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은 어떻게 예술이 되는가? 오늘날 그 과정은 거의 자동적으로 일어난다. 원자력발전소가 폭발한다면? 1년 이내에 런던에서는 연극이 공연될 것이다. 대통령이·암살당한다면? 책이나 영화, 영화화된 책, 책으로 옮겨진 영화가 나올 것이다. 전쟁이 일어난다면? 소설가를 전장에 보낸다. 소름 끼치는 연쇄살인 사건이 발생한다면? 시인들의 무거운 음보에 귀를 기울이라. 우리는 물론 이 재난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재난을 이해하려면 재난을 상상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상상력이 만들어낸 예술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최소한이라도 그것을, 이 재난을, 정당화하고 용서할 필요가 있다. 이 인간적인 발광, 이 미친 자연의 행위는 왜 발생했는가? 어쨌든 그로부터 예술이 나오기는 했다. 결국 재난의 쓸모는 거기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p.33)
19세기 프랑스 미술은 크게 색色과 선線의 다툼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들라크루아가 학술원의 승인을 추구한 또 하나의 이유는, 언제나 미술이 고도로 정치화되어온 사회이니만큼 그가 회원이 되면 학술원이 그의 그림에 공식적인 지지를 보내주리라는것이었다. 19세기 초, 선은 다비드와 그의 유파를 통해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다 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인상주의를 통해 색의 영향력이 득세했다. 그리고 그사이의 시기는 선을 옹호하는 무리와 색을 옹호하는 무리가 자웅을 겨루는 각축장이었다(청 코너에는 앵그르가, 홍 코너에는 들라크루아가 있었다). 물론 이 대립이 항상 고상했던 것은 아니다. 들라크루아가 루브르에 다녀간 뒤 앵그르는 비난하듯이 "유황 냄새가 나서 환기를 시켜야겠다며 창문을 연 적이 있다. 뒤 캉은 한 은행가가 예술의 정치적인 면에 무지한 나머지 멍청하게도 두 화가를 동시에 같은 저녁 식사 자리에 초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앵그르는 언짢은 얼굴을 하고 있다가 결국 자제력을 잃었다. 그는 커피 잔을 든 채 벽난로 앞에 있는 자신의 라이벌에게 다가가 이렇게 단언했다. 들라크루아 씨! 드로잉은 정직을 의미합니다!! 드로잉은 명예를 의미합니다!" 들라크루아의 침착한 모습에 더욱 화가 치민 나머지 앵그르는 그만 자신의 셔츠와 조끼에 커피를 얹질러버리고, 이에 모자를 집어 들고는 문을 열고 나가려다 돌아서서 이렇게 반복했다. "아무렴! 드로잉은 명예예요! 정직함입니다!" (pz75) _ 들라크루아 중에서
낭만주의 화가 들라크루아가 낭만주의에 맞지 않는 기질을 지녔다면, 사실주의 화가 쿠르베는 참된 낭만주의자의 병적인 자기중심주의를 지녔다. 여기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단순한 직업이 아니라 사명이다. (p.93) _ 쿠르베 중
쿠르베의 죽음에는 그의 삶과 예술이 그랬듯이 과하고 끔찍한 무언가가 있었으니, 잔인하게도 이는 그에게 잘 어울리는 듯하다. (p. 102) _ 쿠르베 중에서
마찬가지로 미술의 경우, 벽돌은 마네가 던지고 부당이득을 챙긴 쪽은 인상파 화가들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 이득의 크기를 100년도 더 지난 오늘날 성대하게 열리고 있는 인상파 전시회로 측정해 보자면 확실히 그렇다. (p. 107) _ 마네 중에서
되찾을 수 없는 진실이 무엇이든,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의 검열이 끼친 영향은 오늘날까지도 계속해서 작용하며 후대의 이해를 가로막는다. 문제는 그림만 억압을 받은 것이 아니라, 마네가 이 그림을 보여주려 했던 당대의 사람들, 이 그림을 어떻게 보는 게 가장 좋을지 우리에게 알려줄 수 있었을 그들의 반응도 억압당했다는 사실이다. 반응에 대한 자료가 부재하기에, 오늘의 관람객들에게 이 그림은 더욱 분명하지 않게 되었다. 보다시피, 검열은 언제나처럼 성공한 셈이다. (p.132) _ 마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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