감이 높아가던 청에게 길들여져가는 과정이기도 했던 셈이다. (p.342)

바야흐로 ‘청을 배워야 한다‘는 북학北學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병자호란을 겪은 뒤 ‘청을 정벌해야 한다‘는 북벌北伐이 등장한 뒤로부터 북학으로 전환하기까지는 100년 이상이 걸렸다. 그것은 너무 긴시간이었다. (p.35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병자호란 직전, 조선은 이렇게 ‘야나가와 이켄‘을 계기로 일본과의 관계에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정묘호란 이후 후금 문제에 만주로 매달려왔던 상황에 또 다른 난제가 추가된 것이다. 인조와 조정신료들은 서북과 동남, 양쪽에서 위협받고 있는 조선의 냉혹한 지정학적 현실을 새삼 절감하게 되었다. 후금의 위협을 의식하여 일본과의 관계를 안정시키기 위해 부심해야만 했다. 이래저래 일본에 대한 조선의 대응은 더욱 더 유화적인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p.27)

사실상 최후통첩이었다. 조선이 홍타이지의 요구대로 볼모를 보내지 않는 이상 전쟁은 피할 수 없었다. 전쟁이 터지면 강화도로 들어가는 것 말고는 이렇다 할 대책이 없었던 조선, 그나마 그 계획조차 이미 청에 읽혀버린 조선의 대책은 과연 무엇일까?
(p.51)

‘오랑캐를 타오르는 불길처럼 여겨 겁먹고 두려워하면서도’ 청과의 화친론을 드러내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 조선은 이렇게 군신 상하가 정신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준비되지 않은상태에서 전쟁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p.79)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식이 아무리 참혹해도 포위된 산성에서 조정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적과 결전을 벌일 능력이 없는 데다화친을 이룰 전망도 불투명한 처지가 되자 신료들은 다른 곳에서 돌파구를 찾아보려고 시도했다. 1월8일, 예조는 온조왕에 대한 제사를 다시 지내자고 청했다. (p.148-9)

죄가 있으면 치고, 죄를 뉘우치면 용서하는 것이 대국의 도리입니다. 정묘년의 맹약을 생각하고 생령을 불쌍히 여겨 소방에게 새로워질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하지만 대국이 용서하지 않고 기어이 병력으로 추궁하려한다면 소방은 스스로 죽음을 기약할 뿐입니다. (p.161)

조선의 입장에서는 사방이 온통 캄캄할 뿐이었다. 강화도 함락 소식은 절망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최명길 등은 국서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인조의 출성을 받아들이겠다는 내용이었다. 강화도가 무너졌다는 소식에 남한산성도 무너지고 있었다. (p.214)

청은 다양한 항복 조건을 통해 조선에 이중 삼중의 그물을 쳐놓았다. 조건‘을 따를 경우 인조는 왕위를 유지할 수는 있지만, 청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인조를 그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 있었다. 홍타이지는 조유문의 맨 마지막 부분에서 인조에 대한 협박을 빼놓지 않았다. ‘그대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는데, 짐이 다시 살려주었다. 짐은 망해가던 그대의 종사를 온전하게 하고, 이미 잃었던 그대의 처자를 완전하게 해주었다. 그대는 마땅히 국가를 다시 일으켜준 은혜를 생각하라. 뒷날 자자손손까지 신의를 어기지 않도록 한다면 나라가 영원히 안정될 것이다. (p.219)

가도의 붕괴는 조선에게도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가장 가까이에있던 명의 분신‘이자 충성의 대상이 사라진 것이다. 가도에 상륙한조선군이 살육과 약탈에 가담했던 것은 기존 조명관계의 파탄을 알리는 상징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조선이 ‘새로운 상국‘ 청에게 서서히 길들여져가는 고통스러운 과정이기도 했다.(p.246)

덕이 부족한 내가 왕위에 있은 지 15년에 오직 대의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뜻밖의 화를 만나 외로운 성에서 포위당한 채 봄을 맞았다. 나는 지금해진 갖옷을 입고 거친 밥을 먹는 것이 일반 천민과 다름이 없고, 자식을 사랑하고 돌보는 마음은 천성인데, 지금 두 아들과 두 며느리를 모두 북쪽으로 떠나보냈다. 돌아보건대 백성을 기르는 자리에 있으면서 나 한 사람의 죄 때문에 모든 백성에게 화를 끼쳤다. 군사들은 전장의 원혼이 되게 했고, 죄 없는 백성들은 모두 포로가 되게 했고, 아비는 자식을 보호하지 못하고 지아비는 지어미를 보호하지 못하게 하여 가슴을 치고 하늘에 호소하게 했다. 백성의 부모가 되어 이 책임을 누구에게 돌릴 것인가. 이 때문에 고통과 괴로움을 머금고 오장이 에는 듯하여 뜬눈으로 밤을 새운다. (p.252)

소현이 심양에서 보낸 세월은 명청교체明淸交替‘가 확실히 현실로 나타나고 있던 시간들이었다. 조선에서는 청을 여전히 ‘오랑캐"라며 애써 무시하고 있지만, 심양은 동아시아의 기존 질서를 뿌리째 바꿔가고 있던 ‘새로운 제국의수도였다. 소현은 그 심양에서도 핵심부에 머물며 세상의 변화를 목도했던 셈이다. (p.27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973년 여름, 즉 슈타이너 의원에 관한 기사가 나온 직후였다. 수상의노르웨이 별장에 초청을 받아갔을 때 브란트가 완곡한 어법으로 브룬스기자에게 아주 깜짝 놀랄 만한 이야기를 했다. 도덕적으로 순수한 정치가 더러운 정치에 의해 내몰릴 위기에 처하게 되면 그 순수성을 지켜야하는 사람들로서는 최악의 경우에 더러운 자들의 수법과 비슷한 방법을써서라도 그 음모를 막아낼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p.108) _ 바르첼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위대한 패배자 - 한 권으로 읽는 인간 패배의 역사
볼프 슈나이더 지음, 박종대 옮김 / 을유문화사 / 200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그는 선원의 관례대로 타이태닉호와 함께 스스로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이로써 그는 세계를 주름잡던 영국의 해상 권력에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불명예를 안긴 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타이태닉호의 침몰과 함께그때까지 기술의 끊임없는 진보에 대한 서양 세계의 흔들림 없는 믿음도무너지고 말았다. (p.41)

막시밀리안에게 역사적 공로가 있다면 그것은 군주제의 불합리한 이념을 적나라하게 증명한 데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군주제는 왕가의 피를 받은 사람이라면 자동적으로 백성을 다스리고 백성의 모범이 될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가정에 기반을 두고 있다(하지만 실은 우연히 왕실의 일원으로 태어난 것뿐이지 피에 무슨 특별한 능력이 섞여 있는 것은 아니다). 만일막시밀리안이 국내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서 유능한 신하들의 보필을 받아 선정을 펼치고, 더구나 시대까지 평화로웠다면 왕가의 피를 받아서 그렇다고 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웃음거리를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p.54) _ 멕시코의 막스밀리안 황제

‘성공만큼 성공적인 것이 없다‘는 속담이 있다. 그러나 가끔은 실패만큼 성공적인 것이 없다‘는 말이 좀더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십자가에못 박혀 죽은 예수는 살아 있는 그 어떤 사람들보다 더 큰 영광과 권세를 얻었고, 승리를 거둔 장군이 오히려 패장보다 뒷전으로 밀리는 경우도 허다했다. 한니발과 나폴레옹, 로버트 리(미국 남북전쟁 당시 남군의 총사령관을 맡았던 장군), 그리고 에르빈 롬멜이 바로 그러한 패자들이다. (p.67) _ 롬멜 중에서

그렇다면 게바라의 인기 요인은 무엇일까? 68혁명을 주도한 대학생들은 게바라에게서 자신들의 우상과 순교자를 찾았다. 게바라는 전 세계의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맞서 싸웠다. 그들이 말로만 떠들던 것을 한개인이 실제로 몸을 던져 실천한 것이다. 사람들은 그를 경탄하고 부러워했다. 그런데 이 휘황찬란한 영웅조차도 끝내 패배에 이르자 그들은그를 숭배함으로써 자신들이 직접 행동에 나서지 못하는 것에 대한 미안함을 대신했다. 게바라는 이 세계에 비해 너무나 선한 모든 사람이 결국 악한 세상 때문에 맞아 죽고 마는 것을 몸으로 증명해주었다. (p.80) _ 체 게바라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